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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지도 펼쳐 보고 미국 여행 하자.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지도 검색 블로그)
by 미국 여행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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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민주주의라 해도 진보적이 아니면
위대하지도 않고 민주주의도 아니다"
-- 디어도어 루스벨트, 1910년경.


곤궁에 빠진 국민과 인민당의 대두

19세기 미국 농민들은 괄목할 만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되풀이하여 일어나는 고난의 시기를 겪었다. 이에는 지방의 쇠진, 자연의 변덕, 자급자족제의 감소, 그리고 충분한 법적 보호와 원조의 부족과 같은 몇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과잉생산이었다.
철도가 부설되고 대평원의 인디언들이 점차적으로 보호 지구로 옮겨감으로써 서부지역에의 정착을 위한 새로운 터전이 열린 가운데, 1 헥타르당 농작물 산출량을 크게 증가시킨 농기계의 개량과 더불어 경작농토 면적은 19세기 후반 전체에 걸쳐 급속히 늘어났다. 캐나다, 아르헨티나 및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나라들에서도 일어난 미국과 유사한 농토의 팽창은, 이제는 미국의 농산물의 많은 부분이 팔리던 국제시장에서 문제들을 더욱 심화시켰다.

정착민들이 서부로 더 멀리 진출하면 할수록, 그들은 산품을 수송하기 위해 철도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동시에 서부지역의 공업 분야 대기업체들의 뒷받침을 받은 의회가 오랫동안 지지해 온 보호관세가 부과되는 결과로, 농민들은 공산품에 비싼 값을 치렀다.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중서부 지역과 서부 지역의 농민들은 그들의 저당물을 잡은 은행에 더 많이 빚지게 되었다.

남부에서는 남부동맹의 몰락으로 농업 분야의 관행이 크게 변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변화가 소작제도인데, 소작인들은 종자와 필수적인 영농 보급품을 제공받는 대신 수확고의 절반 정도까지를 지주가 차지했다. 남부의 흑인 농부의 80퍼센트, 그리고 백인 농부의 40퍼센트로 추정되는 농민들이 남북전쟁 이후, 그들을 궁핍하게 만드는 이같은 제도 아래서 살았다.

대부분의 소작인들은 빚더미에서 헤어나지 못했는데, 이 곤경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희망은 농사를 더 많이 짓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목화와 담배가 과잉 생산되었고, 따라서 가격이 하락하고 지방이 가일층 쇠퇴했다.

전반적인 농사 문제를 다루기 위한 첫 노력은 '농민공제조합(Grange)'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867년 농무부 직원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조합원들은 처음에는 대부분의 농민 가정들이 당면했던 사회로부터의 소외 에 대처하는 사회활동에 주력했다. 여성들의 참여가 적극적으로 장려되었다. 1873년의 공황에 자극받아 농민공제조합의 지부는 곧 2만개로 확대되었고, 조합원 수도 150만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공제조합의 대부분이 궁극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의 판매망, 상점, 가공 공장, 생산 공장 및 협동 조직을 설치했다. 이 운동은 또한 1870년대에 어느 정도의 정치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몇몇 주에서는 "농민공제조합 원법"을 제정하여 철도 요금과 창고 사용료를 제한하기도 하였다.

1880년에 이르러서 이 공제조합 운동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대신 "농민동맹(Farmers' Alliance)" 운동이 일어났다. 1890년에 이르러서는, 이 동맹은 뉴욕州에서 캘리포니아州까지 전국에 걸쳐 약 150만명의 회원을 갖게 되었다. 이 농민동맹과 나란히 활동을 벌인, 아프리카系 미국인들의 조직인 "유색농민 전국연합(Colored Farmers National Alliance)"의 회원은 100만명이 넘었다.

시초부터 농민동맹은 정성들여 수립한 경제 계획을 가진 정치적 조직이었다. 이 동맹의 초기의 한 강령에 따르면, 이 동맹의 목적은 "계급 차별적인 입법과 집중된 자본의 침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농민들을 단결시키는 데에"있었다. 그들의 계획은 철도 사업을 (완전한 국유화가 아닐지라도) 규제하고, 빈민구제를 위해 통화를 증발하고 , 관세를 인하하며, 정부가 소유하는 창고 및 저금리 대여시설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1880년대 말기에 있었던 일련의 가뭄으로 서부의 대평원이 황폐화했다. 캔자스의 서부 지역은 그 당시 4년 동안에 인구가 번으로 줄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1890년에 제정된 "매킨리 관세법"이었는데, 이 법에 따른 관세율은 미국에서 그때까지 가장 높은 것에 속했다.

1890년에 와서는 농민들의 궁핍은 그 어느 때보다 심했다. 농민동맹은 남부의 동조적인 민주당원들 및 서부의 소규모의 제 3당들의 당원들과 제휴하여 정치적 세력을 얻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이 같은 요소들을 기반으로 하여, 인민당으로 알려진 제 3의 정당이 대두했다. 대초원과 목화밭 지역을 휩쓴 인민당 열풍은 미국의 정치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1890년의 선거에서 이 새 정당은 남부 및 서부의 10여 개 주에서 세력을 얻어, 20여명의 인민당 출신 상·하원 의원을 연방의회에 보냈다.

인민당의 첫 전당대회는 1892년에 열렸는데, 농장 노무자 그리고 개혁 단체 출신의 대의원들이 네브라스카주의 오마하에서 회동하여, 그들이 보기에는 상공부문 기업합동(trust)들의 財力에 의해 절망적인 정도에까지 부패한 미국의 정치 제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할 것을 마침내 결의했다. 이 당의 정강은

"우리는 나라가 도덕적, 정치적 및 물질적 파멸 직전에 처한 가운데 이곳에 모였다. 부패가 투표소, 주 및 연방 의회에 만연되어 있고, 심지어 法官에까지도 미치고 있다.... 불의의 통치라는 태(胎)에서 두 개의 큰 계급이, 즉 뜨내기와 백만장자의 두 계급이 태어나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이 정강의 실용적인 부분은 토지와 수송 문제, 그리고 은화의 무제한 발행을 포함하는 금융문제 등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1892년의 선거에서 인민당은 서부와 남부에서 놀라운 세력을 과시했는데, 이 당의 대통령 후보는 100만 표 이상을 얻었다. 하지만, 이윽고 다른 모든 쟁점에 앞서 정면으로 부상했던 쟁점은 은본위 주창자들을 금본위 찬성자들과 맞붙게 만든 통화문제였다. 서부와 남부의 농민층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동부의 공업 중심지들의 노동단체들의 지지를 얻어 은화를 제한없이 발행하는 제도로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당면한 어려운 일들이 유통되는 화폐의 양이 부족한 데서 생겼다고 확신한 그들은 통화량을 늘리면 간접적으로 농산물의 가격을 상승시키고 공업부문의 화금을 인상시키게 되어, 따라서 채무자들로 하여금 증발된 화폐로 빚을 갚도록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적인 집단들과 금융계는 그같은 정책은 재난을 몰고 올 것이라고 믿고, 인플레이션이 일단 일어나면 이를 멈추도록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금본위 만이 안정을 보장해 준다고 말했다.

1893년에 일어난 금융공황은 이같은 논쟁의 긴장도를 높여 주었다. 남부와 중서부에서는 파산하는 은행들이 많았다. 실업자들이 속출했고 곡물 가격은 크게 하락했다. 이같은 위기는, 이를 해겨하지 못하는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무능력과 아울러 민주당을 거의 파종으로 몰고갔다. 1896년의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지자 은본위를 지지하는 민주당원들이 인민당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그해에 있었던 민주당의 전당대회에서는 미국의 정치사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에 속하는 한 연설이 행해졌다. 대회 참석자들에게 "인류를 금의 십자가에 못박지 말라"고 호소한 네브라스카州 출신의 젊은 은본위 옹호자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받았다.

인민당 역시 브라이언을 지지했다. 이제는 그들의 높은 인기도를 증명해 보일 때가 왔다. 남부 전역과 캘리포니아주 및 오리건주를 제외한 서부 주들을 석권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은 인구가 더 많은 공업 지역인 북부와 동부에서 패배하여, 공화당 후보 윌리엄 매킨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다음 해에 이 나라의 금융 사정은 호전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알래스카와 유콘강 유역에서 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1898년에는 인민당이 제기하는 쟁점들보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국민의 주의를 더 강력히 끌어 당겼다. 인민당이 벌였던 운동이 사라졌다해도 그 운동이 추구했던 아이디어는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같은 아이디어 중 많은 것들이 다음 20년 안에 법률로 제정되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투쟁

19세기의 미국의 공업 부문 근로자들의 생활은 결코 쉬운 생활이 아니었다. 호황기에조차도 임금은 낮았고, 작업 시간은 길었으며, 근로 조건은 위험했었다. 국가의 성장으로 생겨난 부는 근로자들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부녀자와 아동 노동자의 경우 상황은 더 열악했는데, 일부 업계에서는 노동력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그들이 성인남자 노동자가 벌 수 있는 임금의 극히 일부만을 받을 때가 흔했었다. 정기적으로 경제적 위기가 이 나라를 휩쓴 결과, 공업 부문의 임금을 가일층 낮아지게 만들었고, 높은 율의 실업 사태가 벌어졌다.

동시에, 미국의 생산성 제고에 크게 이바지했던 기술적 향상은 계속해서 숙련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감소시켰다. 그런데, 일자리를 애타게 찾는, 전례없이 많은 수의 이민들이-1880년부터 1910년까지의 이들 이민의 수는 1,800만 명에 달했다- 미국으로 들어오는 가운데 비숙련 노동자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1874년에 매사추세츠주가 부녀자와 아동 공장 노동자들의 하루 작업 시간을 10시간가지로 제한하는 법률을 미국에서 처음으로 제정했는데, 그 이전에는 미국에서는 노무관계 법률이 사실상 없었다. 연방정부는 193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노동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노동문제의 분야는 주나 지방 당국들이 맡고 있었는데, 그 당시 부유한 공업가들ㅇ릐 요구에 부응하는 정도만큼 근로자들의 요구를 보살피는 당국은 거의 없었다.

19세기 후반을 지배했고, 엄청난 부와 권력을 집중적으로 손에 넣은 자유방임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제도에 도전한 사람들에게 번번이 불법 판정을 내렸던 사법부에 의해 뒷받침 되었다. 이 점에서 사람들은 널리 보급된 '시대의 철학'을 따랐을 뿐이었다. "대기업체의 성장은 적자생존일 뿐이다" 라고 존 D. 록펠러가 표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회적 진화론"으로 알려진 이같은 견해는, 실업활동을 규제하려는 그 어떤 기도도 종(種)의 자연적 진화를 가로막는 처사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지지자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자본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비쌌다. 수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생활조건과 근로조건은 열악했고, 평생을 통한 빈곤에서 벗어날 가망성은 희박했다. 1900년에 와서도 미국의 직업 관련 사망률은 세계의 공업국들 중에서도 가장 높았다. 대부분의 공업 부문 근로자들은 아직도 하루에 10시간 일했으며 (제강업계에서는 하루 12시간 노동이었다), 그런데도 웬만한 수준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최저 생계비에서 20퍼센트 내지 40퍼센트가 부족한 임금밖에는 벌지 못했다. 상황은 아동 노동자의 경우 더 열악했는데, 노동력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수는 1870년부터 1900년 사이에 두 배로 늘어났다.

전국적인 규모로 근로자의 단체들을 조직하기 위한 주요한 첫 노력의 결과 1869년 '고귀한 노동기사단(The Noble Order of the Knights of Labor)이 탄생했다. 원래는 이는 필라델피아의 의류 부문 근로자들에 의해 조직된, 의체에 치중하는 비밀 단체였는데, 후에 흑인, 부녀자 및 농민들을 포함하는 모든 근로자들에게 개방되었다. 이 단체는 서서히 성장하여, 마침내는 1885년에 단행한 파업에서 철도왕 제이 굴드를 위압하는 데에 성공할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한 해 사이에 50만 명의 근로자가 이 단체에 새로 가입했다.

하지만 이 '노동기사단'은 곧 쇠퇴하게 되어, 노동운동에서 이 단체가 차지했던 자리를 미국 노동기사단(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이 점차 차지하게 되었다. 이전에 시가아(cigar)문호를 모든 근로자들에게 개방하지 않고 숙련근로자들에게 추점을 두었다. 그가 추구한 목표는 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그리고 근로조건 개선 등 "순수하며 단순하며"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 것들이었다. 이같은 목표를 추구한 결과, 곰퍼즈는 노동운동의 방향을 초기의 노동지도자들이 신봉하던 사회주의적 견해의 노선으로부터 돌려놓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목표들과,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부여하는 데에 대한 자본가들의 소극적 태도는 서로 충돌하여 미국 역사에서 가장 광폭한 노동쟁의를 빚어냈다. 이같은 첫 노동쟁의는 10퍼센트의 임금 삭감에 반대하여 전국의 철도 근로자들이 파업을 단행한 1877년의 대철도파업이었다. 파업을 와해시키려는 기도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시, 일리노이주 시카고시,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시, 뉴요크주 버팔로시, 그리고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등 서너 도시들에서 폭동과 광범한 파괴를 유발했다. 마침내 파업을 끝내기 위해 연방군 병력이 몇몇 지점에 파견되어야만 했었다.

이로부터 9년 후, '헤이마키트'광장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시카고에 있는 매코믹 수확기 제작사회에서 진행중인 파업에 대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던 회의장에 누군가가 폭탄을 던짐으로써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어서 벌어진 난투 끝에 9명이 죽고 약 60명이 부상했다.

다음은 1892년 펜실베이니아주 홈스티드에 있는 카네기 제강소에서 벌어진 폭동이었다. '제강·철강
☞주석 노동자 통합협회'가 단행한 파업을 와해시키기 위해 이 회사측이 고용한 300명의 사설탐정들이 총살당해 10명이 죽었다. 그 결과 주방위군이 투입되었고, (파업중인 노조원들 대신) 비로조원 근로자들이 채용되었으며, 마침내 파업은 와해되었다. 그후 1937년까지도 이 회사는 노조가 이 제철소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2년 후, 시카고시 바로 교외에 자리잡은 '풀먼 팰리스 카'회사가 임금을 삭감함으로써 미국철도연맹의 지원을 받는 파업이 벌어졌다. 이 파업은 이내 미국 전역의 여러 철도들과 연대를 맺었다. 사태가 악화하자, 이전에 철도회사 변호사였던 법무장관 리처드 올니는 철도를 개통시키기 위한 기도에서, 파업중인 철도 직원 대신에 300명의 직원을 임명했다. 이에 이어 노조의 철도 운행 방해를 금지하는 한 연방법원의 명령이 뒤따랐다. 이에 따라 폭동이 일어나자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현지에 연방군 병력을 투입했고, 파업은 드디어 와해되었다.

가장 투쟁적이고 파업을 자주하는 노조는 '세계국제로동자'(IWW: International Workers of the World)였다. 서부의 광업계에서 보다 나은 근로조건 획득을 위해 투쟁하던 노조를 규합하여 결성된 IWW는 1903년에 그들이 콜로라도주 광산에서 벌였던 노동쟁의와, 이 쟁의를 진압하는 둘도 없이 무자비했던 방식으로 해서 특히 두드러진 존재가 되었다. 공공연하게 계급투쟁을 부르짖는 IWW는 1912년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 있는 한 방직공장에서 벌였던 힘든 파업에서 승리한 후,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IWW가 작업중단 운동을 벌인 결과 정부가 IWW를 탄압하게 되어, IWW는 사실상 파괴되고 말았다.


개혁의 추진

1900년의 대통령 선거는 미국민에게 매킨리 행정부에 대해, 특히 그의 외교정책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기회를 부여했다. 공화당원들은 필라델피아에 모여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거둔 성공적인 결과와 미국이 번영을 되찾게 된 것에 대해, 그리고 "문호개방"정책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획득하는 노력에 대해 기쁨을 표시했다. 매킨리의 대통령 당선은 처음부터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매킨리 대통령은 그의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에 충분할만큼 오래 살지 못했다. 1901년 9월 그는 뉴요크주 버펄로시에서 열린 전람회에 참석했다가 암살자의 초안에 쓰러졌다. (그는 남북전쟁 이래 린컨 대통령과 가필드 대통령에 이어 그때까지 세 번째로 암살당한 미국의 태동령이었다.).

매킨리 대통령의 부통령이었던 디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국제문제 뿐만 아니라 국내문제에서도, 루스벨트의 대통령직 계승은 미국민의 정치 생활에서의 새로운 기원과 때가 일치되는 것이었다. 미대륙의 인구는 크게 늘어났고, 미개척의 변경지역은 사라지고 있었다. 이전에는 몸부림쳤던 작은 공화국이 세계의 강국이 된 것이다. 이 나라의 정치적 기반은 외국과의 전쟁과 내전의 풍파를, 그리고 번영과 침체의 물결을 견디어 냈다. 농업과 공업에서 비약적인 발전이 이룩되었다. 무료 공립학교교육이 광범히 실현되었고, 자유 언론이 유지되었다. 종교 자유의 이상도 떠받쳐졌다. 하지만, 대기업체의 영향력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지방 및 시의 정부가 부패한 정치인들의 수중에 들어가는 일이 흔히 있었다.

19세기 資本主義의 지나친 점과 정치적 부패에 대응하여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개혁운동이 일어났는데, 대략 1890년부터 1917년 미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때까지 미국의 정치와 미국민의 사상은 이 주의의 특수한 성격의 영향을 받았다. 진보주의자들은 자신의 운동을 도회지의 정계 두목들과 부패한 악덕 대실업가들이 끼치는 폐해에 항거하는 강력한 민주적인 개혁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폭넓은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정직한 정부, 기업체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규제, 그리고 헌신적인 공무 수행 풍토의 부흥 등이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통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미국사회의 진보와 미국 시민의 복지 향상을 확실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시대의 거의 모든 저명인사들은, 그들이 정치, 철학, 학문 또는 문학 등 그 어떤 분야의 인사이든 간에,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 개혁 운동과 연관을 맺고 있었다.

1902년부터 1908년까지의 시기는, 작가와 언론인들이 농경생활을 위주로 하는 18세기의 공화국으로부터 물려받은 관행과 원칙들은 도시생활을 중심으로하는 20세기의 국가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고 강력히 항의하는 가운데, 가장 큰 개혁 활동이 벌어졌던 시기였다. 이보다 여러 해 앞서 1873년에, 마크 트웨인은 "Gilded Age" (호경기시대)에서 미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파헤쳤다. 이제는 기업합동(트러스트), 금융계, 불량식품 및 철도회사들의 횡포 등에 관한 기사가 일간신문과 "McClure's" 및 "Cillier's"와 같은 인기 있는 잡지들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스탠다스 오일 트러스트'를 상대로 개혁의 필봉을 휘둘렀던 아이다 메이 다벨 기자와 같은 필자들은 "추문 폭로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업턴 싱클레어는 센세이션을 일으킨 그의 소설 "The Jungle"에서 시카고의 대규모 정육업소들의 비위생적인 상태와 미국의 육류 공급을 쇠고기 부문 기업합동이 장악하고 있는 양상을 폭로했다. 디어도어 드라이저는 "The Finacier"(금융업자)와 "The Titan"(巨人)에서 문외한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대기업체들의 간계를 묘사했다. 프랭크 노리스의 "The Pit"(시카고 곡물거래소)는 비밀 조작이 시카고의 곡물시장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폭로함으로써 농민들의 항의를 고무했다. 링큰 스테펀즈의 'The Shame of th Cities"(도시의 수치)는 정치적 부패상을 폭로했다. 이같은 "폭로문학"은 행동을 취하도록 시민들을 각성시킴에 있어 지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타협을 모르는 작가들의 강력한 영향과 점점 높아가는 대중의 각성은 정치 지도자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방책을 위하도록 만들어다. 많은 주들이 국민들의 생활과 근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들을 제정했다. 제인 애덤즈와 같은 저명한 사회비평가의 촉구에 따라 아동로동법이 강화되었고 새로운 법규가 채택되었는데, 아동 노동의 연령 하한선을 올렸고, 근로 시간을 단축시켰고, 아동 작업을 제한했으며, 아동들을 반드시 취학시키도록 규정했다.


루즈벨트의 개혁작업

20세기 초엽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대도시의 대도시와 주들의 반수이상이 공공기관의 근무 시간을 하루 8시간으로 하는 제도를 수립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근로자들을 위한 보상법이 제정된 사실인데, 이 법률은 근로자들이 작업중에 입은 상해에 대해 고용주들이 법적으로 책임을 지도록 규정했다. 새로운 세입법이 또한 제정되었는데, 이는 상속 재산, 소득 및 법인의 재산이나 소득에 과세함으로써 정부의 부담을 지불 능력이 가장 나은 사람들이 짊어지게 하는 취지였다.

개혁 운동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일들은 전국적인 규모로 다루어져야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여러 사람들, 특히 디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위스콘신주 출신 상원의원 로버트 라폴레트 같은 의회의 진보주의 지도자들에게는 분명해 보였다. 개혁에 열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자신의 표현대로 "공정한 업무 처리"를 국민에게 해주기로 결심하고 있었던 루스벨트는 '기업합동(트러스트)방지법'을 시행함에 있어 정부의 감독을 강화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뒤이어 정부의 감독을 철도회사에까지 확대함으로써 철도 관계의 주요 규제법안들이 통과되도록 만들었다. 이들 법안의 하나는 公表된 철도 요금율을 합법적인 표준으로 하였고, (환불 방식에 의한)요금할인에 대해서는 철도회사와 마찬가지로 하주들도 역시 표준 요금을 지키도록 규정한 법안이었다.

루스벨트의 걸출한 인품과 그의 "트러스트 파괴"활동은 일반 시민 개개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의 진보적 조치에 대한 지지는 초당적이었다. 풍요를 구가했던 이 시기의 미국의 번영은 국민들로 하여금 집권당을 만족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190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그가 거둘 승리를 보장되어 있었다.

대통령 선거전에서의 압도적인 승리에 힘입어, 루스벨트는 개혁 운동에 새로운 박차를 가했다. 그는 대통령으로 재선된 후 처음으로 의회에 보낸 연두교서에서 더욱 과감한 철도회사 규제책을 제창했는데, 의회를 1906년 6월 '헵번법'(Hepburn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은 주간통상위원회(Interstate Commerce Commission)에게 철도 요금을 규제함에 있어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고, 이 위원회의 관할권을 확대했으며, 철도회사들로 하여금 선박회사 및 석탄회사와 결부된 그들의 이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의회는 연방에 의한 통제의 원칙이 가일층 광범이 적용되도록 만드는 기타의 조치도 취했다. 1906년에 제정된 순수식품법을 "유해한 약품, 화학품 또는 방부제"를 조제약과 식품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법률은 이윽고 주간의 통상을 통해 육류를 판매하는 모든 회사들이 연방정부의 검사를 받도록 규정한 법률에 의해 보강되었다.

한편, 의회는 행정부에 상무-노무부를 신설하고, 이 부서의 장관이 대통령의 각료가 되게 하였다. 신설된 이 부서의, 대기업체들의 통합체에 관한 사항을 조사하는 권한이 부여된 한 국은 1907년 '아메리칸 제강회사'가 정부의 눈을 속여 거액의 수입관세를 포탈했음을 적발했다. 이에 따라 법적 조치가 취해진 결과 400만 달러가 넘는 관세가 회수되었고, 이 회사의 서너 명의 간부들이 처벌당했다. 또 인디애나주의 '스탠다드 석유회사'는 '시카고 앤드 앨턴 철도회사'로부터 비밀리에 철도 운임을 할인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1,462건에 달하는 개별 운송계약에 부과된 2,924만 달러에 달하는 벌금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었다.

전국의 천연 자원을 보존하고, 원료의 낭비적인 채굴에 종지부를 찍으며, 광대한 유목지를 개간한 것은 루스벨트 시대에 이룩된 다른 주요한 업적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찍이 1901년에 의회에 보낸 첫 연두교서에서 자원 보전, 유휴지 개간 및 관개를 위한 파급 효과가 큰 통합 계획의 수립을 제창했던 것이다. 그의 전입자들은 1,880만 헥타르의 삼림지를 지정했었으나, 그는 이 면적을 5,920만 헥타르로 늘렸고, 산불 방지와 수목이 고갈된 지역에 대한 식수를 위한 체계적인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태프트와 윌슨

루스벨트의 인기는 1908년의 대통령 선거운동이 다가오자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그 어느 대통령도 2회 이상 집권하지 않았다는 전통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는 출마하는 대신 윌리엄 태프트를 지원했는데, 태프트는 대통령에 당선되어 전임 대통령의 개혁 계획을 계속하여 추진하고자 힘썼다. 판사, 필리핀 총독, 그리고 파나마 운하 행정관의 직책을 역임한 바 있는 태프트는 어느 정도의 진전을 이룩했다. 그는 기업합동(트러스트)의 추소를 계속했고, 주간통상위원회를 가일층 강화했고, 우편저금과 우편소포제도를 수립했고, 공무원 제도를 확대했으며, 2개의 헌법 수정조항의 제정을 발의했다.

헌법 수정조항 제 16조는 연방 소득세 징수를 승인하는 것이었고, 1913년에 비준된 제 17조는 주민들이 연방 상원의원들을 직접 선출하도록 함으로써, 주의회에 의해 선임되는 제도를 대치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업적들을 이룩한 반면, 그는 진보
☞자유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격분시켰던 일종의 보호관세를 채택했고, 애리조나주헌법이 진보
☞자유적이라는 이유에서 이 주의 연방 가입을 반대했으며, 그가 소속한 당(공화당)의 보수세력에 점점 더 의존했었다.

1910년에 와서는 그가 소속한 당은 분열했고, 압도적 다수표를 차지한 민주당원들이 다시 의회를 장악하게 되었다. 2년 후, 뉴저지주의 진보주의적 지사였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우드로 윌슨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태프트와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지 못한 후 제 3당인 진보당을 조직한 루스벨트를 상대로 선거전을 벌였다.

활발한 선거운동을 벌인 윌슨은 두 경쟁 상대를 물리쳤다. 윌슨의 영도하에 새로운 의회를 미국 역사상 가장 특기할 만한 입법 계획들을 추진했다. 의회가 다루어야 했던 첫 과제는 관세관계 법률의 수정이었다. 윌슨은 "우리는 관세제도를 수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특권 비슷한 것은 모두 폐지해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1913년 10월 3일에 서명된 '언더우드 관세법'은 수입된 원자재 및 식료품, 면제품 및 모제품, 철강 등에 대한 관세율을 크게 낮췄고, 100개가 넘는 기타 품목에 대해 관세를 폐지했다. 이 법률은 많은 보호무역적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시민의 생활비를 낮추려는 기도의 소산이었다.

민주당이 추진했던 입법 계획의 두 번째 과제는 오래 전부터 현안이 되어 왔던, 신축성 없는 금융 및 통화 제도의 철저한 개편이었다. 윌슨은 "금융 통제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어야만 하고, 그 통제의 행사권은 정부 자체에 귀속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은행들은 실업, 개인기업, 그리고 이니셔티브에 군림하는 주인이 아니라 이들에게 봉사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라고 역설했다.

1913년 12월 23일에 제정된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은 윌슨의 가장 영속적인 입법 분야의 업적 중의 하나였다. 이 법률은, 전국을 12개 연방준비구로 나누고, 각 지구에 연방준비은행을 하나씩 두고, 연방준비제도 이사회가 이들 은행 모두를 감독하는 새로운 기구(中央銀行)를 기존하는 은행들 위에 설치했다. 이들 연방준비은행은 이 제도에 가맹한 은행들의 예금 지불 준비금의 보관소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연방준비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미국정부는 정부가 수행해야 하는 통화공급의 통제를, 규제를 받지 않는 사설은행에 주로 맡겼었다. 去來의 공식적인 매체는 금화였으나 대부분의 대부와 지불은 (요구가 있을 때 지폐를) 금으로 상환한다는 약속 아래 은행권으로 이루어졌다. 이 제도의 폐단은 은행들이 예금 지불 준비금 이상으로 은행권을 발행하고싶어한다는 점이었는데, 그 결과 불안한 예금주들이 앞다투어 은행권을 주화로 환전하는 사태를 빚어내는 금융공황이 정기적으로 일어나곤 했다. 그러나 연방준비법이 제정됨으로써 통화 공급이 보다 큰 신축성을 보장받게 되었는데, 기업체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연방준비권(은행권)을 발행하는 규정이 제정되었던 것이다.

다음의 중요한 과제는 기업합동(트러스트)을 규제하고, 주식 회사들의 폐해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그때까지의 경험으로, 주간통상위원회가 철도회사들에 대해 행사하는 통제와 유사한 통제 제도가 필요할 것같았다. 의회는 연방통상위원회가 대기업체들이 주간 통상에서 "불공정한 경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는 것을 승인했다. 윌슨 대통령의 두 번째 입법 분야의 공적은 '클레이턴 기업합동(트러스트) 방지법'(Clayton Antitrust Act)이었는데, 이 법률은 (한 임원이 여러 회사의 이사직을 겸임하는) 겸임이사제, 구매자들에게 차별적 가격을 적응하는 행위, 노동쟁의가 일어났을 때 회사가 법원이 내리는 금지 명령을 이용하는 행위 및 한 법인이 유사한 기업체들의 주를 소유하는 행위 등 그때까지는 구체적인 규탄을 받지 않았던 주식회사들의 많은 관행을 금지했다.

농민 및 기타 부문의 근로자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연방 영농융자법은 농민들로 하여금 낮은 금리로 신용 대부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1915년에 제정된 선원법은 외항선과 호수나 하천을 운항하는 선박에서 근무하는 종업원들의 생활 및 근로조건을 개선하도록 규정했다. 1916년의 근로자보상법은 공부원이 근무중에 불구가 되었을 때 그들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것을 승인했다. 같은 해에 제정된 '애덤슨법'(Adamson Act)은 철도 근로자들을 위해 하루 8시간 근로제도를 확립했다.

이같은 윌슨 대통령의 업적의 기록은, 그가 선두를 달린 이 나라의 정치개혁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미국 역사에서의 그의 지위를 굳혀 놓았다. 하지만 그의 국내적 명성은, 미국을 승리로 이끌기는 했지만 전쟁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평화안에 대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전시대통령으로서의 기록에 의해 이윽고 가리워지게 되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나라

그 어떤 나라의 역사도 미국역사만큼 移民과 밀접하게 연관된 역사는 없다. 20세기초 15년 동안에만도 1,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왔는데, 그중 많은 사람이 1892년에 뉴욕항내 엘리스 섬에 개설된 연방이민검역소를 통과하여 미국으로 들어왔다. 엘리스 섬의 이 시설은 이제는 운영되고 있지 않으나, 미국의 문지방인 이곳을 넘어온 수백만 명의 이민들을 기념하기 위해 1992년 이 시설이 관광객들에게 다시 개방되었다.

1790년에 미국에서 처음 실시된 국세조사의 결과는 미국인 수를 392만 9,214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원래 영국의 식민지였던 13개의 주의 인구의 약 반 수는 영국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독일계, 네덜란드계, 프랑스계, 스웨덴계, 웨일스계 그리고 핀란드계 사람들이었다. 이들 백인 유럽인들은 대부분이 (기독교) 개신교 신도들이었다. 인구의 5분의 1이 노예가 된 아프리카 인들이었다.

일찍부터 미국인들은 이민을 값싼 노동력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1920년대까지 미국으로 이주하는 데에는 공식적인 제한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이민들이 미국으로 들어오자, 일부 미국인들은 그들의 문화가 위협당하고 있다고 겁을 먹게 되었다.

건국원로들, 그 중에서도 특히 토머스 제퍼슨은 이 지구의 각처로부터 모여드는 사람들을 미국이 환영해야 하는지의 여부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감정을 갖고 있었다. 미국 독립선언문 기초자인 제퍼슨은 민주주의가, 군주를 경외했던 나라들이나 왕정을 뒤엎고 폭도들ㅇ리 통치했던 나라들에서 온 사람들의 수중에서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을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기를 쓰고 노동력을 얻고자 했던 이 나라에서 신참이민들에 대한 문호폐쇄를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쟁들이 대서양 횡단 여행을 가로막고, 유럽 나라들의 정부가 군복무 해당 연령층의 젊은 사람들의 이주를 제한한 18세기 말엽과 19세기 초엽에는, 미국으로의 이주는 정체되었다. 1750년 이후에는, 의료 및 위생 분야의 향상에 따라 유럽인들의 사망률은 낮아졌다. 윤작과 체계적인 시비가 표준 농법이 되자 식품 보급이 늘어났다. 그러나 그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가족들이 겨우 생존할 수 있을 정도의 좁은 농토에 밀집하여 농사를 짓고 있었다. 더욱이 가내공업은 기계화된 생산을 몰고 온 산업혁명에 의해 희생당하고 있었다. 공장에서 일자리를 찾고자 하지 않았거나 찾을 수 없었던 수천 명의 기능공들이 실직하고 말았다.

184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아일랜드에서 감자 마름병이 번지고 독일 본토에서 혁명이 계속 일어난 결과, 수백만 명이 더 미국으로 이주했다. 한편, 그 대부분이 가난에 허덕이던 중국 남동부에서 드문드문 미국으로 이주해 온 중국인 이민들이 미국 서해안 지역에 이주하기 시작했다.

184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아일랜드에서 감자 마름병이 번지고 독일 본토에서 혁명이 계속 일어난 결과, 수백만 명이 더 미국으로 이주했다. 한편, 그 대부분이 가난에 허덕이던 중국 남동부에서 드문드문 미국으로 이주해 온 중국인 이민들이 미국 서해안 지역에 이주하기 시작했다. 1890년부터 1921년까지 거의 1,9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왔는데, 1921년 미국 의회는 이민수를 크게 제한하는 법률을 처음으로 통과시켰다. 대부분의 이민들은 이탈리아, 러시아, 폴란드, 그리스 및 발칸반도 제국 출신이었다. 비유럽인들도 역시 이주해 왔는데, 일본으로부터는 동쪽을 향해, 캐나다로부터는 남쪽을 향해, 그리고 멕시코로부터는 북쪽을 향해 이민들이 미국으로 왔다.

하지만, 1920년대에 와서는 임금의식이 강한 조직된 노동자들과, '쿠 클룩스 클랜'(Ku Klux Klan) 및 이민제한연맹(Imm,agration Restriction League)처럼 인종적 및 종교적 이유에서 이민의 제한을 주장했던 사람들 사이에는 동맹관계가 다져졌다. 1924년에 제정된 '존슨-리드 이민법'은 신참 이민들의 유입을 출신 국가별로 계산된 쿼터로 항구적으로 축소시켰다.

1930년대의 대공황은 이주의 속도를 극적으로 가일층 더디게 만들었다. 여론이 핍박받는 유럽의 소수민족에 대해서조차도 이민을 대체적으로 반대하는 가운데,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였다.

그후 20년에 걸쳐 미국은 구가별 이민 쿼터제를 계속 고수했다. 1952년 제정된 '매카렌-월터법'의 지지자들은 쿼터제를 느슨하게 풀어주면 미국은 동구 국가들의 마르크스주의 파괴분자들로 가득찰 것이라고 주장했다.

1965년 의회는 국가별 쿼터제를 반구별 쿼터제로써 대치했다. 미국에서는 그 수가 모자라는 기능공들이 이민의 우선권을 받았던 것처럼, 미국시민의 친척들도 이민의 우선권을 받았다. 1978년에 이 반구별 쿼터제는 전세계적인 이민 상한선을 연간 29만 명으로 하는 제도로써 대채되었는데, 이 한계 인원수는 1980년에 피난민법이 통과됨에 따라 27만 명으로 줄었다.

1970년대 중반 이래 미국은 아시아와 중남미로부터의 이민의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여 왔는데, 특히 이들 이민은 이 나라 전체에 걸쳐 지역사회의 모습을 바꾸어놓고 있다. 현재의 推計마다 서로 다르지만, 일부 추계는 연간 60만이나 되는 불법 이민들이 미국에 들어오고 있다고 시사한다.

하지만 이민쿼터와 피난민쿼터는 실제적인 수요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불법적인 이민이 아직도 주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멕시코인들과 중남미인들이 일자리, 높은 임금,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위한 보다 향상된 교육과 의료의 기회를 찾아 날마다 미국의 남서부 국경을 넘어오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이레, 중국 및 기타 아시아의 나라들과 같은 세계의 나라들로부터 많은 수의 불법 이민이 들어오고 있다. 추계마다 서로 다르지만, 일부 추계는 연간 60만이나 되는 불법 이민들이 미국에 들어오고 있다고 시사한다.

"미국은 우리에게 손짓한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우리를 거부한다"라는 이민들의 옛 속담이 있다. 이민의 조류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미국의 주류 속에 흘러 들어가고 있는 가운데, 이민 문제에 관한 논쟁은 격화되어 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는, "자유의 숨을 애타게 쉬고싶어 하는"사람들을 환영하면서 "황금의 문" 앞에서 등잔을 쳐들어 올리고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바로 미국의 상징이라는 신념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이같은 신념과, 그들의 먼 조상들도 한때는 아메리카로 이민온 사람들이었다는 확실한 지식이 미국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나라로 유지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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