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명 그 자체가 재산의 신성함에 의존한다." -- 앤드류 카네기, 1889년. |
두 대전, 즉 남북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사이에 미국은 성년으로 자라났다. 50년도 안되는 기간에 미국은 농업국에서 도회지 국가로 변모한 것이다. 변경지방은 자취를 감추었다. 큰 공장과 제철소, 대륙횡단 철도, 번성하는 도시, 그리고 광대한 농토들이 땅을 뒤덮었다. 이같은 경제적 성장과 풍요에는 이에 상응하는 문제들이 수반하게 되었다. 전국에 걸쳐, 기업체들이 독자적으로 또는 다른 기업체들과 합작하여 전체 산업을 지배하게 되었다. 근로 조건은 열악한 경우가 흔히 있었다. 도시들은 너무 빨리 성장했기 때문에 늘어나는 인구를 적절히 수용하거나 통제하지 못했다.
어느 작가는 "남북전쟁은 미국 역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이 전쟁은 이보다 20년 내지 30년 전에 일어나기 시작했던 변화를 극적으로 단숨에 일어나도록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전시의 필요성은 제조산업을 크게 촉진시켰고, 철 및 전력의 활용과 아울러 과학의 발전과 잇따른 발명에 입각한 경제 활동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1860년 이전에 미국에서 부여된 특허권은 3만 6,000건이었으나, 그 후 30년 동안에 44만 건의 특허권이 부여되었고, 20세기의 첫 25년 동안에 부여된 특허권은 거의 100만 건에 달했다.
일찍이 1844년에 새뮤얼 F.B. 모스는 전신을 완성하였고, 곧이어 미국 대륙의 멀리 떨어진 지역들이 전주와 전선망으로 서로 연결되었다. 1876년에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기를 선보였고, 이로부터 반세기 안에 1,600만 대의 전화기가 가설되어 국민의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 1876년에는 타자기가, 1888년에는 계산기가, 그리고 1897년에는 현금 출납기가 발명되어 기업체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1886년에 발명된 자동제 식자기(라이노타이프), 윤전기 및 종이 접는 기계는 8면 신문을 1시간에 24만 부나 인쇄할 수 있게 하였다. 토머스 에디슨이 발명한 백열등은 수백만의 가정을 밝게 해주었다. 에디슨은 말하는 기계, 즉 축음기를 역시 완성했는데, 그는 또 조지 이스트먼과 함께 활동사진의 개발을 도왔다. 이런 것들과, 과학 및 창의성의 다른 많은 응용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수준의 생산성을 낳게 했다.
동시에 미국의 기간산업인 철강산업은 고율의 관세의 보호를 받고 성장을 계속했다. 이전에는 동부 제주에 집중되어 있었던 제철산업은 지질학자들이 새로운 광상들을 발견함에 따라 서부로 이동해 갔다. 이들 광상 중에서 특히 슈피어리어호의 상단 물목에 잇는 거대한 메사비 철광지대는 세계 최대의 철광 산지의 하나가 되었다. 이 철광은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채광이 용이했고 또 비용도 저렴했다. 화학적 불순물이 놀랄만큼 섞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철광을 가지고 그 전까지의 일반적인 비용의 약 10분의 1의 비용으로 품질이 우수한 강철을 만들 수 있었다.
앤드루 카네기는 강철 생산이 크게 발전하도록 만든데서 공로가 지대한 사람이었다. 12세의 어린나이에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카네기는 솜 공장의 얼레잡이 일자리부터 시작하여, 전신소의 직원을 거쳐, 펜실베니아 철도국의 직원이 되었다. 그는 30세가 되기 전부터 약삭빠르고 선견지명이 있는 투자를 해왔는데, 1865년에 와서는 그의 투자는 제철산업에 집중이 되었다. 몇 년이 안가서 그는 철교, 레일(鐵路) 및 기관차를 제작하는 회사들을 설립하거나 그같은 회사들의 주를 사들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가 펜실베이니아州 모논가헬라강 강변에 세운 제철소는 미국 최대의 것이 되었다.
카네기는 신설 제철소 뿐만 아니라, 코크스 제조 시설 및 탄광, 슈피어리어湖 지역에서 나오는 철광, 5대호의 증기선단, 이리 호의 한 항구도시, 그리고 한 연결 철도 등에 대한 지배권도 역시 장악했다. 다른 10여개 업체와 제유한 그의 사업은 철도회사와 해군회사에서 제공하는 유리한 조건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었다. 글의 재원은 공장과 종업원을 방대한 규모로 늘리는데 충분했다. 미국의 공업 발전에서 이와 견줄만한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카네기가 제강산업을 오랫동안 지배했지만, 그는 제강에 관련된 천연자원 수송 및 공장들을 완전히 독점하지는 못했다. 1890년대에 이르러 새로 나타난 회사들이 그의 정상의 자리에 도전했는데, 카네기는 처음에는 경쟁에 자극을 받고 더 강력한 종합 사업체를 만들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노쇠해진 그는 미국내 대부분의 중요한 제철 및 제강 시설을 흡수하게 된 한 회사와 자기회사를 合倂하도록 설득당했다.
1901년에 이루어진 이같은 합병의 결과로 생겨난 미국제강회사(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는 30년 동안 계속되었던 한 과정, 즉 공업 분야의 독립된 기업체를 연합강 체제로 조직된, 또는 단일 중앙집권식 관리를 받는 체제로 조직된 회사들에 통합시키는 대표적 과정을 열시해주었다. 남북전쟁 기간중에 시작된 이같은 추세는 실업인들이 과잉 생산으로 제품의 가격이 떨어지고 이윤이 적어지리라고 우려하기 시작했던 1870년대 이후에 더 강해졌다. 실업인들은 만약 생산과 시장을 통제할 수 있다면 서로 경쟁하는 회사들을 단일 조직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식회사"와 "기업합동"이 발전하게 되었다.
막대한 자본금을 동원할 수 잇고 또 기업체에게 항구적인 존속과 관리의 계속성을 부여하는 주식회사는 예상되는 이윤과 또한 사업이 실패할 경우에도 책임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투자자들의 마음을 끄었다. 반면 기업합동은 실제에 있어서는 주식회사들의 통합체로서 각회사들의 주주들은 자신의 주를 경영을 책임지는 수탁자에게 맡겼다. 그같은 기업함동은 대규모적인 관리적 통합체, 중앙집권식 관리와 경영, 그리고 특허의 공동관리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들의 막대한 자본 자원은 기업을 확장하고, 외국의 상사들과 경쟁하며, 효과적인 조직을 갖기 시작한 노조와 맞서 힘든 협상을 할 수 있는 보다 큰 힘을 제공해 주었다. 그들은 또한 철도로부터 유리한 조건을 얻어낼 수 있었으며,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었다.
존 D. 록펠러가 창립한 스탠다드 석유회사(Standard Oil Company)는 가장 초기의, 그리고 가장 강력한 주식회사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 회사에 이어 면실유, 연, 설탕, 담배 그리고 고무 등의 부분에서도 다른 영리적 결합체들이 급속히 생겨났다. 곧 의욕적인 개인 기업가들도 그들 자신의 산업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필립 아무어, 그리고 구스타부스 스위프트와 같은 대업자를 위시한 4대 정육업자들은 쇠고기 기업합동을 설립했다. 사이러스 맥코믹은 수확기 제작 사업에서 타회사의 추종을 불허했다. 1904년의 한 조사 결과는 이전에는 독립했던 5,000개 이상의 업체들이 약 300개의 공업 부문의 기업합동으로 통합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같은 시업체 합병추세는 기타의 분야, 특히 수송과 통신 분야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통신회사들의 대규모적인 영리적 통합체 중에서 가장 먼저 생긴 '웨스턴 유니언'에 이어 '벨텔리폰 시스템'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미국전화전신회사(American Telephone and Telegragh Company)가 생겨났다. 1860년대에는 코넬리우스 밴더빌트가 개별적으로 운영되는 13개의 구간 철도를 통합하여 거의 8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뉴욕시와 버펄로를 연결하는 단일 철도 노선으로 만들었는데 이리하여 '뉴욕 센트럴 레이로드 시스템'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또 다른 철도회사들의 합병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는데, 전국의 주요 철도는 곧 소수인에 의해 운영되는 간선철도로 조직되었다.
이같은 새로운 산업 질서 속에서, 도시는 방대한 자본의 축적, 실업 및 금융기관, 광대한 철도 조차장, 연기를 내뿜는 공장, 그리고 수많은 일단의 육체노동자 및 사무원 등과 같은 이 나라의 모든 활기찬 경제활동을 떠맡는 중추신경의 역할을 했다. 마을은 시골과 바다건너 사람들을 끌어들여 소도시로 자랐고, 소도시는 거의 하룻밤 사이에 대도시로 자랐다. 1830년에는 15명중 한 명 만이 인구 8.000명 이상의 지역사회에서 살았는데, 1860년에는 이 비율이 6명중 거의 한 명 꼴이 되었고, 1890년에와서는 10명중 3명이 되었다. 1870년에는 주민 100만명 이상을 가진 도시는 단 하나도 없었으나, 30년 후의 뉴욕시 인구는 150만이었고, 일리노이주의 시카고시와 펜실베이니아주의 필라델피아시의 인구는 각각100만을 넘었다. 이 30년 기간에 필라델피아시와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시의 인구는 2배로, 미주리주의 캔자스시와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시는 4배로,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시는 6배로, 시카고시는 10배로 늘어났다. 미네소타주의 미니애폴리스와 네브라스카주의 오마하, 그리고 이들처럼 남북저쟁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한촌이었던 많은 지역회사들이 인구가 50배 이상이나 늘어난 도시가 되었다.
철도는 팽창하는 미국에게 점점 더 중요하게 되었고, 철도회사들의 불공정 관행이 확산했다. 대규모 화주들로부터는 요금의 일부를 환불하는 '리베이트'방식으로 보다 저렴한 요금을 받던 관행은, 소규모 화주들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또한 일부 철도회사들은, 어떤철도 구간에서는 거리에 상관없이 일부 화주들로부터는 다른화주들보다 비싼 요금을 멋대로 받았다.
더욱이, 서너개 철도회사의 노선이 연결되는 도시들 사이의 화물 요금은 경쟁 때문에 억제되었지만, 반면 단일 철도회사가 운영하는 철도 구간의 화물요금은 지나치게 비쌌다. 따라서 물건을 시카고시에서 뉴욕시까지 1,280 킬로미터 운송하는 요금이 시카고시에서 수백 킬로미터 운송하는 요금보다 저렴했다. 또 경쟁을 회피하는 철도회사들의 공동 조치, 즉 영업 공동금리제도(pooling)을 통해, 경쟁회사들은 사전에 정한 계획에 따라 운송업무를 분담했으며, 총 수입은 공동 기금에 적립하고 후에 분배했다.
이같은 관행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주정부로 하여금 서둘러 규제 조치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이같은 규제는 더러는 좋은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가전국적인성격을 띤 것이기 때문에 연방의회의 조치가 필요했다.
1887년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과다한 요금, 영어 공동관리 제도, 요금 환불 및 차별적 비율을 금지하는 주간 통상법(Interstate Commerce Act)에 서명했고, 이 법의 위반 행위를 감시하고 철도 요금과 철도회사의 관행을 규제하기 위해 주간통상위원회(InterstateCommerce Commissio: ICC)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 법률이 제정된 후 첫 10년 동안은 철도회사들이 규제를 실시하고 요금을 인하시키려는 ICC의 거의 모든 노력을 좌절시키기 위해, 대법원이내린 보수적인 판결들을 활용했다.
클리블랜드는 또한 그율의 관세제도를 철폐하기 위해서도 활발히 노력했다. 당초 전시의 비상 조치로 채택되었던 고율의 관세 제도가 그 시대의 정치를 지배했던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에 의해 항구적인 국가 정책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민주당 출신인 클리블랜드는 이 고율의 관세가 생계비의 부담스러운 증가와 기업합동의 급속한 발전의 큰 원인이 되고 있다고 간주했다. 고율 관세 문제가 정치적 쟁점이 되지 않은 채 여러 해가 지난 후, 민주당원들은 1880년 "세입만을 위한 관세"를 주장하게 되었고, 곧 개혁을 부르짖는 끈질긴 목소리가 일어났다. 1887년 클리블랜드는 이 말썽많은 문제를 다루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의회에 보낸 연두교서에서 미국의 산업을 외국의 경쟁으로부터 보호하는 원칙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추구되어 왔다고 비난함으로써 국민을 놀라게 하였다.
관세 문제는 1888년의 대통령 선거 운동의 주요 쟁점이 되었고, 보호무역주의 옹호자인 공화당 후보 벤자민 해리슨이 백중한 선거전에서 승리하였다. 헤리슨 행정부는 1890년에 이른바 "유치산업"의 육성은 물론 이미 설립되어 있는 산업들의 보호를 위해 구상된 방책인 "매킨리 관세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선거 공약을 지켰다. 이 법률에 따라 책정된 일반적으로높은 관세율은 소매가격을 비싸게 만들었고, 국민의 불만이 광범히 학산하게 하였다.
이 기간에, 기업합동에 대한 일반 대중의 반감이 높아졌다. 1880년대를 통하여 헨리 조지 및 에드워드 벨라미와 같은 개혁가들의 신랄한 공격을 받은 미국의 거대한 주식회사들이 치열한 논쟁을 불러 일으킨 정치 쟁점이 되었다. 독점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1890년에 제정된 '셔면 기업합동 방지법'은 주간 통상을 제약하는 모든 영리적 결합행위를 금지했고, 엄한 벌칙으로써 이 법률을 시행하는 몇 가지 방법을 규정했다. 그런데 이 법률의 애매모호한 일반적 원칙 때문에, 이 법률자체는 통과된 직후에는 거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10년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행정부 때 이 법률이 효과적으로 적용된 경과, 루스켈트 대통령은 "기업합동 파괴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공업의 비약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농업은 여전히 이 나라의 기본적 생업으로 남아있었다. 남북전쟁 후에 이룩된 공업혁명에 필적하는 농업의 혁명은, 육체 노동에서 기계 영농에로의, 그리고 생존을 위한 농업에서 상업을 위한 농업에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1860년부터 1910년 사이에 미국의 농장 수는 3배 이상 증가하여 200만에서 600만으로 늘어난 반면, 농경 면적은 2배 이상 증가하여 1억 6,000만 헥타르에서 3억 5,200만 헥타르로 늘어났다.
1860년과 1890년 사이에 밀, 옥수수 및 목화와 같은 기본 농산물의 생산량은 모두 미국의 이전의 생산량을 훨씬 능가했다. 동일한 기간에 미국의 인구는, 도시에서 가장 많은 성장을 보이면서 2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미국의 농민들은 미국의 근로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공급하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항상 늘어나는 잉여 생산량을 낳기에 충분한 곡물과 면화를 재배했고, 쇠고기와 돼지고기, 그리고 양모를 생산했다.
이와 같은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룩한 데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었다. 그 한 요소는 서부에로의 확장이었다. 또 다른 요소는 영농을 위한 기계의 응용이었다. 1800년의 농부 한 사람은 하루 동안에 낫으로 5분지 1 헥타르의 밀을 벨 수 있었다. 30년 후에는 덧사을 os 낫을 가지고 하루에 10분지 8 헥타르의 밀을 벨 수 있었다. 그런데 1840년 사이러스 맥코믹은 그가 거의 10년에 걸쳐 개발해 온 이상한 기계인 수확기를 사용하여 하루에 2헥타르 내지 2.5 헥타르의 밀을 베는 기적을 이룩했다. 이 기계의 수요를 예견한 그는 서쪽에 있는 草原의 신흥도시 시카고로 가서 그곳에 공장을 세웠다. 그는 1860년까지는 25만대에 달하는 수확기를 판매하였다.
자동식 '와이어 바인더', 탈곡기, 수확 탈곡기, 즉 '콤바인'등의 영농기구가 급속히 잇달아 개발되었다. 또 파종기, 절단기, 타작기 및 껍질 벗기는 기계등이 나타났는가 하면, 크림 분리기, 비료 징포기, 감자 식촌기, 가금류 부화기 등을 위시하여 다른 수백가지 영농기구가 발명되었다.
농업혁명에서 기계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과학이었다. 1862년에 '모릴 토지공여대학법'은 농과대학과 산업대학을 설립하도록 주마다 공유지를 할당했다. 이 대학들은 교육기관으로서, 동시에 과학적 영농법의 연구 센터로서 이바지 했다. 의회는 이어 전국에 농사실험소를 설치하기 위한 자금을 배당했고, 또한 연구 목적에 사용하도록 자금을 농무부에 직접 교부했다. 새 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미국 전역에 걸쳐 과학자들이 다양한 농업 연구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얄궂게도 농민들로 하여금 수확을 확대시킬 수 있게 만든 연방정책이 궁극적으로는 막대한 잉여농산물을 낳게 만들어 시장가격을 하락시킨 결과 농민들을 실의에 빠지게 했다.
이들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인 마크 칼턴은 농무부의 위촉을 받고 러시아를 여행했다. 그는 그곳에서 녹병과 가뭄에 강한 겨울(冬)밀을 발견하여, 이를 고국 미국으로 보냈는데, 이 품종은 현재 미국의 밀 생산량의 半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다른 과학자 매리온 도세트는 무서운 돼지 콜레라를 정복했는가 하면, 다른 과학자 조지 몰러는 9가축의 입 발굽에 걸리는 전염병인) 구제역을 예방하는 방법을 창안했다. 한 연구원은 북아프리카로부터 '카피르' 옥수수를 가지고 돌아왔으며, 또 다른 연구원은 투루케스탄으로부터 노란 꽃이 피는 목초 '알팔파'를 들여왔다. 캘리포니아州에서는 루터 버뱅크가 20여가지의 새로운 품종의 과일과 채소를 생산했고, 위스콘신州에서는 스티븐 배브코크가 우유의 유지방 함량을 결정하는 시험 방법을 고안했으며, 앨라배마州의 터스키지 연구소에서는 아프리카系 미국인 과학자 조지 워싱턴 카버가, 고구마 및 완두콩의 수백가지의 새로운 용도를 발견했다.
1880년대에 남부는 공업을 유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투자가들에게는 강철, 목재, 담배 및 직물등의 산업을 발전시키도록 많은 유인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1900년에 와서도 남부가 차지하는 미국의 산업 기반의 몫은 1860년대에 차지했던 몫과 거의 똑같은 수준이었다. 더욱이, 이같은 공업화를 추진하는 노력의 대가는 값비싼 것이었다. 공장들이 들어선 도시에서는 질병이 만연하고 미성년자 노동이 성행하였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30년이 지난 후에도 남부는 여전히 대부분 주민이 가난했고, 농업이 압도적인 생업이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의존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남부의 사회는 흑인과 백인의 엄격한 사회적 분리를 실시했고, 되풀이되는 9흑인에 대한) 인종적 폭력행위를 묵인하였다.
워싱턴의 중앙정부에서 차지하던 지위를 이용하여 남부의 연방 재편입에 저항했던 비타협적인 남부의 백인들은 백인 지배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州의 통제 기능을 주장하는 방도를 찾아냈다. 1870년대부터 대법원의 몇몇 판결이 국가적 권력과 州의 권력은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보수적 견해를 지지하기 시작함으로써, 이같은 남부인들의 견해를 북돋아 주었다.
1873년 대법원은 (시민권이 축소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미국헌법 수정조항 제 14조가 아프리카系 미국인을 州의 권력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사람들에게 특권이나 면책권을 부여하고 있지 않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883년에는 미국헌법 수정조항 제 14조가, 州가 아닌 개인이 (흑인을) 차별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판시했다. 또 '플레시 대 퍼쿠슨' 사건(1896년)에서 대법원은 기차나 식당과 같은, 흑인을 위한 '흑 백이 분리되었으나 평등한" 공공 수용시설은 흑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시했다.
이윽고 인종을 차별하는 (흑백)분리의 원칙은 철도에서 식당, 호텔, 병원 및 학교에 이르기까지 남부의 시민 생활의 모든 분야에 확대되었다. 더욱이, 법에 의해 (흑백)분리가 되어 있지 않은 시민 생활의 분야가 있으면, 이는 관습과 관행에 의해 분리되었다. 널리 퍼진 차별 제도에 직면한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의 가장 저명한 흑인 지도자 부커 T. 워싱턴의 계획을 지지했는데, 그는 알맞은 경제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당분간 사회적 차별을 받아들이라고 그들에게 조언했다. 아프리카계 지성인 W.E.B. 듀 보리스에 의해 영도되는 다른 아프리카系 미국인들은 정치적 행동을 통해 (흑백)분리에 도전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들 주요 흑인 지도자 두 派가 제휴하여 벌인 인종적 正義의 요구는 거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남부에서는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도 (흑백)분리의 법률들은 여전히 흔하게 남아있었다.
1865년에는 (개척지와 미개척지 사이의) 환경선은 대체적으로 미시시피강과 인접한 州들의 서쪽 한계선을 따라가다가 (서쪽으로 불룩이 나와, 캔자스와 네브라스카의 동쪽 일부 지역에 이룩해 놓은 농장들의 가느다란 경계지대 너머에는 대초원과 쑥으로 뒤덮인 땅이 록키 산맥 기슭에 까지 뻗어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금과 은, 그리고 기타 광물들이 풍부히 매장되어 있는 산맥들이 근 1,600킬로미터에 걸쳐 그 거대한 모습을 아련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들 산맥 너머 멀리 서쪽으로는 인적미!의 평원과 사막이, 수목이 울창한 해안지대의 산맥이나 태평양 연안에 까지 뻗쳐 있었다. 캘리포니아 지방의 정착지구들과 산재해 있는 변경 居!지를 제외하고는, 이 광대한 내륙 지역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수족과 블랙푸트족, 포니족, 나바호족 및 호피족의 문화와 같은 남서지역의 인디언 文化들이 있었다.
불과 25년 사이에 미국의 거의 전역이 州와 준주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광산업자들은 산간지방을 두루 헤메다니며 땅 속을 뒤졌고 네바다, 몬태나 및 콜로라도에 작은 마을들을 세웠다. 목축업자들은 광대한 초지를 확보하고자, 텍사스에서 미시시피江 상류까지에 걸친 광활한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양사육자들은 계곡과 산의 !! 지역을 찾아갔다. 농민들은 들판과 江의 유역을 쟁기로 갈고 동부와 서부사이의 격차를 좁혔다. 1890년에 와서는 환경지대는 사라졌다.
정착은 1862년의 '홈스테드法'(Homestead Act)에 의해 촉진되었는데, 이 법은 토지를 점유하고 이를 일구려는 사람에게는 농장을 64헥타르까지 무상으로 제공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농사를 짓고자 했던 사람들이 보기에는 토지 그 자체가 농사보다는 가축사육에 더 적합했으며, 1880년에 와서는 개척자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된" 거의 2,240만 헥타르에 달하는 토지가 목축업자들이나 철도회사들의 손에 들어갔다.
1862년, 의회는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의 설립을 승인해는데, 이 철도회사는 병사 출신 노무자들과 아일랜드系 이민 노무자들을 주로 고용하여 아이오와州의 카운설 블러프스에서 서쪽으로 철도를 부설해 나아갔다. 이와 동시에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는 중국인 노무자들에게 크게 의존하면서 캘리포니아 州 새크라멘토에서 동쪽을 향하여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두 철도노선이 서로 점점 더 접근해 가서 마침내 1869년 5월 10일 유타 州의 프로몬토리 포인트에서 서로 연결되자 전국은 흥분에 휩싸였다. 지금까지는 수개월이나 걸렸던, 서로 떨어진 양대양 사이의 힘든 여행길이 이제는 약 6일간의 철도 여행으로 단축되었다. 대륙횡단 철도산업이 꾸준히 성장했고, 1884년에 와서는 4개의 주요노선이 미시시피 江 중부유역을 태평양과 연결했다.
처음에 극서지역으로 떼지어 몰려든 인구는 산간지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캘리포니아의 산간지방에서는 1848년 金이 발견되었고, 이로부터 10년 후에는 콜로라도와 네바다에서, 1860년대에는 몬태나와 아이오밍에서, 그리고 1870년대에는 다코타의 블랙 힐에서 금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광부들은 그 지방을 새로 개발하고, 마을을 건설했으며, 보다 항구적인 정착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일부 정착민들은 광맥을 찾아 언덕을 파헤치면서 이 지역에 영농과 가축사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몇몇 고장들은 거의 전적으로 광업을 계속 하였지만, 몬태나, 콜로라도, 와이오밍, 아이다호 및 캘리포니아의 진정한 富는 풀과 땅에서 나온다는 것이 밝혀졌다.
오래 동안 텍사스의 중요한 산업이었던 목축업은 남북전쟁 후 기업심이 왕성한 사람들이 텍사스의 '롱혼'종 소(뿔이 긴 소)의 무리를 공유지를 거쳐 북쪽으로 몰고 가기 시작함으로써 더욱 번성했다. 풀을 뜯어먹으면서 이동하는 동안에 출발했을 때 보다 더 크게 자라고 살이 찐 이 소떼들이 캔자스의 철도 수송지점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곧 이 "장정"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오솔길들은 북쪽으로 이동하는 소떼들로 점철되었다. 목축업은 미주리 州를 횡단하는 지역에까지 확산되었고, 엄청나게 넓은 목장들이 콜로라도, 와이오밍, 캔사스, 네브라스카 및 다코타 준주에 나타났다. 서부의 도시들은 소의 도살과 정육업의 중심지로서 번성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목축업은 보기에 멋진 '카우보이'들이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다채로운 정감의 생활방식을 선보였다. 낮은 임금과 고달픈 일과의 연속인 카우보이 생활의 현실은 낭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1870년대의 '싸구려'소설로부터 존 웨인과 클린트 이스트 우드가 주연하는 20세기 후기의 영화에 이르기까지 미국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카우보이 생활의 신화적인 매력은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있다.
1866년과 1888년 사이에 모두 합쳐 약 600만 마리의 소떼들이 콜로라도, 와이오밍 및 몬태나의 고원지대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텍사스로부터 이동해 갔다. 이같은 방식의 목축 붐은 1885년을 고비로 하여 쇠퇴했는데, 소떼들의 이동로 부근의 방목지에는 소떼들이 너무 많이 붐벼 '장정'을 지탱할 만한 목초가 없게 되었고, 방목지를 종횡으로 누비고 철도가 부설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목축업자들의 뒤를 바로 이어 농민들의 포장마차가 그들의 가족, 집수레말, 소 그리고 돼지 등을 데리고 삐걱 거리면서 따라갔다. 이들 농민들은 홈스테드 法에 따라 차지한 그들의 농토의 경계를 말뚝으로 박아표시하고, 새로운 발명품인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쳤다. 목축업자들은 아무런 법적 권리도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던 땅에서 밀려났다. 이리하여 이윽고 '개척시대의 서부'는 사라졌다.
동부에서 인디언들과 갈등을 빚어냈던 것처럼, 광산업자, 목축업자 및 정착민들의 서부의 평원과 산으로 팽창해 나아감으로써 서부의 인디언들과의 갈등이 점점 더 많이 빚어졌다. 서부의 대분지(Great Basin)의 유티스 족에서 아이다호의 네즈 피세즈 족에 이르는 여러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이 수시로 백인들과 싸움을 벌였다. 그 중에서도 북부평원의 수 족과 남서부의 아파치 족이 변경 개척자들의 진출을 가장 크게 가로막았다. '레드 클라우드', '크레이지 호스'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유능한 지도자들이 이끄는 수 족은 특히 기마전에 능숙했다. 아파치 족은 수 족 만큼이나 전투에 능했고 교묘하게 상대를 기만하곤 했는데, 주로 그들의 생활 환경인 사막과 협곡에서 전투를 벌였다.
대평원의 인디언들과의 갈등은 1862년에 백인들의 수 족 인디언들에 의해 학살당함으로써 빚어졌는데, 남북전쟁 기간 전체를 통해 갈등은 계속 되었다. 수 족과의 마지막 대전투는 다코타에서 일어난 금광열기로 광부들이 블랙 힐즈 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간 1876년에 벌어졌다. 육군은 광부들이 수 족의 !!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을 책임이 있었으나 인디언의 땅을 보호하는 대책이 거의 취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미 합중국과) 체결한 조약상의 권리에 따라 수렵 지역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인디언들을 공격하도록 명령이 내려지자 육군은 활발하게 움직였다.
1876년에, 서너 차례에 걸친 수 족과의 승패를 가름할 수 없는 회전이 있은 후, 조지 커스터장군은 '리틀 빅 호온' 강변에 잇는 수족과 그들의 동맹부족의 주야영지를 발견했다. 분유대 분대에서 갈라진 그와 그의 부하들은 이곳에서 벌어진 인디언들과의 전투에서 전멸당했다. 그 후 1890년에, 사우드다코타주 운디드니의 북부 수족 보호구역에서 벌어진 "고스트 댄스"(사자의 혼령과의 교신을 위한 종교적 춤) 의식은 인디언들의 봉기와 마침내는 수백 명의 수족 남녀와 어린이들의 죽음으로 끝난 비극적인 충돌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이전에 평원 인디언들의 생활 양식은 (백인들에 의한) 들소의 대량 도살로 파괴되었는데, 들소는 1870년 이후의 10년 동안에 무차별 수렵으로 거의 별종되었다. 한편 남서부의 아프치족과의 전투는 이 부족의 마지막 !장인 제로니모가 1885년에 사로잡힐 때 까지 질질 오래 끌었다.
인디언 문제에 관한 먼로행정부 이래의 정부 정책은 인디언들을 백인들의 변경 개척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 놓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인디언 보호 구역은 불가피하게 점점 더 작아지고, 좁은 공간에 인원을 더 많이 수용하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대우를 항의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서부에서 살았던 동부인인 헬렌 헌트 잭슨은 1881년에 <불명예로운 한 세기>(A Centry of Dishonor)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인디언들이 처한 곤경을 극적으로 표현하여 이 나라의 양심에 와닿게 했다. 대부분의 개혁자들은 인디언들이 지배적인 문화에 동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방정부는 인디언 젊은이들에게 백인들의 가치관과 신념을 심어주기 위한 기도에서 펜실베이니아주의 칼리일에 학교를 세우기까지 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지금까지 낳은 가장 우수한 운동선수라고 간주하는 짐 터르프가 20세기 초에 명성을 날린 것도 그가 이 학교에 재학중이었을 때였다.)
1887년에 (헨리 로렌스 도우즈가 제안한) '도우즈법'은 미국의 인디언정책을 뒤엎어 놓았는데, 이 법률은 대통령이 인더언 부족들의 전용지를 나누어주고, 인디언 세대주마다 65헥타르의 토지를 분배할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할당된 토지는 25년 동안 이를 정부에 信託하고, 이 기간이 끝나면 소유자가 완전한 권리와 시민권을 차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분배되지 않고 남아있는 토지는 정착민들이 이를 구입할 수 있게 하였다. 제 아무리 선의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이 정책은 재난을 몰고 온 정책이었음이 밝혀졌다. 이 정책은인디언 토지에 대한 가일층의 약탈을 가능하게 했으며, 인디언 부족들의 공동생활체 조직을 파괴함으로써 그들의 전통 문화를 가일층 와해 시켰기 때문이다. 1934년에 미국의 인디언 정책은 '인디언 재조직법'에 의해 다시 반전되었는데, 이 법률은 인디언 보호 구역 안에서의 그들의 부족적 및 공동체적 생활의 영위를 보호하고자 기도했다.
19세기의 마지막 10년은 미합중국에게는 제국주의적 팽창의 시기였는데, 미국이 대서양, 태평양 그리고 중앙 아메리카에 걸쳐 폭넓게 산재한 지역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했거나 때로는 이들 지역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합중국은 유럽제국들을 상대했던 자신의 투쟁과, 자신의 독특한 민주적 발전의 역사 때문에 유럽의 경쟁 상대국들과는 상이한 노선을 따랐다.
19세기 말엽의 미국의 팽창주의의 기원은 여러 가지 상이한 것들이었다. 구제적으로는 이 시기는 유럽 강대국들이 앞다투어 아프리카 대륙의 분할에 나섰고, 새로운 경쟁상대인 일본과 함게 아시아에서의 영향력과 통상의 증대를 경쟁하던 시기였다. 디어도어 루스벨트, 헨리 캐봇 로지 및 이라이휴 루트 같은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포함하는 많은 미국인들은 미국 자체의 권익을 안전히 보호하기 위해서는 미국은 경제적 영향권도 역시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같은 견해는 강력한 해군 로비단의 찬성을 얻었는데, 이 로비단은 미국의 경제적 및 정치적 안보에 필수적인 함대의 증강과 해외항구망의 설치를 요구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처음에는 미국의 아메리카대륙 안에서의 팽창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명시된 운명" 독트린이, 이번에는 미국이 서반구와 카브리해 지역에, 또한 태평양 너머 전세계에 걸쳐 영향력을 뻗히고 미국의 문화를 전파시키는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되살아났다.
동시에 북부의 민주당원들과 개혁의 의지가 강한 공화당원들의 다양한 연합 세력으로부터 나오는 반제국주의 목소리는 여전히 컸고 꾸준했다. 그 결과 "아메리카제국"을 이룩하려는 노력은 일관성없이 조금씩 이루어졌고, 그나마 찬성과 반대의 상반된 반응을 일으켰으며, 식민지 통치는 정치적 통제보다는 통상과 경제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둘 때가 흔히 있었다.
미국이 대륙의 국경 너머에서 처음으로 손댄 모험적 사업은 1876년에 아이누족과 기타 원주민들 만이 드문드문 살고 있던 앨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구입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윌리엄 스워드 국무장관이 취한 앨래스카 구입 조치에 무관심했거나 분개했는데, 앨래스카는 "시워드가 저지른 어리석은 짓"이라거나 "시워드의 냉장고"로 널리 호칭되었다. 그러나 30년 후의 앨래스카의 클론다이크강 강변에서 금이 발견되자 수많은 미국인들이 북쪽으로 앨래스카를 찾아갔고, 그곳에 항구적으로 정착한 사람도 많았다. 앨래스카가 1959년에 미국의 49번째 주가 되자 텍사스주를 제치고 합중국 최대의 州로 부상했다.
1898년에 일어난 미국-스페인 전쟁은 미국 역사에 한 전환점을 가져왔다 이 전쟁이 끝난 후 몇 년 안에, 미국은 카리브해역의 도서들과 멀리 떨어진 태평양 중부 해역의 기타 도서들에 대해, 그리고 더 멀리는 아시아 본토에 가까운 도서들에 대해 통제력이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1890년대에 와서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는 신세계에 있었던, 한때는 방대했던 스페인 식민제국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존재였던 반면, 필리핀군도는 태평양에 존재하는 스페인 세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스페인과의 전쟁이 발발한 데에는, 스페인의 독립 요구에 대한 미국민의 동정심,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강경외교정책"을 표방하거나, 국수주의적이고 선동적인 언론에 자극받은 미국내의 국가적 자기주장의 새로운 정신 등의 세가지 주요원인이 있었다.
1895년, 모국 스페인의 폭정에 대해 쌓여 가던 쿠바 주민의 분노는 독립전쟁으로 폭발했다. 미국은 이같은 봉기의 진전 상황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주시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쿠바인들에게 동정했으나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중립을지키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3년 후인 매킨리 행정부 기간에 아바나항에 정박중이던 미국 군함 메인호가 아직도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 파괴되었다. 250명 이상이 살해되었고, 선동적인 신문 보도에 의해 심화된 분노의 폭발은 전국을 휩쓸었다. 매킨리 대통령은 얼마 동안은 평화를 유지하고자 노력했으나, 몇 달 안가서 개입의 지연이 무익하다고 생각한 끝에 무력 개입을 건의하게 되었다.
스페인과의 전쟁은 속전속결적이었다. 전쟁이 계속된 4개월 동안에 미국은 단 한번도 이렇다할 패전을 당하지 않았다. 전쟁 포고 1주일 후, 당시 홍콩에 있었던 조지 듀이 제독은 6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소함대를 이끌고 필리핀으로 향했다. 그가 받은 명령은 필리핀에 기지를 둔 스페인 함대가 미국 해역에서 작전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었다. 그는 정박중인 스페인함대의 전체 선박을 공격하여, 단 한명의 미국인의 생명도 희생시킴이 없이 이 함대를 격파했다.
한편 쿠바에서는 미군 부대는 산티아고 부근에 상륙하여, 일련의 신속한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산티아고항에 포격을 가했다. 4척의 스페인 철갑해양함이 산티아고에서 달려 나왔으나 몇 시간 후에는 격파당하여 폐선이 되고 말았다.
산티아고를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보스턴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기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국기가 휘날렸다. 신문사들은 쿠바와 필리핀에 특파원을 보냈으며,그들은 이 나라의 새로운 영웅들의 명성을 대서특필했다. 그 중에서 중요한 인물들은 마닐라에서 명성을 떨친 조지 듀이와 쿠바에서 전투에 참여하고자 자신이 모병한 지원병의 기마연대인 "라프 라이더즈"(거칠은 기마대)를 지휘하기 위해 해군차관 자리를 사임한 디어도어 루스벨트였다. 스페인은 곧 강화를 제의했고, 1898년 12월 10일에 체결된 강화조약을 통해 쿠바가 완전히 독립할 때까지 미국이 임시로 점령하고 있도록 쿠바를 미국에 이향했다. 이외에도 스페인은 푸에르토리코와 괌도를 전쟁 배상금 대신 미국에 할양했고, 2,000만 달러를 받고 필리핀을 미국에 내주었다.
해외에 영토를 갖는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 결과 새로운 영토들의 주민들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정치 체제인 민주적 자치체제를 향해 나아가도록 고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필리핀 점령의 첫 10년동안에 필리핀의 무력 독립운동을 진압하면서 자신이 경험해서 잘 알고 있는 식민 통치의 역할을 수행했다. 필리핀 사람들은 1916년에 입법부의 상하원 의원을 선출할 권리를 획득했고, 1936년에는 폭넓은 자치제의 필리핀 연방이 수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6년에 필리핀은 완전한 독립을 획득했다.
하지만 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필리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일어낫던 해에는 또한 하와이 군도와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섰던 하와이와의 접촉은 주로 선교사와 비정기적으로 하와이를 찾아가는 무역상들을 통한 접촉이었다. 하지만 1865년 이후에는 미국인들이 하와이 군도의 자원을-주로 사탕수수와 파인애플을-개발하기 시작했다. 1893년에 왕에 충성하는 하와이 정부가 외국의 영향력을 종식시키려는 의향을 발표하자, 미국 실업인들은 영향력이 강한 하와이 사람들과 합세하여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고, 이 새로운 정부는 하와이를 미국에 합방하도록 미국에 요청했다.
미국 병사의 동원과 식민 통치의 아이디어에 반대하는 미국내의 광범한 항의 때문에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의회는 처음에는 이 합방 요청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미국-스페인 전쟁에 의해 생겨난 국수주의가 고조됨에 따라 의회는 이에 부응하여 1898년 7월 하와이 군도를 미국에 합방할 것을 압도적 다수로 결의했다. 이렇게 해서 진주만에 중요한 해군 기지도 획득하게 되엇다. 1959년에 하와이는 미합중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쿠바는 1902년 미군이 쿠바로부터 철수하자 명목상의 독립을 획득했다. 그러나 미군은 公共질서를 보존하기 위해 개입하는 권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1934년 이 구너리를 포기할 때까지 3회에 거쳐 이 권리를 발동하여 개입했다. 하지만 쿠바가 완전히 독립한 후에도 미국의 경제적 및 정치적 영향력은, 1959년에 피덱 카스트로가 정부를 전복시켜 소련과 긴밀한 유대를 맺은 마르크스주의 정권을 수립할 때까지 여전히 강력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미국은 1902년 쿠바의 관타나모만에 설치한 해군기지를 계속 유지했다.
쿠바 동쪽에 있는 섬 푸에르토리코는 쿠바와 필리핀이 밟은 것과 유사한, 민주적 체제를 수습하는 과정을 밟았다. 1917년 미국 의회는 푸에르토리코인들에게 그들의 의회의원 전원을 선출하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같은 권리를 부여한 법률은 푸에르토리코에게는 (쿠바와 필리핀과는)상이한 진로를 마련했는데, 이 섬을 공식적으로 미국 영토로 만들었고, 더 중요하게는 푸에르토리코인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했던 것이다. 1950년 미국 의회는 푸에르토리코에게 자신의 장래를 결정할 완전한 자유를 부여했다. 푸에르토리코 시민들은 1952년에 실시된 국민투표를 통해 미국의 주가 되거나 완전히 독립하는 길을 거부하고, 대신 미국의 연방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많은 푸에르토리코인들이 미국 본토에 정착했는데, 푸에르토리코인들은 미국 본토에 자유로이 올 수 있고, 또 정착한 본토에서는 미합중국의 기타 시민이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모든 민권은 물론 정치적 권리도 갖고 있다.
스페인과의 전쟁을 계기로, 파나마를 횡단하여 양대양을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는 미국의 관심이 되살아났다. 해로를 통한 무역을 위한 그같은 운하의 유용성은 세계의 주요 상업국들에 의해 오래 전부터 인식되어 왔다. 프랑스는 19세기 말엽 이 운하를 파기 시작했었으나 이에 수반하는 난관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는 카브리해와 태평양을 다같이 세력권에 넣은 강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유사시에 군함들을 한쪽 대양에서 다른쪽 대양으로 보다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는 운하의 군사적 필요성을 인식했다.
20세기 초두에 지금의 파나마 지역은 콜롬비아의 한 북부주였다. 1903년 콜럼비아의회가 미국에게 운하를 건설하고 이를 운영하는 권리를 부여하도록 하는 조약 초안의 비준을 거붛자, 성미가 급한 일단의 파나마인들이 미국 해병대의 지원을 받고 반란을 일으켜, 콜롬비아로부터의 파나마 독립을 선언했다. 모국에서 이탈한 이 나라는 디어도어 루스켈트 대통령에 의해 즉각 승인되었다. 그 해 11월에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파나마는 1,000만 달러와 연간 (파나마 운하) 임대료 25만 달러를 받는 대가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16킬로미터 폭의 파나마 지대를 영구조차지로 미국에게 임대했다. 콜롬비아는 후에 2,500만 달러를 부분적인 포상금으로 받았다.(이로부터 75년 후인 1977년에 미국과 파나마 두 나라 사이에 협상된 파나마 운하조약에 따라 이 운하는 서기 2000년에 가서는 파나마의 주권 아래로 되돌아갈 것이다.)
1914년의 파나마 운하 전성은 조지 W. 고우달즈대령이 지휘한 토목공사가 거둔 주요한 승리였고, 한편 열대 밀림의 말라리아와 황열병의 정복은 예방의학의 탁월한 업적이었다.
중남미 기타지역에서 미국은 단속적으로 개입하는 패턴에 빠져 들어갔다. 예를 들어 1900년부터 1920년 사이에 미국은 6개 서반구 나라에 개입하였는데,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에 대해서는 보호제도를 수립했으며, 니카라과에는 정기적으로 해병대를 주둔시키기도 했다. 1876년 미국은 황제인 맥시밀리온을 지원하는 프랑스군을 철수시키도록 프랑스에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반세기 후, 멕시코혁명에 압력을 가해 영향을 미치려고 했던 군사 행동의 일환으로 미국은 1만 1,000명 병력의 군대를 멕시코 북부지역에 투입하여 반란자이자 무법자인 (혁명 주모자원의 일원) 프란치스코 "판초" 빌라를 생포하려고 노력했으나 허사에 그치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또한 미대룩 나라들 사이의 협력의 제도적 기반을 수립하는 중요한 역할도 수행했다. 1889년 국무장관 제임스 G.블레인은 서반구의 21개 나라들이 분쟁의 평화적 해결 보다 긴밀한 경제적 유대를 위한 한 기구에 가입할 것을 제안햇다. 1890년에 열린 첫 범미대륙회의에서 초기에는 범미연맹(Pan American Union)으로 알려졌고, 오는날에는 미주기구(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로 알려진 항구적인 기구가 탄생했다.
더욱이, 후에 등장한 허버트 후버 행정부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는 중남미 나라들에 미국이 개입하는권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루스벨트의 "미린정책"은 비록 이 정책이 미국과 중남미 나라들 사이의 긴장을 종식시킨 것은 절대로 아니었지만, 초기에 미국이 개입하고 일방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생겼던 (그 지역 주민들의 미국에 대한) 악의를 많이 해소시키는 것을 도왔다.
필리핀에서 새로운 기반을 수립했고, 하와이에서 견고한 기반을 다진 20세기 초두의 미국은 중국과의 활발한 무역을 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한 이래, 여러 유럽 나라들은 중국으로부터 해군 기지와 조차지를 얻어냈고, 중국에 영향권을 수립했다. 유럽 나라들은 또한 인접 지역에서 철도를 부설하고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투자하는 배타적인 권리는 물론, 독점적인 통상권까지 확보했다.
아시아와의 초기의 외교관계에서, 미국정부는 모든 나라들이 동등한 통상 특권을 가질 것을 항상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 대외정책상의 이상주의는 극동에서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과 경쟁하려는 욕망과 갈등을 빚었다. 1899년 9월 국무장관 존 헤이는 관계강국들에게 각서를 보냈는데, 그 결과 중국에서의 모든 나라에 대한 "문호개방"의 원칙에-즉 유럽 강국들이 관장학 hdlt는 지역들에서의 (동일한 관세, 입항세 및 철도 요금 등을 포함하는) 통상기회의 균등 원칙에-합의를 보았다. "문호개방"원칙은 이에 내포된 이상주의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식민지를 억지로 빼앗을 필요없이 식민지의 이점을 손에 넣기 위해 이용되는 교묘한 외교적 수단이 되었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중국인들은 외국인들을 습격했다. 그 해 6월 暴徒들은 북경을 점령하고 이곳의 외국공관들을 공격했다. 헤이 국무장관은 즉각, 미국은 중국의 영토권이나 행정권에 대한, 또는 "문호개방"정책에 대한 그 어떤 방해에도 반대한다고 유럽 강국들과 일본에 발표했다. 일단 폭동이 진압되자, 미국의 계획을 수행하고 엄청난 손해배상으로부터 중국을 보호하는 데는 헤이의 수완이 절대로 필요했다. 그러나 그 해 10월 영국과 독일은 다시 한번 문호개방 정책을 준수하고, 외세의 지배하에 있을 망정 중국의 독립보전을 존중할 것을 다짐했고, 다른 나라들도 이에 따랐다.
1920년대까지 미국의 일본과의 관계는 중국과의 관계와 비슷한 패턴을 따랐다. 1907년 디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인 노무자들과의)경쟁에 대한 미국 노무자들의 불안을 해소시키기 위해 일본정부에 대해 노무자의 미국 이민을 임시로 중단하도록 설득했다. 이런일 말고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접어든 기간에 일본인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는 따뜻했고 평온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일본과의 흔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던 것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노일전쟁(1904-1905)을 중재했던 때인데, 이때 그는 독일과 프랑스에 대해 러시아에 편들어 개입하여 일본에 적대하지 말도록 경고했다. 루스벨트는 이 전쟁의 강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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