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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지도 펼쳐 보고 미국 여행 하자.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지도 검색 블로그)
by 미국 여행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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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민들의 첫째가는 일은 사업이다"
-- 캘빈 쿨리지, 1925.


전쟁과 중립권

1914년 유럽에서의 전쟁 발발은 당시의 미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당초에는 그 전쟁이 미국에게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그 전쟁이 미국에게 주는 경제적 및 정치적 영향은 급속하고도 깊었다. 1915년에 이르러, 경미한 불황에 빠져 있던 미국 산업은 서방 동맹국들로부터의 군수품 주문으로 다시 번영하고 있었다. 교전 당사국 쌍방은 미국민들의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선전책을 이용했다. 제3자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은 외국 태생의 양부모를 가지고 있거나, 두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외국 태생인 부모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과 독일은 공해상의 미국 선박의 항해를 방해하는 일을 했으며, 이로 해서 우드로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신랄한 항의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과 독일간의 분쟁은 점점 더 커져서 불길한 징조를 보이게 되었다.
1915년 2월 독일 군부 지도자들은 영국 제도 연해의 모든 상선 해운에 공격을 가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미국은 중립국으로서의 미국의 전통적인 권리, 즉 공해상에서 무역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윌슨 대통령은 경고했다. 이것은 독일과 영국이 함께 하지 않은 중립권 견해였다. 윌슨 대통령은 미국 선박들이나 미국민들의 인명의 손실에 대해 미국은 독일에게 "엄격한 문책"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후 1915년 봄에 미국인 128명을 포함하여 승객 약 1,200명을 태우고 있던 영국 기선 루시태니아호가 격침되었을 때, 미국민들의 분노는 격렬한 흥분상태에 이르렀다.

미국의 선전포고를 피하고 싶었던 독일은 독일 잠수함 선장들에게, 설사 항해 선박들이 적기를 게양하고 있을지라도 그들에게 발포하기 전에 경고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8월 19일 영국 기선 애러빅호가 경고 없이 격침되었을 때, 이러한 명령은 무시되고 말았다. 1916년 3월 독일 잠수함 수병들이 프랑스 선박 시섹스호를 어뢰로 공격하여 미국인 5, 6명이 부상을 당했다. 윌슨 대통령은 독일이 잠수함 전법을 포기하지 않으면 미국이 단교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독일은 (그 전법을 포기하기로) 동의했다.

그 결과로, 윌슨은 그의 정당이 내건 "그는 우리들로 하여금 전쟁을 모면하게 했다"는 슬로건에 얼마간 힘입어 그 해에 대통령으로 재선될 수 있었다. 1917년 1월까지만 해도, 윌슨 대통령은 상원에서의 연설에서 "승리없는 평화"를 요구하고, 이것은 지속될 수 있는 유일의 종류의 평화라고 말했다.


미국의 제 1차 세계대전 참전

1917년 1월 22일 독일정부는 제한 없는 잠수함전을 재개하겠다고 통고했다. 4월에 5척의 미국 선박이 격침되었을 때,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했다. 즉시 미국정부는 군사 자원 산업, 노동력, 그리고 농업 등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연합국이 승리하기 직전인 1918년 10월에 175만 명을 웃도는 미군이 프랑스에 배치되어 있었다.

영국이 독일 잠수함대의 봉쇄망을 깨뜨리는 일을 돕는 일에서 미국 해군은 매우 중요했으며, 1918년 여름 오랜 동안 예측되었던 독일 측 공격이 시작되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새로 도착한 미군 부대들은 존 J. 퍼싱 장군 지휘 하에 지상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예컨대, 11월에 미군은 자만하고 있던 독일의 '힌덴부르크 선'을 분쇄한 '모이제-아르곤느 대공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윌슨 대통령은 연합국들의 전쟁 목적을 명백히 밝히고, 이 전쟁은 독일 국민들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독재정부에 대항해서 수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조기 종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공정한 평화를 위한 기초로서 1918년 1월에 미국상원에 제출된 그의 유명한 '14개항'은 비밀 국제협정의 포기, 공해의 자유의 보장, 국가 간의 관세장벽의 제거, 각 국의 군축 그리고 식민지에서의 관계 주민들의 이익을 정당하게 고려하여 식민지 측 요구를 조정하는 일 등을 요구했다. 이 밖의 다른 항목들은 유럽 국민들의 자치와 방해받지 않는 경제발전의 보장을 추구했다. 제14항은 윌슨 대통령의 평화안, 즉 "대국들에게나 소국들에게나 똑같이 정치적인 독립과 영토보전을 서로 보장할"수 있는 국가 간의 연합체의 형성안의 기조를 이루었다.

1918년 여름 독일군이 패배하여 후퇴하고 있었을 때, 독일정부는 그 '14개항'을 기초로 하여 협상하자고 윌슨 대통령에게 간청했다. 윌슨 대통령은 연합국들과 협의했으며, 연합국들은 독일 측 제안에 동의했다. 11월 11일 휴전조약이 체결되었다.


국제연맹

최종조약이 "협상에 의한 강화"의 성질을 갖게 되는 것이 월슨 대통령의 희망이었지만, 그는 전쟁이 불러일으킨 격정으로 해서 연합국들이 가혹한 요구를 하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 점에서 그는 옳았다. 민족자결의 개념은 실행 불가능한 것임이 입증되었다. 평화를 위한 자기의 최대 희망인 국제연맹이 연합국들에게 자기가 여러 가지 양보를 하지 않는 한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윌슨 대통령은 파리의 강화협상 기간 중에 민족자결 문제, 그리고 이 밖의 특정 사항들에 관해서 양보했다. 그러나, 그는 라인란트 전역을 독일로부터 떼어내자는 조르즈 클레망소 프랑스 수상의 요구에 저항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가 자아르 분지를 병합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이 독일에게 전쟁 배상의 무거운 부담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전쟁 비용 전액을 독일에게 배상시키자는 제안은 좌절시켰다.

결국에 가서, 관대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위한 윌슨 대통령의 제안들은 국제연맹을 제외하고는 남은 것이 없었으며, 윌슨 대통령은 자기 자신의 나라까지도 국제연맹 가입을 일축하는 마지막 아이러니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당시 윌슨 대통령은 판단을 정확하게 하지 못한 것이 일부 원인이 되어 강화안원단 편성에서 야당인 공화당의 한 주요 인사를 파리에 데리고 가지 않은 정치적 실수를 했다. 그가 미국의 국제연맹가입을 호소하려고 귀국했을 때에도 그는 공화당이 우세했던 상원에서 비준을 얻기 위해 필요한 대수롭지 않은 양보마저도 거부했다.

워싱턴에서 패배한 윌슨 대통령은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미국민들에게 호소하였다. 고된 강화협상과 전시 대통령 직무 수행의 중압으로 해서 몸이 쇠약해진 그는 1919년 9월 25일 콜로라도주 푸에블로에서 뇌졸중을 일으켜 반신불수가 되었으며, 끝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1920년 3월 상원은 그 최종 표결에서 베르사이유 조약과 국제연맹 규약을 모두 거부했다. 그 결과로, 미국이나 러시아가 참가하지 않은 국제연맹은 허약한 기구로 남아 있게 됐다.

전쟁과 평화를 위한 도덕적 및 법적 근거에 대한 윌슨 대통령의 신념은 미국민들을 격려해왔었다. 그러나, 사건들이 이러한 낙관적인 기준에 따라 전개되지 않았을 때 윌슨 식 이상주의는 마침내 환멸을 자아냈으며, 미국은 고립주의로 빠져 들어갔다.


전후의 사회적 불안

대전에서 평화로 접어드는 이행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소란스러운 시기였다. 1917년 봄에 유럽 전역에서 급속히 만연되던 유행성 독감이 1918년 봄에 미국에서 창궐했다. 그 독감의 발생과 마찬가지로 그 독감은 1년 후에 원인 불명으로 사라지기에 앞서, 50만 명을 웃도는 미국인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대전 직후의 벼락 경기는 높은 기대를 갖게 했지만, 그 기대는 전후 경제가 정상상태로 되돌아가게 되자, 재빨리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근로자들은 앙등일로의 생계비, 장시간의 근로시간, 동정심 없는 경영 등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1919년 한 해만 해도 400여만 명의 근로자들이 파업을 했다. 뿐만 아니라, 그 해 여름에 인종 폭동은 미국 남북부에서 모두 발생했다.

그러나 최대의 전국적인 반대와 염려를 도발한 사건이 2년 전에 미국 바깥에서 발생했었다. 즉, 1917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볼셰비키 혁명이다. 사기가 낮은 미국민들은 러시아에서 한 작은 도당이 정권을 장악했듯이, 한 도당이 미국을 장악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었다. 1919년 4월 미국의 체신 공무원들이 저명한 미국민들 앞으로 송부되는 약 40개의 폭탄들을 도중에서 가로챘을 때에 이러한 두려움은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났다.

미첼 파머 법무장관은 법무성 내에 방첩을 담당하는 한 국을 신설하고, 에드거 후버를 그 국장으로 임명했다. 후버 국장은 유명한 극렬분자들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하고 갖가지 단체들을 급습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국외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파머 법무장관의 무서운 경고로 해서 이른바 "적색 위협"은 계속 증폭되었지만, 이러한 위협은 실제로 현실화되어 나타나지는 않았으며, 1920년 여름에 이르러 미국민들은 미국이 무정부 상태가 될 위험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호경기의 1920년대

192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워렌 G. 하딩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은 대체로 국민들이 윌슨의 국제주의와 이상주의를 거절하는 최종적인 증거였다. 저널리스트인 윌리엄 앨런 화이트는 (당시의) "미국민들은 쟁점을 다루는 일에 지치고, 이념에 넌더리나고, 그리고 고매하게 되는 일에 싫증났다"고 설명했다.

1920년의 선거는 도한 미국 전역에서 여성들이 대통령 후보에게 투표한 최초의 대통령 선거였다. 1919년에 연방의회는 헌법 수정 제19조항을 주들에게 제출한 바 있었으며, 이 헌법 수정 제29조항은 다음 해에 여성들이 투표할 수 있도록 때늦지 않게 비준되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 나라의 도시 지역에 있어서의) 도처에서 보이는 번영을 유지하는 일에서, 1920년대의 미국정부 정책은 현저하게 안보주의적이었다. 그 정책은 정부가 민간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만 한다면, 번영은 마침내 미국의 나머지 인구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까지 스며들게 될 것이라는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공화당 정책의 목적은 미국산업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는 데에 있었다. 1922년과 1930년의 관세법들은 관세장벽을 새롭게 높임으로써 미국의 제조업자들이 분야마다 차례로 국내시장을 독점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 이들 관세법들의 두 번째 것인 1930년의 '스무트-홀리법'은 관세율을 너무나 높였기 때문에, 1,000여 명의 경제전문가들이 후버 대통령에게 그 관세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진정했다. 그 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다른 나라들이 값비싼 보복을 할 것이라는 그 경제전문가들의 예언을 확증했다. 동시에, 연방정부는 고율의 소득세가 부자들의 새로운 기업투자를 막는다는 앤드루 멜론 재무장관의 소신을 반영시켜서, 감세계획을 시작했다. 연방의회는 192년부터 1929년까지의 사이에 통과된 일련의 법안들에서, 전시 소득세, 초과 소득세, 법인세 등을 즉시 폐지하거나 격감시켜야 한다는 멜론 장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고집 센 버몬트주 태생의 부통령으로서 1923년 하딩 대통령이 사망한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캘빈 쿨리지는 "미국민들의 첫째가는 사업"이라고 선언했으며, 192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당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쿨리지 대통령은 공화당의 보수주의적인 경제정책을 고분고분 따랐지만, 운 나쁜 하딩 대통령보다는 훨씬 유능한 행정관이었다. 하딩 대통령의 행정부는 하딩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 몇 달 동안 부패 비난으로 해서 곤경에 빠져 있었다.

1920년대 내내, 민간기업은 건설 융자, 이윤 많은 우편배달 청부계약, 그리고 기타 간접적인 보조금 등을 포함하여 상당한 혜택을 받았다. 예컨대, 1920년의 운수법은 대전 중에 정부의 통제 하에 있던 이 나라 철도들에게 민간경영을 이미 복구시켜놓고 있었다. 그리고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정부가 소유하고 있었으며, 대체로 정부가 운영하고 있던 미국 상선대는 민간업자들에게 매각되었다.

그러나 공화당의 농업정책에 대한 비판은 점점 많아졌다. 왜냐하면 농민들은 1920년대의 번영에서 가장 작은 몫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1900년부터 1920년까지의 기간은 미국 농산물 생산을 강력하게 자극한, 전례가 없는 전시 미국 농산물 수요로 해서 농민들이 전반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농산물 가격은 앙등일로에 있던 시기였다. 농민들은 오랜 동안 휴한지로 남아 있거나, 아니면 과거에 전혀 경작한 적이 없는 보잘것없는 땅들을 개간했었다. 미국 농산물 가격이 올라감에 따라, 미국 농민들은 과거에 구입할 수 없었던 상품과 기계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0년 말에 이르러 전시 수요가 갑자기 없어지게 되자, 소맥(밀) 및 옥수수와 같은 주요 곡물을 생산하는 농업은 급격히 쇠퇴했다. 미국 농업의 불황을 초래한 요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요인은 외국시장의 상실이었다. 미국 농민들은 미국 자체의 수입관세로 해서 미국이 상품 수입을 하고 있지 않은 외국지역에서 미국 농산물을 쉽사리 판매할 수는 없었다. 세계시장의 문호는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1930년대에 전 세계에 전반적으로 대공황이 들이닥쳤을 때, 이 공황은 이미 취약해져 있던 미국의 농업을 결단냈다.


이민 문제로 생긴 긴장

1920년대의 미국의 이민 제한은 미국정책의 중요한 변화를 나타냈다. 미국의 이민은 19세기 말엽에 폭증했으며 20세기 초엽에는 최고도에 달했다. 예컨대, 1900년부터 1915년까지의 기간 중에 1,300만 명을 웃도는 이민들이 미국으로 들어왔는데, 남유럽과 동유럽으로부터 많이 들어왔다. 이들의 대부분은 유태인들이거나, 아니면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이것은 주로 앵글로 색슨족(영국계 미국인) 및 프로테스탄트였던 많은 옛 가계의 미국인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이들의 일부는 새로 들어온 이민들이 낮은 임금의 일자리를 위해 경쟁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 분개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새로 들어온 이민들이 구(舊)세계의 관습을 유지하고, 흔히 도시의 고립된 특정 민족문화 내에서 생활하면서, 보다 광범위한 미국문화 속으로 동화되어 들어가는 일에 저항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러했다.

1차대전 후의 이러한 이민 폭증의 결과로, 미국 토착문화 보호주의자들의 호소력은 강화되었다. "100퍼센트 미국풍"을 요구하는 재조직된 3K단(큐클럭스클랜)이 나타났다. 재건기(1865년-77)의 3K단과는 다르게, 이 새로운 3K단은 그 단원 자격을 미국태생의 백인 프로테스탄트로 제한했으며, 가톨릭 신자, 유태인 이민, 아프리카계 미국인 등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 3K단은 자기들의 적을 재정의함으로써 호소 대상 지역을 북부 및 중서부의 일부 지역으로까지 넓혔는데, 한 동안 그 단원은 증가했다.

반(反)이민 감정은 일련의 법안들을 통해서 법제화되어 마침내 1924년의 이민쿼터법과 1929년의 이민법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법들은 연간 이민수를 15만 명으로 제한하고, 그것을 국민들에게 1920년에 이미 미국에 와 있는 그들 나라 사람들의 수에 비례하여 배정했다. 이러한 이민제한 조치의 하나의 결과로 미국 토착문화 보호주의 단체들의 호소력이 줄어들었으며,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 또한 이민 격감현상을 초래한 한 원인이었다.


문화의 충돌

도시 세속 사회가 점점 더 옛 시골풍의 전통과 충돌하게 됨에 따라, 일부 미국민들은 가정과 종교에 초점을 두면서 1920년대의 현대 생활의 성격에 불만을 표명했다. 예컨대, 프로 야구 선수로부터 복음 전도사로 전향한 빌리 선데이와 같은 기독교 원리주의 전도사는 단순한 생활을 하던 과거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출구를 제공했다.

아마 이러한 갈망을 가장 극적으로 나타낸 것이 기독교 성서의 해석과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서로 싸움 붙인 기독교 원리주의 운동이었을 것이다. 1920년대에 진화론을 가르치는 일을 금지하는 법안들이 중서부 및 남부의 주의회들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믿어지지 않게도, 연로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옹이 이 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그는 진화론은 "정신적인 갱생의 필요성이나 가능성을 부정함으로써 모든 개혁을 저지한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반(反)진화론적 행동주의와 자기의 초년의 급진주의적인 경제 개혁안을 교묘하게 양립시켰다.

이 문제는 1925년 테네시주에서 절정에 달하게 되었는데, 당시 미국 공민자유권연맹(ACLU)은 이 나라의 최초의 진화론금지법에 도전했다. 젊은 고교 교사 존 스토우프스는 생물학 수업 시간에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세간의 이목을 강하게 끈 이 사건에서, 주를 대표하고 있던 브라이언옹은 피고측 변호인 클래런스 대로우의 심문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스코우프스 교사는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판례상의 법절차 미비 관계로 석방되었으며, 브라이언옹은 이 재판이 끝난 후 2,3일 만에 사망했다.

중요한 문화 충돌의 또 하나의 예--이것은 이 나라에 훨씬 더 큰 결과를 초래한 문화 충돌이었음--는 금주법이었다. 거의 100년에 걸친 논의 끝에, 알코올성 음료의 제조, 판매 또는 운송을 금지하는 헌법 수정 제18조가 1919년에 시행되었다. 금주법은 그 제정 목적이 술집과 주정꾼을 미국사회에서 없애는 데에 있었지만, 예상외로 "스피키지"(무허가 술집)라고 불리는 불법 음주 장소들과, "부우트레깅"(주류밀매)으로 알려진 주류 운송행위와 같은, 점점 더 이윤을 많이 올릴 수 있는 형태의 범죄 행위들을 조성하는데 이바지했다. "고상한 실험"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던 이 금주법은 1933년에 폐지되었다.

기독교 원리주의의 부활과 금주법과 같은 서로 공통점이 없는 현상들을 연계시키는 공통의 실은 어느 의미에서, '재즈시대', 불절제의 시대, '광란의 1920연대' 등과 같이 갖가지로 일컬어진 당시의 사회적 및 지적 혁명에 대한 반동이었다. 특히 대학 캠퍼스에서의 미국 젊은이들의 매너, 도덕관, 유행 등의 변화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많은 지성인들 가운데서, 미국생활에 있어서의 허위와 황금만능주의를 가차없이 비난하고 있던 저널리스트이자 평론가 H.L. 멘큰은 영웅이 되었다. 작가 F. 스코트 피츠제럴드는 그의 단편 소설들과 그리고 The Great Gatsby와 같은 장편 소설들에서 1920년대의 정력, 소동, 환멸 등을 잘 묘사했다.

피츠 제럴드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잃어버린 세대)이라고 일컬어진, 소수이지만 영향력 있는 운동을 하고 있던 작가들 및 지성인들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제1차 대전의 대량 학살로 해서 충격을 받았으며, 이들이 인식한 미국생활의 물질주의와 정신적 공허를 불만으로 여겼다. 이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예를 들어 이들의 가장 유명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은--유럽으로 가서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아프리카계 미국민들도 이러한 국민적인 자성의 정신에 동참했다. 1920년부터 1930년까지의 기간 중에, 남부로부터 북부로 대량적인 흑인 이주가 있었으며, 1015년부터 1916년까지의 기간 중에 그것은 최고도에 달했다. 이주한 흑인들의 대부분은 농촌인 남부보다 일자리를 얻을 기회와 개인적인 자유가 더 많은 디트로이트시(市) 및 시카고시(市)와 같은 도시 지역에 정착했다. 1910년 흑인 저술가 W.E.B. 듀보아와 이 밖의 지식인들이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NAAP)를 창설했는데, 이 협회는 중요도가 점점 커지게 될 전국적인 목소리를 미국흑인들이 얻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동시에, "할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미국흑인 문예운동이 나타났다. 랭스턴 휴즈 등과 같은 작가들은 미국 생활의 현실을 다루기는 했지만, "로스트 제너레이션"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중류층의 가치관과 재래식 문학 형식을 거부했다.


세계대공황

1929년 10월 주식시세는 폭락했으며, 보통주의 액면 가격의 40%가 날라갔다. 그러나 주식시세가 폭락한 후에도 정치가들과 산업 지도자들은 이 나라의 경제에 대하여 계속 낙관적인 예언을 했다. 하지만 공황은 깊어졌고, 신뢰도 사라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평생 모아둔 저축을 잃었다. 1933년에 뉴욕 증권거래소의 주식 가격은 1929년 당시의 최고 가격의 5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상점들은 문을 닫았으며, 공장들은 폐쇄되고 은행들은 파산했다. 농가 소득은 약 50%나 줄어들었다. 1932년에 미국민 약 4명 중 1명은 실업자였다.

문제의 핵심은 이 나라의 생산능력과 국민들의 소비능력의 불균형이었다. 대전 중과 대전 후의 생산 기술의 대혁신으로 산업의 생산고는 미국 농민들과 임금 근로자들의 구매력 이상으로 증가되었다. 건전한 투자 가능성을 훨씬 넘어서 증가되고 있던 부유층 및 중류층의 저축 자금은 주식이나 부동산의 광적인 투기의 자금으로 끌려 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증권시장의 붕괴는 몇 가지 폭발 현상 중의 하나에 불과했었데, 그 속에서 투기의 취약한 구조는 무너져버렸던 것이다.

1932년의 대통령 선거는 주로 세계 대공황의 원인과 가능한 구제책에 관한 논쟁이었다. 불운하게도 증권시장이 붕괴되기 8개월 전에 백악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산업의 수레바퀴를 다시 가동시키기 위해 지칠 줄 모르게 노력했었다. 위기가 증대되고 있는 동안에 뉴욕 주지사로서 이미 평판이 좋았던 그의 민주당 정적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대공황이 미국경제의 기저에 있는 결함들로 해서 생겼으며, 이 결함들을 1920년대의 공화당 정책들이 악화시켰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버 대통령은 미국경제는 근본적으로 건전하지만, 전 세계적인 불경기의 영향을 받아 흔들렸던 것이며, 세계적인 불경기의 원인은 대전때문이라고 응답했다. 이러한 논쟁의 배후에는 하나의 명백한 함축적인 의미가 있었다. 즉, 루즈벨트는 과감한 실험적인 구제책들을 위해서 연방정부의 권한을 사용할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후버 대통령은 주로 자연스러운 경제회복 과정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선거의 결과는 후버가 얻은 1,570만 표에 대하여 22,80만 표를 얻은 루즈벨트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미국은 바야흐로 새로운 경제적 및 정치적 변화의 시대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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