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자치정부를 가질 권리가 있다." -- 토마스 제퍼슨, 1790. |
아메리카 식민지 사람들은 독립전쟁에 성공함으로써 독립선언문에 표명된 자기들의 정치적 이상을 법적으로 구체화하고, 일부 불만 사항을 주헌법을 통하여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대륙회의는 1776년 5월10일에 벌서 “선거구민들의 행복과 안전을 가장 잘 도모할 수 있는” 정부를 수립하도록 식민지의 각 주에 종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식민주 중에는 이미 새 정부를 조직한 주도 더러 있었으며, 독립이 선언된 지 1년도 못되어 3개 주를 제외하고는 모든 주가 헌법을 기초했다.
이들 새 헌법에는 민주적 이념의 영향이 나타나 있었다. 그 어느 헌법도 과거와 과감하게 결별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식민 시대의 경험과 영국의 관행의 굳은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헌법마다가 또한 계몽철학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찬양되어 왔던 이상인 공화주의의 정신에 의해 고무되었다.
주헌법 기초자들의 첫째 목적이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확보하는 데에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권리가 침해당했기 때문에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과의 관계를 끊게된 것이다. 그래서 각 주의 헌법은 권리의 선언이나, 권리장전으로 시작하고 있다. 다른 모든 주헌법들의 모델이 된 버지니아주 헌법에는 국민주권, 관직의 교대제도, 선거의 자유, 그리고 기본적인 자유권의 세목--즉 적절한 보석과 인도적인 처벌, 배심에 의한 신속한 재판, 언론과 양심의 자유, 그리고 정부를 개혁하거나 바꿀 수 있는 다수파의 권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주들은 자유권의 목록을 확대하여 여기에 언론, 집회 및 청원의 자유의 보장을 추가했으며, 총기를 휴대할 권리, 인신보호영장제도에 의한 보호를 받을 권리, 주거의 불가침과 법의 평등한 보호를 받는 권리 등과 같은 규정을 포함시키는 일이 흔히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주헌법들은 정부를 행정부, 입법부 및 사법부로 나누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도모하게 하는 3권분립 체제에 충실하였다.
펜실베니아주 헌법은 가장 급진적이었다. 이 주에서는 필라델피아의 기술공,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변경개척자, 그리고 독일계 농민들이 지배적인 존재였다. 주대표자회의는 모든 남성 납세자와 그들의 아들을 투표할 수 있게 하고, 관직을 교대로 맡게 하고 (그 어떤 대표자도 7년 기간 중 4년 이상을 관직에 머물 수 없었다), 단원제 입법부를 설치하는 헌법을 택했다.
주헌법들에는 명백한 한계점들이 있었다. 인민의 천부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제정된 헌법들은 가장 기본적인 천부의 권리를--즉 평등을--모든 사람에게 확보해 주지는 않았다. 펜실베니아주 이남의 식민지들에서는 노예들로부터는 인간으로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배제했다. 여성들에게는 정치적 권리가 없었다. 그 어느 주도 보편적인 남성 참정권을 허용하려고는 하지 않았는데, 모든 납세자들이 투표하는 것을 허용한 주들(펜실베니아주 외에 델라웨아주, 노드캐롤라이나주 그리고 조지아주)에서조차도 공직자들은 일정한 액수의 재산을 소유해야 하도록 규정하였다.
영국과의 투쟁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태도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1754년에 지방 의회들은 자기들의 자치권의 조그마한 부분까지도 다른 기관에게, 심지어 자기들 자신이 선출한 기관에게 양도하는 것까지 거부함으로써 올바니연방안(Albany Plan of Union)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독립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상부상조하는 것이 효과적임을 알게 되자 개별적인 권한을 포기하는 데서 생기는 두려움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존 딕킨슨이 1776년에 ‘연합규약과 영속적인 연합(Article of Confederation and Perpetual Union)안을 제시했다. 대륙회의는 1777년 11월 이를 채택했고, 모든 州가 이를 추진함으로써 1781년부터 실시되었다. 이 규약에 의해 수립된 정부의 뼈대에는 약점이 많았다. 중앙정부에는 필요할 때 관세를 설정하고, 상행위를 규제하며,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이 없었다. 중앙정부에는 오직 중앙정부 만이 가질 수 있는, 국제관계를 통제하는 권한이 없었는데, 여러 주들이 외국과 독자적인 교섭을 하기 시작했다. 9개 주가 독자적으로 육군을 조직했으며, 몇몇 주들은 독자적으로 해군을 갖기도 했다. 괴상한 재화들이 잡다하게 많았으며, 주정부와 중앙정부가 발행한 온갖 지폐들은 그 가치가 급속도로 하락하였다.
독립전쟁 후의 경제적 어려움은 변화에 대한 요구를 촉진시켰다. 독립전쟁의 종식은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쌍방의 군대에 보급 물자를 공급했던, 그리고 영국의 상업 체제에 참여함으로써 얻는 유리한 조건을 잃게 된 상인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주들은 그들의 관세정책에서 미국의 물품에 특혜를 부여했는데, 그러나 이들 관세는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력한 중앙정부가 균일한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요구를 낳게 했다.
농민들이 독립전쟁에 이어 일어나 경제적 어려움의 고통을 어쩌면 가장 많이 겪었다. 농산물의 공급은 수요를 초과했고, 주로 채무가 많은 농민들 사이에 불안이 감돌았다. 그들은 저당 잡힌 자기들의 재산이 유실되는 일이 없도록 다짐해주는, 또 채무로 해서 투옥되는 일이 없도록 해주는 강력한 구제책을 바라고 있었다. 법원들에는 채무소송 사건이 가득 밀려 있었다. 1786년 여름 내내 몇몇 주에서 열린 주민대회와 비공식 회합에서는 주행정의 개혁을 요구했다.
1786년 가을 전 육군대위 다니엘 셰이즈의 지휘아래, 메사추세츠주의 농민 폭도들은 다음 주선거 때까지 군법원이 채무관계의 재판을 더 이상 하지 못하도록 힘으로 방해하기 시작했다. 1787년 1월 1,200명 농부들의 오합지졸 군대가 스프링필드에 있는 연방 병기차를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주로 장대와 갈퀴로 무장한 폭도들은 소수의 민병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때 벤자민 링컨장군이 보스턴으로부터 군을 이끌고 도착하여 남아있는 셰이즈 일당의 폭도들을 패주시켰고, 폭도들의 지도자는 버몬트로 도망했다. 정부는 폭도 14명을 체포하고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마침내 일부는 사면되고 다른 폭도들은 단기형을 복역한 후 석방되었다. 이 폭동이 실패한 후, 대다수가 폭도들에 동정적이었던 새로 선출된 주의회 의원들은 채무를 구제해 달라는 이들의 요구의 일부를 충족시켜 주었다.
독립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오래 전부터 해결되지 않고 있던 서부의 문제--복잡한 토지 문제가 수반된 영토확장의 문제, 모피 교역 문제, 인디언 문제, 정착 문제 및 속령의 통치 문제 등에 다시 직면해야 했다. 개척자들은 이 나라의 가장 기름진 땅에 유혹되어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내륙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1775년까지에는 수로를 따라 널리 흩어져 있는, 변경의 최전방 개척촌들에 수만 명이 살고 있었다. 산맥에 의해 분리되고, 동부의 정치적 중심지로부터 수백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사는 이들 개척민들은 자기들 자신의 정부를 수립했다. 모든 정착민들은 내륙의 기름진 강유역 울창한 삼림지대와 널따란 초원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리하여 1790년에 와서는 애팔래치아산맥 서쪽의 인구는 12만 명을 훨씬 넘었다.
독립전쟁 전에 몇몇 식민주들은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의 땅에 대해 흔히 이중 삼중으로 광범한 소유권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한 소유권을 내세우지 않았던 주에게는 이 기름진 땅이 공평하지 못하게 분배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메릴랜드주는 이들 후자의 대변인 격으로, 서부의 영토는 의회가 자유·독립 정부들에게 분할해 주어야 할 공유재산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안(案)은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1780년 뉴욕주는 솔선해서 서부영토 요구권을 합중국(중앙정부)에 양도했다. 1784년에는 가장 넓은 영토에 대한 요구권을 가졌던 버지니아주가 오하이오강 이북의 영토에 대한 요구권을 포기했다. 다른 주들도 그들의 영토 요구권을 포기했는데, 의회가 오하이오강 이북과 앨리게니 산맥의 모든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수백만 헥타르에 달하는 땅을 이렇게 공동의 소유로 하였다는 것은 국가의식과 통일의식이 존재하였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으며, 주권국가의 아이디어에 어떤 실질적 내용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같은 광대한 영토는 해결을 필요로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 문제는 연합규약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이 규약 아래, ‘북서영토’의 조직을 규정하는 제한된 자치제도(이는 1787년의 ‘북서부령(Northwest Ordinance)'에서 공포되었음)가 마련되었다. 시초에는 이 영토를 단일 행정 구역으로 하여 의회가 임명하는 지사와 판사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이 영토의 투표 연령에 달한 남자 주민의 수가 5,000 명에 달하게 되면 이 북서영토는 양원으로 구성된 입법부를 가질 수 있으며, 하원 의원은 주민이 직접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북서영토는 그 당시 투표권이 없는 대표를 의회에 보낼 수 있었다.
이 서부영토에는 3개 이상 5개 이하의 주를 두도록 되어 있었으며, 그 중 어느 주든 자유인인 주민의 수가 6만 명에 달했을 때에는 “모든 면에서 원래의 (13개) 주들과 동등한 조건으로” 연방에 가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 북서부는 민권을 보장했고 교육을 고무했으며, “상기 북서영토에는 노예제도나 자의에 의하지 않는 노역은 없음”을 보장했다.
이 새로운 정책은 식민지란 모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정치적으로는 종속적이고, 사회적으로는 열등하다는 옛날부터의 관념을 거부하였다. 그 관념은 식민지란 국가의 연장에 불과하며, 평등의 모든 혜택을 특전으로서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서 받을 자격이 있다는 원칙에 의해 대치되었다. 북서부령의 이 같은 개화된 규정들은 아메리카의 공유지정책의 기초를 다져놓았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 독립전쟁을 종결시켰던 강화조약인) 파리조약(Treaty of Paris)과 미국헌법이 기초될 때까지의 기간을 묘사하면서 주들이 겨우 “모래로 만든 줄”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썼다. 포토맥강 운선권을 둘러싼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 사이의 분규로 1786년 메릴랜드주 아내폴리스에서 5개 주의 대표자 회의가 열렸다. 대표자의 한 사람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상업은 다른 정치적 및 경제적 문제들과 너무 얽혀 있으며, 그 자리에 모인 국한된 대표자들만으로 다루기에는 사태가 너무 심각하다고 동료 대표자들을 설득했다.
해밀턴은 모든 주에 대해, 이듬해 봄 필라델피아에서 열리게 될 회의에 참가할 대표자를 임명하도록 촉구했다. 대륙회의는 처음에는 이 대담한 조치에 분개했으나, 버지니아주가 워싱턴을 대표로 선출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항의를 곧 중단했다. 그 다음 가을과 겨울 동안 로드아일랜드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선거가 실시되었다.
1787년 5월 필라델피아의 주의사당에서 열린 연방회의(Federal Convention)는 각사들의 집회였다. 각 주의 의회는 식민지 정부와 주정부, 대륙회의 법조계 및 군대의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들을 회의에 보냈다. 성실한 인격과 독립정쟁 중의 군사적 지휘 능력으로 해서 이 나라의 출중한 시민으로 인정되고 있던 조지 워싱턴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활동적이 대표들 중에서도 출중한 사람은 펜실베니아주의 두 대표였다. 즉, 중앙정부의 필요성을 명확히 간파한 유능하고 대담한 구버뉴어 모리스, 그리고 국가의 이상을 위해 지칠 줄 모르고 활동한 제임스 윌슨이었다. 버지니아주 대표는 제임스 매디슨이었는데, 그는 실제적이 젊은 정치가이며, 정치와 역사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동료의 말에 의하면, “근면하고 지성스러운 인물이며 ... 토론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나 가장 소상히 알고 있었다.” 매디슨은 오늘날 “미합중국 헌법의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다.
매사추세츠주의 대표는 유능하고 경험이 풍부한 두 젊은이, 루퍼스 킹과 엘브리지 게리였다. 코네티컷주 대표의 한 사람은 제화공으로부터 판사가 된 로저 샤먼이었다. 뉴욕주의 대표는 이 연방회의를 제안한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다.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던 대표는 미국공사로서 프랑스에서 근무하던 토마스 제퍼슨과, 역시 똑같은 임무로 영국에 가있던 존 애덤스였다.
연방회의는 연합규약 개정안을 기초할 권한이 부여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후일에 매디슨이 기술한 것처럼 대표들은 “자기들의 나라에 대해 사나이다운 확신을 갖고” 연합규약을 제쳐놓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수립하는 일을 추진해 나갔다.
그들은 두 가지 상이한 권력--즉, 반(半)독립적인 13개 주가 이미 행사하고 있는 지방 관할권과 중앙정부의 권한--을 조절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들은 중앙정부의 기능과 권한은 새로운 것이고 전체적이며 포괄적인 것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정의되고 진술되어야 하며, 한편 그 밖의 다른 모든 기능가 권한은 주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채택했다. 그러나 대표들은 중앙정부에게는 무엇보다도 실권을 가져야 하고 상거래를 규제하고 전쟁을 선포하며 강화를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대체로 받아들였다.
필라델피아에 모였던 18세기 미국정치인들은 정치에 있어서 권력이 균형 되어야 한다는 몽테스키외의 사상의 신봉자들이었다. 이 원칙은 식민지 시대의 경험으로 뒷받침되었으며, 이 원칙은 대부분 대표들이 익히 알고 있는 존 록의 저서로 해서 더욱 굳게 신봉되었다. 이러한 사상의 영향은, 정부에는 동등하고 대등한 3개 부가 설치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낳게 했다. 즉, 입법, 행정, 사법의 3부는 어느 한쪽이 타(他)부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잘 조화되고 균형이 잡혀야 했다. 대표들은 입법부나 영국의회처럼 양원제로 되어야 한다는 데에 견해를 같이했다.
이러한 사항에 대해서는 이 회의에 모였던 모두가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의견의 차이가 생겼다. 예를 들면 뉴저지주 같은 작은 주의 대표들은 연합규약 아래 행해진 주대표제에 따름으로써 중앙정부에서의 자기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는 개정 조치에 반대하였다.
다른 한편, 버지니아주와 같은 큰 주의 대표들은 인구 비례대표제를 주장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은 로저 샤먼이 의회의 한 원, 즉 하원에는 인구 비례 대표제를 적용하고, 다른 한 원, 즉 상원에는 각 주가 동일하게 대표를 보내는 안(案)을 제시할 때까지 끝없이 계속될 기세였다.
큰 주와 작은 주 사이의 대립은 마침내 이렇게 해서 해소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 계속해서 일어나는 문제마다 새로운 대립을 낳았고, 오직 새로운 타협안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었다. 북부주의 대표들은 각 주의 세금 몫을 계산할 때 노예도 포함시켜서 산정하기를 원했으나, 주가 하원에서 차지할 의석수를 (인구 비례로) 결정할 때는 노예를 계산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거의 이의 없이 채택된 타협안에 따라, 각 주의 하원 의석수는 주의 자유인인 주민의 수에 노예의 수의 5분의 3을 합친 인구에 비례하여 배당하게 되었다.
다니엘 셰이즈 일당이 일으켰던 농민 폭동에 아직도 상심하고 있었던 로저 샤먼과 엘브리지 게리와 같은 일부 대표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자신들을 다스릴 만한 충분한 지혜가 없다고 우려했고, 따라서 연방정부의 어느 부도 직선제로 선출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다른 대표들은 중앙정부는 가급적 넓은 국민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일부 대표들은 성장일로에 있는 서부에 주로 승격될 기회를 주지 않기를 바랐고, 다른 대표들은 1787년의 서북부령에 의해 확립된 동등의 원칙을 창도하고 나섰다.
지폐와 같은 전국적인 경제 문제, 계약상의 의무에 관한 법률, 또는 정치에서 배제된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심각한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지역별 경제적 이해관계를 균형잡고, 행정수반의 권한, 임기 및 선출 방법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며, 법관의 임기와 법원의 종류에 관계되는 문제들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연방회의는 필라델피아의 여름의 더위를 무릅쓰고 강행군하여 마침내 짧은 문서 속에, 그때까지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복잡한 정부의 조직을--명확히 정의된 한정된 범위 내에서 최고의 정부조직을 구체화하는 초안을 완성했다. 연방회의는 연방정부에게 권력을 부여함에 있어서 과세, 자금 차입, 균일한 관세, 공과금 및 물품세 책정, 도량형 결정, 특허권 및 저작권의 수요, 우체국의 설립 등의 전권을 부여했다. 중앙정부에게는 또한 육군과 해군을 조직하여 유지하고, 주 사이의 교역을 규제하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중앙정부에게는 인디언 문제와 국제 관계를 관장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중앙정부는 외국인을 귀화시키고 공유지를 관리하기 위한 법률을 통과시킬 수도 있었으며, 구(舊)주와의 절대적 평등의 바탕에서 신(新)주를 연방에 가입시킬 수도 있었다. 연방정부가 갖는, 명확히 정의된 이 같은 권한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하고 적절한 모든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는 권한은, 연방정부로 하여금 그 후에 올 세대들과 크게 확대된 정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권력분립의 원칙은 이미 대부분의 주헌법에서 잘 시행되어 건전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연방회의는 입법, 행정, 사법을 별개의 부로 하여 상호 견제하도록 하는 통치체제를 수립했다. 그리하여 의회가 통과시킨 법도 대통령의 찬성 없이는 확장될 수 없게 되었으며, 한편 대통령은 자기가 행하는 가장 중요한 임명사항과 자기가 체결한 조약을 상원에 제출하여 인준을 받게 되었다. 또 대통령이 의회에 의하여 탄핵되고 해임될 수 있게 했다. 사법부는 연방의 법률과 헌법 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다루어야 했는데, 사실상 법원은 기본법(헌법)과 성문법을 해석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이 인준하는 법관도 의회에서 탄핵될 수 있게 했다.
헌법을 경솔하게 고치는 것을 막기 위해, (헌법) 제5조는, 헌법 개정안은 상하 양원의 의원 3분의 2에 의해 제안되거나, 또는 연방 전주의 3분의 2가 대회를 열어 제안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 개정은 전(全)주의 4분의 3의 입법부에 의한 비준이나, 또는 전(全)주의 4분의 3에서 열린 대회에 의한 비준의 두 방법 중, 의회가 제의하는 한 가기 방법에 의해서 비준되어야 한다.
마침내 연방회의는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새 중앙정부에 부여된 권한은 어떻게 행사되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였다. 연합규약 아래의 중앙정부는 문서상으로는 방대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권한은 각 주가 이 같은 권한을 존중하기 않았기 때문에 실제에 있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 새 중앙정부가 그와 똑같은 운명에 빠지지 않도록 구해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처음에는 대부분의 대표들은 무력사용이라는 한 가지 해결책만을 내놓았다. 그러나 각 주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면 연방이 깨지고 말리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도달한 결정인즉, 중앙정부는 주에 대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해 작용하는 것이며, 국가의 개개 주민들 모두를 위한, 그리고 그들에게 적용될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연방회의는 헌법의 요체로서 짤막하면서도 매우 의미심장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성명을 채택했다.
“의회는 이 헌법에 의하여 미국정부에게 부여된 권한의 행사를 위해 필요하고 적절한 모든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갖는다.....”
(헌법 제1조, 제7절)
“이 헌법과 이 헌법에 따라 제정된 미국의 법률, 그리고 미국의 권한으로 이미 체결되었거나 체결될 모든 조약은 이 나라의 최고의 법이다. 그리고 각 주의 법관은 각 주의 헌법이나 법률에 이와 반대되는 규정이 있다 하더라도 이 헌법의 제약을 받는다.”(헌법 제6조)
이리하여 미국의 법률은 연방정부의 법관과 치안관에 의해 연방법원에서 뿐만 아니라 각주의 법관과 사법관에 의해 주법원에서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헌법을 기초한 사람들의 동기에 관한 논쟁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1913년에 찰스 비어드는 그의 저서 <헌법의 경제적 해석>에서, 건국원로들이 강력하고 권위 있는 중앙정부가 강제적으로 이룩한 안정으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얻고자 했는데, 이는 그들이 가치가 절하된 많은 약수의 정부 채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헌법의 아버지”인 제임스 매디슨은 공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으며, 반면 일부 헌법 반대론자들은 거액의 공채와 채권을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논쟁의 방향에 영향을 주었고, 주들 사이의 이해관계, 지방적 및 이념적 이해관계도 역시 그러했다. 계몽주의의 소산인 건국 원로들은 개인의 자유와 공공적 미덕을 신장시키리라고 그들이 믿었던 정부를 고안해 냈다. 미국헌법에 구현된 이상들은 미국의 국가적 독자성에서 불가결한 요소들이다.
1787년 9월17일, 16주 간의 심의 끝에 참석한 주대표 42명 중 39명이 완성된 헌법에 서명했다. 프랭클린 워싱턴의 의자 뒤에 찬란한 금빛으로 그려놓은 반원의 태양을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회의하는 동안 ... 의장의 뒤에 있는 저 해를 바라보면서, 그것이 돋는 해인지, 지는 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마침내 그것이 도는 해이지, 지는 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기쁘다.”
연방회의는 끝나고 대표들은 “‘시티주점’주점으로 자리를 옮겨 식사를 같이하고, 서로 정중한 작별을 하였다.” 그러나 보다 완벽한 연방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의 중요한 부분은 아직 남아있었다. 헌법이 효력을 발생하려면 아직도 국민이 선출한 주대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연방회의는 헌법이 13개 주 중, 9개 주에서의 대회에서 승인되는 즉시 발효하도록 결정했다. 1788년 6월까지에는 헌법 발효에 필요한 9개 주가 헌법을 비준했는데 큰 2개 주, 즉 버지니아 주와 뉴욕 주는 비준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 두 주의 지지 없이는 헌법이라는 문서에는 위험이 가득 차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이 헌법으로 수립되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국민을 억압하고, 무거운 세금으로 괴롭히며, 그들을 전쟁으로 끌어들이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견해가 달라짐으로써,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지하는 연방당(Federalists)과 각 주의 느슨한 유대를 지지하는 반연방당(Antifederalists)라는 두 당이 생겼다. 양측의 열띤 주장이 신문, 주의회에서 표명되었다.
버지니아주에서 반(反)연방당파는 미국 헌법 전문에 있는 “우리들 미합중국 인민은”이라는 구절을 문제삼으면서 제안된 새 중앙정부를 논했다. 대표들은 헌법에 개개의 주 명칭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각 주는 개별적인 권리와 권한을 보유하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버지니아주의 반연방당파는 패트릭 헨리가 이를 이끌었는데, 그는 새로운 중앙정부의 권력을 두려워했던 오지의 농민들의 주대변인이 되었다. 헌법지지 여부를 망설이던 대표들은 버지니아 주대회가 권리장전을 건의한다고 제안함으로써 헌법을 지지하도록 설득되었고, 6월 25일 반연방당파에 합세하여 헌법을 비준했다.
뉴욕주에서는 알렉산더 해밀턴, 존 제이 및 제임스 매디슨이 <연방주의론 논문집>(Federalists Paper)으로 알려진 일련의 논문을 통해 헌법을 비준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뉴욕의 신문을 통해 발표된 이 논문들은 서로 견제하고 균형 잡는 분립된 행정부, 입법부 및 사법부를 가진 연방중앙정부를 옹호하는, 이제는 고전이 된 주장을 내세웠다. <연방주의 논문집>이 뉴욕 주 대표들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헌법은 7월26일에 비준되었다.
1776년 버지니아주 권리선언(Declairation of Rights)의 기초자인 조지 메이슨은 최종적인 헙법 초안이 개인의 권리를 열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서에 대한 서명을 거부한, 헌법제정회의에 파견되었던 대표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패트릭 헨리와 함께 버지니아주가 헌법 비준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매사추세츠주를 포함하는 5개 주가 헌법에 그 같은 (개인의 권리에 관한) 수정조항이 즉각 추가되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헌법을 비준했던 것이다.
1789년 첫 (연방)의회가 뉴욕시(市)에서 열렸을 때,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수정 조항에 대한 요구는 거의 만장일치의 것이었다. 의회는 12개의 그 같은 수정 조항을 재빨리 채택했는데, 1791년까지에는 충분히 많은 수의 주가 10개 수정 조항이 헌법의 일부가 되도록 비준했다. 이들 10개 수정 조항은 총체적으로는 ‘권리장전’으로 알려져 있다. 수정 조항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언론, 출판, 및 종교의 자유와 평화적으로 집회하고, 항의하며 변화를 요구하는 권리(수정 제1조); 부당한 수색. (재산의) 압수 및 체포로부터의 보호(수정 제4조); 모든 형사사건에 있어서의 정당한 법공의 절차(수정 제5조);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 (수정 제6조); 잔혹하고 통상적이 아닌 처벌로부터의 보호(수정 제8조); 그리고 인민은 헌법에는 열거되어 있지 않는 권리를 추가로 보유한다는 규정(수정 제9조) 등이다.
권리장전이 채택된 이래 16개 수정 조항만이 현재까지 헌법에 추가되었다. 권리장전에 이은 많은 수정조항들이 연방정부의 구조와 운영방식을 수정했지만, 그 대부분은 권리장전에 의해 수립된 선례를 따랐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확대시켰다.
아메리카 식민지연맹 의회(Congress of the Confederation)가 취한 마지막 조치의 하나는 새로운 중앙정부의 발족 일자를 1789년 3월 4일로 정하고, 초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준비 절차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새 국가원수로서 한 사람의 이름이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이름은 조지 워싱턴으로, 그는 1789년 4월 30일 만장일치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워싱턴은 대통령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최선을 다하여 “미국의 헌법을 보전하고, 보호하며, 수호”할 것을 다짐했는데, 이때부터 모든 대통령이 취임식 때 이 말을 답습하여 사용했다.
워싱턴이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는, 새 헌법은 전통도 없었고, 조직화된 여론의 완전한 뒷받침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새 정부는 독자적인 기구를 마련해야 했다. 조세수입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법부가 들어설 때까지는 법을 시행할 수단이 없었다. 육군은 그 규모가 작았고, 해군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의회는 신속하게 토마스 제퍼슨을 장관으로 하는 국방부와, 알렉산더 해밀턴을 장관으로 하는 재무부를 창설했다. 그와 동시에 의회는 연방 사법부를 조직하여 대법원(대법원장과 5명의 대법원 판사로 구성) 뿐만 아니라, 3개의 고등법원과 13개의 지방법원을 설치했다. 육군장관과 법무장관도 임명되었다. 워싱턴은 대체로 자기가 그 판단을 존중하는 사람들과 의논한 후에 결정을 내리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의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나라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고,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은 늘어나고 있었다. 미국민의 에너지의 주력은 서부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뉴잉글랜드와 펜실베니아주 사람들은 오하이오주로 이동하고 있었고, 버지니아주와 캐롤라이나주 사람들은 켄터키주와 테네시주로 향하고 있었다. 적은 돈으로도 좋은 농장을 살 수 있었으며,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대단했다. 뉴욕주의 북부, 펜실베니아주의 비옥한 평야들은 이윽고 광활한 소맥 지대가 되었다.
아직도 여러 가지 물건들이 가내에서 만들어졌으나. 미국의 산업혁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매사추세츠주와 로드아일랜드주는 중요한 직조공업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었고, 코네티컷주는 주석제품과 시계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뉴욕주, 뉴저지주 및 펜실베니아주는 종이, 유리 및 철을 생산하고 있었다. 해운업은 미국이 바다에서 영국 다음 갈 정도로 발전했다. 미국의 배들은 1790년 이전에 벌써 중국에까지 진출하여 모피를 팔고, 차와 비단을 사들여왔다.
이 나라가 성장하는 중대한 그 시기에, 워싱턴의 현명한 지도력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그는 중앙정부를 조직하고, 이전에 영국과 스페인이 점유했던 영토문제의 해결을 위한 정책을 발전시켰고, 북서부의 변경지역을 안정시켰으며, 3개 주, 즉 버몬트주(1791년), 켄터키주(1792년), 및 테네시주(1796년)가 새로 연방에 가입하는 것을 감독했다. 마침내 워싱턴은 퇴임식의 고별사에서 "외부세계의 그 어떤 부분과도 항구적인 동맹을 맺는 일을 피하라"고 국민에게 경고했다. 이 같은 충고는 그 후 여러 세대를 두고 세계 여타 나라들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
1790년대에 연방주의자들과 반(反)연방주의자들 사이에 조성된 갈등은 미국 역사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부유한 슈일러가(家)에 장가든 알렉산더 해밀턴이 이끄는 연방주의자들은 항구들의 도시중심적인 상업적 이익을 대표했고, 토마스 제퍼슨이 이끄는 반(反)연방주의자들은 농촌과 남부지역의 이익을 대변했다. 이들 대립하는 두 파 사이의 논쟁은 중앙정부의 권한과 이에 대립하는 주정부의 권한에 관한 것이었는데, 연방주의자들은 전자에 찬성했고, 반면 반(反)연방주의자들은 주의 권리를 창도했다.
해밀턴은 상업과 공업의 이익을 추구하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추구했다. 그는 공적 생활에 능률, 질서 및 조직에 대한 '사랑'을 심어 놓았다. "국가의 신용을 적절히 뒷받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라는 하원의 요구에 호응해서, 그는 공공경제 뿐만 아니라 능률적인 정부에 관한 원칙을 마련하여 이를 뒷받침했다.
해밀턴은 미국은 공업발전, 상업 활동 및 정부의 운용을 위해 신용을 얻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은 또한 국민의 전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국가의 채무상환을 거부하거나 그 일부만을 상환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해밀턴은 국가 채무의 전액 상환뿐만 아니라, 연방정부가 주들이 독립전쟁 기간 중에 짊어진 미상환 채무까지도 인수하는 계획을 주장했다.
해밀턴은 또한 전국 각 지방에 지점을 설치할 권리를 가진 미국중앙은행을 고안해냈다. 그는 독립조폐국을 설립할 것을 발의했으며, 새로 탄생한 기업체들을 임시로 보호함으로써 경쟁력을 갖춘 국가의 산업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을 도울 수 있다는 일종의 "유치산업" 보호 이론을 내세워 관세제도에 찬성했다. 연방정부의 신용을 확고부동하게 만들며, 연방정부가 필요로 하는 모든 세입을 이에 주는 조치들은 상업과 공업을 고무했으며 중앙정부를 강력히 지지하는 튼튼한 실업인력을 만들어냈다.
토마스 제퍼슨은 지방분권 체제의, 농업에 중점을 두는 공화국을 창도했다. 그는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강력한 중앙정부의 가치를 인정했으나, 다른 여러 면에서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원하지 않았다. 해밀턴의 커다란 목표를 보다 효율적인 조직체였으나, 반면 제퍼슨은 "나는 너무 활력적인 정부에는 찬동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해밀턴은 무정부 상태를 두려워했고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제퍼슨은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이 두 가지 영향력을 모두 필요로 했다. 이 두 사람을 가졌다는 것은 미국의 행운이었으며, 미국은 조만간 그들의 철학을 융합하여 조절할 수 있었다. 제퍼슨이 국무장관으로 취임한지 얼마 후에 일어난 이들 두 사람 사이의 충돌은 헌법에 대한 새롭고 지극히 중요한 해석을 내리게 했다. 해밀턴이 중앙은행 설립을 위한 자신의 법안을 내놓았을 때 제퍼슨은 이에 반대했다. 주의 권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대변하여, 제퍼슨은 미국헌법은 연방정부에 속하는 모든 권한을 명백히 열거하고 있으며, 그 밖의 다른 권한은 이를 명백히 주에 유보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앙정부에는 어디에서도 은행을 설립할 권한이 부여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해밀턴은 중앙정부의 권한에 관한 필요한 세부 사항들이 방대하기 때문에 엄청난 수의 (중앙정부의) 권한들이 (헌법의) 일반적인 조항들에 의해 함축적으로 표시되어야 했고, 또 그 같은 조항들의 하나가 (중앙정부에게) 구체적으로 부여된 다른 권한을 의회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헌법은 중앙정부에게 세금을 부과, 징수하고, 채무를 상환하며, 자금을 차입할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중앙은행은 이러한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의회는 그 함축된 권한에 따라 그러한 은행을 설립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었다. 워싱턴 대통령과 의회는 해밀턴의 견해를 받아들였으며, 연방정부의 권한을 확대해석하는 하나의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새 정부가 맨 먼저 할 일의 하나는 국내 경제를 튼튼히 하고. 연방의 재정을 확고히 하는 일이었으나. 미합중국은 해외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워싱턴의 외교정책의 기초는 평화를 유지하고 이 나라가 (독립)전쟁의 상처로부터 회복할 시간적 여유를 주며, 국가적 통합의 완만한 과업이 계속될 수 잇게 하는 것이었다. 유럽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이러한 목표들을 위협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프랑스 혁명을 날카로운 관심과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1793년 4월에는 이 프랑스 혁명을 미국 정치문제로 만든 소식이 전해졌다. 프랑스가 영국과 스페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했으며, '시티즌' 즈네로 알려진 에드몽 새를르 즈네가 프랑스의 새로운 사절로서 미국으로 부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1793년 1월에 프랑스왕 루이 16세가 처형된 후, 영국, 스페인, 그리고 네덜란드는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1778년에 체결된 미불동맹 조약에 따라 미합중국과 프랑스는 영세 동맹국이었고, 미국에게는 프랑스가 서인도제도를 방어하는 것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미합중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약한 나라였고, 유럽의 주요 강국들을 상대로 하는 또 다른 전쟁에 끼어 들 만한 입장에 있지 않았다. 1793년 4월 22일 워싱턴은 미합중국이 "교전중인 국가들을 우호적으로 또 공평하게 대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미국 독립을 기능하게 만들었던 이 1778년 조약의 조건을 실제적으로 폐기했다. 즈네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많은 시민들은 그를 환영했으나, 정부로부터는 냉냉한 격식의 대접을 받았다. 이에 분개한 그는 나포한 한 영국선박에 사략선으로 사용하기 위한 필요장비를 갖추지 않겠다는 약속을 위배했다. 즈네는 다음에는 이 같은 의도를 미국정부 수반을 제쳐놓고 미국민에 직접 호소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미국은 곧 프랑스정부에 대해 그의 소환을 요청했다.
즈네 사건은 영국과의 관계가 결코 만족스럽지 않을 때에,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한때 긴장시켰다. 영국군 부대들은 아직도 서부의 요새들을 점령하고 있었고, 독립전쟁 중 영국군 병사들이 탈취해 간 재산은 아직 반환되거나 보상되지 않았으며, 영국해군은 프랑스 항구를 향해 가는 미국선박들을 나포하고 있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워싱턴은 미국 초대대법원장 존 제이를 특사로서 런던에 파견했다. 그는 미국 서부의 요새들로부터 영국군 병사들을 철수시키고, 영국정부로 하여금 1793년과 1794년에 영국이 나포, 압수한 미국의 선박과 화물에 대한 손해 배상을 약속하게 하도록 하는 조약을 협상했다. 체결된 조약은 미국의 입장의 허약성을 반영하고 있었는데, 이 조약은 미국의 서인도제도와의 교역을 심히 제한했고, 앞으로 미국의 선박을 나포하는 문제에 대해서나, 미국 선원을 강제로 영국 해군에 복무시키는 "강제 모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제이는 또한 해군용 전쟁물자는 중립국 선박에 의해 적의 항구에 운송될 수 없는 금제품이라는 영국측 견해를 받아들였다.
제이가 영국과 체결한 이 조약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놓고 이제는 공화주의자로 불리게 된 반(反)연방주의자들과 연방주의자들 사이에 격렬한 의견 대립을 불러 일으켰다. 연방주의자들은 그들이 대표하는 상업면의 이익이 영국과의 교역에서 나왔기 때문에 친(親)영정책에 호의적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공화주의자들은 주로 이념적 이유에서 프랑스에 호의적이었고, 제이가 체결한 조약이 영국에 지나치게 유리한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오랜 토론 끝에 미국 상원은 이 조약을 비준했다.
워싱턴은 국가원수직을 8년 이상 맡는 것을 굳게 사양하면서 1797년 은퇴했다. 그의 부통령이었던 매사추세츠주 출신인 존 애덤즈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애덤즈는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부터도 알렉산더 해밀턴과 다투었었는데--이처럼 당의 분열로 인해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국내적 난관은 국제적 분규로 해서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제이가 영국과 체결한 조약에 분노하여, 영국의 주장을 역으로 이용, 프랑스 해군이 적의 항구로 운송되는 보급품, 전쟁물자를 압수하기로 했다. 1797년까지에는 프랑스는 300척에 달하는 미국 선박을 나포했고,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애덤즈가 협상을 위해 다른 세 사절을 파리에 보냈을 때, 프랑스 외상 샤를르 모리스 드 탈레랑의 대리인들이 (애덤즈는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이들을 X, Y, 및 Z라고 호칭했다) 미국 사절들에게, 협상은 미국이 프랑스에 1,200만 달러를 대여하고 프랑스 정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고 귀뜸해 주었다. 프랑스에 대한 미국민의 적개심은 극도에 달했다. 이른바 XYZ사건의 결과로 미국에서는 군대가 모집되고 창설된 지 얼마 안 되는 해군을 강화시키게 되었다.
1799년 프랑스군과의 일련의 해전이 벌여진 끝에 마침내 전쟁이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위기에 처하여 애덤즈는 전쟁을 원했던 해밀턴의 조언을 제쳐놓고 세 사람의 새 사절을 프랑스로 보냈다. 갓 집권한 나폴레옹은 이 사절을 정중히 영접하였고, 1800년의 협정이 협상됨으로써 전쟁의 위험은 사라졌는데, 이 협정으로 미국은 1778년에 프랑스와 맺은 방위동맹의 의무에서 정식으로 벗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약한 입장을 반영하듯이, 프랑스는 프랑스 해군이 나포한 미국 선박들의 배상금 2,000만 달러의 지불을 거부했다.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은 의회로 하여금 미국민의 공민적 자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외국인 단속법과 치안 유지법을 통과시키게 만들었다. 미국시민으로 귀화할 수 있는 요건인 5년 간의 미국 거주 기간을 14년으로 바꾼 귀화법은 공화주의자들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은 아일랜드계와 프랑스계 이민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2년 동안만 효력이 있는 외국인 단속법은 전시에 대통령에게 외국인을 추방하거나 투옥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치안유지법은 대통령이나 의회에 고나해 "허위이고, 중상적이며 악의적인" 성질의 글을 쓰거나, 말을 하거나 인쇄물을 간행하는 그 어떤 행위도 이를 금지했다. 이 법에 의해 유죄 판결이 내려진 건이 몇몇 건 있었는데, 이는 공민적 자유의 대의에 몸바친 '순교자'들을 만들어낼 뿐이었고, 공화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를 일으켰다.
이들 법률은 저항에 부딪혔다. 제퍼슨과 매디슨은 켄터키주 의회와 버지니아주 의회가 1798년 11월과 12월에 켄터키주 결의안과 버지니아주 결의안을 통과시킬 것을 발의했다. 이들 결의안에 따르면, 주는 연방이 취한 조치에 그들의 의견을 "첨가"할 수 있고 이들 조치를 "무효화"시킬 수 있었다. 이 무효화의 독트린은 후에 남부 각 주가 관세문제를 놓고, 더 불길하게는 노예 문제를 놓고, 북부에 대항하여 그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1800년에 이르러서는 미국민들은 변화를 원하게 되었다. 워싱턴과 애덤즈의 집권 아래 연방주의자들은 장려한 정부를 확립하였으나. 때로는 미국정부는 국민의 의사에 호응해야 한다는 원칙을 존중하지 않고 많은 국민을 소외시키는 정책들을 시행했다. 예를 들어, 1798년에 연방정부는 주택, 토지 및 노예에 과세하는 제도를 제정하여 미국 내의 재산 소유자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제퍼슨은 수많은 소농, 상점주인 및 기타 근로자들을 규합했으며, 이들은 1800년의 선거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웠다. 이 선거에서 제퍼슨은 미국의 이상에 호소함으로써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그는 새로운 수도 워싱턴 D.C 에서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행하는 취임 연설을 통해, 주민들 사이의 질서를 유지하되, "그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산업과 생활향상을 추구해 나갈 수 있게 해줄, 현명하고 검약한 정부"를 약속했다. 제퍼슨이 백악관에 있다는 사실만도 이는 민주적 절차를 고무하는 힘이 되었다. 그는 부하들이 자신들을 단순한 국민의 수임자로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농업과 서부로의 확장을 장려했다. 그는 미국을 피압박자들의 안식처로 믿고, 관대한 이민법의 제정을 촉구했다. 1809년까지에는 긴 안목을 가진 재무장관 앨버트 갤라틴이 국가의 채무를 5억 6,000만 달러 미만으로 줄여놓았다. 제퍼슨식 사상의 열기가 전국을 휩쓸자 주들은 잇달아 재산 소유에 따른 투표 자격 제도를 폐지하고, 채무자와 범죄자들에 대한 보다 인도적인 법률을 제정했다.
제퍼슨의 업적의 하나는 미국의 국토를 배로 늘린 일이었다. 7년전쟁(Seven Year's War: 1756~1763)이 끝나고 프랑스는 미시시피강 이서의 영토를 스페인에 할양했는데, 이 강의 하구 가까이 있는 뉴올리언즈항은 오하이오강과 미시시피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미국의 산물을 수송하는 데에 절대로 필요한 항구였다. 제퍼슨이 대통령에 취임한지 얼마 후 나폴레옹은 약한 스페인 정부에게 루이지애나라고 불리는 넓은 지역을 다시 프랑스에 할양하도록 강요했다. 이러한 행동은 미국민들을 불안과 분노에 차게 만들었다. 미국의 바로 서쪽에 거대한 식민제국을 건설하려는 나폴레옹의 계획은 모든 내륙정착지의 교역권과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제퍼슨은 만약 프랑스가 루이지애나를 차지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영국의 함대및 국민과 결합해야 한다"고, 그리고 유럽의 전쟁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포성은 영미 연합군이 뉴올리언즈를 향해 진격하는 신호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또 다른 전쟁이 임박하고 있음을 알고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도함으로써 영국의 손이 이 영토에 미치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는 제퍼슨을 헌법상 궁지로 몰아넣었다. 헌법은 정부의 어는 부서에게도 영토를 구입하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제퍼슨은 헌법을 개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고문들은 구입을 지연시키면 나폴레옹의 마음을 바꾸게 될지도 모르고--영토를 구입하는 권한은 본래부터 조약을 체결하는 권한에 고유한 것이라고 그에게 조언하였다. 제퍼슨은 "우리나라의 양식은 엉성한 구조가 아니라 나쁜 영향을 미칠 때 그 해악을 시정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헌법 개정의 의사를 굽혔다.
미국은 1803년 1,500만 달러로 루이지애나를 구입했다. 이에는 260만 평방킬로미터가 넘는 광활한 토지와 함께 뉴올리언즈항이 포함되었다. 이리하여 80년 후에는 이 나라의 심장 지대가 되고==또 세계의 대곡창 지대의 하나가 될 광활한 평야, 산맥, 그리고 하천을 얻게 되었다.
1805년 제퍼슨이 2차 임기를 시작했을 때, 그는 영불전쟁에서 미국의 중립을 선언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다같이 상대방에 대한 중립국의 해운을 제한하려고 애썼지만, 영국 측의 해상 통제는 나폴레옹 통치 하의 프랑스 측의 그 어떤 조치보다 심각성이 훨씬 더한 교역 금지와 화물 압수의 고통을 미국 측에 안겨주었다.
1807년까지는 영국은 해군을 근 15만 병력의 수병과 해병이 승선하는 700여 척의 군함으로 증강했다. 이 막대한 해군력이 프랑스의 항구들을 봉쇄하고, 영국의 무역을 보호하며, 영국의 식민지들과의 연계를 유지하는 등 해로를 장악했다. 하지만 영국함대의 승무원들은 아주 가혹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자유로운 모병으로는 필요한 승무원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많은 영국 해군 수병들이 탈주하여 미국 선박에 피신했다. 이러한 경우 영국군 장교들은 미국 선박을 수색하여 영국국민을 데려가는 것을 자기들의 권리로 간주했다. 이는 미국인들에게 큰 모욕감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군 장교들이 미국인 선원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영국 해군에 편입시키는 일이 흔히 있었다.
제퍼슨이 영국군함들에게 미국의 영해에서 떠나도록 명령하는 포고를 발표하자 영국측은 더 많은 미국 선원을 강제로 끌고 가 영국해군에 편입시키는 대응을 보였다. 제퍼슨은 영국해군으로 하여금 물러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들게 위해 경제적 압력을 가하는 방법에 의존하기로 결정했다. 1807년 12월 미국의회는 금수령을 통과시켜, 모든 대외교역을 금지했다. 얄궂게도 제한된 정부를 옹호하는 공화주의자들이 중앙정부의 권한을 크게 증대시킨 법률을 제정했던 것이다. 단 1년 동안에 미국의 수출고는 전년도의 5분의 1로 줄었다. 이 조치로 해운업은 거의 몰락했고, 뉴잉글랜드와 뉴욕 주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높아갔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타격이 컸다. 남부와 서부의 농민들이 그들의 잉여 양곡과 육류 및 연초를 수출할 수 없게 되자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이 금수조치로 영국이 굶주리게 되면 그들이 정책을 바꾸리라는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국내에서 불만이 커지자 제퍼슨은 금수조치를 완화하여 국내 해운업자들을 달랬다. 1809년, 그는 영국 및 프랑스 그리고 그들의 속국을 제외하는 다름 모든 국가와의 통상을 허용하는 '비교역령'에 서명했다.
1809년 제임스 매디슨이 제퍼슨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영국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두 나라는 급히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매디슨 대통령은 영국이 미국 시민을 강제 모병해간 수천 건에 달하는 사례를 보여주는 상세한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 외에도 서북부의 정착민들은 인디언의 습격으로 피해를 입었는데, 그들은 캐나다에 있는 영국의 압잡이들이 인디언을 충동했다고 믿었다. 이는 많은 미국민들로 하여금 캐나다 정복을 찬성하게 만들었다. 캐나다 정복이 성공하면 인디언들 사이에 미치는 영국의 영향력이 제거되고, (미국의) 식민지 건설을 위한 새로운 땅이 마련되리라는 기대에서였다. 캐나다 정복의 의욕은 선원의 강제 모병에 대한 분노와 겹쳐 미국민의 전쟁 수행 열기를 북돋았는데, 이리하여 마침내 1812년 미국은 영국에 대해 전쟁을 포고했다.
미국은 영국과의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대내적으로 의견이 분열되어 있었다. 남부와 서부가 전쟁에 찬성하는 데에 반하여, 뉴욕주와 뉴잉글래드는 전쟁이 그들의 교역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이에 반대했다. 영국에 대한 전쟁은 미국 육군이 완전한 준비를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포고되었다. 7,000명 미만의 정규군 병사들은 해안과 캐나다 국경, 그리고 먼 내륙 지방에 널리 흩어져 있는 요새에 분산되어 있었다. 이들 정규군 병사들은 규율이 서있지 않은 주민병대의 지원을 받게 되어 있었다.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미국의 캐나다 침공과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만약 이 침공이 시간을 적절히 맞추어 수행되었더라면 몬트리올에 대한 연합 작전을 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 작전이 실패하여 영국군이 디트로이트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미국 해군은 거듭 승전하여 미국의 자신을 회복시켰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민간 무장선들이 대서양을 휩쓸면서 1812년에서 1813년에 이르는 가을과 겨울 기간에 영국 선박을 500척이나 나포했다.
1813년의 전투는 뉴욕주 이어리호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후에 대통령이 되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 장군은 디트로이트를 탈환할 목적으로 켄터키주로부터 민병대, 의용군 및 정규군의 부대를 이끌고 진군했다. 9월 12일, 그가 아직도 오하이오주 북부에 있을 때 올리버 해자드 페리 제독이 이어리호에서 영국 함대를 섬멸했다는 소식이 그에게 전해졌다. 헤리슨은 디트로이트를 탈환하고 캐나다로 진격하여, 쫓기는 영국군과 영국과 동맹한 인디언들을 테임즈강에서 무찔렀다. 이제 미국은 그 지역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전쟁의 또 다른 결정적인 전기는 1년 후 토마스 맥도너 제독이 뉴욕주 북부의 챔블레인호에서 벌이는 근접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마련되었다. 1만 명의 영국 침공군은 해군의 지원을 잃게 되자 캐나다로 후퇴했다. 그 무렵 영국함대는 "무찌르고 쳐부숴라!"라는 명령하에 동부 연안지역을 괴롭히고 있었다. 1814년 8월 24일 밤, 영국함대의 원정대가 연방정부의 본거지인 워싱턴 D.C로 쳐들어와 워싱턴은 화염에 싸이게 되었다. 제임즈 매디슨 대통령은 버지니아주로 피신했다.
이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미국과 영국 협상대표들은 서로 상대방에 대해 양보를 요구했다. 하지만 영국 대표들은 챔블레인호에서 맥도너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알자 양보하기로 결정했다. 웰린턴공으로부터 협상을 타결하라는 촉구를 받고, 또 국고의 고갈에 직면한 끝에 영국 협상대표들은 1814년 12월 젠트(Gent) 조약을 받아들였다. 이 조약으로 전투는 중지되고 점령지는 반환되었으며, 국경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쌍방은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즈에서 전투를 계속했다. 앤드류 잭슨 장군이 이끄는 미국군이 이 전쟁의 지상 전투 승리 중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과 미국의 대표들이 해결책을 협상하고 있는 동안, 매사추세츠주, 로드아일랜드주, 코네티컷주, 버몬트주 및 뉴햄프셔주의 의회가 선출한 연방주의자들의 대표들이 "매디슨씨의 전쟁"에 대한 반대를 상징한 모임을 코네티컷주의 하트포드에서 가졌다. 뉴잉글랜드는 이 전쟁 전반을 통해 힘들게나마 적과 교역을 할 수 있었고, 일부 지역들은 실제로 이 교역을 통해 번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방주의자들은 이 전쟁이 경제를 파멸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회의에 참가한 일부 대표들은 연방으로부터의 탈퇴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대표들은 60일 이상 지속되는 금수조치를 금지하고, 또 동일한 주에서 대통령이 연달아 나오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을 포함하는, 공화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한 일련의 헌법수정에 찬동했다. 하지만, 하트포드 회의가 보낸 사자가 워싱턴 D.C에 도착했을 때는 전쟁은 이미 끝난 후였다. 이 하트포드 회의는 연방주의자들에게 그들이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不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낙인을 찍어 놓았다.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교육받은 많은 미국인들이 더 이상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지 않았다. 이 시대의 세속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19세기 전반기에 기독교 신앙부흥운동이 코네티컷주에서 뉴햄프셔주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다.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일어난 이 기독교신앙 각성 대운동은 종교적 헌신의 현장과 그 헌신의 표현에 의해 구분되는 몇 가지 종류의 활동으로 구성되었다.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종교에 대한 새로워진 관심이 사회적 행동주의 물결을 고무했다. 뉴욕주의 서부에서는 신앙부흥 정신은 새로운 기독교 교파들의 대두를 고무했다. 켄터키주와 테네시주의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에서는 이 신앙 부흥운동은 감리교와 침례교를 강화시켜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표현인 "야영 집회"를 탄생시켰다.
1730년대에 일어났던 기독교신앙 각성 대운동과는 달리, 동부에서 일어난 (제2의) 신앙부흥운동에는 신도들의 히스테리적인 감정 노출이 없는 것이 현저한 현상이었다. 비(非)신자들은 신앙을 간증하는 신도들의 "존경스러운 침묵"에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일어난 복음전도의 열성은 서부를 복음화하기 위해 결성된 교파간 연합선교회들을 낳게 했다. 이들 선교회의 회원들은 신앙의 사도로서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 시민의 지도자로서, 또 동부 도시문화의 대표자로서 활동했다. 出版 및 교육단체들은 기독교에 바탕을 둔 교육을 장려했다. 이들 단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1816년에 창립된 미국성서공회였다. 신앙부흥운동에 의해 고무된 사회적 행동주의는 노예제도 폐지운동 단체들과 금주장려협회를 탄생시켰고, 아울러 교도소를 개혁하고 장애자와 정신질환자들을 돌보는 노력을 낳게 했다.
뉴요크주 서부에서의 신앙부흥운동은 뉴요크주 애덤즈 출신의 변호사 찰스 그래디슨 피니가 주로 벌인 운동이었다. 온타리오호에서 애디론댁 산맥에 이르는 지역은 지난날에 수많은 신앙부흥운동이 벌여졌던 장소였기 때문에 "열기로 타버린 구역"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1821년 피니는 일종의 종교적 현시를 경험하고 뉴요크주 서부에서 복음전도에 나섰다. 그의 신앙 부흥운동은 주의 깊은 계획 수립, 흥행적 수완 및 광고가 그 특징으로 되어 있었다. 피니는 1835년에 오버린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오하이오로 옮겨가기 전에, 1820년대 전반과 1830년대 초에 "열기로 타버린 구역"에서 전도 활동을 벌였다. 그는 마침내 오버린 대학 학장이 되었다.
미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두 교파, 즉 모르몬교와 '제7일 안식일 재림교'도 역시 이 "열기로 타버린 구역"에서 시작되었다.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에서는, 신앙 부흥운동은 18세기에 있었던 기독교신앙 각성 대운동과 유사한 특징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앙 부흥운동의 중심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거리 때문에, 그 장소에서 숙영하지 않을 수 없는 일단의 사람들을 위한, 서너 날에 걸친 종교 행사"라고 정의되는 "야영집회"였다. 인구가 희박한 지역에 살고 있는 개척자들은 이 야영집회를 변경지역의 외로운 생활로부터 벗어나는 기회로 생각했다. 수백 명, 어쩌면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신앙 부흥운동에 참석하게 된 기쁨에 들뜬 참석자들은 춤을 추고 고함을 지르며 이 행사에 관련된 노래들을 불렀다.
첫 야영집회는 1800년 7월 켄터키주 남서부의 '개스퍼 리버' 교회에서 열렸다. 이보다 훨씬 대규모인 야영집회는 1801년 8월 켄커키주 캔 리지에서 열렸는데, 이 집회에는 장로교, 침례교 및 감리교의 목사들이 참석했다. 조직된 신앙 부흥운동을 감리교, 침례교 같은 교단을 위한 교회 팽창의 주요방식이 되게 만든 것이 바로 이 행사였다.
이 대신앙부흥운동은 재빨리 켄터키주, 테네시주, 그리고 오하이오주주 남부에 걸쳐 확산했는데, 이로써 주로 감리교와 침례교가 교세를 확장하게 되었다. 교파마다 변경지역에서 교세를 확장하게 할 수 있는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감리교는 멀리 떨어진 변경지역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순회특사"(circuit rider)로 알려진 목사들에 의존했던, 매우 효과적인 조직을 갖고 있었다. 이 순회특사의 직분은 평신도들이 맡았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신도로 만들려고 바랐던 변경지역의 주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도왔다.
침례교는 정식 교회 조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교파의 전도사들은 신의 "소명"을 따른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성서를 공부하고 교회를 세웠으며, 이 교회가 이번에는 그들을 전도사로 임명했던 것이다. 이 같은 교회들에서 성직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멀리 떨어진 황무지에 침례교 교회들이 활동하는 기반을 다지는 것을 도왔다. 이 같은 전도방법을 사용하여 침례교는 경계주 전역과 남부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우세하게 되었다.
이 제2의 기독교신앙 각성 대운동은 미국역사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침례교와 감리교의 수적 세력은 식민지 기간에 우세했던 교파들--즉 성공회, 장로교회, 조합교회들의 수적 세력에 비례하여 상승했다. 후자의 교파들에서 기울인 사회문제의 해결에 기독교 가르침을 적용하려는 노력은 19세기 후기의 "사회적 복음" 운동을 예시한 것이었다. 미국은 19세기 초엽에서 중엽에 걸쳐 더 다양한 나라로 되어 가고 있었으며, 미국 개신교 안에서 점차 늘어나는 상이한 교파들은 이 다양성을 반영했고 또 이에 이바지했다.
미국 지도 펼쳐 보고 미국 여행 하자.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지도 검색 블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