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한 대조병창이 되어야 한다" -- 플랭클린 D.루즈벨트, 1941년. |
1933년 새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신뢰와 낙관론이 감도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뉴딜로 알려진 그의 정책의 기치하에 국민들이 재빨리 모여들게 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 라고 선언했다.
어느 의미에서 뉴딜정책은 약 한세대 남짓 동안이나 여러 유럽인들이 익히 잘 알고 있던 사회적 및 경제적 개혁을 미국에 도입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온당하다. 뿐만 아니라 뉴딜정책은 1880년대의 철도규제 조치와 그리고 디어도어 루스벨트 및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진보주의적인 시대에 홍수같이 쏟아져 나왔던 주 및 연방정부의 개혁 입법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자유방임 자본주의 포기를 향한 장기적인 추세의 최고조를 나타냈다.
그러나 뉴딜정책의 신기한 점은 과거에 수세대가 걸렸어야 할 일들을 이 정책이 해낸 그 속도였다. 사실 많은 개혁안들이 성급하게 작성되고 허약하게 집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 개혁안들은 서로 모순되기도 했다. 뉴딜정책이 실시된 전기간중 국민들의 대정부비판과 논의는 결코 방해되거나 중지당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뉴딜정책은 정부에 대한 개개 국민의 관심을 크게 소생시켰다.
루즈벨트 대통령 당선자가 대통령 취임 연설을 했을 때, 이 나라의 금융 및 신용제도는 마비 상태에 있었다. 이 나라의 은행들은 처음에 놀랄만한 속도로 문을 닫았으나 그 후 지불능력만 있으면 다시 문을 열었다. 정부는 상품 가격들이 올라가는 추세를 조정할 뿐만 아니라 채무자들의 부담을 얼마간 덜어주기 위해 알맞은 통화팽창정책을 채택했다. 신설된 정부기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저축은행 예금을 최고 5,000달러까지 보험계약 해주었으며 증권거래소의 증권판매에는 엄격한 규제가 가해졌다.
1933년에 미국민 수백만 명이 실업자였다. 실업자 빈민들이 식료품을 무료배급 받으려고 서있는 줄은 대부분의 도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음식, 일거리, 숙소 등을 찾아서 헤매고 돌아다녔다. "형제여, 한푼만 나누어 줄 수 있을까요?"라는 유행가 후렴이 나돌았다.
실업자들을 위한 한 조치는 18세부터 25세까지의 청년들을 구제하기 위해 연방의회가 확정한 계획인 민간식임치수단(CCC)의 형태로 나타났다. 반군대식으로 운영되는 민간식림치수단은 전국에 산재하고 있는 근로대에 무직청년들을 입대시켜 한달에 약 30달러를 주도록 했다. 10년동안에 청년 약 200만 명이 이 계획에 참가했다. 그들은 토양침식작용을 막고 국유림을 늘리기 위한 식목, 하천오염제거, 물고기, 맹수, 조유 등의 보호구역 신설, 그리고 석탄 석유, 가스 , 이판암 나트륨, 헬륨 광상 보존등을 포함하여 갖가지 천연자원 보존 사업계획에 참가했다.
실업경제는 토목사업청의 형태로 나타났다. 일부러 일거리를 만든다는 비판은 받았지만 자금을 공급받은 일거리들은 도랑파는 일에서부터 도로 보수공사.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1933년 11월에 신설된 이 토목사업청은 1934년 봄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핵심 관리들은 국민의 복지수당보다는 오히려 일자리에 바탕을 둔 실업구제 프로그램들을 계속 선호했다.
뉴딜정책 시대의 특징은 보다 큰 규제조치가 아니라 이 나라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라는 신념이었다. 예컨대, 1933년 의회는 농민들에게 경제적 구제책을 제공하기 위해 농업조정법(AAA)을 통과시켰다. 농업조정법의 핵심에는 농민들의 자발적인 감산에 대한 보상을 해주기 위한 보조금을 농민들에게 지급함으로써 농산물 가격을 인상하려는 계획이 들어있었다. 이 보조금 지급을 위한 자금은 농작물 가공산업에 부과하는 세금에 의하여 조성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AAA가 법률로 확장되었을 때에 농작물 성장 시기는 꽤 많이 지나갔으며 AAA는 농민들로 하려금 그들의 풍요로운 농작물을 갈아엎도록 권장했다. 헨리 A. 윌러스 농무장관은 이러한 활동을 "우리의 문명에 대한 충격적인 비평"이라고 했다. 하지만 농업조정법과 저장해 놓아서 매물로 나와있지 않은 농산물에 대해 융자해주는 프로그램인 상품신용공사(CCC)로 해서 농산물 생산고는 떨어졌다.
1932년부터 1935년까지의 사이의 농가소득은 50%이상이 증가했는데 어느 정도는 연방정부의 원조계획 덕택이었다. 농민들에게 휴경-차지인들과 소작인들을 쫓아내는일이 권장되고 있던 당시 대평원 주들에 가뭄이 엄습하여 농산물 생산고가 대폭 줄어들었다. 1930년대 특히 1935년부터 1938년까지의 기간중에 강한 바람과 황진폭풍이 "황진지대"로 알려지게 된 남부 기계들은 파괴되고, 사람들과 동물들은 상처를 입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흔히 "오우키즈"(1930년대의 오클라호마주출신의 뜨네기 농부들)라고 불리운 약 80만명의 이동 농업노동자들이 오클라호마주는 물론 아칸소주, 텍사스주, 미주리주 등을 떠났다. 이들의 대부분은 한층 더 서쪽에 있는 전설과 약속의 나라, 자기들의 생활이 농경지역사회의 건전도와 연걸되어 있는 전문직업인들과 소매상인 등이었다. 캘리포니아 주는 적어도 당초에는 그들의 꿈의 땅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지극히 낮은 임금으로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계절적인 일거리를 서로 얻으려고 경쟁하게 되었다.
정부는 1935년에 토양보존국(SCS)을 신설하여 농민들에게 원조를 제공했다. 토양에 해를 주어온 농업관행으로해서 폭풍에 의한 피해가 더 심해졌기 때문에 토양보존국은 농민들에게 토양침식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뿐만 아니라 바람의 힘을 막기 위해 약 3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이에 식목을 했다.
농업조정법은 대부분 성공적이었지만 식품 가공업자에 대한 과세는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온 1936년에 폐지되었다. 6개월 후에 의회는 보다 효과적인 농업 구제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토양을 메마르게 하는 농작물들의 지배를 줄인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게 부여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토양보존 관행을 통해서 농산물의 감산이 이루어졌다.
1940년에 이르기까지 약 600만 명의 농민들이 이 계획 하에서 연방정부 보조금을 받고 있었다. 이 신법도 마찬가지로 잉여 농산물에 대해 융자해주고 소맥에 보험계약을 주고 그리고 안정된 식품 공급을 확보하기 위해 계획된 농산물 저장 체제를 제공했다. 이윽고 농산물 가격은 올랐으며 농민들의 경제적 안정은 가능한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전국산업부흥법(NIRA)와 함께 1933년에 신설된 전국부흥청(NIRA)은 보다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럼으로써 보다 많은 구매력을 창출하기 위해 공정경쟁 관행 규약을 설정함으로써 살인적인 경쟁을 종식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당초에 전국부흥청은 환영을 받았지만 부흥이 시작하자 업계는 과도한 구제에 심한 불평을 했다. 1935년에 전국부흥은 위헌이라고 선언되었다. 당시에 기타 정책들은 부흥을 촉진시키고 있었으며, 정부는 이윽고 특정 업종에 있어서의 관이실격은 국가경제의 심한 낭비일뿐만 아니라 부흥에 대한 장애요인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조직노동자들이 미국 역사상의 과거 어느시기보다도 더 많은 이득을 본 것도 뉴딜정책실시기간중이었다. 전국산업부흥법은 노동자들에게 노사간의 단체교섭권을 보장해주었다. 그리고 1935년에 의회는 전국노동관계법(NLRA)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부당 노동관행을 정의하고 근로자들에게 자신들이 선택한 노동조합을 통해 단체교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고용주가 노동조합 활동을 방해하지 못하게 했다. 이 법은 또한 단체교섭을 감독하고 선거를 관리하고 그리고 고용주와의 교섭에서 자신을 대표해야 할 노조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근로자들에게 보장해주기 위해 전국노동관계안원회를 신설했다.
노조에서 이룩한 대발전은 공동 이해관계 의식을 점점 더 많이 근로자들에게 가져왔으며, 근로자들의 힘은 산업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증대되었다. 이 힘은 주로 양대 정당의 테두리 안에서 행사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노조측 지지를 더 많이 받았다.
뉴딜정책은 초기에 괄목할 만한 입법 계획들을 후원했으며 생산과 물가를 대폭 상승시켰지만 대공황을 종식시키지는 못했다. 그리고 절박한 위기의식이 누그러짐에 따라 새로운 요구들이 나타났다. 실업인들은 자유방임의 종식을 한탄하고 전국노동관계법의 단속하에 안달했다. 몽상가, 음모가, 정치가들이 모두 부흥 속도에 불만을 품고 있는 광범위한 청중을 끌은 경제적 만병통치학을 가지고 나오게 되자. 좌우 정파로부터의 시끄러운 구두 공격도 거세어졌다. 이 경제적 만명통치약들에는 프랜시스 E.타운센드의 후한 노년연금계획, 반유태주의 이미지가 진하게 가미된 연설에서 국제금융가들을 비난한 라디오방송 성직자 커플린 신부의 인플레 조성 제안, 그리고 루이지애나 주지사였던 휴이 P.룽 상원의원의 가공할 "객인은 왕"이라는 계획등이 들어있었다. 롱 상원의원은 주를 개인 영지처럼 운영하던, "황진지대"를 떠난 사람들의 강력하고도 냉혹한 대변인이었다.(만약 그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그가 1936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도전하여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좌우 정차로부터의 이러한 압력에 마주치면서 새로운 일련의 경제적 및 사회적 조치들을 지지했다. 이러한 조치들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빈곤퇴치조치, 사업에 의한 실업대책, 그리고 사회안전강(최저의 생활을 보장하는 사회복지 계획)의 제공등이었다.
소위 제2의 뉴딜정책의 주된 실업구제 기관인 공공사업촉진청(WPA)은 복지수당보다는 차라리 일거리를 제공하려는 하나의 시도였다. WPA계획하에서 빌딩, 도로. 공항. 학교 등이 건설되었다. 배우들, 화가들, 음악가들. 저술가들은 연방연극사업계획, 연방예술사업계획, 연방저술가사업계획 등을 통해서 고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청소연지도청(NYA)은 학생들에게 파트 타임 일거리들을 제공하고 훈련프로그램을 만들고 그리고 직업 없는 청소년들을 도와주었다. WPA의 도움을 받은 청소년들은 초기에 약 300만명이었지만 WPA가 폐지된 1943년에 이르러서는 WPA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900만명에 달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 따르면 뉴딜정책의 초석은 1935년의 사회보장법이었다. 사회보장법은 연노자, 실직자, 불구자 등을 위해 근로자들과 고용주들의 각출금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보험제도를 창설했다. 다른 여러 선진공업국들은 이미 이러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지만 1900년대에 미국에서 이러한 계획에 대한 진보파측의 요구는 주목받지 못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사회보장제도가 미국의 전통에 위배된다고 불평했지만, 실제에 있어서 미국의 사회보장제도는 비교적 보수적인 것이었따. 미국의 사회보장제는 주로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단일 고정세율로 모든 근로자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에 의하여 그 자금이 공급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는 사회보장 프로그램에 대한 이러한 제한들은 의회에서의 통과를 확보하기 위한 타협조건들이었다. 사회보장제도는 당초에는 매우 소규모로 시작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미국정부가 관장하고 있는 가장 큰 국내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 되어있다.
1936년에 공화당은 루스벨트에 대항하기 위해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앨프레드 M.랜던(캔저스 주지사)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뉴딜정책에 대한 많은 불평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는 193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가일층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유권자 60%의 지지를 얻었으며, 메인주 버몬트주를 제외하고 모든 주를 석권했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과 제휴한 광범위한 새로운 연합세력, 즉 근로자들, 대부분의 농민들, 그리고 동유럽 및 남유럽 출신의 이민들과 도시 소수민족그룹들, 아프리카계 미국민들 등으로 구성된 새로운 연합세력이 나타났다. 공화당은 실업계의 지지와 소도시 및 교외 중류층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정치적 제휴는 약간의 변동은 있었지만 수십년 동안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32년부터 1938년까지 뉴딜정책이 미국의 정치 및 경제생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미에 관한 토의가 미국민들 사이에 널리 행해졌다. 정부가 국민의 복지에 관한 토의가 미국민들 사이에 널리 행해졌다. 정부가 국민의 복지에 대한 보다 많은 책임을 지기를 미국민들이 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실제로 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현대 복지국가 기반을 확립한 공적을 뉴딜정책에 돌린다. 일부 뉴딜정책 비판자들은 정부기능의 무한한 확대는 마침내 국민들의 자유권들을 파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은 경제적 복지를 증진시키는 조치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강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8년 한 라디오 방송연설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미국민들에게 일깨워주었다.
몇몇 강대국들에서 민주주의는 사라져버렸다. 이것은 그나라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싫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나라 국민들이 실업과 불안정에 지치고 영도력의 결핍으로 해서 생긴 정부의 혼란 및 허약성에 마주쳐서 난감해 하고 있는 동안 자기들의 자녀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는데 지쳤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절망속에서 먹을 것을 얻기를 바라면서 자유를 희생시키기를 선택했다. 미국의 우리들은 우리의 민주제도가 보존될 수 있고, 또 기능을 발휘하게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제도를 보존하기 위해서...민주정체의 실제운영이 국민의 안전을 보호하는 일과 똑같은 일이라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미국민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자기들의 자유권들을 수호하는 일에서 국민의 의견이 일치되어 있으며, 또 그 수호의 제 1선은 경제적 안전의 보호에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많이 지나가기 전에 그의 국내계획은 보통 미국민들이 별로 알아차리지 못한 새로운 위험에 가리워지고 말았다. 즉 새로운 위험은 일본, 이탈리아, 독일 등의 전체주의 정권들의 팽창주의 계획이었다. 1931년 일본은 만주를 침공했으며 중국의 저항을 분쇄했다. 1년후에 일본은 만주국 괴뇌정권을 수립했다. 파시즘 세력이 장악한 이탈리아는 리비아에서 그 국경선을 확대했으며, 1935년에 이디오피아를 침공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국가사회당을 조직하여 1933년에 통치권을 장악한 독일은 라인란트를 다시 점령하고 대규모의 재무장을 했다.
전체주의의 진정한 성질이 분명해지고 독일과 이탈리아와 일본이 침략을 계속하게 되자, 이에 대한 미국민들의 우려가 고입주의 감정을 증대시켰다. 1938년 히틀러가 독일제국에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덴란트를 요구하게 되자, 유럽에서는 전쟁이 어느 순간에라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십자군의 실패로 환멸을 맛본 미국은 전쟁에 말려든 나라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미국에게 원조를 기대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1935년부터 1937년까지 하나씩 하나씩 제정된 중립법은 교전국과의 통상이나 교전국에 대한 차관을 금지했다. 그 목적은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미국이 비미국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막으려는 데에 있었다.
세계의 사건들에 대한 미국민들의 감정은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1939년에 나치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자, 독립주의 감정은 증대되었다. 미국민의 감정은 히틀러의 침공의 희생자들에게 분명히 호의를 보였으며, 독일의 팽창에 반대하고 있던 연합국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하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개입에 관한 미국민의 여론이 사건들에 의하여 변하게 될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1940년의 프랑스의 패망과 독일의 대영공중전으로 해서 민주국가들에 대한 지원을 찬성하는 사람들과 중서부지역 보수주의자들 및 좌경 평화주의자들로부터의 지지를 받는 미국제1주의 위원회를 중심으로 뭉친 고립주의파들 사이에서 토의가 격렬해졌다. 결국 오래끈 국민 토의에서 관여주의자들의 주장이 주로 '연합국지원'에 의한 미국수호안의회(Committee to Defend America By Aiding Allies)의 지원을 받아 승리했다.
미국은 상호방위안원회에서 캐나다와 합세했으며, 서반구 국가들에게 집단보호 조치를 제공하는 일에서 중남미 국가들과 제휴했다. 점점 심각해지는 위기에 마주친 의회는 재무장을 위한 막대한 금액의 지출을 가결했으며, 1940년 9월에는 미국사상 최초의 평화시 미집 법안을 통과시켰다. 비록 하원에서 단 한표 차이로 통과된 것이었지만 1941년초에 의회는 무기대여법을 승인했는데 이 법으로 해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방위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나라(특히 영국, 소련, 중국)에게 무기와 군장비를 넘겨줄 수 있었다. 대전이 끝날무렵의 무기대여법에 의거한 무기원조 총액은 500억 달러를 웃돌았다.
1940년의 대통령 선거운동은 독립주의자들이 시끄럽게 떠들기는 했지만 전국적으로 이들에게 비교적 추종자들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적이었던 공화당의 웬델 월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지지하고 또 루스벨트대통령의 국내 계획을 대부분 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한 흥미를 돋우는 정점을 가지고 있기 않았다. 그래서 11월의 선거는 루스벨트에게 절대 다수표를 안겨주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3선 대통령이 나타났다.
대부분의 미국민들이 유럽의 전쟁과정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아시아에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자국의 전략적 입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고 있던 일본은 태평양전역에서 일본이 패권을 행사하게 될 '신질서"를 대담하게 선언했다. 나치 독일에 대항하여,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던 영국은 어쩔 수 없이 상해로부터 철수하고 미얀마통로(버마의 라시오로부터 중국 운남성 곤명으로 이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전략적 도로)를 잠정적으로 폐쇄했다. 1940년 여름에 일본은 프랑스의 허약한 비시 정부로부터 인도차이나 비행장들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그 해 9월에 일본은 로마-베를린 추축에 가담했다. 미국은 이에 대한 대항수단으로서 대일 고철수출을 금지시켰다.
일본은 영영 말레이 반도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석유, 주석, 고무등을 얻으려고 남진할 것같았다. 1941년 일본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잔여지경을 점령했으며, 미국은 이에 대한 대응조치로서 일본인 재산을 동결했다.
1941년 10월에 도조 히데키 장군이 일본의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 해 11월 중순에 그는 미국에 특사를 파견하여 코델 헐 국무장관을 만나게 했다. 무엇보다도 일본은 미국이 일본인 재산동결을 해제하고 태평양 지역에서의 미해군 팽창을 중지하기를 요구했다. 헐 국무장관은 이러한 일본측 요구에 일본인 재산동결 해제조치의 교환조건으로 중국 및 인도차이나 반도로부터 일본이 철수해달라는 제안으로 대응했다. 일본은 이 제안을 연구하게 위해 2주일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12월 1일 이 제안을 거부했다. 12월 6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황 히로히토에게 직접 호소를 했다. 그러나 12월 7일 아침 일본의 항해 함재기들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태평양 함대를 기습공격했다. 군함 5척을 포함한 19척의 군함과 미국 비행기 약 150대가 파괴되었으며, 미군 병사, 수병, 민간인 등 2,300여명이 피살되었다. 그날 단 한가지 사실만이 미국에게 유리했다. 즉, 그 이후의 태평양 해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미국 항공모함들이 해상에서 항해중이었으며, 진주만에 정박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와이, 미드웨이, 웨이크, 괌 도 등에 대한 일본의 기습공격 상보가 미국의 각 라디오에서 요란하게 방송되자 설마하고 의심하고 있던 미국민들의 마음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이른바 "불명예로 남아있게 될 그날"에 대한 분노로 변했다. 12월 8일 미국 의회는 일본과의 전쟁 상태를 선언했으며, 3일 후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대미선전포고를 했다.
미국은 미국민들과 미국의 全산업 능력을 동원하는 체제로 신속히 들어갔다. 1942년 1월 6일 어마어마한 생산목표, 즉 그해 안에 항공기 6만대, 전차 4만 5,000대, 고사포 2만대, 총 1,800만 중양톤의 상선대를 인도하는 목표를 발표했다. 이 나라의 모든 활동, 농업 제조업, 무역, 노동, 투자, 통신, 심지어는 교육 및 문화 사업까지--은 갖가지 방식으로 새롭고도 확대된 통제하에 들어갔다. 이 나라는 거액의 돈을 모금해서 선박, 장갑차, 항공기 등을 대량생산하기 위한 거대한 새 산업들을 만들었다. 인구의 대이동이 일어났다. 일련의 징집조치에 의하여 미군의 총병력은 1,510만명에 달하게 되었다. 1943년말, 정복군인이거나 전쟁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는 미국인 남녀총수는 약 6,500만 명이었다.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해서 고립주의자들의 호소력은 제거되었으며, 신속한 군대동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진주만 피습 사건과 아시아인 간첩행위에 대한 두려움의 결과로서 미국민들은 편협한 행위, 즉 일본계 미국민들의 강제수용을 자행했다. 1942년 2월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고 있던 약 12만명의 일본계 미국민들이 그들의 집으로부터 철조망이 쳐진 10개의 임시수용소로 이동 수용되었으며 후에 외딴 서남부 소도시들 외곽에 있는 강제 격리 수용소들로 이송되었다. 이들 일본계 미국민들의 약 63%는 미국 태생의 니세이(2세)였으므로 이들은 미국민이었다. 이들이 간첩행위 한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하와이와 미국 본토 출신의 일본계 미국인들은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 2개 보병부대에서 용감하게 싸워 두드러진 태평양 지역에서 통역과 번역관으로 복무했다. 1983년에 이르러서야 미국정부는 그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수용한 일이 부당했음을 인정하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미국이 참전한지 얼마 안되어서 서방 연합국들은 주요한 군사노력을 적의 힘의 핵심에 있는 유럽에 집중시키고 태평양 지역은 2차적으로 다루어야 했다.
1942년 봄과 여름에 영국군은 이집트를 목표로 한 독일군의 진격을 분쇄하고 독일군의 에르빈 로멜 장군을 리비아로 후퇴시킴으로써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에 대한 위협을 없앴다.
1942년 11월 7일 미군은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했으며 격전 끝에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은 크게 격파했다. 1942년은 또한 막대한 손실을 입어 고통받고 있던 소련이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문턱에서 나치의 침략을 저지시키고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패배시킨 동부전선에서의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1943년 7월 영국군과 미군은 시칠리아로 침공했으며 늦여름에 가서는 지중해 남부 연안의 파시스트 군대는 일소되었다. 연합군은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으며 이탈리아 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수락했지만 이탈리아 전역에서 나치 군대에 대항하는 전투는 치열하고도 오래 끌었다. 로마는 1944년 6월 4일에야 비로소 해방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도 연합군은 루마니아의 플로스티시에 있는 독일 석유보급창을 포함하여 독일의 철도, 공장, 무기설치 장소 등에 대대적인 공습을 단행했다.
1943년 말엽에 연합국들은 전략에 관한 토의를 여러 차례 거듭한 후에 독일로 하여금 러시아 전선으로부터 훨씬 더 많은 병력을 서부로 돌리지 않을 수 없도록 위해 서부전선을 열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장군이 유럽의 연합군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어마어마한 준비를 한 후 1944년 6월 6일 미, 영, 카나다 군의 선봉대가 우월한 공군의 엄호를 받으면서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다. 치열한 전투를 한 후 확보한 해안 교두보를 통해서 보다 많은 연합군이 진입했으며 많은 독일 수비병들이 연합군의 협공작전에 의해 고립되어 포로가 되었다. 연합군은 프랑스를 가로질러 독일을 향해서 진격하기 시작했다. 8월 25일 파리는 재탈환되었다. 연합군의 진격은 독일 국경에서 완강한 반격을 받아 지연되었지만 1945년 2월과 3월 서부로부터 독일로 진압했으며 독일군은 서부의 러시아인들 앞에서 무너졌다. 5월 8일 독일 제3제국의 육해공군은 모두 항복했다.
한편, 미군은 태평양에서 진격하고 있었다. 1942년 초엽에 필리핀에서 미군은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후 2,3개월 안에 연합국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제임스 "지미"두우리틀 장군이 4월에 미군 폭격기들을 이끌고 동경 폭격을 했는데 이 폭격은 군사적으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만 미국민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심리적인 격려가 되었다. 그 다음달의 산호해 해전 항해 함재기들 만이 싸운 사상 최초의 해전에서는 일본 해군이 막대한 손실을 입어 오스트레일리아를 공격하려던 생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월 중앙 태평양에서의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해군에게 항공모함 4척을 잃은 최초의 대패를 맛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중앙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일본의 진격을 종식시킨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연합국들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이밖의 다른 전투들도 연합국의 성공에 기여했다. 1942년 11월에 미군이 결정적으로 승리한 과달카날 전투는 태평양에서의 미군의 최초의 대공격이었다. 그후 2년동안의 대부분의 기간 중에 미군과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수륙 양면공격으로 솔로몬 군도, 길버트 군도, 마샬 군도, 마리아나 군도, 보닌 군도 등을 점령하면서 중앙 태평양의 , "사닥다리"를 따라 북진했다.
연합국의 군사적인 노력에는 전쟁의 정치적 목적에 관한 일련의 중요한 국제적인 회담들이 병행되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회담의 첫 회담은 미국이 아직 참전하지 않고 있었으며, 군사적인 정세가 스산하게 보이고 있었을 때인 1941년 8월에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사이에서 있었다.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근처의 순양함상에서 만난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다음과 같은 목표들을 승인한 목적 성명서인 대서양헌장을 발표했다. 즉 영토확대의 불허, 관계 국민들의 승인 없는 국경선 변경의 불허, 자신들의 정체를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국민들의 권리, 자주장부를 박탈당하고 있는 인민들의 자주정부 회복, 모든 국가들 사이의 경제협조, 모든 사람들의 전쟁, 공포, 결핍으로부터의 해방, 공해의 자유, 그리고 국제정책의 수단으로서의 무력이용의 포기 등이었다.
1943년 1월 모로코의 카사블란카에서 개최된 영미회의는 무조건항복조건이 아니면 추축국들 및 그들의 발칸 위성국들과 강화조약을 체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장한 이 조건의 목적은, 파시스트 및 나치의 대표들과는 어떠한 강화협상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대표들이 그들의 잔재세력들을 구출하기 위한 어떠한 흥정도 하지 못하게 하며, 또 독일 이탈리아 일본 국민들에게 최종적인 강화조건을 제시하기에 앞서 이들 나라의 군벌들이 전세계 앞에서 자신들의 완전하고도 전적인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들을 모든 참전국 국민들에게 다짐하려는 데에 있었다.
1943년 11월 22일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카이로에서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일본에 대한 조건에 합의했는데 이에는 일본이 과거의 침략에서 얻은 것들을 포기하게 한다는 조건이 들어있었다. 그해 11월 28일 테헤란에서 루스벨트, 처칠 그리고 스탈린은 새로운 국제기구인 국제연합(유엔)을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약 2년 후인 1945년 2월에 그들은 승리가 거의 확실하게 보이는 가운데 얄타에서 회담했다. 소련은 독일이 항복한 후 얼마 안되어 일본과 전쟁하기로 비밀리에 동의했다. 폴란드의 동부 국경선은 대체로 1919년의 쿠르존선으로 정해졌다. 독일로부터 받아낼 막대한 전쟁 배상-스탈린이 요구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반대했음--에 대한 의논이 있은 후에 그 결정은 연기되었다. 연합군의 독일 점령과 전범자들의 재판 및 처벌에 관한 특별 조치가 마련되었다.
또한 얄타 회담에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강대국들이 그들의 안보에 영향을 주는 문제에서 거부권 가져야 한다는데 합의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얄타로부터 귀국한지 2개월 후에 조지아 주에서 휴가중 뇌일혈로 사망했다. 미국 역사상 그렇게도 심심한 애도를 받은 인물은 거의 없었으며, 한 동안 미국민들은 보상받을 수 없는 손실로 인한 허탈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주리주 상원의원이었던 해리 S. 트루먼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 했다.
태평양전쟁은 독일이 항복한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마지막 전투들은 가장 격심한 전투들이었다. 1944년 6월초 필리핀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크게 격파되어 도조 일본수상은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2년에 일본군에게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필리핀을 마지못해 떠났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1944년 10월에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와서 미 해군을 위한 진격의 길을 열었다. 레이티만 해전은 일본 해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필리핀 해성에서의 연합국의 지배력을 회복시켜주었다.
1945년 2월 미군은 마닐라를 점령했다. 다음에 미국은 마리아나 군도와 일본사이의 중간쯤에 있는 보닌 군도의 유황도(이오지마)를 목표로 정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 섬을 수호하기로 결심하고 있었으며, 천연 동굴과 바위 많은 지세를 가장 잘 이용했다. 미군의 폭격은 일본군의 해상운송과 비행장들에 대한 대한 광범위한 공습을 시작했다. 5월부터 8월까지 미 제 20공군은 일본열도에 대한 파상 공습을 단행했다.
미영소 정부 수반들은 대일 작전, 유럽의 평화해결, 독일의 미래를 위한 정책등을 의논하기 위한 정책 등을 의논하기 위해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회동했다.
이 회의에서는 나치즘 하에서 자라난 독일인 세대의 재교육을 돕고 또 이 나라에 민주정치 생활을 부활시키는 일에 적요오딜 광범위한 원칙을 명백히 정할 필요성에 대해 의견이 일치되었다. 이 회의 참석자들은 또한 독일에 대한 배상청구를 의논하고, 인도에 반하는 범죄 혐의로 고발된 나치 지도자들의 재판에 합의하고 그리고 (점령지에서의)소련에 의한 공장시설 및 재산의 철거 방식을 규정했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이미 제기된 총 100억 달러에 달하는 배상청구는 앞으로의 논의 대상으로 남았다.
포츠담 회담이 시작되기 바로 전 날, 뉴멕시코 주 앨라모고도에서 원자폭탄의 폭발시험에 있었는데 이것은 맨해튼 계획으로 알려진 계획에 의하여 미국 전역의 여러 연구소에서 3년 동안 집중적인 연구가 계속된 끝에 얻어진 결정이었다. 보다 신속하게, 그리고 일본 본토를 침공하는 것보다 적은 사상자를 내고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원자폭탄이 사용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은 만약 일본이 8월 3일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원자폭탄을 사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연합국은 일본이 항복만 하면 파괴되지도 않고 노예가 되지도 않을 것이지만 만약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일본은 '전멸'하게 될 것임을 다짐하면서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미국의 군부 및 정계 요인들, 그리고 과학자들로 구성된 한 안원회가 새 무기의 투하 목표지 선정 문제를 심의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오직 군사시설 만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기술한 바 있다. 예컨대 헨리, L. 스팀슨 육군장관은 일본의 옛 수도이자 많은 국보 및 종교적 귀중품들을 간직한 교토는 원폭투하 목표지 선정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시켰다. 전시산업 및 군사직전의 한 중심지인 히로시마시가 원폭투하 목표지로 선정되었다.
8월 6일 미군 폭격기 '에놀라 게이'機(B-29)가 히로시마 시에 한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8월 8일 두 번째 원자폭탄이, 이번에는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미국민들은 이 폭탄이 전쟁종결을 가속화한 것을 보고 안도감을 가졌었다. 이 폭탄의 가공할 파괴력은 후에 알려지게 된다. 8월 14일 일본은 포츠담 회담에서 정해진 조건에 동의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은 정식으로 항복했다.
포츠담 회담에서 규정된 나치 지도자 형사재판 1945년 11월에 열렸다. 영 불 소 미 의 한 무리의 저명한 재판관들 앞에서 나치 지도자들은 침략전쟁을 모의,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홀로 코오스트로 알려져 있는 유럽 거주 유태인 및 기타 기타 인종들의 조직적인 대량 학살에서 전쟁 법규와 인도의 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전범 재판은 10개월 남짓 계속되었으며, 3명 제외한 피고 전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태평양 지역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유럽 전쟁이 총국을 맞이하던 1945년 4월 25일 전후 세계 형성에 관해서 미래를 가장 멀리 내다보는 쾌정 중의 하나가 내려졌다. 국제연합(유엔)의 기틀을 만들기 위해 50개국의 대표들이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희동했다. 그들이 기초한 헌장은 국제간의 의견차이를 평화적으로 의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굶주림 및 질병에 대해서 공동전선을 펼 수 있는 세계기구의 윤곽을 표시했다. 미국 상원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을 거부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엔헌장을 89대 2로 신속히 고립주의 정신의 종식을 확인하고 국제문제에서 미국이 주요한 역할을 할 작정임을 세계에 알린 것이었다.
미국에서 1920년대는 번영의 시대였지만 철강, 자동차, 고무, 직물 등과 같은 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다른 많은 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보다 이득을 덜 보았다. 대부분의 그러한 산업들의 노동조건은 전세기(19세기)나 다름없이 열악했다. 예컨대, 1923년까지 미국의 보통 철강 근로자는 2주일마다 하루밖에 없는 휴일에 하루 12시간의 근로를 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1920년대에 대량생산 산업의 소유주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미국영동총연맹(AFL)산하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누리던 노조들의 득세를 막으려는 노력을 배가했다. 그들의 노력은 스파이 및 무장 파업파괴자의 이용, 노조 동맹 혐의자의 파면 등을 포함하여 여러자기 형태로 나타났다. 독자적인 노조들은 흔히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동시에 많은 회사들은 자사의 노조를 결성했다.
전통적으로, 주의회는 노조가 전 근로자를 전적으로 대표하지는 못하게 하는 오픈숍(비조합원도 고용하는 사업장)의 개념을 지지했다. 이것으로 해서 회사들은 노조에게 단체교섭권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법원의 강제에 의하여 노조 결성 및 가입을 보다 수월하게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보다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1920년대의 일부 회사들은 근로자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갖가지 수당, 노사의 이익분배제, 회사 종업원의 주식매입 선택권, 보건계획 등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1919년 철강회사를 필두로 하여 회사들은 대량생산 산업에 있어서의 일련의 파업을 심하게 억압했다. 그 결과로 1920년부터 1929년까지의 사이에 미국의 노조 가입자수는 약 500만 명으로부터 35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세계대공황이 시작되자, 모든 산업의 생산에 대한 수요가 갑자기 줄어들었다. 그 결과로 실업이 늘어났다. 1933년에 미국의 실업자수는 1,200만명을 웃돌았다. 예컨대, 1929년부터 1933년 사이에, 자동차 산업의 근로인력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동시에 임금은 3분의 2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플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당선은 산업 근로자들의 상태를 영원히 바꾸어버렸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근로자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진 첫 징후는 저명한 작업장 개혁 주창자인 프랜시스 퍼킨즈 여사의 노동장관 임명으로 나타났다.(퍼킨즈여사는 또한 각료급 지위를 가진 최초의 여성이었다)1933년 6월 먼 장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전국산업부흥법(NIRA)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임금인상, 주동노 시간 제한, 미성년자 고용금지 등을 추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법이 한 사업장 만의 단독 어용조합 에 가입하도록 회사가 고용자들에게 가입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고용자들이 "자기들 자신이 선택한 대의자들에 의하여 노조를 결성하고 단체교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뉴딜정책이 근로자들에게 의미한 바를 다른 어느 노동 지도자보다도 더 이해한 사람은 성급하고 이론이 정연한 존 L.루이스 전미광산 노동조합(UMW)장이었다. 루이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원을 강조하면서 교묘하게 노조운동을 함으로써 UMW의 조합원수를 1년 내에 15만명으로부터 50만명을 웃돌게 만들었다.
루이스는 자기가 간부회의의 일원이었던 미국노동총연맹(AFL)으로 하여금 대량생산 산업에서도 이와 비슷한 운동을 시작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숙력 노조 노동자들에 초점을 두고있던 AFL은 그렇게 하려고 들지 않았다. 심한 내부 불화 끝에 루이스와 그밖의 몇몇은 AFL과 결별하고 후에 산업별 노동조합회의라고 불리게 된 산업별 노동조합안원회(CIO)를 신설했다.
루이스와 CIO의 첫 목표는 악명높게 노조를 금지하고 있던 자동차 산업과 철강산업이었다. 1936년 말엽에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시와 미시건 주 플린트시의 제네럴 모터즈 사 공장들에서 일련의 자연발생적인 연좌항의 파업이 발생했다. 루이스는 이에 신속히 대응하여 파업자들을 돕기 위해 노조 결성팀과 자금 10만 달러를 보냈다. 이윽고 근로자 13만 5,000명이 이 파업에 참가하여 이 산업은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노동운동에 동정적인 미시건주지사의 도움으로 1937년 이 노동 쟁의는 해결을 보게 되었다. 그해 9월, 전미자동차 노동조합(UAW)은 자동차 산업에 관련된 400개 회사들과 단체협약을 체결함으로써 근로자들에게 시간당 75퍼센트의 최저임금과 주 근로시간 40시간을 보장해주었다.
미국의 철강제조업 중심지인 펜시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시에서는 철강산업대표들이 루이스를 빨갱이 그리고 흡혈귀라고 출판물을 공격했다. 그러나 1936sys의 전국노동관계법(NLRA)의 통과와 루스벨트 대통령의 재선은 노동세력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루이스의 보좌역인 필립 머리가 이끈 철강노동자 노조결성안위원(SWOC)은 이 위원회가 설치된지 6개월만에 12만 5,000명의 철강 노동자들을 노조에 가입시켰다.
제네럴 모터즈사의 항복은 철강회사 "유에스 스틸사"에 뚜렷한 영향을 주었다. 유에스 스틸사는 시대가 변했음을 알아차리고 1937년 CIO와 타협하게 되었다. 같은 해(1937)에 미국 연방대법원은 전국노동관계법의 합헌성을 확인,인정했다. 그 후 전통적으로 유에스 스틸사보다 한층 더 노조를 금지하고 있던 군소회사들고 CIO 노조들과 협약을 체결했다. 다른 산업들, 즉 고무산업, 유류산업, 전자기기산업 직물산업등도 하나씩 차례로 다른 회사가 하는 대로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대량생산 산업 노동자들은 이제 외롭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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