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미국 역사 | 12 ARTICLE F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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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은 존속되기 위해 변화해야만 한다.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 미국의 이상을 보존하기 위해 변화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음악에 맞추어 행진하지만 우리의 사명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다" -- 빌 클린턴 대통령, 1993년. |
수년, 아니면 수십년 전에 시작된 미국 사회구조의 변화는 19890년대에 이르러 뚜렷해졌다. 인구구성 성분과 미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업종 및 기술이 주요한 변화를 하고 있었다. 경제에서 서비스업의 우세 현상은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기에 50여년 동안 계속되어온 추세가 마침내 절정에 이르러, 미국의 전고용인의 4분의 3이 서비스 부문에서 -예컨대, 소매 점원, 사무직원, 교사, 의사 및 기타 보건 전문직원, 정부 공무원, 변호사, 법률 및 금융 전문가 등으로- 일했다.
서비스 부문 활동은 특정 유형의 과학기술, 즉 컴퓨터의 이용성 및 이용도의 증대로 해서 득을 보았다. 이것은 경제적 및 사회적 추세에 관해서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만큼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를 가진 정보시대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연방정부는 군사 및 우주 계획의 일부로서 컴퓨터 과학기술에 상당히 많은 투자를 했다. 1970년대 말엽에 캘리포니아주의 두 젊은 기업인이 자동차 차고에서 일하고 있다가 최초로 널리 시판된 가정용 컴퓨터를 조립하고, 그것에 '애플'(Apple)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산업혁신에 불을 붙였다. 1980년대 초엽에 수백만 개의 마이크로컴퓨터들이 미국의 기업체들과 가정에 파고들어갔으며, 1982년에 시사주간지 Time은 그 컴퓨터에 "올해의 기계"(Machine of the Year)라는 명칭을 붙였다.
한편, 철강 및 직물 산업과 같은 미국의 "굴뚝 산업"들은 쇠퇴하고 있었다. 미국 자동차 산업은 도요타(豊田), 혼다(本田), 닛산(日産) -이들의 대부분은 미국에 자기들의 공장을 세웠음- 등과 같은 매우 유능한 日本 자동차 제조업자들과의 경쟁으로해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1980년에 일본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미국 시장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1980년대 말엽과 1990년대 초엽에 이르러 비로소 미국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자기들의 라이벌인 일본 자동차 제조업자들의 비용효과 및 기술 기준에 뒤지지 않기 시작했으며, 지난 20년 동안 수입 자동차에 양보했던 국내 자동차 시장의 몫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으로 해서 득을 본 자는 소비자들이었지만 -생산비를 줄이려는 고통스러운 노력은 미국 자동차 산업에서의 수천명의 항구적인 실업을 의미했다.
인구 패턴도 변했다. 1946년경부터 1964년까지 계속된, 전후 "베이베 붐" 시기가 끝난 후, 전반적인 인구 증가율은 줄어들었으며, 인구는 보다 높은 연령이 되었다. 세대구성 상태도 변했다. 1980년에 가족세대의 백분율(%)은 떨어졌으며, 미국의 전세대수의 4분의 1은 인척 혈연 관계 없는 2, 3명의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비가족 세대"로 분류되었다.
새로운 이민들이 다른 방법으로 미국사회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1965년에 개혁된 이민정책은 그 초점을 서유럽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에 아시아 및 중남미 지역으로부터 새로 도착한 이민들의 수가 괄목할 만하게 증가되었다. 예컨대, 월남전 직후기에 월남 난민들이 미국으로 유입했다. 1980년에 80만 8,000명의 이민이 도착했는데, 이것은 60년만에 처음보는 최고 이민수였다. 이 나라는 또다시 全세계로부터 들어오는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1980년대에는 또다른 그룹이 기회 균등을 위한 투쟁의 적극적인 참가자가 되었다. 동성연애자들은 민권운동의 여러 전술을 사용하여 다른 그룹들이 요구한 것과 똑같은 것, 즉 차별대우로 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 흔히 압력이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예컨대, 1975년에 미국공무원 임용시험 위원회(USCSC)는 동성연애자 고용금지를 폐지했으며, 많은 주들이 차별대우 금지법을 제정했다. 반발이 일어났으며, 동성연애자들을 적대시하는 사건들이 나타나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후, 1981년에 인체의 면역체계를 파괴하는 가공할 질병인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가 발견되었다. 에이즈(AIDS)는 성행위나 혈액을 통해서 전염된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일반 국민들도 이 질병에 걸리기 쉽다는 것이 판명되었지만, 이 질병은 특히 동성연애자들이나 정맥주사약 사용자들이 아주 많이 걸렸다. 1992년에 이르러 에이즈로 사망한 미국인수는 15만명을 웃돌았으며,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는 30만명 내지 100여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에이즈는 결코 미국에만 국한된 질병이 아니었으며, 이 전염병을 다루려는 노력에는 전세계의 의사들과 의학 연구자들이 참가했다. 그들의 초기 성공 중의 하나(주로 미국과 프랑스의 연구 결과임)는 에이즈 병균을 분리시킨 다음, 혈액 공급의 보호를 확실케 하기 위한 실험을 발전시킨 일이었다.
지난 20년 동안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추세를 -여러 도심자에서의 범죄와 인종적 대립에서부터 카터 대통령 시대의 경제적 하강 및 인플레에 이르기까지- 은 많은 미국민들에게 환멸무드를 안겨주었다.그 추세들은 또한 정부에 대한 회의는 물론, 이 나라에 깊이 뿌리박힌 사회적 및 정치적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정부의 능력에 대한 회의도 증대시켰다.
전국적인 수준에서 장기간 세력을 잃고 있던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새 무드를 이용하기에 좋은 입장에 있었다. 당시는 많은 미국민들이 제한된 정부, 강력한 국방, 그리고 관용적이고 흔히 혼란스러운 현대 사회 현상의 침입으로 간주된 것들에 반대하는 전통적 가치관 보호 등 메시지를 잘 받아들이는 때였다.
이러한 보수주의자 급증 원인은 여러 곳에 있었다. 성경을 신의 직접적이고 잘못없는 말씀으로 간주하는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의 큰 집단은 범죄와 성적인 부도덕행위의 증대를 특히 염려하고 있었다. 1980년대 초엽의 가장 정치적으로 유력한 집단 중의 하나는 '도덕적인 다수파'(Christian Majority)라고 불렀는데, 이 집단은 침체적 목사 제레 팰웰이 이끌었다. 패트 로버트슨이 이끈 또하나의 집단은 '크리스천 연합'(Christian Coalition)이라고 불린 단체를 조직했는데, 이 단체는 1990년대에 공화당 내의 하나의 유력한 세력이었다. 이러한 여러 집단들처럼, 그들 (보수주의자들)은 종교를 미국 생활의 중심부로 되돌리기를 원했다. 팰웰 및 로버트슨과 같이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복음을 전도하는 성직자들은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었다.
보수주의자들을 적극적으로 나오도록 만든 문제는 당시의 여론을 가장 분열시키는 감정적인 문제중의 하나인 낙태 문제였다. 1973년 '로우 대 웨이드' 사건에서 임신 초기 수개월 내에 낙태 시킬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확인한 연방대법원 판결에 대한 반대세력이 갖가지 여러 단체들과 개인들을 뭉치게 했다. 이렇게 뭉친 사람들에게는 많은 수의 가톨릭 신자들, 정치적 보수주의자들, 그리고 실제로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낙태를 살인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대부분이 간주한 기독교 원리주의자들 등이 들어 있었으나, 이들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주장에 찬동하는 정치가들과, 자기들의 주장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반대하는 정치가들을 옹호하여 조직체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낙태 합법화 지지 데모와, 낙태금지 데모는 미국 정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되었다.
공화당 내에서, 우익은 또다시 커져서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다. 이 우익은 1964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배리 골드워터와 더불어 잠시 공화당지배력을 장악했었으나, 그 후 세인의 주시권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1980년에 이르러 우익은 최신 모금 기법을 사용하여 당내의 중도파를 추월했다. '신우익'(New Right)은 경제학자 밀튼 프리드만, 저널리스트 윌리엄 F. 버클리 및 조지 윌, 그리고 '헤리티지 재단'과 같은 연구기관 등의 지적 능력이 의존하면서, 1980년대의 쟁점들을 명백히 밝히는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우익은 기타 보수주의자들이나 '구우익'처럼, 정부의 경제개입에 대한 엄격한 제한을 찬성했다. 그러나 신우익은 자기들의 가정관을 장려하고, 동성연애 행위를 제한하고, 그리고 외설물들을 검열하기 위해 기꺼이 국가 권력을 사용하려고 했다. 대체로, 신우익은 범죄에 대한 강경 조치, 강력한 국방, 긔록 공립학교에서의 기도를 허용하기 위한 헌법수정, 낙태 반대, 그리고 여성을 위한 남녀평등 헌법수정안의 폐기 등을 찬성했다.
이러한 본질적으로 다른 모든 요소들을 한데 묶게 한 인물은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난 레이건은 정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할리우드 영화 및 텔리비젼 배우로써 스타의 지위를 이룩했었다. 그는 1964년 전국적으로 텔레비전 방송된 배리 골드워터 지지 연설로써 정치적인 두각을 최초고 나타냈다. 1966년에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에서의 학생 폭동에 반대하는 물결의 유권자 반응 덕택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었으며, 1975년까지 주지사였다. 그는 1976년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 획득을 약간의 차로 놓쳤으나 198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되어 대통령이 되었다. 레이건은 198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카터 대통령의 부통령 월터 먼데일을 누르고 압도적으로 재당선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불요불굴의 낙관주의와, 미국민들의 업적 및 여망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그의 능력은 그의 두 차례의 임기중 내내 지속되었다. 그는 많은 미국민들을 안심시켜주고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잘못된 진술을 하는 성향은 있었지만, 주로 텔레비전을 숙달된 솜씨로 이용했기 때문에 "위대한 의사소통자"(Great Communicator)로 알려졌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1950년대의 번영과 사회안정, 즉 널리 국민의 사랑을 받던 또 한 사람의 온화한 공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통치한 시대를 상기시켰다.
레이건 대통령은 정부가 미국민 생활에 너무나 깊이 개입한 것으로 믿었다. 그는 "낭비, 사기 그리고 권력 남용" 등을 제거함으로써, 이 나라에 필요하지 않다고 그가 주장한 프로그램들을 감축하기를 원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또한 지미 카터 대통령이 시작한 규제해제 계획을 임기 중 내내 추구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비자, 작업장, 환경 등에 영향을 주고 있는, 그리고 비능률적이고 값비싸고 경제성장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그가 주장한 규제조치들의 철폐를 추구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국내 계획은 민간경제 부문이 규제의 속박에서 풀려나면 이 나라가 번영할 것이라는 그의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공급측" 경제, 즉 상품 및 용역의 보다 많은 공급은 경제성장으로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의 지지자인 레이건 대통령은 보다 많은 소비자 지출, 저축, 투자 등을 촉진시키기 위해 대폭적인 감세를 추구했다. 공급측 경제 전문가들은 감세가 기업체의 투자 증대, 수익 증대, 그리고 이러한 수익에 대한 과세에 의한 정부 세수 증대 등의 현상을 초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원에서는 공화당이 약간의 차로 다수파 세력이 되어 있고, 하원은 민주당원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레이건 대통령은 개인에 대한 세금을 3년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25%줄이는 감세안이 들어 있는 그의 경제 계획의 주요한 부분을 첫 임기중에 성공적으로 법제화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또한 이 나라의 군대를 현대화하고, 소련으로부터의 계속적이고도 점증되고 있는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방위비 지출의 대폭적인 증대를 추구했으며, 실제로 방위비 지출을 대폭적으로 증대시켰다.
경기후퇴는 레이건 대통령 시정 초기의 특색을 이루었으며, 이 나라의 거의 모든 부문을 강타했다. 실업율이 10%를 웃돌게 되고, 미국의 공장들의 약 3분의 1이 유휴 상태에 빠지게 되자, 1982년도의 미국의 실질 국민총생산(GNP)은 2.5%나 떨어졌다. 중서부 전역에서, 제네럴 일렉트릭사 및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사와 같은 주요한 회사들이 근로자들을 해고했다. 석유 위기도 이러한 경기후퇴를 나타나게 한 한 요인이었다. 미국 생산성 증대율이 둔화됨에 따라, 독일 및 일본과 같은 미국의 경제적 라이벌들이 세계무역에서 보다 많은 몫을 차지했다. 미국의 외국산 상품 소비가 격증되었다.
농민들도 어려운 시기의 고통을 받았다. 생산이 소수의 수중에 집중됨에 따라, 농민 수는 줄어들었다. 1970년대에, 미국 농민들은 인도, 중국, 소련, 그리고 농산물 부정으로 고통받고 있는 기타 국가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토지를 사들이고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해 자금을 많이 차입했다. 그 후 유가가 올라서 농산물 생산비가 올라갔으며, 1980년의 범세계적인 경제침체로 해서 농산물의 수요가 줄어들었다. 농민들은 빚 안 지고 살아가느라고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떨어지는 유가와 함께 1982년 내내 계속된 심한 경기후퇴는 하나의 중요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카터 대통령 시정 기간 중에 시작되었던 천정부지의 인플레를 그것이 억제했다. 1983년 말엽에 일부 경제부문의 상태는 좋아졌으며, 1984년 초엽에는 경제가 원상태로 회복되었고,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이래 환경 훼손 없는 경제성장의 가장 긴 시기 중의 하나에 진입했다. 일본은 일본 자동차의 대미 수출에 자율적인 쿼터제를 실시한다는데 동의했다. 연방정부의 감세 조치에 따라, 소비자 지출이 증가되었다. 낙관적인 매기 폭증 현상이 나타나서 주식시세는 앙등했다. 경제회복이 시작된 후 5년 동안, GNP는 연간 성장율 4.2%로 증대되었다. 연간 인플레율은 1983년부터 1987년까지의 기간 중에 3% 내지 5%에 머물러 있었는데, 1986년도만은 예외로 2% 미만, 즉 수십년 내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었다. 1980년대에 이 나라의 GNP는 상당히 증대되었으며, 1982년부터 1987년까지의 기간중에 미국경제가 창출한 새로운 일자리 수는 1,300만 개를 웃돌았다.
그러나, 이러한 고르지 않은 성장율은 적자지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 시정하에서 미국의 채무는 거의 3배로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국부증대 현상은 최고 소득 그룹에서만 나타났다. 낮은 수준의 기술 및 반숙련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들이 경제로부터 제거되거나, 사회의 여타 부문의 발전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게 됨에 따라, 대부분의 빈곤층 및 중산층 가구들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보다 낮은 세금 공약이 확고부동한 레이건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 중에 75년만에 가장 포괄적인 연방 세제개혁안에 서명했다. 민주당원으로부터나 공화당원으로부터나 다같이 폭넓게 지지를 받은 이 세제개혁안은 소득세율을 낮추고, 소득에 따라 분류되는 납세계층제를 간소화하고, 탈세 구멍들을 막음으로써 저소득 미국민들에게 보다 고정하게 과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경제가 호전되었는데도 만성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이득을 얻지 못했다. 농민들은 계속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 1986년과 1988년의 심한 가뭄은 그들의 어려움을 더욱 증가시켰다.
감세 및 정부 보건지출의 증가와 아울러 군사예산 증대는 연방정부가 매년 거두어들인 세수보다 훨씬 더 많은 연방정부 지출을 초래했다. 일부 분석가들은 이러한 적자는 민주당이 추구한 국내지출 증대를 막기 위한 계획적인 행정부 전략의 일부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의회의 민주당 의원들과 공화당 의원들은 다같이 이러한 지출의 삭감을 거부했다. 적자는 1980년의 740억 달러로부터 1986년의 2,210억 달러로 치솟았다가 1987년의 1,500억 달러로 다시 내려갔다. 1987년 말엽의 주식시장 붕괴는 경제안정에 대한 의심을 극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외교정책에서 이 나라를 위하여 보다 독단적인 역할을 추구했으며, 초기의 시험 장소는 중미였다. 게릴라 반도들이 엘살바도르 정부를 전복시킬 기세를 보이자, 미국은 엘살바도르에 경제원조 및 군사훈련 계획을 제공했다. 미국은 또한 민선 민주정부로 이행하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는데, 활력적인 우익 암살대들을 억제하려는 노력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미국측의 지원은 정부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엘살바도르에서의 폭력의 수준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으며, 1989년 말엽에는 오히려 증대되었다. 그러나 쌍방은 1992년초에 평화협정에 합의했다.
미국의 대니카라과 정책은 훨씬 더 많은 논난의 대상이어다. 1979년 '산디니스타'로 자칭하는 혁명전사들이 억압적인 우익 소모사 정권을 타도했다. 산디니스타 정부는 쿠바 및 소련과의 군사적 유대를 단절하고, 민주적 개혁을 위하여 니카라과 정치 체제를 개방하라는 미국측 요구를 거절했다. 지역평화 노력의 초저은 '콘트라'로 알려진 반산디니스타 저항 세력에 대한 지원으로 옮겨졌다. 의회는 이 정책에 관해서 열띤 정치적 논쟁을 한 후에, 1984년 10월에 '콘트라'에 대한 모든 군사원조를 종결했지만 인도주의적인 지원은 계속되었다. 1986년 가을 의회는 행정부 측의 압력을 받아서 태도를 번복하여 '콘트라'에 대한 군사원조비 1억 달러를 승인했다. 그러나, 전장에서의 성공의 부재, 인권침해 비난, 그리고 이란에 대한 비밀 무기 판매 대금이 '콘트라'에 전용되어 온 사실의 탄로 등으로 해서 반산디니스타 게릴라를 위한 군사원조 계속에 대한 의회에서의 정치적 지지 근거가 사라졌다.
그 후, 조지 부시 행정부는 '콘트라'를 위한 군사원조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아예 포기해버렸다. 부시 행정부는 또한 비올레타 차모로가 이끈 재야 정치연합을 지지했는데, 이 정치연합은 1990년 2월에 실시한 선거에서 산디니스타를 누르고 놀랄 만한 승리를 거두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다행히도 과테말라에서부터 아르헨티나에 이르기까지 중남미 전역에서의 민주주의 복귀 현상을 목격했다. 하지만,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출현은 중남미에 국한되지 않았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코라손 아키노의 "민중의 힘"(people power) 운동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독재정권을 타도했으며, 한국에서의 선거는 30여년 동안의 군사통치를 종식시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논란의 대상인 "건설적인 관여"정책에 의한 인종차별정책 종결을 권장하려는 레이건 행정부의 노력에 마주쳤을 때에 여전히 비타협적이었다. 1986년 아무런 진전이 없어서 실망한 미국의회는 레이건 대통령이 거부한 법안을 재가결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일련의 경제적 제재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1988년 12월 레이건 행정부의 마지막 수주일 동안에 이르러 비로소 여러 해 동안의 꾸준한 미국의 거중 조정이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나미비아 영토의 역사적인 평화적 해결 및 독립에 도움이 되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노골적으로 반공 언사를 사용했지만, 직접적인 군사력 사용은 비교적 자제하는 편이었다. 19833년 10월 25일 그레나다의 이웃 나라들의 긴급한 지원 호소가 있은 후 미군은 카리브해의 섬나라 그레나다에 상륙했다. 이러한 조치는 그레나다의 좌익 수상이 그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지향 정당 당원들에 의하여 암살된 후에 취해졌다. 미군은 단기간의 전부 끝에 수백명의 쿠바 군인들과 건설요원들을 사로잡았으며, 소련이 공급한 무기의 저장소들을 점거했다. 1983년 12월 최후의 미군 전투부대가 그레나다를 떠났는데, 그레나다는 1년 후에 민주적인 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허약하고 온건한 친서방 정부를 지지하려고 시도했던 레바논에서의 미국의 군사적 노력은 1983년 10월 테러리스트의 폭파작전으로 미해병대원 241명이 피살되자 비극적으로 끝났다. 1986년 4월 미해군 및 공군 비행기들은 리비아의 사주를 받은 테러리스트들의 유럽 주둔 미군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리비아의 트리폴리시 및 벵가지시 목표물들을 폭격했다.
페르시아만에서는 미-이란 관계의 악화와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해서 이 지역의 미해군 활동 무대가 열렸다. 처음에는 미국이 쿠웨이트의 유조선대를 보호해달라는 쿠위에트측의 요청에 응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서유럽 해군 함정들과 함께 페르시아만을 왕래하는 유조선의 호위선들과 기타 중립국 선박들을 호송함으로써 지극히 중요한 해상 운송로를 계속 열어놓게 되었다.
대소 관계에서 레이건 대통령이 선언한 정책은 힘에 의한 평화 정책이었다. 냉전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잇던 그는 자기가 "사악한 제국"이라고 명명한 나라(소련)를 다룰 때에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두 개의 사건이 미소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즉, 1981년 12월 폴란드의 자유로조 '솔리다리티' 운동 탄압 사건과, 1983년 9월 1일 소련 전투기가 항로를 이탈한 민간 항공기 대한항공 007기를 격추한 사건이다. 미국은 또한 소련의 계속적인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규탄했으며, 그곳의 무자히딘(회교 반군) 저항 세력을 지원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레이건의 첫 임기중에 소련의 미사일 배치에 대항하기 위한 중거리 핵미사일 유럽 배치를 포함하여, 대규모의 방위력 증강을 위해 미증유의 거액을 소비했다. 그리고 레이건 대통령은 1983년 3월 23일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중 가장 피열하게 토의된 정책 결정 중의 하나에서, 대륙간 탄도 유도탄을 막기 위해 레이저 광선 무기 및 고에너지 발사체와 같은 발달된 과학기술을 연구할 수 있는 '전략방위계획'(SDI) 연구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많은 과학자들이 SDI의 과학기술상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경제전문가들은 이에 관련된 어마어마한 거액을 지적했지만, 레이건 행정부는 그 계획을 계속 추진했다.
레이건은 1984년에 재당선된 후 군비통제에 관한 그의 경직된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미국의 방위력증강과 경쟁하기 위해 소련 경제가 필요로 하는 경비의 수준을 소련이 지탱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일부 원인이 되어 소련은 쉽사리 합의를 보게 되어있었다. 1985년 11월 레이건 대통령은 제네바에서 소련의 새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그들은 중거리 핵전력에 관한 잠정 협정과, 아울러 공격용 전략핵무기의 50% 감축을 추구한다는 데에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1987년 12월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핵무기의 파괴를 규정하고 있는 중거리 핵전력(INF) 조약에 서명했다.
전략방위계획(SDI)은 레이건 행정부에게 문제거리였지만, 우주에서의 기타 노력들은 보다 전도유망한 것이었다. 1981년에 미국은 우주 왕복선 '콜롬비아'호 즉, 최초의 재사용 가능 유인 우주선을 발사했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의 기간 중에, 이 우주 왕복선은 우주 비행사들의 실험, 사진 촬영, 그리고 궤도를 돌고 있는 동안의 인공위성의 발사, 회수, 수리 등과 같은 비상한 여러 가지 기능을 입증해보였다. 그러나 1986년 1월 비극이 일어났다.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가 이륙한지 73초 만에 폭발하여 우주 비행사 6명과, 우주 최초의 보통 시민이 될 뻔한 교사가 즉사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안전을 위해 우주 왕복선의 재설계에 착수했지만, 우주 왕복선의 비행은 무기연기되었다. 미국이 1989년 말엽 우주 왕복선 '디스커버리'호를 발사하기까지에는 이 우주 왕복선의 발사 시스템 및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300여 가지나 변경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 레이건 행정부의 가장 심각한 외교정책 문제가 발생했다. 1987년에 미국민들은 이란의 호메이니 정부가 조종하고 있는 과격한 단체들이 레바논에 억류하고 있는 미국인 인질들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한 한 시도로서 행정부가 비밀리에 이란에 무기를 판매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사를 해본 결과, 이 무기판매 대금이 의회가 이러한 군사원조를 금지하고 있던 기간 중에 니카라과의 콘트라에게 전용되었다는 사실도 나타났다.
그 후 상하양원합동위원회에서의 이란-콘트라 청문회들에서는 중동 및 중미 지역에서의 미국 외교정책 이익을 정의하는 폭넓은 문제와, 아울러 대이란 무기 판매의 불법성 유무 문제가 심의되었다. 광의로 볼 때, 이란-콘트라 청문회들은 14년 전의 상원 워터게이트 청문회와 마찬가지로, 국민에 대한 정부의 책임 문제와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적절한 균형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미국은 주식시세가 22%나 폭락하여 1930년대의 세계대공황이 뒤따른 1929년의 엄청난 주식시장 붕괴를 즉시 상기시킨 소위 "불길한 월요일"인 1987년 10월 19일 경제침체의 고통을 당했다. 이러한 주식시장 붕괴는 미국 국제무역 적자 및 연방정부 예산 적자에 대한 걱정, 법인 및 개인 채무의 높은 수준에 대한 염려, 그리고 특정 상황이 발생할 경우 컴퓨터가 대량의 주식의 매입이나 매각을 자동적으로 명령하는 "프로그램 거래"로 알려져 있는 새로운 주식시장 기술혁신 등이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괄목할 만하게 단기간에 회복되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주식시장으로부터 보다 더 안전한 형태의 투자쪽으로 옮겨갔으며, 경기후퇴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제로, 경제 성장은 지속되었으며, 1988년 6월 실업율은 14년만에 5.2%로 떨어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 인기가 매우 높았었지만, 미국헌법에 따라서 1988년에 다시 출마할 수 없었다. 8년 동안 그의 부통령으로 재직했던 그의 정치적 후계자인 조지 부시는 레이건의 인기 덕을 크게 봤으며, 41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부시는 레이건 대통령이 초래한 번영의 계속을 유권자들에게 약속하고 선거운동을 했으며, 자기의 전문지식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마이클 듀카키스보다 더 낫게 미국 방위를 강력하게 뒷받침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매사추세츠 주지사 듀카키스는 불우한 미국민들이 경제적으로 해를 입고 있으며, 정부는 연방정부 채무 및 방위지출을 억제하는 한편, 이러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민들은 새로운 증세가 없을 것임을 약속하는 부시 후보의 메시지에 마음이 훨씬 더 끌렸다. 선거에서 부시는 54% 대 46%의 일반투표 差로 승리했다.
부시 대통령은 첫 임기중에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계획에 충실한 세제, 지출, 채무 정책들을 추구함으로써 보수주의적인 재정 계획을 따랐다. 그러나, 터무니없이 방대한 예산적자와 적자감축 원칙으로 해서, 부시 대통령은 정부지출 삭감을 요구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새로운 예산 항목들을 거의 허용할 수 없는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국정부에게 비용이 가장 적게 들게 하는 행정부 정책들만이 가장 잘 진척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환경보호 및 교육 문제들, 즉 민간산업과 지방자치체 및 주정부가 그 대부분의 비용을 지불하는 문제들에 관해서 정책 변경책을 내놓았다. 1990년 11월 부시 대통령은 도시 스모그, 자동차 배기가스, 유독성 대기오염, 산성비 등에 관한 새로운 연방 기준을 시행하되, 그 비용의 대부분은 산업측의 오염자들이 부담하도록 하는 포괄적인 법안에 서명했다. 그는 신체장애자들을 위해 공공건물 등에 신체장애자들이 접근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확보해주되, 그 비용은 기업체에게 부담시키는 법안에 서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한 자발적인 사회적 선행, 즉 그의 기억할 만한 문구인 이른바 "수많은 자선의 불빛"(a thousand points of light)을 권장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연방정부 예산적자를 억제하려는 부시 행정부의 노력은 문제를 보다 많이 안고 있었다. 어려움을 발생시킨 한 원인은 상호신용금고업의 위기에 있었다. 사기, 경영실책, 엄격하지 않은 규정, 그리고 1980년대 초엽 및 중엽의 미국의 특정 지역들의 경제적 하강 등으로 해서 상호신용금고들의 채무변제 불능(파산)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1970년대 말엽에 존재하던 3,100여개의 이러한 기관들 중에서, 1990년 6월 30일 현재까지 존속된 기관들은 2,453개에 불과했다. 1993년에 이르러, 파산한 저축기관들의 매각비 및 정리비 총액 -이들 기관의 예금에 대한 지불보증은 정부가 해주었음- 은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즉, 3,000억 달러 내지 5,000억 달러에 달했었다.
1990년 1월 부시 대통령은 그의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민주당은 행정부 예산안이 너무나 낙관적이며, 적자감축 원칙을 실행하자면 증세와 아울러 방위 지출의 격감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산 협상은 지연되었으며, 6월에 이르러 -부시 후보가 선거운동 중에 증세가 없을 것임을 약속했는데도 불구하고- 부시 대통령은 국가경제의 변화하는 상황은 증세가 포괄적인 예산안의 일부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고 의회 지도자들에게 말했다.
예산안에는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경기후퇴 현상, 상호신용금고업 구출 작업으로 해서 생긴 손실액, 그리고 메디케어(고령자 의보제도) 및 메디케이드(저소득자 및 신체장애자 의보제도)를 위한 보건비 증대 등이 한데 뭉쳐서 모든 적자 감축, 조치들을 상쇄하고, 1991년도에 적어도 전년도(1990)만큼의 적자를 만들어 냈다.
1980년대 말엽의 초강대국들의 관계는 동유럽의 정치적 소요의영향을 받았다. 민주적 개혁을 위한 민중 폭동의 결과로 그 지역 전역의 공산주의 정부들이 몰락하는 것을 미국과 세계는 지켜보았다.
1989년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말타섬에서 개최한 미소 정상회담은 성공적이었지만, 1990년에 미소 관계에서 이루어질 비상한 업적을 예언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시 대통령은 1월의 그의 연두교서에서, 유럽 주둔 미군을 19만 5,000명으로 감축할 의도를 발표했다. 2월에 부시 행정부는 군비통제와 동서독 통일에 관해서 소련과 협의했다. 7월 이내에, 소련은 갖가지 2국간 협의와 다자간 협의를 한 후에 소련의 전시 권리들을 포기하고,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정식 회원국 자격을 가진 통일독일을 수락했다. 독일에 관한 "최종해결 조약"(The Treaty on the Final Settlement)이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조인되었다.
유럽 안보협력회의(CSCE)의 3일간의 정상회담에서, 1990년 11월 19일 부시 대통령과 21개국 국가수반들은 '유럽 주둔 재래식 군대(CFE)에 관한 조약'에 서명했다. 이 CFE 조약은 나토와 구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이 대서양에서부터 우랄산맥에 이르기까지 배치해놓은 수천 대의 탱크, 항공기, 각종 포 등에 관한 가장 복잡하고 대규모인 군비통제 조약 중의 하나였다.
그 후, 1991년 7월 31일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모스크바에서 미소 양측의 비축 핵무기를 30% 내지 40% 감축할 것을 명령한, 장기간 협상되던 전략무기 감축조약(START)에 섬여함으로써 미국은 소련과의 마지막 주요한 군비통제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군비 감축마저도 모든 다탄두 미사일을 2003년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없애기로 한 보리스 옐친 새 러시아 연방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 간의 합의로 해서 더 줄어들었다. 이 두 개의 협정으로 해서 핵탄두의 수는 3분의 2가 줄어들어 약 2만 1,000개로부터 6,000개 내지 7,000개로 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미소 간의 핵대결 대신에 핵물길 처리와 핵확산에 대한 상존하는 염려가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냉전은 사실상 끝났다.
냉전의 종식으로 생긴 행복감은 1990년 8월 2일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해서 격감되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과 이것이 사우디 아라비아 및 군소 페르시아만 국가들에 대해 제기하는 위험성은 미국의 중요한 국익의 하나를 위협했다. 왜냐하면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대체로 그 유류 공급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의 행동을 강력히 규탄하고, 이라크의 즉각적이고도 무조건의 철수를 요구했다. 유엔 안보이사회 긴급회의는 이라크를 규탄하고, 휴전을 촉구하고, 그리고 쿠웨이트로부터의 이라크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그 후 8월에,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합병을 선언하고, 쿠웨이트의 모든 외국 공관의 폐쇄를 명령하고, 쿠웨이트의 미국인들과 영국인들을 인질로 삼기 시작했다. 8월 8일 부시 대통령은 전국의 텔레비전 방송에서 미군의 중동 배치를 발표했다. 그런 다음, 부시 대통령은 중동은 물론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지역으로부터의 군대들과 함께, 현대의 가장 비상한 군사적 및 정치적 연합세력 중의 하나를 규합하려고 노력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후 수주일 동안에,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의 침공행위를 규탄하고, 이라크에 대해 광범위한 경제제재를 가하기로 하는 12개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1월 29일에 통과된 12번째의 결의안은 이라크가 1991년 1월 15일 까지 쿠웨이트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경우 유엔 회원국들에 의한 무력사용을 승인했다. 새로운 미소 관계가 이라크의 침공행위를 저지할 수 있는 유엔 조치를 위해 필요한 조건을 제공했다. 양국간의 합의가 없었더라면, 유엔은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을 결코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의회 의원들은 페르시아 만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다하기를 부시 대통령과 국제사회에 공적으로 요구했다. 기초에 깔려 있는 문제는 미국헌법에 관한 문제였다. 즉, 미국헌법은 선전포고권을 입법부에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기에, 미국은 특히 월남에서 이러한 의회의 명령 없이 무력 충돌에 거듭 말려들게 되었다. 일부 의원들은 안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다른 의원들은 의회가 원하는 것은 미국이 개전하게 되는 장소와 때와 조건에 있어서의 발언권이지, 선전포고 자체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유엔이 이라크에게 통고한 최종 기한 3일 전인 1991년 1월 12일 의회는 부시 대통령에게 가장 명백하고도 포괄적인 개전권에서 그가 추구한 권한을 부여했는데, 이것은 약 반세기 만에 미국 대통령에게 부여된 개전권이었다.
유엔 최종 기한이 지난지 24 시간도 채 안되어서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이끈 한 달 남짓 계속된 대파괴적인 공중전에 의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은 쿠웨이트 해방에 성공했다. 이에 장갑부대 및 공수 보병대들의 대규모 쿠웨이트-이라크 침공이 뒤따랐다. 연합군은 100시간 밖에 계속되지 않은 지상전에서, 우월한 속도, 기동성, 화력 등으로 이라크군을 압도해버렸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군사적인 목표는 달성했지만, 승리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여전히 권좌에 머물러 있었으며, 전쟁 발발 후 반란을 일으키고 있던, 북부의 쿠르드족과 남부의 회교 시아파 신도들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있었다. 이라크인들이 고의로 방화하여 불타고 있는 수백개의 유전들은 1991년 11월에 이르러서 소화작업이 끝났다. 사담 정권은 또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들에 따라 활동하고 있으며, 핵시설과 대량적인 비축 화학무기가 포함된 이라크의 대량 파괴무기의 소재 확인 및 파괴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유엔 시찰단원들을 방해하려고 꾀했다.
그러나 간접적인 면에서 미국은 걸프전으로 해서 아랍 국가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대표단 등을 설득하여 복잡하고 서로 얽힌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마침내 이 지역의 복잡하고 서로 얽힌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마침내 이 지역의 영속적인 평화를 초래할 수 있는 직접협상들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991년 10월 30일 스페인의 마드리드시에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 협상은 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간의 역사적인 협정을 초래한 노르웨이에서의 비밀협상 무대를 마련했으며, 그 협정은 1993년 9월 13일 백악관에서 서명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또한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 장군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1989년 12월 20일의 미국의 단기간의 파나마 침공에 대한 폭넓은 초당적인 의회측 지지를 받았다. 1980년대에, 코카인 중독은 전염병에 버금갈 정도로 만연되었으며, 부시 대통령은 "마약에 대한 전쟁"을 그의 국내 과제의 중심으로 삼았다. 미국은 노리에가가 마약 밀수활동에 관련되어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파나마 침공에 의하여 노리에가를 재판에 회부하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파나마를 침공한 이유에는 이 밖의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부시 대통령의 목적 중의 하나는 노리에가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길레르모 엔다라가 이끄는 정부로 대체시키려는 데에 있었다. 엔다라의 대통령 당선을 선거 후에 노리에가가 무효화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또한 미국인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하고,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일에 도움을 주고, 긔록 파나마 운하조약을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 미군의 파나마 파병을 명령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노리에가는 마침내 미국 관헌 당국에 넘겨졌으며, 후에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시의 연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마약 불법거래 및 부정한 돈벌이의 죄명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부시 행정부는 멕시코 및 캐나다와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협상으로 경제면에서 진전을 이룩했는데, 이 협정은 클린턴 행정부에서 치열한 비준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노동조합들은 NAFTA가 미국 일자리 수출을 촉진시키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으며, 환경보호론자들은 이 협정이 산업공해 통제력이 이완되어 있는 지역들로 산업들이 이동하도록 만드는 유인을 산업들에게 제공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와 클린턴 행정부는 NAFTA가 보다 낮은 비용으로 상품과 서비스(용역)을 보다 많이 유통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이 세 나라(미국, 캐나다, 멕시코)의 산업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보다 더 갖게 되도록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3년 말에 전국적인 활발한 토론을 거친 끝에 의회에서 승인된 NAFTA는, 결국에 가서 서반구 전역의 자유무역을 초래할 수 있게 될 미래의 무역협정들을 위한 하나의 시험장으로 간주되고 있다.
1992년의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을 때, 미국민들은 자신들이 4년 전에는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방식으로 변화된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냉전의 낯익은 상징들, 즉 베를린 장벽에서부터 끊임 없는 심한 경계의 대상이 되어왔던 대륙간 탄도 미사일 및 폭격기들에 이르기까지 냉전을 일깨워주는 것들은 사라져버렸다. 동유럽은 독자적으로 되었고, 소련은 해체되었으며, 독일은 통일되었고, 아랍인들과 이스라엘은 직접 협상을 하게 되었으며, 핵대결의 위협은 격감되었다. 마치 하나의 커다란 역사책 한 권이 닫히고, 또하나의 역사책 한 권이 열린 것 같았다.
그러나 국내에서, 미국민들은 덜 낙관적이었다. 즉 미국민들은 심각하고도 낯익은 문제들에 마주치고 있었다. 걸프전 후의 축하 행사 및 행렬들이 끝나게 되자, 미국은 자신이 1980년대 초엽 이래 가장 심각한 경기후퇴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과거에 가장 심한 타격을 받았던 제조업 부문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아니라, 중간경영층의 화이트칼라 근로자들 가운데서 실직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1992년에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을 때에도, 경제성장은 그해 말까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미미했으며, 이 나라의 여러 지역들은 여전히 경기후퇴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연방정부 적자는 증대일로의 보건비 지출로 해서 계속 증대되었다. 대부분의 미국민들은 자기들의 미래에 대해 심각한 비관론을 표명하고, 자기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과 댄 퀘일 부통령은 초기에 보수주의 저널리스트 패트릭 부캐넌의 도전을 받았지만, 공화당의 재지명을 쉽사리 얻었다. 민주당 측에서는 빌 클린턴 아칸소주지사가 난립한 후보들을 누르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았다. 클린턴은 일반적으로 가장 식견있고 달변인 환경보호론자 중의 하나로 인정된 앨 고어 상원의원(테네시주)을 자기의 러닝 메이트로 선정했다.
그러나 경제의 방향에 대한 이 나라의 깊은 불안감은 괄목할 만한 무소속 대통령 후보, 즉 텍사스주 부호 기업가 H. 로스 페로를 등장시켰다. 컴퓨터 및 정보처리 분야에서 큰 재산을 모은 페로는 경제문제, 주로 연방정부 적자를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미국정부의 무능에 대한 국민들의 좌절감을 노렸으며, 그의 지지자들은 미국 전주 50개주의 입후보자 명단에 그의 성명이 오를 수 있을만큼 충분한 수의 지지자 서명을 모으는 일에 성공했다. 페로는 7월의 대통령 선거전의 후보명단에서 탈퇴했다가 가을에 다시 출마 의사를 밝힘으로써 그나마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하던 기회마저 헛되게 했지만, 그의 존재로 해서 경제문제들은 계속 전국적인 논쟁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은 으레 쟁점, 이미지, 인품 등이 혼합된 싸움인데, 그 초점이 이 나라의 경제적 장래에 강하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1992년의 대통령 선거운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시의 재선 노력은 현직 정부통령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일련의 아이디어들, 적 경험과 신뢰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세대 간의 싸움이었다. 아마 제 2차 세계대전 중 군에 복무한 경력을 가진 마지막 미국 대통령일지도 모르는 68세의 조지 부시 후보는 군대 복무 경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월남전 반대 항의운동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46세의 젊은 도전자 빌 클린턴 후보와 마주쳤다. 부시 후보는 대통령 및 총사령관으로서의 자기의 경험을 강조하면서 클린턴 후보의 판단력과 품위부족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한편, 빌 클린턴 후보는 선거 정치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테마의 하나인 '변화를 중심으로 하여 자기의 선거운동을 추진했다. 클린턴은 청년 시절에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는데, 30년 후에 자신의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의식적으로 변화를 받아들이기를 미국민들에게 요구하는 그의 언설의 대부분은 1960년대의 케네디 후보의 언설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같았다.
12년 동안의 아칸소 주지사로서 클린턴 후보는, 여론조사에 따르면 바로 부시 대통령의 주된 취약점인 경제성장, 교육, 보건 문제 등과 씨름해온 자기의 경험을 내세울 수 있었다. 부시 후보는 보다 낮은 시금과 정부 지출 삭감에 입각한 경제계획을 제안했지만, 클린턴 후보는 부유층에 대한 보다 높은 과세와, 이 나라의 생산성 및 경제성장을 증대시킴으로써 적자를 줄이게 될 것으로 생각했던 교육, 운수, 통신에의 투자에 대한 지출 증가를 제안했다. 마찬가지로, 클린턴의 보건비 통제책도 부시 후보의 안보다 훨씬 더 많은 연방정부 개입을 필요로 했다.
클린턴은 10월의 부시 대통령 및 로스 페로와의 세 차례에 걸친 텔레비전 토론에서는 물론, 선거운동 기간 내내 '변화'의 테마를 성공적으로 국민들의 마음에 주입시켰다. 11월 3일 빌 클린턴은 일반투표의 43%를 얻은데 불과했지만, 제 42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미국은 대서양안을 껴안고 있는,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한 무리의 식민지들이던 기원 당시부터 괄목할 만한 변화를 거쳐서, 정치분석가 벤 와텐버그의 이른바 "최초의 세계적인 국가"(the first universal nation), 즉 전세계의 모든 국민성 및 인종 집단을 나타내고 있는 약 2억 5,000만 인구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또한 경제적, 과학기술적, 문화적, 인구학적, 사회적 변화의 속도 및 정도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은 흔히 현대화 및 변화의 선구자가 되는데, 이 현대화와 변화는 점점 더 상호의존적이고, 상호관련적인 세계 속에서 다른 나라들과 사회들에 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미국은 또한 계속성에 대한 의식, 즉 미국 건국 당시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일련의 핵심적인 가치관들을 유지하고 있다. 그 가치관들에는 개인적 자유와 민주적인 정부에 대한 신념, 그리고 만인을 위한 경제적 기회 및 발전에 대한 공약이 들어 있다. 미국이 계속해야 할 과업들은 이 나라와 세계가 새로운 세기의 문턱에 다가섬에 즈음해서, 이 나라의 자유, 민주주의, 기회 등 가치 -풍요롭고 파란만장한 역사의 유산- 를 보호하고, 번성하도록 다짐하는 일일 것이다.
미국은 흔히 양대정당 제도로 생각되고 있다. 실제에 있어서 그렇다. 즉 1852년 이래 백악관은 4년마다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이 차지해왔다. 그러나, 동시에 이 나라에서는 그 동안에 제 3당과 군소 정당들이 많이 결성되었다. 예컨대, 1992년의 대통령 선거 기간중 에는 적어도 1개주 입후보자 명단에 58개 정당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이런 정당들 가운데는 무관심당(the Apathy), 회고당(the Looking Back), 뉴멕시코 금주당, 무소속 시민당, 버몬트 납세자당 등과 같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정당들이 들어 들어있었다.
일반적으로, 제 3당들은 단일 쟁점이나 일련의 쟁점들을 중심으로 하여 결성된다. 제 3당들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가지고 있을 때에 가장 잘 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제 3당들은 대통령직은 감히 바라보지 않으면서 자기들의 정치적 및 사회적 관심사를 선전·광고할 수 있는 정강을 추구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금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제 3당 대통령 후보는 공화당원인 디어도어 루스벨트였다. 그의 진보당, 즉 '불 무스'(큰 사슴) 혁신당은 1912년에 일반 투표수의 27.4%를 얻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자기 후계자로 손수 선정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에 환멸을 느끼게 된 공화당내 진보파는 루스벨트에게 1912년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획득을 추구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그렇게 해서 여러 예비선거에거 태프트를 패배시켰다. 그러나, 태프트는 공화당 조직을 조종하여 당의 대통령 후보 指名을 얻어냈다.
그 후 루스벨트 지지자들은 공화당과 결별하고 진보당을 결성했다. 루스벨트는 자기 자신이 '큰 사슴'(bull moose)처럼 원기왕성하다고 선언하면서(이때부터 이것이 정당의 상징이 되었음), "대기업" 규제, 여성들의 선걱권, 누진 소득세, 파나마 운하, 자연보호 등을 정강으로 내걸고 선거운동을 했다. 그의 노력은 태프트를 패배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화당의 표를 갈라놓음으로써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 후보의 당선에 도움을 주었다.
사회주의자들, 사회당도 일반 투표수의 6%를 얻음으로써 1912년에 그 최고세에 달했다. 다년간 계속 출마하는 사회당 대통령 후보 유진 뎁스는 운수 및 통신 산업의 공동소유권, 보다 짧은 근로시간, 고용 촉진을 위한 공공 사업계획 등을 주창함으로써 그해에 90만표를 웃도는 표를 얻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폭동 교사 행위로 수감된 뎁스는 1920년 감방에서 선거운동을 했는데, 뎁스나 그의 후계자들이나 1912년에 올린 것과 같은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로버트 라폴레트, 또 하나의 진보당원은 192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일반투표수의 16.65를 얻은 로버트 라폴레트 상원의원이었다. 장기간 농민들과 산업 근로자들을 위한 투사였으며, 대기업의 숙적이었던 라폴레트 의원은 제 1차 세계대전 후 진보당 운동을 다시 살리는 주동자였다. 사회주의자들과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혁신당(Bull Moose Party) 잔당은 물론, 농민들 및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은 라폴레트 의원은 철도와 천연자원의 국유화를 정강으로 내걸고 출마했다. 그는 또한 부유층에 대한 증세와, (노조의) 단체교섭권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는 일부 지역들에서 강세를 보였지만, 자기 출신 주인 위스컨신주에서만 승리했다.
헨리 월러스, 진보당은 1948년에 전농무장관이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 부통령이었던 헨리 월러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함으로써 당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잠시 동안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상무장관이었던 그는 소련에 대한 트루먼 대통령의 단호한 태도에 반대했기 때문에 파면되었다. 월러스 후보의 1948년의 정강은 냉전, 마셜 계획, 대기업 등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흑인들 및 여성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종식시키기 위한 운동을 하고, 최저임금제를 지지하고, 하원 비미활동위원회의 폐지를 요구했다. 그는 그를 지지하던 미국 공산당과의 인연을 끊지 못한 탓으로 인기가 떨어졌으며, 그가 얻은 표수는 일반투표의 2.4%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딕시크래트(미국남부의 민주당 이반파), 사우드 캐롤라이나주의 스트롬 더몬드지사가 이끈 주권 확대론자들, 즉 남부 민주당 이반파들도 이와 똑같은 비율의 표수 밖에 얻이 못했다. 진보당과 마찬가지로, 남부 민주당 이반파도 1948년에 민주당과 결별했다. 그러나, 남부 민주당 이반파는 두드러지게 색다른 단체였다. 그들이 민주당에 반대한 이유는 트루먼 대통령의 냉전 정책이 아니라, 그의 공민권 강령에 있었다. 남부 민주당 이반파 의 주요한 목표는 "주권 확대"를 내세웠지만, 실은 인권분리 정책과 그거을 지지한 "짐 크로우"법(흑인에 대한 인종차별법)을 계속하려는 데에 있었다.
조지 월러스, 1960년대의 인종분규와 사회적 격변은 또하나의 인권분리주의자인 남부(앨라매배마주)의 주지사 조지 월러스가 전국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월러스 주지사는 공민권, 자유진보주의자, 연방정부 등에 대한 다채로운 공격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일을 했다. 즉, 1968년에 범미 독립당을 창당한 그는 앨라배마주 주의회 의사당에서부터 그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시작하여 일반투표의 13.5%를 얻었다.
H. 로스 페로, 모든 제 3당은 주요한 정당들과 연방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최근의 미국사에서 이러한 감정이 1992년의 대통령 선거 때처럼 강렬했던 때는 별로 없었다. 텍사스 페로는 경제적 상식과 재정 책임에 관한 자기의 메시지를 각계각층의 미국민들에게 주지시킬 수 있는 교묘한 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페로 후보는 이 나라의 지도자들을 비아냥거리고, 자기의 경제적 메시지를 쉽사리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요약함으로써 어려움 없이 매스 미디어의 주목을 끌었다. 그의 선거운동 단체 "우리는 단합되어 있다"(United We Stand)에는 주로 자원자들이 들어가 있었으며, 재원은 그의 개인 재산이 뒷받침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富에 분개하기는커녕, 페로의 사업적인 성공과 그 성공이 특별 이익단체들에게 선거운동 자금을 간청하지 않아도 된 것을 찬양했다.
페로는 7월에 대통령 선거 경쟁에서 물러섰다. 그랬다가, 선거 실시 한 달 전에 다시 그 경쟁에 뛰어드는 그는 그때까지 제 3당 대통령 후보가 얻은 표수로서는 단연 최다표수였으며, 총투표수의 백분율로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1912년에 얻은 득표율(27.4%)에 다음가는, 1,900여만표를 얻었다.
변천하는 사회
수년, 아니면 수십년 전에 시작된 미국 사회구조의 변화는 19890년대에 이르러 뚜렷해졌다. 인구구성 성분과 미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업종 및 기술이 주요한 변화를 하고 있었다.
경제에서 서비스업의 우세 현상은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기에 50여년 동안 계속되어온 추세가 마침내 절정에 이르러, 미국의 전고용인의 4분의 3이 서비스 부문에서 -예컨대, 소매 점원, 사무직원, 교사, 의사 및 기타 보건 전문직원, 정부 공무원, 변호사, 법률 및 금융 전문가 등으로- 일했다.
서비스 부문 활동은 특정 유형의 과학기술, 즉 컴퓨터의 이용성 및 이용도의 증대로 해서 득을 보았다. 이것은 경제적 및 사회적 추세에 관해서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만큼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를 가진 정보시대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연방정부는 군사 및 우주 계획의 일부로서 컴퓨터 과학기술에 상당히 많은 투자를 했다. 1970년대 말엽에 캘리포니아주의 두 젊은 기업인이 자동차 차고에서 일하고 있다가 최초로 널리 시판된 가정용 컴퓨터를 조립하고, 그것에 '애플'(Apple)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산업혁신에 불을 붙였다. 1980년대 초엽에 수백만 개의 마이크로컴퓨터들이 미국의 기업체들과 가정에 파고들어갔으며, 1982년에 시사주간지 Time은 그 컴퓨터에 "올해의 기계"(Machine of the Year)라는 명칭을 붙였다.
한편, 철강 및 직물 산업과 같은 미국의 "굴뚝 산업"들은 쇠퇴하고 있었다. 미국 자동차 산업은 도요타(豊田), 혼다(本田), 닛산(日産) -이들의 대부분은 미국에 자기들의 공장을 세웠음- 등과 같은 매우 유능한 日本 자동차 제조업자들과의 경쟁으로해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1980년에 일본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미국 시장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1980년대 말엽과 1990년대 초엽에 이르러 비로소 미국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자기들의 라이벌인 일본 자동차 제조업자들의 비용효과 및 기술 기준에 뒤지지 않기 시작했으며, 지난 20년 동안 수입 자동차에 양보했던 국내 자동차 시장의 몫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으로 해서 득을 본 자는 소비자들이었지만 -생산비를 줄이려는 고통스러운 노력은 미국 자동차 산업에서의 수천명의 항구적인 실업을 의미했다.
인구 패턴도 변했다. 1946년경부터 1964년까지 계속된, 전후 "베이베 붐" 시기가 끝난 후, 전반적인 인구 증가율은 줄어들었으며, 인구는 보다 높은 연령이 되었다. 세대구성 상태도 변했다. 1980년에 가족세대의 백분율(%)은 떨어졌으며, 미국의 전세대수의 4분의 1은 인척 혈연 관계 없는 2, 3명의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비가족 세대"로 분류되었다.
새로운 이민들이 다른 방법으로 미국사회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1965년에 개혁된 이민정책은 그 초점을 서유럽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에 아시아 및 중남미 지역으로부터 새로 도착한 이민들의 수가 괄목할 만하게 증가되었다. 예컨대, 월남전 직후기에 월남 난민들이 미국으로 유입했다. 1980년에 80만 8,000명의 이민이 도착했는데, 이것은 60년만에 처음보는 최고 이민수였다. 이 나라는 또다시 全세계로부터 들어오는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1980년대에는 또다른 그룹이 기회 균등을 위한 투쟁의 적극적인 참가자가 되었다. 동성연애자들은 민권운동의 여러 전술을 사용하여 다른 그룹들이 요구한 것과 똑같은 것, 즉 차별대우로 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 흔히 압력이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예컨대, 1975년에 미국공무원 임용시험 위원회(USCSC)는 동성연애자 고용금지를 폐지했으며, 많은 주들이 차별대우 금지법을 제정했다. 반발이 일어났으며, 동성연애자들을 적대시하는 사건들이 나타나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후, 1981년에 인체의 면역체계를 파괴하는 가공할 질병인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가 발견되었다. 에이즈(AIDS)는 성행위나 혈액을 통해서 전염된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일반 국민들도 이 질병에 걸리기 쉽다는 것이 판명되었지만, 이 질병은 특히 동성연애자들이나 정맥주사약 사용자들이 아주 많이 걸렸다. 1992년에 이르러 에이즈로 사망한 미국인수는 15만명을 웃돌았으며,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는 30만명 내지 100여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에이즈는 결코 미국에만 국한된 질병이 아니었으며, 이 전염병을 다루려는 노력에는 전세계의 의사들과 의학 연구자들이 참가했다. 그들의 초기 성공 중의 하나(주로 미국과 프랑스의 연구 결과임)는 에이즈 병균을 분리시킨 다음, 혈액 공급의 보호를 확실케 하기 위한 실험을 발전시킨 일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국내 계획은 민간경제 부문이 규제의 속박에서 풀려나면 이 나라가 번영할 것이라는 그의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공급측" 경제, 즉 상품 및 용역의 보다 많은 공급은 경제성장으로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의 지지자인 레이건 대통령은 보다 많은 소비자 지출, 저축, 투자 등을 촉진시키기 위해 대폭적인 감세를 추구했다. 공급측 경제 전문가들은 감세가 기업체의 투자 증대, 수익 증대, 그리고 이러한 수익에 대한 과세에 의한 정부 세수 증대 등의 현상을 초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원에서는 공화당이 약간의 차로 다수파 세력이 되어 있고, 하원은 민주당원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레이건 대통령은 개인에 대한 세금을 3년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25%줄이는 감세안이 들어 있는 그의 경제 계획의 주요한 부분을 첫 임기중에 성공적으로 법제화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또한 이 나라의 군대를 현대화하고, 소련으로부터의 계속적이고도 점증되고 있는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방위비 지출의 대폭적인 증대를 추구했으며, 실제로 방위비 지출을 대폭적으로 증대시켰다.
경기후퇴는 레이건 대통령 시정 초기의 특색을 이루었으며, 이 나라의 거의 모든 부문을 강타했다. 실업율이 10%를 웃돌게 되고, 미국의 공장들의 약 3분의 1이 유휴 상태에 빠지게 되자, 1982년도의 미국의 실질 국민총생산(GNP)은 2.5%나 떨어졌다. 중서부 전역에서, 제네럴 일렉트릭사 및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사와 같은 주요한 회사들이 근로자들을 해고했다. 석유 위기도 이러한 경기후퇴를 나타나게 한 한 요인이었다. 미국 생산성 증대율이 둔화됨에 따라, 독일 및 일본과 같은 미국의 경제적 라이벌들이 세계무역에서 보다 많은 몫을 차지했다. 미국의 외국산 상품 소비가 격증되었다.
농민들도 어려운 시기의 고통을 받았다. 생산이 소수의 수중에 집중됨에 따라, 농민 수는 줄어들었다. 1970년대에, 미국 농민들은 인도, 중국, 소련, 그리고 농산물 부정으로 고통받고 있는 기타 국가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토지를 사들이고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해 자금을 많이 차입했다. 그 후 유가가 올라서 농산물 생산비가 올라갔으며, 1980년의 범세계적인 경제침체로 해서 농산물의 수요가 줄어들었다. 농민들은 빚 안 지고 살아가느라고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떨어지는 유가와 함께 1982년 내내 계속된 심한 경기후퇴는 하나의 중요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카터 대통령 시정 기간 중에 시작되었던 천정부지의 인플레를 그것이 억제했다. 1983년 말엽에 일부 경제부문의 상태는 좋아졌으며, 1984년 초엽에는 경제가 원상태로 회복되었고,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이래 환경 훼손 없는 경제성장의 가장 긴 시기 중의 하나에 진입했다. 일본은 일본 자동차의 대미 수출에 자율적인 쿼터제를 실시한다는데 동의했다. 연방정부의 감세 조치에 따라, 소비자 지출이 증가되었다. 낙관적인 매기 폭증 현상이 나타나서 주식시세는 앙등했다. 경제회복이 시작된 후 5년 동안, GNP는 연간 성장율 4.2%로 증대되었다. 연간 인플레율은 1983년부터 1987년까지의 기간 중에 3% 내지 5%에 머물러 있었는데, 1986년도만은 예외로 2% 미만, 즉 수십년 내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었다. 1980년대에 이 나라의 GNP는 상당히 증대되었으며, 1982년부터 1987년까지의 기간중에 미국경제가 창출한 새로운 일자리 수는 1,300만 개를 웃돌았다.
그러나, 이러한 고르지 않은 성장율은 적자지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 시정하에서 미국의 채무는 거의 3배로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국부증대 현상은 최고 소득 그룹에서만 나타났다. 낮은 수준의 기술 및 반숙련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들이 경제로부터 제거되거나, 사회의 여타 부문의 발전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게 됨에 따라, 대부분의 빈곤층 및 중산층 가구들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보다 낮은 세금 공약이 확고부동한 레이건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 중에 75년만에 가장 포괄적인 연방 세제개혁안에 서명했다. 민주당원으로부터나 공화당원으로부터나 다같이 폭넓게 지지를 받은 이 세제개혁안은 소득세율을 낮추고, 소득에 따라 분류되는 납세계층제를 간소화하고, 탈세 구멍들을 막음으로써 저소득 미국민들에게 보다 고정하게 과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경제가 호전되었는데도 만성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이득을 얻지 못했다. 농민들은 계속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 1986년과 1988년의 심한 가뭄은 그들의 어려움을 더욱 증가시켰다.
감세 및 정부 보건지출의 증가와 아울러 군사예산 증대는 연방정부가 매년 거두어들인 세수보다 훨씬 더 많은 연방정부 지출을 초래했다. 일부 분석가들은 이러한 적자는 민주당이 추구한 국내지출 증대를 막기 위한 계획적인 행정부 전략의 일부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의회의 민주당 의원들과 공화당 의원들은 다같이 이러한 지출의 삭감을 거부했다. 적자는 1980년의 740억 달러로부터 1986년의 2,210억 달러로 치솟았다가 1987년의 1,500억 달러로 다시 내려갔다. 1987년 말엽의 주식시장 붕괴는 경제안정에 대한 의심을 극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외교정책에서 이 나라를 위하여 보다 독단적인 역할을 추구했으며, 초기의 시험 장소는 중미였다. 게릴라 반도들이 엘살바도르 정부를 전복시킬 기세를 보이자, 미국은 엘살바도르에 경제원조 및 군사훈련 계획을 제공했다. 미국은 또한 민선 민주정부로 이행하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는데, 활력적인 우익 암살대들을 억제하려는 노력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미국측의 지원은 정부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엘살바도르에서의 폭력의 수준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으며, 1989년 말엽에는 오히려 증대되었다. 그러나 쌍방은 1992년초에 평화협정에 합의했다.
미국의 대니카라과 정책은 훨씬 더 많은 논난의 대상이어다. 1979년 '산디니스타'로 자칭하는 혁명전사들이 억압적인 우익 소모사 정권을 타도했다. 산디니스타 정부는 쿠바 및 소련과의 군사적 유대를 단절하고, 민주적 개혁을 위하여 니카라과 정치 체제를 개방하라는 미국측 요구를 거절했다. 지역평화 노력의 초저은 '콘트라'로 알려진 반산디니스타 저항 세력에 대한 지원으로 옮겨졌다. 의회는 이 정책에 관해서 열띤 정치적 논쟁을 한 후에, 1984년 10월에 '콘트라'에 대한 모든 군사원조를 종결했지만 인도주의적인 지원은 계속되었다. 1986년 가을 의회는 행정부 측의 압력을 받아서 태도를 번복하여 '콘트라'에 대한 군사원조비 1억 달러를 승인했다. 그러나, 전장에서의 성공의 부재, 인권침해 비난, 그리고 이란에 대한 비밀 무기 판매 대금이 '콘트라'에 전용되어 온 사실의 탄로 등으로 해서 반산디니스타 게릴라를 위한 군사원조 계속에 대한 의회에서의 정치적 지지 근거가 사라졌다.
그 후, 조지 부시 행정부는 '콘트라'를 위한 군사원조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아예 포기해버렸다. 부시 행정부는 또한 비올레타 차모로가 이끈 재야 정치연합을 지지했는데, 이 정치연합은 1990년 2월에 실시한 선거에서 산디니스타를 누르고 놀랄 만한 승리를 거두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다행히도 과테말라에서부터 아르헨티나에 이르기까지 중남미 전역에서의 민주주의 복귀 현상을 목격했다. 하지만,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출현은 중남미에 국한되지 않았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코라손 아키노의 "민중의 힘"(people power) 운동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독재정권을 타도했으며, 한국에서의 선거는 30여년 동안의 군사통치를 종식시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논란의 대상인 "건설적인 관여"정책에 의한 인종차별정책 종결을 권장하려는 레이건 행정부의 노력에 마주쳤을 때에 여전히 비타협적이었다. 1986년 아무런 진전이 없어서 실망한 미국의회는 레이건 대통령이 거부한 법안을 재가결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일련의 경제적 제재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1988년 12월 레이건 행정부의 마지막 수주일 동안에 이르러 비로소 여러 해 동안의 꾸준한 미국의 거중 조정이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나미비아 영토의 역사적인 평화적 해결 및 독립에 도움이 되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노골적으로 반공 언사를 사용했지만, 직접적인 군사력 사용은 비교적 자제하는 편이었다. 19833년 10월 25일 그레나다의 이웃 나라들의 긴급한 지원 호소가 있은 후 미군은 카리브해의 섬나라 그레나다에 상륙했다. 이러한 조치는 그레나다의 좌익 수상이 그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지향 정당 당원들에 의하여 암살된 후에 취해졌다. 미군은 단기간의 전부 끝에 수백명의 쿠바 군인들과 건설요원들을 사로잡았으며, 소련이 공급한 무기의 저장소들을 점거했다. 1983년 12월 최후의 미군 전투부대가 그레나다를 떠났는데, 그레나다는 1년 후에 민주적인 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허약하고 온건한 친서방 정부를 지지하려고 시도했던 레바논에서의 미국의 군사적 노력은 1983년 10월 테러리스트의 폭파작전으로 미해병대원 241명이 피살되자 비극적으로 끝났다. 1986년 4월 미해군 및 공군 비행기들은 리비아의 사주를 받은 테러리스트들의 유럽 주둔 미군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리비아의 트리폴리시 및 벵가지시 목표물들을 폭격했다.
페르시아만에서는 미-이란 관계의 악화와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해서 이 지역의 미해군 활동 무대가 열렸다. 처음에는 미국이 쿠웨이트의 유조선대를 보호해달라는 쿠위에트측의 요청에 응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서유럽 해군 함정들과 함께 페르시아만을 왕래하는 유조선의 호위선들과 기타 중립국 선박들을 호송함으로써 지극히 중요한 해상 운송로를 계속 열어놓게 되었다.
대소 관계에서 레이건 대통령이 선언한 정책은 힘에 의한 평화 정책이었다. 냉전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잇던 그는 자기가 "사악한 제국"이라고 명명한 나라(소련)를 다룰 때에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두 개의 사건이 미소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즉, 1981년 12월 폴란드의 자유로조 '솔리다리티' 운동 탄압 사건과, 1983년 9월 1일 소련 전투기가 항로를 이탈한 민간 항공기 대한항공 007기를 격추한 사건이다. 미국은 또한 소련의 계속적인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규탄했으며, 그곳의 무자히딘(회교 반군) 저항 세력을 지원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레이건의 첫 임기중에 소련의 미사일 배치에 대항하기 위한 중거리 핵미사일 유럽 배치를 포함하여, 대규모의 방위력 증강을 위해 미증유의 거액을 소비했다. 그리고 레이건 대통령은 1983년 3월 23일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중 가장 피열하게 토의된 정책 결정 중의 하나에서, 대륙간 탄도 유도탄을 막기 위해 레이저 광선 무기 및 고에너지 발사체와 같은 발달된 과학기술을 연구할 수 있는 '전략방위계획'(SDI) 연구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많은 과학자들이 SDI의 과학기술상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경제전문가들은 이에 관련된 어마어마한 거액을 지적했지만, 레이건 행정부는 그 계획을 계속 추진했다.
레이건은 1984년에 재당선된 후 군비통제에 관한 그의 경직된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미국의 방위력증강과 경쟁하기 위해 소련 경제가 필요로 하는 경비의 수준을 소련이 지탱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일부 원인이 되어 소련은 쉽사리 합의를 보게 되어있었다. 1985년 11월 레이건 대통령은 제네바에서 소련의 새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그들은 중거리 핵전력에 관한 잠정 협정과, 아울러 공격용 전략핵무기의 50% 감축을 추구한다는 데에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1987년 12월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핵무기의 파괴를 규정하고 있는 중거리 핵전력(INF) 조약에 서명했다.
전략방위계획(SDI)은 레이건 행정부에게 문제거리였지만, 우주에서의 기타 노력들은 보다 전도유망한 것이었다. 1981년에 미국은 우주 왕복선 '콜롬비아'호 즉, 최초의 재사용 가능 유인 우주선을 발사했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의 기간 중에, 이 우주 왕복선은 우주 비행사들의 실험, 사진 촬영, 그리고 궤도를 돌고 있는 동안의 인공위성의 발사, 회수, 수리 등과 같은 비상한 여러 가지 기능을 입증해보였다. 그러나 1986년 1월 비극이 일어났다.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가 이륙한지 73초 만에 폭발하여 우주 비행사 6명과, 우주 최초의 보통 시민이 될 뻔한 교사가 즉사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안전을 위해 우주 왕복선의 재설계에 착수했지만, 우주 왕복선의 비행은 무기연기되었다. 미국이 1989년 말엽 우주 왕복선 '디스커버리'호를 발사하기까지에는 이 우주 왕복선의 발사 시스템 및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300여 가지나 변경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 레이건 행정부의 가장 심각한 외교정책 문제가 발생했다. 1987년에 미국민들은 이란의 호메이니 정부가 조종하고 있는 과격한 단체들이 레바논에 억류하고 있는 미국인 인질들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한 한 시도로서 행정부가 비밀리에 이란에 무기를 판매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사를 해본 결과, 이 무기판매 대금이 의회가 이러한 군사원조를 금지하고 있던 기간 중에 니카라과의 콘트라에게 전용되었다는 사실도 나타났다.
그 후 상하양원합동위원회에서의 이란-콘트라 청문회들에서는 중동 및 중미 지역에서의 미국 외교정책 이익을 정의하는 폭넓은 문제와, 아울러 대이란 무기 판매의 불법성 유무 문제가 심의되었다. 광의로 볼 때, 이란-콘트라 청문회들은 14년 전의 상원 워터게이트 청문회와 마찬가지로, 국민에 대한 정부의 책임 문제와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적절한 균형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미국은 주식시세가 22%나 폭락하여 1930년대의 세계대공황이 뒤따른 1929년의 엄청난 주식시장 붕괴를 즉시 상기시킨 소위 "불길한 월요일"인 1987년 10월 19일 경제침체의 고통을 당했다. 이러한 주식시장 붕괴는 미국 국제무역 적자 및 연방정부 예산 적자에 대한 걱정, 법인 및 개인 채무의 높은 수준에 대한 염려, 그리고 특정 상황이 발생할 경우 컴퓨터가 대량의 주식의 매입이나 매각을 자동적으로 명령하는 "프로그램 거래"로 알려져 있는 새로운 주식시장 기술혁신 등이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괄목할 만하게 단기간에 회복되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주식시장으로부터 보다 더 안전한 형태의 투자쪽으로 옮겨갔으며, 경기후퇴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제로, 경제 성장은 지속되었으며, 1988년 6월 실업율은 14년만에 5.2%로 떨어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 인기가 매우 높았었지만, 미국헌법에 따라서 1988년에 다시 출마할 수 없었다. 8년 동안 그의 부통령으로 재직했던 그의 정치적 후계자인 조지 부시는 레이건의 인기 덕을 크게 봤으며, 41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부시는 레이건 대통령이 초래한 번영의 계속을 유권자들에게 약속하고 선거운동을 했으며, 자기의 전문지식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마이클 듀카키스보다 더 낫게 미국 방위를 강력하게 뒷받침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매사추세츠 주지사 듀카키스는 불우한 미국민들이 경제적으로 해를 입고 있으며, 정부는 연방정부 채무 및 방위지출을 억제하는 한편, 이러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민들은 새로운 증세가 없을 것임을 약속하는 부시 후보의 메시지에 마음이 훨씬 더 끌렸다. 선거에서 부시는 54% 대 46%의 일반투표 差로 승리했다.
부시 대통령은 첫 임기중에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계획에 충실한 세제, 지출, 채무 정책들을 추구함으로써 보수주의적인 재정 계획을 따랐다. 그러나, 터무니없이 방대한 예산적자와 적자감축 원칙으로 해서, 부시 대통령은 정부지출 삭감을 요구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새로운 예산 항목들을 거의 허용할 수 없는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국정부에게 비용이 가장 적게 들게 하는 행정부 정책들만이 가장 잘 진척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환경보호 및 교육 문제들, 즉 민간산업과 지방자치체 및 주정부가 그 대부분의 비용을 지불하는 문제들에 관해서 정책 변경책을 내놓았다. 1990년 11월 부시 대통령은 도시 스모그, 자동차 배기가스, 유독성 대기오염, 산성비 등에 관한 새로운 연방 기준을 시행하되, 그 비용의 대부분은 산업측의 오염자들이 부담하도록 하는 포괄적인 법안에 서명했다. 그는 신체장애자들을 위해 공공건물 등에 신체장애자들이 접근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확보해주되, 그 비용은 기업체에게 부담시키는 법안에 서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한 자발적인 사회적 선행, 즉 그의 기억할 만한 문구인 이른바 "수많은 자선의 불빛"(a thousand points of light)을 권장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연방정부 예산적자를 억제하려는 부시 행정부의 노력은 문제를 보다 많이 안고 있었다. 어려움을 발생시킨 한 원인은 상호신용금고업의 위기에 있었다. 사기, 경영실책, 엄격하지 않은 규정, 그리고 1980년대 초엽 및 중엽의 미국의 특정 지역들의 경제적 하강 등으로 해서 상호신용금고들의 채무변제 불능(파산)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1970년대 말엽에 존재하던 3,100여개의 이러한 기관들 중에서, 1990년 6월 30일 현재까지 존속된 기관들은 2,453개에 불과했다. 1993년에 이르러, 파산한 저축기관들의 매각비 및 정리비 총액 -이들 기관의 예금에 대한 지불보증은 정부가 해주었음- 은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즉, 3,000억 달러 내지 5,000억 달러에 달했었다.
1990년 1월 부시 대통령은 그의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민주당은 행정부 예산안이 너무나 낙관적이며, 적자감축 원칙을 실행하자면 증세와 아울러 방위 지출의 격감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산 협상은 지연되었으며, 6월에 이르러 -부시 후보가 선거운동 중에 증세가 없을 것임을 약속했는데도 불구하고- 부시 대통령은 국가경제의 변화하는 상황은 증세가 포괄적인 예산안의 일부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고 의회 지도자들에게 말했다.
예산안에는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경기후퇴 현상, 상호신용금고업 구출 작업으로 해서 생긴 손실액, 그리고 메디케어(고령자 의보제도) 및 메디케이드(저소득자 및 신체장애자 의보제도)를 위한 보건비 증대 등이 한데 뭉쳐서 모든 적자 감축, 조치들을 상쇄하고, 1991년도에 적어도 전년도(1990)만큼의 적자를 만들어 냈다.
1980년대 말엽의 초강대국들의 관계는 동유럽의 정치적 소요의영향을 받았다. 민주적 개혁을 위한 민중 폭동의 결과로 그 지역 전역의 공산주의 정부들이 몰락하는 것을 미국과 세계는 지켜보았다.
1989년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말타섬에서 개최한 미소 정상회담은 성공적이었지만, 1990년에 미소 관계에서 이루어질 비상한 업적을 예언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시 대통령은 1월의 그의 연두교서에서, 유럽 주둔 미군을 19만 5,000명으로 감축할 의도를 발표했다. 2월에 부시 행정부는 군비통제와 동서독 통일에 관해서 소련과 협의했다. 7월 이내에, 소련은 갖가지 2국간 협의와 다자간 협의를 한 후에 소련의 전시 권리들을 포기하고,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정식 회원국 자격을 가진 통일독일을 수락했다. 독일에 관한 "최종해결 조약"(The Treaty on the Final Settlement)이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조인되었다.
유럽 안보협력회의(CSCE)의 3일간의 정상회담에서, 1990년 11월 19일 부시 대통령과 21개국 국가수반들은 '유럽 주둔 재래식 군대(CFE)에 관한 조약'에 서명했다. 이 CFE 조약은 나토와 구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이 대서양에서부터 우랄산맥에 이르기까지 배치해놓은 수천 대의 탱크, 항공기, 각종 포 등에 관한 가장 복잡하고 대규모인 군비통제 조약 중의 하나였다.
그 후, 1991년 7월 31일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모스크바에서 미소 양측의 비축 핵무기를 30% 내지 40% 감축할 것을 명령한, 장기간 협상되던 전략무기 감축조약(START)에 섬여함으로써 미국은 소련과의 마지막 주요한 군비통제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군비 감축마저도 모든 다탄두 미사일을 2003년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없애기로 한 보리스 옐친 새 러시아 연방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 간의 합의로 해서 더 줄어들었다. 이 두 개의 협정으로 해서 핵탄두의 수는 3분의 2가 줄어들어 약 2만 1,000개로부터 6,000개 내지 7,000개로 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미소 간의 핵대결 대신에 핵물길 처리와 핵확산에 대한 상존하는 염려가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냉전은 사실상 끝났다.
냉전의 종식으로 생긴 행복감은 1990년 8월 2일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해서 격감되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과 이것이 사우디 아라비아 및 군소 페르시아만 국가들에 대해 제기하는 위험성은 미국의 중요한 국익의 하나를 위협했다. 왜냐하면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대체로 그 유류 공급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의 행동을 강력히 규탄하고, 이라크의 즉각적이고도 무조건의 철수를 요구했다. 유엔 안보이사회 긴급회의는 이라크를 규탄하고, 휴전을 촉구하고, 그리고 쿠웨이트로부터의 이라크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그 후 8월에,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합병을 선언하고, 쿠웨이트의 모든 외국 공관의 폐쇄를 명령하고, 쿠웨이트의 미국인들과 영국인들을 인질로 삼기 시작했다. 8월 8일 부시 대통령은 전국의 텔레비전 방송에서 미군의 중동 배치를 발표했다. 그런 다음, 부시 대통령은 중동은 물론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지역으로부터의 군대들과 함께, 현대의 가장 비상한 군사적 및 정치적 연합세력 중의 하나를 규합하려고 노력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후 수주일 동안에,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의 침공행위를 규탄하고, 이라크에 대해 광범위한 경제제재를 가하기로 하는 12개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1월 29일에 통과된 12번째의 결의안은 이라크가 1991년 1월 15일 까지 쿠웨이트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경우 유엔 회원국들에 의한 무력사용을 승인했다. 새로운 미소 관계가 이라크의 침공행위를 저지할 수 있는 유엔 조치를 위해 필요한 조건을 제공했다. 양국간의 합의가 없었더라면, 유엔은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을 결코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의회 의원들은 페르시아 만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다하기를 부시 대통령과 국제사회에 공적으로 요구했다. 기초에 깔려 있는 문제는 미국헌법에 관한 문제였다. 즉, 미국헌법은 선전포고권을 입법부에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기에, 미국은 특히 월남에서 이러한 의회의 명령 없이 무력 충돌에 거듭 말려들게 되었다. 일부 의원들은 안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다른 의원들은 의회가 원하는 것은 미국이 개전하게 되는 장소와 때와 조건에 있어서의 발언권이지, 선전포고 자체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유엔이 이라크에게 통고한 최종 기한 3일 전인 1991년 1월 12일 의회는 부시 대통령에게 가장 명백하고도 포괄적인 개전권에서 그가 추구한 권한을 부여했는데, 이것은 약 반세기 만에 미국 대통령에게 부여된 개전권이었다.
유엔 최종 기한이 지난지 24 시간도 채 안되어서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이끈 한 달 남짓 계속된 대파괴적인 공중전에 의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은 쿠웨이트 해방에 성공했다. 이에 장갑부대 및 공수 보병대들의 대규모 쿠웨이트-이라크 침공이 뒤따랐다. 연합군은 100시간 밖에 계속되지 않은 지상전에서, 우월한 속도, 기동성, 화력 등으로 이라크군을 압도해버렸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군사적인 목표는 달성했지만, 승리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여전히 권좌에 머물러 있었으며, 전쟁 발발 후 반란을 일으키고 있던, 북부의 쿠르드족과 남부의 회교 시아파 신도들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있었다. 이라크인들이 고의로 방화하여 불타고 있는 수백개의 유전들은 1991년 11월에 이르러서 소화작업이 끝났다. 사담 정권은 또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들에 따라 활동하고 있으며, 핵시설과 대량적인 비축 화학무기가 포함된 이라크의 대량 파괴무기의 소재 확인 및 파괴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유엔 시찰단원들을 방해하려고 꾀했다.
그러나 간접적인 면에서 미국은 걸프전으로 해서 아랍 국가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대표단 등을 설득하여 복잡하고 서로 얽힌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마침내 이 지역의 복잡하고 서로 얽힌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마침내 이 지역의 영속적인 평화를 초래할 수 있는 직접협상들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991년 10월 30일 스페인의 마드리드시에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 협상은 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간의 역사적인 협정을 초래한 노르웨이에서의 비밀협상 무대를 마련했으며, 그 협정은 1993년 9월 13일 백악관에서 서명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또한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 장군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1989년 12월 20일의 미국의 단기간의 파나마 침공에 대한 폭넓은 초당적인 의회측 지지를 받았다. 1980년대에, 코카인 중독은 전염병에 버금갈 정도로 만연되었으며, 부시 대통령은 "마약에 대한 전쟁"을 그의 국내 과제의 중심으로 삼았다. 미국은 노리에가가 마약 밀수활동에 관련되어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파나마 침공에 의하여 노리에가를 재판에 회부하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파나마를 침공한 이유에는 이 밖의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부시 대통령의 목적 중의 하나는 노리에가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길레르모 엔다라가 이끄는 정부로 대체시키려는 데에 있었다. 엔다라의 대통령 당선을 선거 후에 노리에가가 무효화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또한 미국인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하고,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일에 도움을 주고, 긔록 파나마 운하조약을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 미군의 파나마 파병을 명령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노리에가는 마침내 미국 관헌 당국에 넘겨졌으며, 후에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시의 연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마약 불법거래 및 부정한 돈벌이의 죄명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부시 행정부는 멕시코 및 캐나다와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협상으로 경제면에서 진전을 이룩했는데, 이 협정은 클린턴 행정부에서 치열한 비준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노동조합들은 NAFTA가 미국 일자리 수출을 촉진시키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으며, 환경보호론자들은 이 협정이 산업공해 통제력이 이완되어 있는 지역들로 산업들이 이동하도록 만드는 유인을 산업들에게 제공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와 클린턴 행정부는 NAFTA가 보다 낮은 비용으로 상품과 서비스(용역)을 보다 많이 유통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이 세 나라(미국, 캐나다, 멕시코)의 산업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보다 더 갖게 되도록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3년 말에 전국적인 활발한 토론을 거친 끝에 의회에서 승인된 NAFTA는, 결국에 가서 서반구 전역의 자유무역을 초래할 수 있게 될 미래의 무역협정들을 위한 하나의 시험장으로 간주되고 있다.
1992년의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을 때, 미국민들은 자신들이 4년 전에는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방식으로 변화된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냉전의 낯익은 상징들, 즉 베를린 장벽에서부터 끊임 없는 심한 경계의 대상이 되어왔던 대륙간 탄도 미사일 및 폭격기들에 이르기까지 냉전을 일깨워주는 것들은 사라져버렸다. 동유럽은 독자적으로 되었고, 소련은 해체되었으며, 독일은 통일되었고, 아랍인들과 이스라엘은 직접 협상을 하게 되었으며, 핵대결의 위협은 격감되었다. 마치 하나의 커다란 역사책 한 권이 닫히고, 또하나의 역사책 한 권이 열린 것 같았다.
그러나 국내에서, 미국민들은 덜 낙관적이었다. 즉 미국민들은 심각하고도 낯익은 문제들에 마주치고 있었다. 걸프전 후의 축하 행사 및 행렬들이 끝나게 되자, 미국은 자신이 1980년대 초엽 이래 가장 심각한 경기후퇴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과거에 가장 심한 타격을 받았던 제조업 부문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아니라, 중간경영층의 화이트칼라 근로자들 가운데서 실직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1992년에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을 때에도, 경제성장은 그해 말까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미미했으며, 이 나라의 여러 지역들은 여전히 경기후퇴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연방정부 적자는 증대일로의 보건비 지출로 해서 계속 증대되었다. 대부분의 미국민들은 자기들의 미래에 대해 심각한 비관론을 표명하고, 자기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과 댄 퀘일 부통령은 초기에 보수주의 저널리스트 패트릭 부캐넌의 도전을 받았지만, 공화당의 재지명을 쉽사리 얻었다. 민주당 측에서는 빌 클린턴 아칸소주지사가 난립한 후보들을 누르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았다. 클린턴은 일반적으로 가장 식견있고 달변인 환경보호론자 중의 하나로 인정된 앨 고어 상원의원(테네시주)을 자기의 러닝 메이트로 선정했다.
그러나 경제의 방향에 대한 이 나라의 깊은 불안감은 괄목할 만한 무소속 대통령 후보, 즉 텍사스주 부호 기업가 H. 로스 페로를 등장시켰다. 컴퓨터 및 정보처리 분야에서 큰 재산을 모은 페로는 경제문제, 주로 연방정부 적자를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미국정부의 무능에 대한 국민들의 좌절감을 노렸으며, 그의 지지자들은 미국 전주 50개주의 입후보자 명단에 그의 성명이 오를 수 있을만큼 충분한 수의 지지자 서명을 모으는 일에 성공했다. 페로는 7월의 대통령 선거전의 후보명단에서 탈퇴했다가 가을에 다시 출마 의사를 밝힘으로써 그나마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하던 기회마저 헛되게 했지만, 그의 존재로 해서 경제문제들은 계속 전국적인 논쟁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은 으레 쟁점, 이미지, 인품 등이 혼합된 싸움인데, 그 초점이 이 나라의 경제적 장래에 강하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1992년의 대통령 선거운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시의 재선 노력은 현직 정부통령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일련의 아이디어들, 적 경험과 신뢰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세대 간의 싸움이었다. 아마 제 2차 세계대전 중 군에 복무한 경력을 가진 마지막 미국 대통령일지도 모르는 68세의 조지 부시 후보는 군대 복무 경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월남전 반대 항의운동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46세의 젊은 도전자 빌 클린턴 후보와 마주쳤다. 부시 후보는 대통령 및 총사령관으로서의 자기의 경험을 강조하면서 클린턴 후보의 판단력과 품위부족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한편, 빌 클린턴 후보는 선거 정치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테마의 하나인 '변화를 중심으로 하여 자기의 선거운동을 추진했다. 클린턴은 청년 시절에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는데, 30년 후에 자신의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의식적으로 변화를 받아들이기를 미국민들에게 요구하는 그의 언설의 대부분은 1960년대의 케네디 후보의 언설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같았다.
12년 동안의 아칸소 주지사로서 클린턴 후보는, 여론조사에 따르면 바로 부시 대통령의 주된 취약점인 경제성장, 교육, 보건 문제 등과 씨름해온 자기의 경험을 내세울 수 있었다. 부시 후보는 보다 낮은 시금과 정부 지출 삭감에 입각한 경제계획을 제안했지만, 클린턴 후보는 부유층에 대한 보다 높은 과세와, 이 나라의 생산성 및 경제성장을 증대시킴으로써 적자를 줄이게 될 것으로 생각했던 교육, 운수, 통신에의 투자에 대한 지출 증가를 제안했다. 마찬가지로, 클린턴의 보건비 통제책도 부시 후보의 안보다 훨씬 더 많은 연방정부 개입을 필요로 했다.
클린턴은 10월의 부시 대통령 및 로스 페로와의 세 차례에 걸친 텔레비전 토론에서는 물론, 선거운동 기간 내내 '변화'의 테마를 성공적으로 국민들의 마음에 주입시켰다. 11월 3일 빌 클린턴은 일반투표의 43%를 얻은데 불과했지만, 제 42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미국은 대서양안을 껴안고 있는,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한 무리의 식민지들이던 기원 당시부터 괄목할 만한 변화를 거쳐서, 정치분석가 벤 와텐버그의 이른바 "최초의 세계적인 국가"(the first universal nation), 즉 전세계의 모든 국민성 및 인종 집단을 나타내고 있는 약 2억 5,000만 인구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또한 경제적, 과학기술적, 문화적, 인구학적, 사회적 변화의 속도 및 정도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은 흔히 현대화 및 변화의 선구자가 되는데, 이 현대화와 변화는 점점 더 상호의존적이고, 상호관련적인 세계 속에서 다른 나라들과 사회들에 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미국은 또한 계속성에 대한 의식, 즉 미국 건국 당시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일련의 핵심적인 가치관들을 유지하고 있다. 그 가치관들에는 개인적 자유와 민주적인 정부에 대한 신념, 그리고 만인을 위한 경제적 기회 및 발전에 대한 공약이 들어 있다. 미국이 계속해야 할 과업들은 이 나라와 세계가 새로운 세기의 문턱에 다가섬에 즈음해서, 이 나라의 자유, 민주주의, 기회 등 가치 -풍요롭고 파란만장한 역사의 유산- 를 보호하고, 번성하도록 다짐하는 일일 것이다.
미국은 흔히 양대정당 제도로 생각되고 있다. 실제에 있어서 그렇다. 즉 1852년 이래 백악관은 4년마다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이 차지해왔다. 그러나, 동시에 이 나라에서는 그 동안에 제 3당과 군소 정당들이 많이 결성되었다. 예컨대, 1992년의 대통령 선거 기간중 에는 적어도 1개주 입후보자 명단에 58개 정당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이런 정당들 가운데는 무관심당(the Apathy), 회고당(the Looking Back), 뉴멕시코 금주당, 무소속 시민당, 버몬트 납세자당 등과 같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정당들이 들어 들어있었다.
일반적으로, 제 3당들은 단일 쟁점이나 일련의 쟁점들을 중심으로 하여 결성된다. 제 3당들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가지고 있을 때에 가장 잘 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제 3당들은 대통령직은 감히 바라보지 않으면서 자기들의 정치적 및 사회적 관심사를 선전·광고할 수 있는 정강을 추구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금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제 3당 대통령 후보는 공화당원인 디어도어 루스벨트였다. 그의 진보당, 즉 '불 무스'(큰 사슴) 혁신당은 1912년에 일반 투표수의 27.4%를 얻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자기 후계자로 손수 선정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에 환멸을 느끼게 된 공화당내 진보파는 루스벨트에게 1912년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획득을 추구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그렇게 해서 여러 예비선거에거 태프트를 패배시켰다. 그러나, 태프트는 공화당 조직을 조종하여 당의 대통령 후보 指名을 얻어냈다.
그 후 루스벨트 지지자들은 공화당과 결별하고 진보당을 결성했다. 루스벨트는 자기 자신이 '큰 사슴'(bull moose)처럼 원기왕성하다고 선언하면서(이때부터 이것이 정당의 상징이 되었음), "대기업" 규제, 여성들의 선걱권, 누진 소득세, 파나마 운하, 자연보호 등을 정강으로 내걸고 선거운동을 했다. 그의 노력은 태프트를 패배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화당의 표를 갈라놓음으로써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 후보의 당선에 도움을 주었다.
사회주의자들, 사회당도 일반 투표수의 6%를 얻음으로써 1912년에 그 최고세에 달했다. 다년간 계속 출마하는 사회당 대통령 후보 유진 뎁스는 운수 및 통신 산업의 공동소유권, 보다 짧은 근로시간, 고용 촉진을 위한 공공 사업계획 등을 주창함으로써 그해에 90만표를 웃도는 표를 얻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폭동 교사 행위로 수감된 뎁스는 1920년 감방에서 선거운동을 했는데, 뎁스나 그의 후계자들이나 1912년에 올린 것과 같은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로버트 라폴레트, 또 하나의 진보당원은 192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일반투표수의 16.65를 얻은 로버트 라폴레트 상원의원이었다. 장기간 농민들과 산업 근로자들을 위한 투사였으며, 대기업의 숙적이었던 라폴레트 의원은 제 1차 세계대전 후 진보당 운동을 다시 살리는 주동자였다. 사회주의자들과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혁신당(Bull Moose Party) 잔당은 물론, 농민들 및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은 라폴레트 의원은 철도와 천연자원의 국유화를 정강으로 내걸고 출마했다. 그는 또한 부유층에 대한 증세와, (노조의) 단체교섭권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는 일부 지역들에서 강세를 보였지만, 자기 출신 주인 위스컨신주에서만 승리했다.
헨리 월러스, 진보당은 1948년에 전농무장관이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 부통령이었던 헨리 월러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함으로써 당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잠시 동안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상무장관이었던 그는 소련에 대한 트루먼 대통령의 단호한 태도에 반대했기 때문에 파면되었다. 월러스 후보의 1948년의 정강은 냉전, 마셜 계획, 대기업 등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흑인들 및 여성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종식시키기 위한 운동을 하고, 최저임금제를 지지하고, 하원 비미활동위원회의 폐지를 요구했다. 그는 그를 지지하던 미국 공산당과의 인연을 끊지 못한 탓으로 인기가 떨어졌으며, 그가 얻은 표수는 일반투표의 2.4%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딕시크래트(미국남부의 민주당 이반파), 사우드 캐롤라이나주의 스트롬 더몬드지사가 이끈 주권 확대론자들, 즉 남부 민주당 이반파들도 이와 똑같은 비율의 표수 밖에 얻이 못했다. 진보당과 마찬가지로, 남부 민주당 이반파도 1948년에 민주당과 결별했다. 그러나, 남부 민주당 이반파는 두드러지게 색다른 단체였다. 그들이 민주당에 반대한 이유는 트루먼 대통령의 냉전 정책이 아니라, 그의 공민권 강령에 있었다. 남부 민주당 이반파 의 주요한 목표는 "주권 확대"를 내세웠지만, 실은 인권분리 정책과 그거을 지지한 "짐 크로우"법(흑인에 대한 인종차별법)을 계속하려는 데에 있었다.
조지 월러스, 1960년대의 인종분규와 사회적 격변은 또하나의 인권분리주의자인 남부(앨라매배마주)의 주지사 조지 월러스가 전국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월러스 주지사는 공민권, 자유진보주의자, 연방정부 등에 대한 다채로운 공격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일을 했다. 즉, 1968년에 범미 독립당을 창당한 그는 앨라배마주 주의회 의사당에서부터 그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시작하여 일반투표의 13.5%를 얻었다.
H. 로스 페로, 모든 제 3당은 주요한 정당들과 연방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최근의 미국사에서 이러한 감정이 1992년의 대통령 선거 때처럼 강렬했던 때는 별로 없었다. 텍사스 페로는 경제적 상식과 재정 책임에 관한 자기의 메시지를 각계각층의 미국민들에게 주지시킬 수 있는 교묘한 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페로 후보는 이 나라의 지도자들을 비아냥거리고, 자기의 경제적 메시지를 쉽사리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요약함으로써 어려움 없이 매스 미디어의 주목을 끌었다. 그의 선거운동 단체 "우리는 단합되어 있다"(United We Stand)에는 주로 자원자들이 들어가 있었으며, 재원은 그의 개인 재산이 뒷받침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富에 분개하기는커녕, 페로의 사업적인 성공과 그 성공이 특별 이익단체들에게 선거운동 자금을 간청하지 않아도 된 것을 찬양했다.
페로는 7월에 대통령 선거 경쟁에서 물러섰다. 그랬다가, 선거 실시 한 달 전에 다시 그 경쟁에 뛰어드는 그는 그때까지 제 3당 대통령 후보가 얻은 표수로서는 단연 최다표수였으며, 총투표수의 백분율로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1912년에 얻은 득표율(27.4%)에 다음가는, 1,900여만표를 얻었다.
미국 지도 펼쳐 보고 미국 여행 하자.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지도 검색 블로그)
| "나에게는 꿈이 있다...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 owners 앞으로 언젠가는 조지아주의 붉은 동산에서 옛 노예의 자손들과 옛 노예 소유자의 자손들이 우애의 테이블에 함께 앉아 있게 될 수 있으리라는" -- 마르틴 루터 킹 2세, 1963년. |
1960년대에 이르러 정부는 국민생활에서 점점 더 강력한 힘이 되었다. 1930년대에 백악관은 법안을 제출하기 시작했으며, 세계 대공황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의회와 긴밀히 협력했다. 모든 면의 미국민 생활을 다루기 위해 새로운 행정부 기관들이 설치되었다. 연방정부가 채용한 민간인의 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100만 명으로부터 380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그 후 1950년대에 내내 250만 명 선에서 웃돌았다.
정부 역할의 확대가 어디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미국민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미국민은 정부 역할의 확대를 받아들였다. 민주당원들은 정부가 성장과 안정을 이루기 위해 정부 권력을 사용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교육, 보건, 복지 등을 위한 연방정부 혜택을 확대하기를 원했다. 공화당원들은 정부의 기본적이고도 필수적인 책임을 받아들이면서도 정부지출을 억제하고, 개인의 창의를 보다 많이 부활시키기를 바랐다.
196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F. 케네디는 당년 43세로 대통령직을 얻게 될 최연소 후보였다. 적수인 리처드 닉슨 후보(공화당)와의 텔레비전에서의 일련의 토론에서, 케네디는 유능하고,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정력적으로 보였다. 선거운동에서 그는 "새로운 시대로 적극적으로 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뉴 프론티어(신개척자 정신)를 추구하건 추구하지 않건, 뉴 프론티어는 와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웅변의 호소로 끝맺었다. 즉, "여러분의 나라가 여러분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마시오--여러분이 여러분의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시오"라고. 케네디의 단간의 대통령직 재임 기간 중 내내, 품위, 위트, 스타일이 결합된 케네디 대통령의 독특한 매력은 그의 인기를 지탱시켰으며, 그 이후의 여러 세대의 정치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모든 국민에게 경제적인 혜택을 주기 위해 강력한 영도력을 행사하기를 원했지만, 적은 표차에 의한 승리로 해서 그의 대통령 직무수행 능력은 제한을 받았다. 민주당이 의회의 양원을 다 지배했지만, 보수적인 남부인들은 연방정부의 교육지원을 증대시키고, 연로자들에게 건강보험을 제공하고, 그리고 도시문제부를 신설하는 계획들에 저항했다. 그래서, 그의 달변에도 불구하고 케네디 대통령의 정책들은 흔히 제한을 받고 억제되었다.
경기후퇴를 종식시키고, 경제성장을 회복시키는 일은 하나의 우선적 과제였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그의 행정부가 과도한 가격 인상이라고 간주한, 철강산업의 인상된 철강 가격을 본래 수준으로 되돌리려고 노력했을 대 업계지도자들의 신뢰를 잃었다. 그는 목전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에서는 성공했지만, 하나의 중요한 지지원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가 후에 자본을 공급하고, 경제를 자극하기 위해 대폭적인 감세를 요구했을 때, 의회의 보수적인 반대세력은 그 감세안이 통과될 희망을 꺾어 버렸다.
케네디 행정부의 전반적인 입법기록은 실망적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민권운동 지도자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거의 임기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민권운동의목표들을 받아들였다. 그는 학교 교육을 지원하고, 고령자들에게 의료 보호를 제공하려는 노력에서는 실패했다. 그는 최저임금을 약간 인상시켰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우주계획 자금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들의 자구 노력을 돕기 위한 미국민 남녀를 해외에 파견하기 위해 평등봉사단(Peace Corps)을 창설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그의 임기의 마지막 해에 야심적인 입법안을 계획했었다. 그러나 1963년 11월 22일 그는 텍사스주 댈러스시 방문 때 암살되었다. 그것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이 그랬듯이, 한 세대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케네디 대통령이 자유 진보주의적이라는 평판은 그의 정책의 집행보다는 오히려 그의 스타일과 이념으로 해서 나왔지만, 그의 임기의 마지막 해에 책정된 과제가 1964년부터 1966년 사이의 기간 중에 법제화되었기 때문에, 그는 사후에 변화를 위한 자유진보주의 세력으로 간주되었다.
상원의 다수당 원내총무였다가 케네디의 부통영이 된 텍사스주 출신의 린든 존슨은 그의 전임자보다 더 유능한 정치가였다. 그는 연방의회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거기서 일을 해낼 수 있는 비상한 능력을 키웠다. 그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간청하고, 구슬리거나, 아니면 으르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빈곤을 없애고, 모든 사람들에게 번영의 혜택을 보급시키기 위해 권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했다.
존슨은 케네디 대통령이 추구한 법안들이 통과되도록 하기로 작심하고 취임했다. 시급한 우선순위 과제는 감세안과 민권보장 법안이었다. 1964년 존슨 대통령은 자기의 설득 기술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암살된 대통령에 대한 의원들의 존경심에 호소하면서, 케네디 대통령이 제출한 민권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법안은 남북전쟁 직후의 재건기 이래 제정된 가장 원대한 민권법안이었다. 이윽고 존슨 대통령은 다른 문제들도 다루었다. 1964년 봄에 그는 자기의 개혁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위대한 사회"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용어는 그 해의 대통령 선거에서 그가 보수적 공화당 대통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누르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 한층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경제면에서, 존슨 대통령은 감세안을 성공적으로 추진시킨 다음, 케네디 대통령이 시작한 빈곤 퇴치 계획을 적극 추진했다. 그는 "오늘 이 자리에서 이 행정부는 미국의 빈곤에 대해 무조건의 선전포고를 한다"고 선언했다. 경제기회국(Office of Economic Oppoitunity)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업훈련을 제공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주택, 보건, 교육 계획 등에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갖가지 지역사회 활동계획을 마련했다.
다음 순서는 의료보호 조치였다. 20여 년 전에 트루먼 대통령이 중앙에서 관리하는 의료보호 계획을 제안했었는데, 의회에서 통과되지 않았었다. 존슨 대통령의 영도하에서, 의회는 고령자들을 위한 의료보험 계획은 '메디케어'(Medicare)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의료 지원 계획인 '메디케이드'(Medicaid)를 법제화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존슨 대통령은 케네디 대통령이 실패한 초등 및 중등 교육 지원 노력에서도 성공했다. 법제화된 이 교육 지수법안은 저소득 가정 출신의 어린이 수를 기초로 해서 주에게 자금을 주었다. 이 자금은 공립학교 어린이나 사립학교 어린이들을 다같이 돕는데 사용될 수 있었다.
'위대한 사회' 계획은 한층 더 넓은 범위에까지 추진되었다. 신주택법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주택 임차료 보조비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주택·도시개발부를 신설했다. 1924년에 책정된 차별적인 이민쿼터는 마침내 이민법안과 대체되었다. 예술가들과 학자들의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연방정부가 그들에게 조력했다.
존슨 행정부는 또한 로비스트이자 컨설턴트인 젊은 변호사 랠프 네이더의 노력이 일부 도움이 되어 운송안전 문제를 다루었다. 네이더는 1965년의 그의 저서 "Unsafe at Any Speed: The Designed-In Dangers of the American Automobile"(어는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 미국 자동차의 예정되어 있는 위험성)에서, 많은 작은 자동차 사고에도 사망이나 손상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네이더는 자동차 제조업자들이 자동차 스타일을 좋게 하기 위하여 안전에 필요한 것들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말하고, 결함 많은 공학기술이 고속도로 사고사의 한 요인이 되고 있는 자동차형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1966년 9월 존슨 대통령은 2개의 운송법안에 서명하여 이것들을 법률로 확정했다. 첫째 법안은 안전계획을 개발하기 위한 자금을 주정부와 지방 자치체에 제공했으며, 또 하나의 법안은 자동차 및 타이어의 연방 안전 기준을 설정했다.
총체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사회'는 뉴딜정책 이래 가장 많이 이루어진 입법활동이었다. 그러나 존슨 행정부정책에 대한 지지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으며, 많은 계획들이 충분한 자금을 공급받지 못했다. 하지만, '위대한 사회'는 1965년부터 1968년 사이에 빈곤을 어느 정도 감소시켰다. 예컨대, 흑인 가구 소득은 백인 가구 소득의 54%로부터 60%로 증대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미국은 여전히 공산국가들과의 심한 충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미국 지도자들은 이 시기 중 내내 세계를 냉전 면에서 보았으며, 소비에트권의 위협에 대항하려고 노력했다. 쿠바는 케네디 시대의 미
☞소대결장이 되었다.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군이 1959년에 집권하고, 소련의 지지를 얻은 이래, 미국의 대쿠바 관계에는 긴장이 계속되었다. 미국은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하기 직전에 외교적인 유대를 단절했으며,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은 망명한 쿠바인들이 자기들의 고국을 침공하고 폭동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해 망명한 쿠바인들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1961년의 피그만에서의 공격은 비참하게 실패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시작한 계획을 찬성한 케네디 대통령은 그 패배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다.
그 이듬해, 상실한 위신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던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이 비밀리에 쿠바에 공격용 핵미사일을 설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여러 다른 선택사항들을 고려한 후, 소련 선박들이 더 이상 미사일을 가져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쿠바를) 봉쇄하기로 결정한 다음, 소련이 그 핵무기를 철거하도록 공공연히 요구했다. 세계가 과거의 그 어느 때 보다고 더 핵전쟁에 접근한 긴장의 5,6일이 지난 후, 소련이 물러섰다. 지지자들은 케네디의 용기에 박수 갈채를 보냈으며, 비판자들은 조용한 외교가 보다 적절했을지도 모르는 때에 그가 핵재난의 위험을 무릅썼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쿠바의 미사일 위기는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긴장을 완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미
☞소 양측이 깨달음에 따라 미
☞소 관계에 있어서의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 이듬해, 미
☞소·영은 대기권 내에서의 핵무기 실험을 금지한 획기적인 부분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했다.
1957년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한 후 우주는 또 하나의 전장이 되었다. 미국은 앞지름을 당했다. 왜냐하면 소련의 핵폭탄을 손쉽게 운반할 수 있는 로켓으로 인공위성을 궤도에 진입시켰기 때문이다. 미국은 1958년에야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엑스플로러' 1호를 발사할 수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미국이 인간을 달에 상륙시킨 다음, 그를 다시 지구로 귀환시킬 것이라는 다짐으로써 대응했다.
1962년 8월 '머큐리 계획'으로 해서 존 H. 글렌 2세가 지구 상공에서 궤도를 도는 최초의 미국 우주비행사가 되었다. 1960년 우주 비행이 인간에게 주는 영향을 조사하였다. '제미니'호('제미니'는 쌍둥이라는 뜻의 라틴어임)는 2명의 우주비행사를 실었는데, 이것은 과거의 '머큐리' 우주선들보다는 1명이 더 많았고, 그 후의 '아폴로' 우주선보다는 1명이 적은 수의 우주비행사를 실은 것이다. '제미니' 계획은 1965년 8월의 8일간의 임무, 즉 당시의 최장기 우주비행과, 1966년 11월의 지구 대기권으로의 자동 조정 재진입을 포함하여, 몇 가지 최초로 시도한 일들을 성취했다. '제미니'호는 또한 비행 중의 2개의 유인(有人) 우주선의 최초의 도킹(연결)과 미국 우주비행사의 최초의 우주 유영을 성취했다.
아폴로 계획은 케네디의 목표를 성취시켜주었다. 1969년 7월 수억의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국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은 달 표면을 걷는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그 밖의 '아폴로' 우주선 비행이 뒤따랐지만, 많은 미국민들이 유인 우주비행의 가치를 문제로 삼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엽에 기타 우선순위 과제들이 보다 긴급하게 되자. 미국은 우주계획의 규모를 축소시켰다. 일부 '아폴로' 비행들이 취소되었으며, 2개의 '스카이랩' 우주 정거장 중 하나 만이 건설되었다.
인도차이나 반도는 여전히 또 하나의 냉전 전장이었다. 프랑스는 19세기 중엽 이래 베트남을 지배해오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이 베트남을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베트남 공산주의자 호지명은 자국을 식민통치로부터 해방하려고 노력했으며, 미국독립전쟁을 그의 본보기로 삼았다. 연합국은 1945년 일본을 패배시킨 후에도 호치민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강대국의 지위를 되찾기를 바란 프랑스는 베트남으로 복귀하기를 주장했다. 호는 물러서기를 거부했으며, 해방전은 계속되었다. 유럽에서의 봉쇄정책에 대한 프랑스측 지지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던 미국은 프랑스는 베트남 전투 자금난을 면할 수 있었다. 이 경제원조마저도 1954년의 프랑스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제네바의 국제회의에서 베트남은 북에서 집권하고 있는 호치민과, 남에서 정부를 이끌고 있는, 주로 불교신도들의 인구 가운데서 가톨릭 신도인 반공주의자 고 딘 디엠의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이 나라를 통일하기 위해 2년 후에 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다.
월남이 패망하게 되면, 미얀마, 태국, 인도네시아 등도 패망할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6년의 선거 실시에 대한 고 딘 디엠 대통령의 거부를 지지하고,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증가하기 시작했다. 케네디 대통령도 월남지원을 증가하고, 소수의 군사고문관들을 파월했지만, 베트남의 북과 남 간의 전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고 딘 디엠은 인기가 떨어져 마침내 1963년 타도되어 피살되었다.
정세는 전보다 더 불안정해졌다. 월남에서는 '베트콩'으로 알려져 있는 게릴라들이 떄로는 남몰래,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정치적인 일익인 민족해방전선(NFL)을 통해서, 월남정부에 도전했다. 월맹의 지원을 받고 있던 그들은 특히 시골의 농민들 사이에서 세력을 넓혔다. 월남에 있어서의 공산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있던 존슨 대통령은 월남전에 개입하기로 했다. 2척의 미국 구축함에 대한 월맹 해군의 공격이 있은 후, 존슨 대통령은 1964년 8월 7일, "미군에 대한 어떠한 무력공격도 격퇴하고, 더 이상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통킹만 결의'를 의회로부터 얻어냈다. 존슨 대통령은 1964년 11월에 재선된 후 확전정책에 착수했다. 월남전에 참가한 미군수--지원병 및 징집병--는 1965년 초의 2만 5,000명으로부터 1968년 50만 명으로 증가되었다. 대략적인 폭격전은 월맹에게나 월남에게나 황폐를 가져왔다.
미국민들은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소름끼치는 전투 장면들을 보고 미국의 월남전 개입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조지 케난과 같은 대외 정책 전문가들도 미국은 월남전 종결 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대량적인 군사 행동이 전쟁의 추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아 보이게 되자, 미국민들은 불만으로 해서 존슨 대통령은 압력을 받아 강화협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1968년 반전무드로 해서 존슨 대통령은 또 하나의 임기를 추구하려는 의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리노이주 시카고시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항의자들은 경찰과 시가전까지 벌였다. 특히 6월의 로버트 케네디 암살 후의 민주당 내에서의 혼란, 1960년대 민권법안들에 대한 백인들의 반대, 그리고 (출신주 미시시피주, 아칸소주, 루이지애나주, 조지아주 등에서 승리한)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러스의 제3당 대통령 후보 출마 등은 월남전으로부터 미국을 구출할 뿐만 아니라, "법과 질서"의 유지도를 증대시키겠다는 계획을 내걸고 출마한 공화당 대통령 후보 리처드 닉슨의 당선에 도움을 주었다.
미군이 서서히 철수하고 있는 동안에, 닉슨 대통령은 이 전쟁에서 가장 가공할 몇몇 폭격 명령을 내렸다. 닉슨 대통령은 또한 캄보디아를 통해서 월남으로 들어가는 월맹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1970년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이것은 많은 대학교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과 같은 또 다른 일련의 항의와 데모를 유발했다. 오하이오주 켄트 주립대학교에서의 이러한 데모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소집되었던 주방위군들이 당황하여 4명의 대학생들에게 발포하여 그들을 살해했다.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 담당 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미국을 위해 협상한 휴전협정은 1973년에 마침내 조인되었다. 미군은 철수했지만 전쟁은 1975년 봄까지 끌었으며, 이 무렵에 월맹은 나라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
전쟁은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렀다. 이 전쟁으로 해서 베트남은 황폐화되었고, 수백만 명이 불구자가 되거나 살해되었다. 미국은 미국인 5인 8,000명의 생명을 잃는 가운데 1,500억 달러를 웃도는 돈을 소비했다. 이 전쟁으로 해서 또한 냉전 대외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컨센서스)도 깨졌다. 미국민들은 미군이 베트남에서 잔학행위를 자행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정부는 1964년 '통킹만' 사건 주변의 상황에 관해서도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미국민들이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에 혐오감을 느꼈다. 이 전쟁으로 해서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자국의 행동과, 그리고 미국이 지지하려고 노력한 가치관을 의문으로 여기게 되었다.
전쟁이 단계적으로 축소됨에 따라, 닉슨 행정부는 주요한 공산국들을 실제적 이익을 추구하여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가장 극적인 조치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유대를 맺기 시작하는 일이었다. 모택동이 승리한 이래 20년 동안, 미국은 대만의 국민당 정부가 전중국을 대표한다고 주장해왔다. 1971년에 닉슨 대통령은 미국의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통상 제한조치를 완화하고, 그리고 북경을 방문하는 미국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소련에 대해서도 닉슨 대통령은 긴장완화 정책을 추구하는 일에서 마찬가지로 성공적이었다. 닉슨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한 지 몇 달 후에 소련도 방문했다. 그는 소련 지도자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와 몇 차례 정중한 회담을 했는데, 이 회담에서 그들은 비축미사일을 제한하고, 우주에서 협력하고, 그리고 통상제한 조치를 완화하기로 합의했다. 미
☞소 전략무기제한협상(SALT)은 드디어 1972년에 비축 핵무기 증가를 한정하고, 탄도탄 요격 미사일 체계를 제한하는 군비통제협정을 낳게 되었다.
닉슨은 민주당 통치 8년 만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60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패배하기 이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이었던 닉슨은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존슨 대통령처럼 열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에게 냉담했던 그는 언제나 그가 취해야 할 다음 행동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그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마참내 그의 몰락을 가져왔다.
닉슨은 다난한 시대에 대통령이 되었다. 존슨 행정부 말기에 월남전은 '위대한 사회'를 무너뜨리고, 깊은 사회적 분열을 조성했다. 닉슨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는 국내에서 안정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닉슨 대통령은 공화당의 재정 책임관에 찬동했지만, 정부의 책임을 확대시켜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복지국가의 기본적인 형태를 받아들였다. 그는 단지 복지국가 계획들을 보다 낫게 집행하기를 원했다.
닉슨은 대통령 재임 중에 일련의 경제문제에 마주쳤다. 1973년에 인플레율은 9%였고, 다우존스 평균 공업주가는 1968년 11월부터 1970년 5월까지의 사이에 36%나 떨어졌으며, 1970년말의 실업율은 6.6%나 되었었다. 닉슨 대통령은 1971년에 임금-물가 통제조치를 단행했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닉슨은 대통령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요인들이 그의 경제정책을 무너뜨렸다. 1973년 이스라엘, 이집트, 시리아간의 전쟁으로 해서 사우디 아리비아가 이스라엘의 동맹국인 미국에 수출되는 석유류에 대한 수출금지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기타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들은 그들의 유가를 4배로 올렸다. 미국민들은 석유 부족 및 유가 급등 현상에 마주쳤다. 그 이듬해에 대미 석유수출 금지조치가 끝났지만, 유가는 여전히 높았다. 높은 에너지 가격은 미국 경제생활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즉, 1974년 인플레율은 12%에 달했으며, 이것으로 해서 한층 더 높은 실업율을 초래한 경제혼란이 야기되었다. 이러한 경기후퇴 및 인플레("스태그플레이션") 시대는 1948년이래 미국이 누려오던 미증유의 경제 붐에 종지부를 찍었다.
닉슨 대통령은 경제를 잘 다루려고 노력하고 있는 동안에도 "법과 질서"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했다. 미국 도시들에서의 중대일로의 범죄율과 정치적인 항의, 증가된 마약 사용, 그리고 미국 각 대학교에서의 섹스에 관한 보다 허용적인 견해 등이 일부 미국민들을 성나게 했다. 자기를 정치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세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닉슨 대통령은 혼란에 대항하기 위해 정부권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데모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왜곡된 보도를 하는 언론을 공격하고, 그리고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키려고 애썼다.
그 전략은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실패했다. 첫 임기 중에 의회 양원에서의 다수파 세력인 민주당 세력에 마주친 닉슨 대통령은 의회에서 공화당이 다수파 세력이 될 뿐만 아니라 의회의 정돈상태를 끝내게 될, 1972년의 압도적 재선 승리를 얻기를 원했었다. 닉슨 대통령 재선위원회는 정치 헌금이 새 법에 따라서 신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이전에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1972년 초에, 닉슨 팀은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아파트 단지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의 전화 도청을 시도했다. 그 시도는 실패했다. 돈과 그리고 마침내 백악관에까지 추적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문서를 가지고 도망친 침입자들이 체포되었을 때, 닉슨 행정부는 자기들의 개입을 은폐하기로 결정했다. 이 침입 사건이 발각된 지 6일 후에, 닉슨 대통령은 국가안보가 위태롭다는 이유로 이 사건에 대한 연방수사국(FBI)의 수사를 중지시키라는 명령을 FBI애 내리도록 중앙정보국(CIA)에 명령했다. 사실, 그 침입 사건은 닉슨 행정부가 자기들의 '적'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을 찾아내서 제거해 버리기 위한 운동의 한 측면에 불과했다. 이러한 활동에는 불법 전신
☞전화 도청, 주거 침입, 모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닉슨은 그해에 압도적으로 재선되었지만, 언론에서 민주당 대다수 세력은 닉슨 대통령에 대한 탄핵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그가 개입한 증거가 늘어나기 시작하자, 그는 1974년 8월 9일 사임했다.
대부분의 공직생활은 의회에서 지낸 겸손한 의원 제럴드 포드는 스피로 T. 애그뉴 부통영이 임기 이전과 임기중에 수회한 사실이 밝혀져 부통령직을 사임한 후, 닉슨의 부통령이 되었다. 그의 최우선 과제는 닉슨 해임을 목표로 한 탄핵절차로 해서 흔들린 정부에 대한 신임을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포드 대통령이 많은 신임을 받았지만, 그가 닉슨을 사면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미래의 소추를 받지 않도록 해주었을 때에 그에 대한 신임도는 급속히 떨어졌다.
공공정책에서, 포드 대통령은 닉슨이 정한 진로를 따랐다. 인플레와 실업이 계속 증대되고, 국민총생산(GNP)이 감소되었기 때문에 경제문제는 여전히 심각했다. 포드 대통령은 처음에, 1929년에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그랬듯이, 국민을 구슬리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실패했을 때, 그는 인플레 억제책을 단행했는데, 이것으로 해서 실업율은 12%가 되었으며, 세계 실업수당과 감세조치로 해서 원기는 약간 회복되었지만, 경제적 곤경은 끝나지 않았다.
민주당 출신 조지아 주지사였던 지미 카터가 1976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선거운동 기간 중에 워싱턴 정치에는 문외한임을 자처하던 그는 신선한 통치방식을 약속했지만, 전국적 수준에 있어서의 그의 경험부족으로 해서 그의 재직 기간 중의 일들은 시작부터 복잡해졌다. 해군장교 및 기사의 훈련을 받은 그는 난국을 뚫고 나아갈 수 있는 보다 강력한 지도자를 미국민들이 원하고 있었을 때에, 기술자 출신 관료로 흔히 보였다.
경제문제에서 카터 대통령은 처음에 적자지출 정책을 허용했다. 통화정책 수립 책임을 지고 있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적자를 메우기 위해 통화양을 증가시키자 인플레율은 10%로 올라갔다. 카터 대통령은 인플레를 둔화시키기 위해 예산 감축으로써 대응했지만, 이 감축은 민주당 정책의 핵심인 사회보장 계획들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임기가 끝날 무렵, 적자는 여전히 많았으며 업계의 기능이상 현상은 분권가격 하락과 금리에서 볼 수 있었다.
카터 대통령은 또한 그가 실효성있는 에너지 정책을 개발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마주쳤다. 그는 "정신적 전쟁에 상당하는 것"이라고 그가 부른, 외국산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것을 목표로 한 포괄적인 계획을 제시했다. 반대자들은 의회에서 그 계획을 좌절시켰다.
카터 대통령은 인민주의자(인민 전체의 이익 증진을 목표로 하고 있는 정치철학의 신봉자)로 자처했지만, 그의 정치적인 우선순위 과제들은 결코 명백하지 않았다. 그는 정부의 보호역할을 찬성했지만, 그 다음에는 규제해제, 즉 경제생활에 있어서의 정부통제의 철폐 과정을 시작했다. 그는 지난 세기에 있었던 몇몇 제한조치들이 경쟁에 제한을 가하고, 소비자의 지출을 증대시켰다고 주장하면서 유류, 항공기, 철도, 화물트럭 등 산업에 있어서의 규제해제를 찬성했다.
카터 대통령은 민주당 영도력을 재확립하기를 희망했지만, 국민의 지지나 의회 측 지지를 얻으려는 그의 노력은 실패했다. 그의 임기가 끝날 무렵, 그를 찬성하지 않는 율은 77%에 달했으며, 미국민들은 또다시 공화당에 기대하기 시작했다.
월남전 직후시기에, 미국은 세계문제에서 계속 적극적인 정책을 추구하여, 유럽, 중동, 중남미 등 지역의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엽, 대(對)소관계에서, 그리고 특히 대(對)이란 관계에서 심각한 문제들이 나타났다.
포드 대통령은 대(對)소 긴장완화를 추구하는 닉슨 행정부정책을 계속했다. 1974년 11월 포드 대통령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소련 지도자 브레즈네프와 회담했다. 이 회담의 결과로 그 이후의 미
☞소 군비통제 조치에 관한 예비적 합의가 이뤄졌다. 그 회담은 또한 1975년의 핀랜드 헬싱키에서의 다국회의를 위한 길을 닦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유럽 역사상 최대의 정상회담이었던 이 '헬싱키 회의'에는 미국과 캐나다는 물론, 35개 유럽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참석했었다. 이 회의에서는 3만 단어로 된 역사적인 '최종 의정서'가 작성되었는데, 여기에는 서방국가들이 주창한 몇몇 중요한 사항들과, 동유럽 블록의 정권들이 주창한 몇몇 중요한 사항들이 들어가 있었다. 최종 의정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변경된 유럽 국경들이 영궤성(불변성)을 인정했는데, 이것은 소련이 장기간 추구해오던 것을 인정한 것이다. 헬싱키 최종 의정서에는 또한 개인의 권리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약속이 들어 있었다. 서방국가들은 동유럽 블록의 정부들로 하여금 그 약속에 서명하도록 함으로써 그들 동방 블록 정부들에 대한 압력을 증대시키기를 바랐다. 실제로, 서방국가들은 동방블록 공산주의 정권들의 갖가지 인권유린사건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정기적인 "헬싱키 협정 심사회의"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집트와 이스라엘 가느이 30년 동안의 전쟁상태를 종식시킨 중요한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78년 카터 대통령은 평화 해결을 협상하기 위해 대통령 휴양지인 '캠프 데이비드' 산장에서, 중재자이자 참석자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안와르 엘-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및 베긴 이스라엘 수상과 회동했다. 이 두 지도자들은 1979년 3월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서 백악관에서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오래 끈, 그리고 흔히 감정적이었던 토의 끝에, 카터 대통령은 파나마 운하를 서기 2000년까지는 파나마에 반환한다는 조약의 비준을 상원에서 얻어냈다. 그리고 그는 닉슨 대통령의 전철을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정식 외교적 승인을 했다.
그러나 카터 대통령은 대(對)소 관계에서는 덜 성공적이었다. 그는 긴장완화가 고조되었을 때에 취임하여 미국은 "터무니없는 공산주의 공포"에서 빠져나왔다고 선언했지만, "인권에 대한 우리의 공약은 절대적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소련 정부의 반감을 샀다. 비축 핵무기를 가일층 제한하는 제2차 미소전략무기제한협정이 서명되었지만, 이 협정은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가 일부 원인이 되어 미국 상원에서 비준되지 않았다. 같은 해에 카터 대통령은 방어 증강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1980년대의 방대한 지출을 하게 되는 길을 열었다.
1979년에 카터 대통령은 대(對)이란 관계에서 한층 더 많은 곤란에 마주쳤다. 부패했지만 (미국에게) 우호적인 이란 정권을 시아파 회교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갈아치운 후, 카터 대통령은 폐위된 이란 국왕의 치료를 위한 미국 입국을 승인했다. 성난 이란 투사들은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고, 미국인 53명을 1년 남짓 인질로 잡아두었다. 카터 대통령은 그들의 석방을 위해서 노력했지만, 그들을 석방시키지는 못했으며, 이 미국인 인질 석방 실패는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원인이 되었다.
미국흑인들의 평등을 위한 투쟁은 1960년대 중반기에 그 절정에 달했다. 흑인들은 1950년대에 점진적으로 승리를 거둔 후에 한층 더 비폭력적인 직접 행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흑인 목사들로 구성된 남부기독교조지도자회의(SCLC)와 젊은 민권운동가들로 구성된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와 같은 단체들은 평화적인 대결을 통한 개혁을 추구했다.
1960년 흑인 대학생들이 노드 캐롤라이나주의 인종분리가 되어 있는 울워스 연쇄 백화점 런치 카운터(간이 식당)에 연좌하여 자리를 떠나기를 거부했다. 연좌한 흑인 대학생들은 보도매체의 주의를 끌었으며, 남부 전역에서 이와 비슷한 데모들이 일어나게 했다. 그 이듬해에, 민권운동가들은 "프리덤 라이드"(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남부지방으로의 버스여행)를 마련했는데, 이에 참여한 흑인들과 백인들은 대결이 보도 매체의 주의를 끌어서 마침내 개혁으로 이르게 될지도 모르는, 남부의 인종 분리된 목적지를 향해 버스에 올랐다.
민권운동가들은 또한 1963년의 "워싱턴 행진"과 같은 집회들도 마련했다. 20만 명을 웃도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의 평등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입증하기 위해 이 나라의 수도에 모였다. 노래와 연설을 하게 되어 있는 인 날의 행사는 탁월한 민권 대변인으로 여러 차례 나타난 바 있는 마틴 루터 킹 2세의 연설로 최고조에 달했다. "나는 어느날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의 자손들과 옛 노예 소유주의 자손들이 우애의 테이블에 함께 앉아 있게 될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킹 목사는 선언했다. 그가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는 후렴을 말할 때마다 군중은 환성을 울렸다.
그러나 민권운동의 주장과 이론은 처음에 민권의 발전을 초래하지 못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처음에 백인 남부인들에게 민권을 지지해달라고 강청하기를 주저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문제에 관해서 그들의 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건들이 전개됨에 따라 케네디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민권을 위한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2년에 제임스 메레디스에게 그의 인종을 이유로 하여 미시시히 대학교가 입학 허가를 거부했을 때, 케네디 대통령은 법을 준수하기 위해 연방군을 파견했다. 앨라배마주 버밍엄시의 인종 분리를 철폐시킬 것을 목표로 한 항의들이 경찰의 폭력적인 대응을 유발한 후, 그는 공공장소의 흑백 인종 통합을 명령하는 새로운 민권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워싱턴 생진"마저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었을 당시 여전히 의회 위원회에 갇혀 있던 그 법안을 구해내지 못했다.
존슨 대통령은 보다 더 성공적이었다. 텍사스주 출신 남부인인 그는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민권에 헌신하게 되었다. 1963년에 그는 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케네디 대통령을 추모함에 있어서, 민권법안의 가능한 한 가장 빠른 통과보다 더 웅변적인 추도사나 송덕문은 없다." 존슨 대통령은 자기의 모든 권한을 사용하여 토의를 한정하도록 상원을 설득함으로써, 모든 공공시설에 있어서의 인종차별을 불법화한 1964년의 포괄적인 민권법을 통과시켰다. 그 이듬해에 그는 1965년의 투표권법으로 될 것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 투표권법은 지방 관리들이 흑인들의 등록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역에서 유권자 등록 조사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연방정부에 부여했다. 그 투표권법이 통과된 이듬해, 최남부 지방에서는 40만 명의 흑인들이 등록했으며, 1968년에는 그 수가 100만 명에 달했는가 하면, 흑인들이 선출한 관리들의 수는 전국적으로 대폭 증가되었다. 마침내, 1968년에는 주택분야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러한 모든 입법활동에도 불구하고, 일부 흑인들은 민권 발전의 느린 속도를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달변의 흑인 민권운동가 '말콤 X'는 백인종으로부터의 흑인종의 분리를 주장했다. 한 학생 지도자인 스토우클리 카마이클도 비(非)폭력 및 이(異)인종 간의 협력이라는 생각에 마찬가지로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필요한 어떠한 수단에 의해서라도 이룩해야 할 흑인 권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호전적인 개혁요구에는 폭력이 수반되었다. 1966년과 1967년에 몇몇 대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암살자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수개월 후, 사회적으로 불우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대변자이자 월남전 반대자인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도 이와 똑같은 운명에 마주쳤다. 이 두 암살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에 있어서의 수주의측 반발과 함께, 좌파의 증대일로의 호전성은 이 나라의 정신에 불화를 초래했으며, 이 불화는 이것이 치유되는데 여러 해가 걸렸다.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으로 되었을 때 연방정부의 민권 공약은 줄어들었다. 닉슨 대통령은 흑인의 평등운동은 너무나 지나쳤다고 느낀 보수주의 백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자기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작심하고 있었다. "남부 전략"에 따라 행정부는 '공정 주택 법래'의 조치의 시행을 위한 예산 배정액을 줄였으며, 1970년에는 1965년의 투표권법(VRA)의 확장을 막으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71년 연방대법원이 (흑백 학생융합을 위해) 어린이들을 거주 구역 밖의 학교로 보내는 강제 버스 통학은 인종차별 철폐 학교들에게 허용될 수 있는 한 수단이라고 판시했을 때, 닉슨 대통령은 텔레비전에서 그 판결을 비난하고, 그 판결 집행의 일시 정지나 제한을 추구했었다. 그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자기의 입장은 명백히 했다. 강제 버스 통학 반대자들은 1974년 도심지 흑인학생들을 백인일색의 교외 학교로 보내는 노력을 연방대법원이 무효화한 "밀리컨 대 브래들리' 사건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소수민족 우대에 대한 반발은 1978년의 한 연방대법원 판례에서 한층 더 공공연하게 되었다. 백인 남자인 앨런 배키는 소수민족 지원자들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입학생 쿼터로 해서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의과대학에 대한 자기의 입학 허가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연방대법원은 입학생 쿼터제는 이제 더 이상 강제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입학 허가를 명령하고 난 다음, 인종에 대한 고려는 입학생 선발 절차에 관련된 요인 중의 하나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 소란스러운 시기 중 내내 어린이 강제 버스 통학과 (기회의 평등보다도 결과의 평등을 실현하려는)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에 관한 논쟁으로 해서 아프리카계 미국민들이 중류층 및 교외 거주자 대열로 꾸준히 진입하는 일이 때로는 불투명하게 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점점 더 많은 수의 기혼여성들이 근로인력에 들어갔지만, 1963년에 근로 여성의 평균 수입은 남성의 수입의 63%에 불과했다. 그 해에 저술가 베티 프리댄은 중류층 생활패턴들을 대담하게 비판한 "The Feminine Mystique"(여성을 위한 비결)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그녀의 비판은 수많은 여성들이 불만감을 명백히 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프리댄은 여성들은 흔히 "남편을 찾아서 결혼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출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여성들이 새로운 역할과 책임을 추구하고, 외부 남성지배 사회가 여성들에게 정해주지 않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및 직업적 주체성을 추구하도록 독자들에게 권장했다.
1960년대 및 1970년대의 여성운동은 민권운동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그 여성운동은 주로 상류층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1960년대의 대부분의 중류층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준 반항정신의 기색이 있었다. 여성운동의 출현에 관련된 또 하나의 요인은 산아제한 알약의 개발 및 시판에 의해 촉발된 1960년대 성혁명이었다.
개혁입법도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1964년의 민권법안에 관한 토의 중에, 보수주의자들은 인종 및 성을 바탕으로 한 차별대우를 불법화하는 수정안을 제안함으로써 법안 전체를 부결시키기를 바랐다. 처음에는 수정안이, 그리고 다음에는 그 법안이 통과됨으로써 여성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확보할 수 있는 법적 수간을 얻게 되었다.
여성들은 자기들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들을 스스로 취했다. 1966년 베티 프리댄을 포함한 28명의 직업여성들이 "미국 여성들이 미국사회의 주류에 전면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들 수 있는 조치를 취하기 위해" 미국 전국여성연맹(NOW)을 창설했다. 그 해에 1,000명의 여성이 이 단체에 가입했으며, 4년 후에 회원수는 1만 5,000명에 이르렀다. NOW 및 이와 유사한 여성단체들의 도움으로 여성들은 자기들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음을 점점 더 깨닫게 되었으며, 자기들의 기회를 늘리겠다는 결심을 강화하게 되었다.
남녀동권주의, 다시 말해서 여성의 권리 및 이익을 위한 조직적 활동은 1970년대 초엽에 고조에 달했다. 여성 저널리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넴과 몇몇 여성들은 1972년에 새 잡지 Ms.(미즈)를 창간했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의 기긴 중에, 한 여성 보건단체가 발행한 소책자 " Our Bodies, Ourselves"(우리들의 몸, 우리 자신들)는 85만 부나 팔렸다.
일부 남녀동권주의 운동가들은 남녀평등 헌법수정안(ERA)의 비준을 강력히 추진했다. 1972년 의회에서 통과된 이 헌법수정안은 "법 아래에서의 남녀 동권은 성별로 해서 합중국이나 주에 의하여 거부되거나 제한되지 아니한다"고 선언했다. 그 후 수년 동안에 걸쳐서, 비준에 필요한 38개주 중 35개주가 그 수정안을 비준했다. 법원들도 남녀평등을 증진시켰다. 1973년 연방대법원은 '로우 대 웨이드' 사건에서, 임신 첫 3개월 동안에 유산시킬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확인했는데, 이것은 여성운동의 하나의 중요한 승리였다.
그러나, 1970년대 중엽과 말엽에 여성운동은 침체되었다. 여성운동은 그 호소의 범위를 중류층을 넘어서까지 넓히지는 못했다. 온건한 남녀동권주의자들과 급진적인 남녀동권주의자들 사이에 분열 현상이 나타났다. 보수주의적인 반대자들은 남녀평등 헌법수정안에 반대하는 운동을 개시했으며, 이 헌법수정안은 비준에 필요한 38개주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1982년에 폐기되었다.
제 2차 대전 후의 미국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그룹들도 차별대우에 마주쳤다. 쿠바, 푸에르토 리코, 멕시코, 중미 출신인 그들은 흔히 숙련된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맹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농장 노동자로 일했으며, 수확기에는 때로는 잔인하게 착취되었고, 그 밖의 중남미계 미국인들은 도시로 모여들었는데, 초기 이민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보다 나은 생활을 추구하는 가운데 심각한 곤란에 마주쳤다.
급진적인 '전국 멕시코계 미국인협회(Asociacion Naciona Mexico-Americana)와 같은 (중남미계) 단체들에서 동원된 '치카노', 즉 멕시코계 미국인들은 1960년대에 이르러 대결적으로 되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의 빈곤퇴치 계획이 자기들을 위한 기회를 늘려주기를 바라고 있던 그들은 덜 시끄러운 그룹들에 대해서는 관리들이 잘 대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흑인 행동주의의 사례에는 다원주의사회에서의 압력정치의 중요성을 스페인계 미국민들에게 가르쳐주었다.
1935년의 전국노동관계법(NLRA)은 근로자들에게 결사의 권리 및 단체 교섭권을 보장하는 일에서 농업 노동자들을 배제했었다. 압도적으로 중남미계 미국인들이 많이 들어있는 '전미농업노조(UFW)의 창설자인 세자르 차베즈는 자기의 노조의 승인을 얻으려고 할 때, 직접 행동의 효력을 실제로 입증해 보여주었다. 차베르는 캘리포니아주의 포도 재배업자들을 상대로 하여 전국적인 소비자 불매 운동을 요구했으며, 이것으로 해서 당시 착취되고 있던 떠돌이 농업 노동자들은 마침내 노조가 자기들의 권익을 대표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양상추 및 기타 농산물들에 있어서의 이와 비슷한 불매 운동도 역시 성공적이었다. 농장 경영자들은 계속 차베즈 노조의 행동을 방해하려고 애썼지만, 농업 노동자들의 보다 높은 임금과 개선된 근로조건을 보장하기 위해, 차베즈의 노조가 농업 노동자들을 대표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은 이미 닦아져 있었다.
중남미계 미국인들은 정치적으로도 적극적이었다. 1961년 헨리 B. 곤잘레스는 텍사스주에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했다. 3년 후에 또 다른 텍사스주 사람인 엘리조 ("카카") 데 라가르자도 그의 뒤를 따랐으며, 뉴멕시코주의 조제프 몬토야는 상원의원이 되었다. 곤잘레즈 의원과 데 라 가르자 의원은 후에 하원의 위원장이라는 세력있는 지위에까지 올라갔다. 1970년대 및 1980년대에, 중남미계 미국인들의 정치참여 속도는 빨라졌으며,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자 두 사람의 저명한 중남미계 인물이 각료로 임명되었다. 즉, 샌안토니오시장이었던 헨코 시스네로스는 주택도시개발장관으로, 페데리코 페나는 운수장관으로 발탁되었다.
1950년대에 아메리카 인디언(아메리카 인디언 운동)들은 자기들을 인디언 보호 거주지로부터, 자기들이 미국의 주류에 동화하게 될지도 모르는 각 도시로 이주시키려는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여 싸웠다. 그들은 땅을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든 땅에서 쫓겨난 그들의 대부분은 흔히 도시생활에 적응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1961년 그 정책이 중지되었을 때, 미국민권위원회(USCCR)는 인디언들에게서 "빈곤과 권리상실은 흔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제 3세계의 내셔널리즘 발전 상황과 민권운동의 진척 상태를 지켜보고 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달라고 보다 적극적으로 주장하게 되었다. 새로운 세대의 인디언 지도자들은 잔여 부족 땅을 보호하거나, 아니면 과거에 흔히 불법으로 빼앗긴 것들을 되찾기 위해 법원에 제소했다. 차례로 주에서마다, 그들은 미국정부와 인디언 부족 간에 체결된 조약의 위반 사례에 도전했으며, 1967년에는 장기간 침해된 토지 사용권 및 수리권의 회복을 보장하는 여러 승리 중의 하나를 거두었다. 1968년에 시작된 미국 인디언 공민권운동(AIM)은 인디언들이 관장하는 단체들에 정부 자금을 공급하는 일과, 각 도시에서 무시되고 있던 인디언들을 돕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대결은 자주 일어났다. 1969년 78명의 아메리카 인디언 상륙부대가 샌프란시스코만의 앨커트래즈도를 점령했으며, 1971년 연방정부 관리들이 그들을 물러나게 만들 때까지 그 섬을 점령하고 있었다. 1973년 미국인디언공민권운동은 19세기에 미군이 '수' 야영지를 습격 학살한 운디드 니 마을(사우드 다코타주)을 접수했다. 인디언 공민권운동 투사들은 인디언 가구들의 절반은 사회복지 혜택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알콜 중독자들이 널리 퍼져 있는 도시 주변 인디언 보호 거주지의 비참한 생활조건을 극적으로 보여주기를 바랐다. 이 일은 인디언 1명이 피살되고, 또 다른 인디언 1명이 부상을 당한 후에, 조약에서 보장되어 있는 권리들을 미국정부가 검토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끝났지만, 인디언들에게 이로운 일은 그 후에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인디언 행동주의는 성과를 가져왔다. 미국민들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정부 각 부처의 관리들은 장기간 지체되어 온 (인디언에 대한) 동등한 대우를 위한 압력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아메리카 인디언 상원의원 벤 나이트홀스 캠벨(코로라도주 출신)은 1992년에 선출되었다.
평등한 기회를 위한 선동은 다른 형태의 격변을 촉발했다. 특히 젊은이들은 제2차 대전 후 수 십년 동안 자기들의 부모들이 만들어 온, 안정된 중산층 생활 패턴을 거부했다. 일부 젊은이들은 급진적인 정치활동에 投身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복장 및 성행위의 새로운 기준을 받아들였다.
반문화의 뚜렷한 징후는 1960년대 말엽 및 1970년대 초엽의 미국사회에 고루 퍼져 있었다. 머리털은 점점 더 길어졌으며, 턱수염은 흔하게 되었다. 청바지와 티셔츠가 양복 바지, 양복 저고리, 넥타이 등을 대신했다. 과거의 구속감으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불법 마약 사용이 증가되었다. 로큰롤은 점점 더 성행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변주곡으로 변하게 되었다. 비틀즈, 롤링 스톤즈, 그리고 기타 영국 음악인 그룹들은 이 나라를 황홀하게 했다. "하드록"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가수이자 작사가인 밥 다이랜의 노래와 같은, 젊은이들의 반문화는 1969년 8월 참가자가 거의 50만 명이나 되었던 뉴욕주의 전원도시 우드스톡에서 개최된 3일간의 음악 축제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영화와 음반 앨범에서 신화적으로 다루어진 이 축제는 당시를 나타내는 시대 명칭, 즉 '우드스톡 세대'를 낳게 했다.
민권운동을 뒷받침하고 반문화를 촉진시킨 에너지는 또한 1960년대 중반기의 환경보고 운동에도 자극을 주었다. 살충제, 특히 DDT가 초래하는 참해를 지적한 레이첼 칼슨의 저서 "Silent Spring"의 출판(1962년)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각성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건강과, 환경의 미(美)에 위협을 주는 기타 오염물질들, 즉 자동차 배기가스, 산업 폐기물, 해상 석유 누출 등을 알게 됨에 따라, 환경에 대한 국민들의 염려는 1960년대에 계속 증대되었다. 1970년 4월 22일 미국 전역의 학교들과 지역사회들은 '환경의 날' 선포식을 거행했다. "티치-인"(학생들과 교수들이 참석하는 대학에서의 성토대회)들은 환경 공해의 위험성에 관해서 미국민들을 교육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의 대기와 물을 맑게 하기 위해 제안된 방안들에 저항했다. 해결책들은 실업인들과 개인들에게 돈을 부담시킬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나 일하는 방식에서 변화를 강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0년 의회는 획일적인 전국적 대기질 기준을 만들기 위해 1967년의 '맑은 대기법'을 개정했다. 의회는 또한 수질개선법(WQIA)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연안 해상에서 누출된 유류를 깨끗이 청소하는 일의 책임을 오염자에게 지웠다. 그리고 환경 오염 악폐를 막기 위한 노력에서 앞장서기 위해 1970년에 연방정부 독립 기관으로서 환경보호청(EPA)가 신설되었다.
미국 지도 펼쳐 보고 미국 여행 하자.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지도 검색 블로그)
| "우리는 새로운 세계, 훨씬 나은 세계 -- 즉 인간의 영원한 존엄성이 존중되는 세계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된다" -- 해리 S. 트루먼, 1945. |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시기에 세계 문제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 대란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본토가 전화를 입지 않은 이 나라는 국내외에서의 미국의 사명을 확신하고 있었다. 미국 지도자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수호한 민주주의체제를 유지하기를 원했고, 번영의 혜택을 가능한 한 널리 나누기를 원했다. 시사주간지 <타임>(Time)의 발행인인 헨리 루스와 마친가지로 그들에게는 이 시기가 "미국의 세기"였다.
20년 동안 대부분의 미국민들은 이러한 자신만만한 접근방식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1945년 이후 전개된 영토 중에 소련에 대해 강력한 자세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들은 정부권능의 증대를 찬성했으며, 뉴딜정책 실시 기간 중에 처음으로 명백히 확립한 부강한 국가의 대망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미국에서 새로운 수준의 풍요를 창출한 전후 번영을 즐겼다.
그러나 차츰 일부 미국민들은 미국생활에 관한 주된 가정들을 의문시하기 시작했다. 갖가지 면에서의 도전은 국민적 합의를 깨뜨렸다. 1950년대에 아프리카계 미국민들이 '미국의 꿈'의 보다 큰 몫을 차지하기 위해 강력한 개혁운동을 시작했는데, 이 운동에는 후에 기타 소수민족들과 여성들이 참여했다. 1960년대에 정치적으로 행동적인 학생들이 해외에서의 이 나라의 역할, 특히 정신적으로 좀먹어들어가는 월남전에서의 현장유지에 도전했다. 각계각층의 미국민들이 미국에서 새로운 평형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냉전은 전후 초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였다. 냉전은 소련과 미국 사이에 장기간 존속되어온 의견 불일치로부터 생겼다. 1918년 미군은 볼셰비키 세력을 위해서 연합국의 러시아 개입에 참가했다. 미국은 193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볼셰비키 정권을 외교적으로 승인했다. 그때에도 의구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 두 나라는 서로 연합하고 있었으므로 나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의 의견차이를 무시했었다.
대전이 종결되었을 때 그들의 적의는 또다시 표면화되었다. 미국은 미국의 자유, 평등, 민주주의 등의 개념을 다른 나라들과 함께 하기를 바랐다. 여타 세계가 내란에 시달리고, 제국들이 붕괴되는 동란속에 있었으므로 이 나라는 평화로운 재건을 가능하게 해주는 안정을 제공하기를 바랐다. 세계 대공황의 망령을 잊을 수 없는 미국은 당시 미국이 익숙한 자유무역 견해를 키웠으며, 미국의 잉여 농산물 및 공산품을 위한 판로를 창출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성장을 촉진시키고, 그들의 경제를 재건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서유럽 국가들의 수출 능력을 보장해주기 위해서 무역 장벽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무역장벽의 감축은 미국 내외에서 경제성장을 촉진시키고, 미국의 우방국 및 동맹국 내에서의 안정을 뒷받침할 것이라고 믿어졌다.
소련은 자신의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의 강력히 중앙 집권화되고 독재적인 통합의 역사적인 전통은 미국의 민주주의강조와 대조가 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는 대전 중에 중시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소비에트 정책의 지침이 되어있었다. 소련 국민이 1,000만명이나 사망한 전쟁으로 해서 황폐화된 소련은 자국을 재건하고, 또 다른 이러한 가공할 전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소련은 특히 그들의 영토에 대한 서방측으로부터의 또 다른 침공을 염려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침공을 물리친 그들은 또다른 이러한 침공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작심하고 있었다. 당시에 소련은 방어 가능한" 국경들과, 동유럽에서 소련의 목적에 동조하는 정권들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중부 및 동유럽의 기타 국가들의 독립 및 자치를 회복시키는 일은 미국의 전쟁 목적 중의 하나였다고 계속 선언했었다.
해리 트루먼은 대전이 종결되기 전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을 승계했다. 과거에 미주리주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그리고 후에 부통령으로 재직했던 겸허한 트루먼은 처음에는 미국을 통치할 준비가 잘 되어있지 않은 것으로 느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복잡한 전후 문제들에 관해서 그에게 말해주지 않았으며, 그는 국제문제에 경험이 없었다. 그는 옛 동료에게 "나는 이런 일을 할만큼 큰 인물이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트루먼은 새로운 도전에 신속히 대응했다. 추진력있는 그는 자기가 마주친 문제들에 대해서 신속한 결정을 기꺼이 내리고자 한다는 것을 입중해 보여주었다. 그의 백악관 집무실 책상 위에는 미국 정치에서 유명한 말이 된 "The Bcuck Stops Here"(모든 일은 내가 맡는다)라는 좌우명이 적혀 있었는데, 이것은 자기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질 용의가 있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소련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한 그의 판단한 냉전 초기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전후세계 형성에 관한 의견 차이가 미, 소간의 의구심과 불신을 조성함에 따라 냉전이 진전되었다. 최초의 이러한 의견 충돌은 폴란드에 관해서 일어났다. 소련은 소련의 영향력의 지배를 받는 정부를 요구했으며, 미국은 서방 모델을 따르는 보다 독자적인 대의정체를 원했다.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는 상이한 해석을 하기 쉬운 광범위한 협정이 이루어졌었다. 그 협정의 규정들 가운데는 폴란드에서의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는" 선거의 약속이 들어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몰로토프 소련외상과의 최초의 회담에서, 얄타 협정을 이행해야 할 필요성을 논하면서 폴란드 민족자결에 관해서 단호한 태도를 취하겠다는 자기의 의도를 밝했다. 모로토프 소련 외상이 "저의 생애 중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듣지 않게 될 것이오"라고 대꾸했다. 그 시점에서부터 미소 관계는 줄 곧 악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몇 달 동안에, 소련군은 중앙 및 동유럽 전역을 점령했다. 소련은 동유럽 공산당들의 노력을 지원하고 민주적인 정당들을 분쇄하기 위해 소련의 군사력을 사용했다. 소련의 혜택을 입은 공산당들은 그 지역의 모든 나라에서 그들의 세력과 영향력을 신속히 확대했으며, 마침내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쿠데타를 초래하게 되었다.
공공 성명들은 냉전이 시작되었음을 명백히 밝혔다. 1946년 스탈린은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발전하에서는"국제평화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전시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은 미주리주 풀턴에서 극적인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을 하고 있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연단에 앉아 있었다. 처칠 은 "발틱해의 슈테틴시에서부터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시에 이르기까지 철의 장막이 대륙을 가로질러 내려졌다"고 말하고, 영어를 사용하는 국민들은 소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소련 봉쇄는 전후 시기의 미국정책이 되었다. 조지 케난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는 1946년 미국 국무부로 보낸 길다란 전문에서 새로운 접근방식을 명백히 밝혔다. 그는 소련으로부터 귀국한 후 권위있는 외교문제 전문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기고인 "X"로 발표된 기사에서 그의 분석 내용을 설명했다. 케난대사는 러시아의 전통적인 불안감을 지적하면서, 소련은 어떠한 사정하에서도 그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련은 "미국을 상대로 해서는 항구적인 협정(modus vivendi)이란 있을 수 없으며, 미국 사회내의 조화를 깨뜨리는 일은 바람직하고도 필요하다는 신념을 광적으로 신봉하고 있다"고 케난대사는 기술한 다음, 소련 세력을 팽창시키기 위해 모스크바 당국이 가하는 압력은 "러시아의 팽창 경향에 대한 단호하고도 항시 방심하지 않는 봉쇄에 의해서 저지하지 않으면 안되었었다고 덧붙였다.
봉쇄 독트린의 최초의 중요한 적용사례는 동부 지중해 지역에서 나타났다. 영국은 내란을 겪고 있는 군주정체에 공산주의세력이 위협을 주고 있는 그리스와, 소련이 영토 분할과 아울러 보스포루스에 해군기지를 건설 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던 터키를 지원하고 있었다. 1947년 영국은 이 이상 더 이러한 원조를 제공할 여유가 없다고 미국에게 말했다. 미국 국무부는 미국측의 원조 계획을 신속하게 고안했다. 그러나 아더 반덴버그의원과 같은 상원 지도자들은 트루먼 대통령이 "(원조부담을 두려워하는)미국민을 깜짝 놀라게 할 일"을 시작할 용의를 가졌을 경우에만 신 관여주의 정책을 지지할 수 있다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말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트루먼 독트린'으로 알려지게 된 한 성명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무장한 소수파나 외부 압력에 의한 정복에 저항하고 있는 자유 국민들을 지원하는 일이 미국 정책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본인은 믿는다."고 선언했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그는 그리스 및 터키에 대한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위해 4억 달러 지출 승인을 의회에 요청했는데, 그 돈의 지출은 승인되었다.
그러나, 트루먼의 승리를 위해서 트루먼 대통령 자신과 미국사회가 치른 대가가 있었다. 봉쇄 정책에 대한 지지를 재빨리 증대시키기 위해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과장했다. 그의 성명들은 이 나라 전역에 병적으로 흥분된 반공주의의 물결이 일게 했으며, 매카시주의 출현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봉쇄는 또한 전쟁으로 피폐한 서유럽 부흥을 돕기 위한 광범위한 경제원조를 필요로 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불안정한 이 지역의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미국은 소련의 지시를 받고 있는 당지 공산당들이 나치에 대한 그들의 전시 중의 저항심을 이용하여 집권하지 않을가 두려워했다. "의사들의 숙고하고 있는 동안에 환자는 위독해지기" 때문에 무슨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조지 마셔 미국 국무장관은 말했다. 마셜은 과거의 미군 최고위 장관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군사적인 승리를 초래한 주된 공로자로 인정되었다. 19 47년 중반기에 마셜은 곤란을 겪고 있는 유럽 국가들에게 "어느 국가나 독트린에 대항하는 계획이 아니라, 굶주림, 빈곤, 절망, 혼란 등을 없애기 위한"계획을 작성하도록 요청했다. 소련은 최초의 기!회담에는 참가했으나, 그들의 자원 및 문제에 관한 경제적 자료를 나누고, 원조 비용에 관한 서방측 통테에 굴복하기를 꺼려하여 떠나고 말았다. 나머지 16개국들은 마침내 4년 동안에 거쳐서 170역 달러에 달하느 원조액을 요청하는 안을 만들어냈다. 1948년초에 미국 의회는 대체로 역사상 미국의 가장 성공적인 대외정책안 중의 하나로 간주된, "마셜 플랜"이라는 명칭의 유럽경제부흥원조안을 가결했다.
전후 독일은 미, 소, 영, 불점령지구로 분할되었으며, 소련점령지구 중심부 가까이에 위치한 과거의 독일 수도 베를린도 4개 지구로 분할되었다. 미,영,불은 자기들의 점령지구를 단일자치 공화국으로 만드는 일을 의논했다. 그러나 소련이 독일을 통일시키는 계획에 반대했기 때문에 독일에 관한 4강국 각료급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서방 열강들이 자기들의 점령지구들을 통합하여 연방국가를 만들려는 의도를 발표하자, 스탈린은 이에 대응했다. 1948년 6월 23일 소련군은베를린을 봉쇄하고, 서방으로부터 (베를린으로 들어가는) 모든 도로와 철로를 차단했다.
미국 지도자들은 베를린의 상실이 독일을 잃고, 또 전유럽을 잃게되는 전조가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연합국공군들은 '베를린 공수!'로 알려진 서방측 결의를 실제로 성공적으로 보여주면서 공로에 의존하여 보급물자를 베를린으로 공수했다. 231일이 지나고, 27만 7,264회의 비행이 있은 후에 스탈린은 그 봉쇄를 해제했다.
동유럽에서의 소련의 영향력은 서방에게 경종을 울렸다. 미국은 소련을 봉쇄하는 일에 있어서의 경제적인 노력을 보완할 수 있는 군사동맹을 만드려는 노력을 주도했다. 1949년 미국과 이밖의 11개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했는데, 이것은 집단안보 원칙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동맹이었다. 가맹국 중의 한 나라에 대한 공격은 全가맹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고, 적절한 무력 대응에 마주치게 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이듬해에 미국은 미국의 방위목적을 명백히 밝혔다. 미국의 국가안보회의(NSC)는 미국의 대외 및 방위 정책을 전면적으로 검토했다. 그 결과로 생긴, NSC_68로 알려진 문서는 미국안보정책의 새로운 방향을 알렸다. "소련은 가능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모든 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하려는 광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문서로 해서 미국은 세계에서 소련의 침공이 있을 것 같이 보이는 어느곳에서나 동맹국들을 지원한다는 공약을 하게 되었다. 미국은 유럽 및 서베를린의 미.영.불의 존재에 대한 소련측 위협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방위지출을 극적으로 증가시키게 되었다.
미국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유럽에서 그 신봉자들을 더 얻게 되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을 하면서 또한 기타 지역에서의 도전에도 대응했다. 미국은 중국에서 모택동과 그의 공산당이 전진하는 것을 걱정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장개석 밑에 있는 국민당 정부와 공산군은 일본군과 싸울 때에도 내전을 하고 있었다. 장은 대전 당시의 한 동맹자였지만, 절망적으로 무능력하고 부패한 정부는 미국의 지원으로도 뒷받침을 할 수가 없었다. 모택동 군대는 마침내 1949년에 했으며, 모가 자기의 새 정권은 "제국주의자" 미국에 대항하여 소련을 지지할 것이라고 발표했을 때, 공산주의는 적어도 아시아에 있어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한국전쟁은 미, 중간의 무력충돌을 초래했다. 연합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당시 한반도를 일본으로부터 해방시킨 후 38도선을 따라 분단했다. 소련은 38도선 이북 지역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았으며, 미국은 38도선 이남 지역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았다. 원래 군사적인 편의의 목적을 위해 생긴 이 분단선은 냉전의 긴장이 증대됨에 따라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두 강대국은 제각기의 점령지역에서 정부를 수립했으며, 점령지역을 떠나간 후에도 계속 그 정부를 지원했다.
1950년 6월 북한군은 38도선을 넘어서 남침하여 서울을 석권했다. 범세계적인 투쟁에서 북한군을 소련의 볼모로 인식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에게 참전준비를 하게 하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미국은 북한을 침략자로 낙인찍는 유엔 결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소련은 유엔안보리의 소련 의석을 그대로 차지하고 있었더라면, 어떠한 조치에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을 터인데, 중앙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는 유엔 결정에 항의하기 위해 유엔을 보이콧하고 있었다.)
전쟁은 일진일퇴를 했다. 미군과 한국군은 처음에는 남쪽 부산항 주변의 고립된 지역으로 밀렸었다. 육, 해, 공군 합동의 과감한 인천 상륙작전으로 해서 북한군은 격퇴되었으나, 전투가 중국 국경에 가까워지게 되자, 중국이 참전하여 대규모의 군대를 압록강 너머로 파병했다. 대부분이 미군인 유엔군은 치열한 전투를 하는 가운데 또다시 후퇴했으며, 그 후 서서히 전투력을 회복하여 다시 38도선까지 진격해 올라갔다.
맥아더 장군이 중국 폭격에 대한 미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하고, 중국 국민당 군대의 본토 침공을 허용함으로써 문민정부의 군부통제원칙을 위반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그의 불순종을 비난한 다음, 그를 해임하고 매튜 리지웨이 장군과 교체시켰다. 냉전의 위험도는 매우 높은 것 같았지만, 제한된 전쟁을 하려는 미국 정부의 노력은 억제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한 미국민들 사이에서 욕구불만이 생기게 했다.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미국인의 찬성 인기도는 24%로 급강하했는데, 이것은 여론조사자들이 미국 대통령 인기도를 측정하기 시작한 이래 최저의 대통령 인기도였다.
Truce talks began in July 1951. The two sides finally reached an agreement in July 1953, during the first term of Dwight Eisenhower, Truman's successor.
냉전은 또한 중동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석유 공급지역으로서 전략상 중요한 이 지역은 영, 미군이 이미 철수한 후에도 소련군이 약속한 대로 철수하지 않고 있었을 때인 1946년에 소련의 공격에 허물어지기 쉬운 곳으로 보였다. 미국은 계속적인 소련군 주둔에 대한 유엔의 규탄을 요구했다. 미국이 이 지역으로 진입하는 소련전차들을 인지했을 때, 미국정부는 직접적인 무력출동 준비를 했다. 미국의 결의에 마주친 소련은 소련군을 철수시켰다.
2년 후, 미국은 이스라엘의 독립이 선포된지 15분 후에 신생국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마셜 국무장관과 국무부측의 강력한 저항을 누르고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이스라엘과의 긴밀한 관계를 증진시키면서도, 미국은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아랍 국가들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1953년에 대통령직에 취임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전임자들과는 다른 대통령이었다. 전쟁영웅이었던 그는 그를 널리 인기있기 만들어준 자연스럽고도 스스럼없는 매너를 지니고 있었다. "I like Ike"(나는 아이크를 좋아한다.)는 당시 도처에 나타난 선거운동 슬러건이었다. 전후기에 그는 육군 참모총장, 콜럼비아 대학교 총장, 그리고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추구하기에 앞서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 최고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그는 국민들이 협력하도록 만드는 일에 능숙했지만, 자제된 공공 역할을 추구했다.
그는 기본적인 미국 대외정책 견해는 트루먼 대통령과 함께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역시 공산주의를 세계 패권을 얻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획일화되고 자유가 없는 세력으로 인식했다. 그는 소련이 범세계적인 혁명을 부추기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의 첫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이 사상 드물게 따로따로 한 무리가 되어있고, 무장하고 있고, 서로 반대하고 있다. 자유는 노예제도를 상대로 싸우고 있으며, 빛은 둠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고 선언했다.
재직중에,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그의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소련 팽창주의를 막는 일에서 봉쇄는 충분한 효과가 없다고 주장했다. 공산주의에 의하여 정복된 사람들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과감한 해방정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소련 지배하에 있는 지역에서 1956년 헝거리에서와 같은 민주세력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소련군이 그들을 진압하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다.
공산주의를 봉쇄한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기본적인 공약은 남아있었으며, 그 목적을 위해서 그는 핵방패에 대한 미국의 의존도를 증대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맨해튼 프로젝트'는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들어냈다. 1950년에 트루먼 대통령은 새롭고 보다 강력한 수소폭탄의 개발을 승인했다. 이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예산 지출을 억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대량 보복" 정책을 안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서 미국은 미국이나 미국의 중요한 군익이 군사적 공격의 위협을 받을 경우 원자 무기들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베트남 공산세력에 의하여 프랑스인들이 축출된 인도차이나나, 중화인민공화국의 공격에 대항해서 국부(국민당 정부)룰 수호하기로 미국이 약속한 만에서, 핵무기의 사용을 고려해야 한다는 모든 제안을 물리치면서 미군을 매우 신중하게 배치했다.
중동에서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후, 1956년 영, 불군이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고 이스라엘이 시나위반도를 침공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무력사용에 저항했다. 영, 불, 이스라엘군은 미국측으로부터 심한 압력을 받아 이집트로부터 철수했으며,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 관리권을 계속 보유했다.
냉전은 미국 대외정책을 틀잡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국내 문제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미국민들은 급진적인 정부 전복을 오랫동안 두려워했으며, '공산주의 공포'시기(1919-1920) 중에 미국정부는 미국사회에 대한 인지된 위협을 모두 제거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내의 모든 공산주의 자취를 일소하기 위해서 한층 더 강력한 노력이 기울여졌다.
외국의 사건들과 간첩 스캔들도 이 시기의 반공 히스테리를 유발한 한 원인이 되었다. 1949년에 소련은 소련이 고안한 원자탄을 폭발시켰는데, 이것이 미국민에게 충격을 주어 믹국민들은 미국이 소련의 공격 목표가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1948년 미국 국무차관이였으며,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한 조언자였던 앨저 히스가 전소련 첩보원 휫테이커 챔버어스에 의하여 공산주의 간첩으로 고발되었다. 히스는 그 죄를 부인했지만, 1950년 그는 위증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마침내 미국정부는 1950년에 원자폭탄 개발에 관한 자료를 소련에게 넘겨준, 영, 미 간첩망을 적발했다. 원폭비밀 폭로 혐의에 의한 에델 및 줄리어스 로젠버그 夫妻의 체포 및 재판은 국내 공산주의 위험의 인지를 확인했다. 하워드 J. 맥그래드 법무장관은 "사회에 대한 죽음의 세균"을 지니고 있는 미국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있다고 선언했다.
1946년 의회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원들이 승리하고, 이들이 정부전복 활동을 조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이 보였을 때, 대통령은 '연방고용자 충성계획'(FELP)을 만들었다. 과거와 현재의 정부전복 활동에 관해서 추궁을 받은 근로자들은 흔히 대항할 기회가 없었다.
한편, 의회는 의회 자체의 충성계획에 착수했다. 1947년 하원 비미활동위원회는 영화에 공산주의 감정이 반영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영화 산업을 조사했다. 일부 작가들이 증언을 거부했을 때, 그들은 법정 모욕죄로 소환되어 수감되었다. 이에 할리우드는 항복했으며,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은 채용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반공 전사는 조세프 R.매카시 상원의원(공화당, 위스컨신州)이었다. 그는 국무부의 이미 알려진 공산주의자 205명의 명단을 수중에 가지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1950년에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매카시 의원은 그후 이 숫자를 몇 차례 변경하고, 그의 비난 내용의 어느것도 입증하지 못했지만 그에게 호응하는 국민감정을 불러일으켰다.
1952년 공화당이 상원의 다수파가 되었을 때, 매카시 의원은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는 당시 한 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자기가 하고 있는 공산주의자 색출 운동을 위한 공개 토론회장을 갖게 되었다. 그는 광범위한 신문, 텔레비젼 보도에 의존하면서 계속 반역을 이유로 해서 최고위급 관리들을 비난했다. 그는 자기의 강경하다는 평판을 이용하여 자기의 공격의 대상인 "혐오할 만하고 비열한"사람들의 특징을 묘사하기 위해 흔히 무례한 언행을 했다.
그러나 매카시 위원은 너무나 지나쳤다. 여론조사들이 국민의 절반이 그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지만, 매카시 의원은 자기의 보좌관 중의 한 사람이 징집되었을 때 미국 육군에 도전함으로써 월권행위를 했다. 텔레비전은 -그 초기에-그 청문회들을 수백만 가정에서 볼 수 있게 했다. 많은 미국민들이 매카시 위원의 야만적인 전술을 처음으로 보았으며, 국민의 지지가 줄어들기 시작하자, 마침내 상원은 그의 행위를 규탄했다.
그러나 그렇게 될 때까지 매카시 의원은 미국에서 어마어마한 권세를 부렸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정돈상태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의 득세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남의 죄를 지는 희생자들'을 제공했다. 그는 트루먼 행정부의 반공노력이 야기한 공포감을 고조시켰으며, 무고한 사람들에게 흔히 사용한 전술을 정당화했다. 요컨대, 매카시 위원은 국내에서의 냉전의 최악의 지나친 행위를 나타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5년 동안 냉전이 전개되었을 때, 미국은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경험했다. 전쟁으로 해서 번영은 다시 돌아왔으며, 전후기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미국의 국민생산량은 1940년의 약 2,000억 달러에서 1950년의 3,000억 달러로, 그리고 1960년의 약 5,000억 달러로 증가했다.
이러한 경제성장을 가져온 근원들은 여러 다른 부문에 있었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의 기간 중에 연간 자동차 생산량 수가 4배로 늘어났기 때문에 자동차 산업에도 일부 원인이 있었다. 귀환병들을 위해 감당할 만한 조건으로 저당을 설정해 준 일로 일부 자국을 받은 주책 건설 붐도 경제팽창을 촉진시켰다. 냉전 확대에 따른 방위지출 증대도 한 역할을 했다.
1945년 이후에 미국의 주요한 회사들은 한층 더 커졌다. 1890년대와 1920년대에 회사 합병의 물결이 있었는데, 1950년대에 또 하나의 회사 합병의 물결이 일어났다. 새로운 복합기업들-갖가지 다른 산업에 소유주가 있는 회사들-이 앞장섰다. 예컨대, 국제전화전신회사(IT&T)는 셰라튼 호텔, 컨티넨탈 제과회사, 하트포드 화재보험회사 ,에이비스 렌터카사등을 사들였다. 맥도널드 간이식품 레스토랑과 같은 소규모의 독점 판매 활동은 또 다른 패턴을 만들어냈다. 대회사들도 흔히 인건비가 낮은 해외 지역에서 지주회사들을 발전시켰다.
미국의 산업이 변함에 따라 근로자들은 자신들의 생활이 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상품을 생산하는 근로자들은 적어졌으며, 서비스(용역)를 제공하는 근로자들은 많아졌다. 1956년에 이르러 미국민의 대다수는 회사 지배인, 교사, 외판원, 사무원 등으로 일하는 화이트 칼러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일부 회사들은 연봉,장기 고용 계약, 그리고 이밖의 혜택 등을 인정하고 보장했다. 이러한 변화로 해서 근로자의 투쟁 정신은 무너졌으며, 일부 사회계급 구별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편, 농민들은 험난한 시대에 마주쳤다. 농업이 대기업화되자 생산성 증대는 농업의 합병을 초래했다. 또한 가족농업은 경쟁하기가 곤란해졌으며, 점점 더 많은 농민들이 농토를 떠났다.
기타 미국민들도 이동했다. 전후기에 서부와 서남부는 계속 발전했는데, 이것은 세기말까지 계속될 추세이다. 텍사스주의 휴스턴시,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시, 뉴멕시코주의 앨버커키시, 애리조나주의 튜선시 및 피닉스시 등과 같은 선벨트(미국 남부를 동서로 뻗은 온난지대)도시들이 급속히 확대되었는데, 이들의 발전은 주로 이 지역의 군사시설 소재로해서 촉진되었다. 캘리포니아주의 로스앤젤레스시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서 펜실베이니아주는 뉴욕주보다 더 많은 인구를 갖게 되었다.
한층 더 중요한 형태의 이동현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미국민들이 도심지로부터 새로운 교외로 나가는 이동이었다. 새로운 교외에서 그들은 전후 베이비 붐으로 해서 대량적으로 늘어난 많은 가구들이 귿르의 힘으로 구입할 수 있을 만한 주택들을 발견하기를 바랬다. 윌리엄 J. 레비트와 같은 도시개발업자들은 대량기술을 이용하여 모두 똑같은 모양의 주택들이 있는 새로운 지역사회르 건설했다. 레비트의 주택은 조립식으로 미리 제조된 것이거나, 아니면 공장에서 부분적으로 조립된 것이었다. 그 주택들은 수수했다. 그러나 레비트의 방법은 생산비를 절감시켜 새로운 소유자들로 하여금 적어도 '미국의 꿈'의 일부를 가질 수 있게 하였다.
교외들이 발전함에 따라 사업체들이 새 지역들로 옮겨갔다. 갖가지 상점들이 들어있는 대형 쇼핑 센터들이 소비자 패턴을 변하게 만들었다. 이들 쇼핑 센터의 수는 제2차 세계대전 종결 당시의 8개로부터 1960년대의 3,840개로 증가되었다. 소비자들은 용이한 주차와 편리한 저녁 시간으로 해서 도심지에서 쇼핑을 할 필요가 없었다.
신설된 고속도로들로 해서 교외와 교외의 상점들에 보다 낫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나라의 모든 지역을 서로 연결하는 장장 6만 4,000킬로미터를 웃도는 길이의 연방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1956년의 고속도로법은 미국사상 최대의 공공사업비인 260억 달러를 제공했다.
텔레비젼도 사회 및 경제의 패턴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1930년대에 개발된 텔레비전은 2차 세계대전 후에야 비로소 널리 시판되었다. 1946년에 이 나라의 텔레비전 수상기 보유 수는 1만 7,000대 미만이었다. 3년 후에 소비자들은 한 달에 25만대를 사들이고 있었으며,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미국 전가구의 4분의 3이 적어도 한대를 소유하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기에 보통 가정은 텔레비전을 하루에 4시간 내지 5시간 시청했다. 어린이들에게 인기있는 쇼들에는 Howdy Doody Time쇼와 The Mickey Mouse Club 쇼가 들어있었으며, 나이 많은 시청자들은 I Love Lucy와 Father Knows Best와 같은 시튜에이션 코미디(연속홈코미디)를 더 좋아했다. 모든 연령층의 미국민들은 좋은 생활에 필요하다고 하는 상품들을 위한 점점 더 고도로 발달된 광고에 마주치게 되었다.
페어 딜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국내 계획에 명명된 명칭이었다. 루즈벨트 전대통령의 뉴딜 정책을 기초로 하여 일을 추진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은 연방정부가 경제적 기회와 사회적 안정을 보장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정부의 역할을 감소시키기로 작정한 보수주의적 입법으로부터 나오는 맹렬한 정치적 반대에 마주치면서도 그러한 목적들을 달성하려고 분투노력했다.
종전직후 시기의 트루먼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는 평시경제로 전환하는 일이었다. 군인들은 조속히 귀국하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주택 및 고용을 위한 경쟁에 마주쳤다. 대전 종결 직전에 통과된 'GI 권리장전'(복 원병수호법)은 주택 구입을 위한 융자보장과 산업훈련 및 대학 교육을 위한 재정지원과 같은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군인들이 민간인 생활로 복귀하는 일을 도왔다.
전시생산이 멈추게 되자, 많은 근로자들이 실직자가 되었다. 그 밖의 근로자들은 봉급 인상을 원했는데, 그들은 이 인상이 장기간 지체되어 있던 것으로 느꼈다. 1946년 근로자 460만명이 파업을 단행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과거 어느 때와 파업 근로자수보다도 많은 수였다. 그들은 자동차, 철강, 전기 산업 등에 도전했다. 그들이 철도 산업 및 유연탄 광업에서 투쟁을 전개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이 개입했는데,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수백만 명의 근로층 미국인들을 멀리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또한 긴급한 당면 문제를 다를 때 보다 광범위한 행동과제를 제공했다. 대전이 종결된지 1주일도 안되어서, 그는 불공정 고용 관행으로부터 보호, 보다 높은 최저임금, 보다 많은 실업포상 및 주택 지원등을 제공하는 21개조 개항 계획을 의회에 제출했다. 그는 그후 몇 달 안에 건강 보험 및 원자력 법안을 위한 기타 제안들도 추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산발적인 접근방식으로 해서 트루먼 대통령의 우선순위 과제들은 불분명한 것이 되고 말았다.
공화당원들은 이것을 재빨리 공격했다. 1946년 의회의원선거에서 그들 "(민주당의 정책이) 지겹지 않느냐?" 라고 물었는데, 유권자들은 지겹다고 응답했다. 1928년이래 처음으로 연방의회 상하원에서 다수파가 된 공화당은 루스벨트 대통령 시대의 자유진보주의적인 방향을 뒤집기로 작심하고 있었다.
의회가 정부 지출을 삭감하고 세금을 인하하는 조치를 취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와 싸웠다. 1948년에 트루먼 대통령이 당선도리 가능성이 없음을 여론조사들이 가리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당선을 추구했다. 치열한 선거운동을 치른 후에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정치에 있어서의 대역전 현상의 하나를 빚어내어 공화당 대통령 후보 토머스 듀이 뉴욕주지사를 패배시켰다. 트루먼 대통령은 구뉴딜 연합세력을 부활시키면서 근로자, 농민, 흑인 유권자들에게 계속 의지함으로써 또다른 대통령 임기를 얻었다.
트루먼 대통령이 마침내 1953년에 대통령직을 떠났을 때, 그의 페어 딜 정책은 일부는 성공했으며, 일부는 실패했다. 1948년에 그는 연방정부 고용 관행에 있어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했으며, 미군 내에서의 인종분리 정책의 종결을 명령했다. 최저임금은 인상되었으며, 사회보장 계획들은 확대되었다. 주택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과를 가져왔지만, 많은 사람들의 수요는 충족되지 않았다. 국민 건강 보험 및 교육 지원 법안들은 끝내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냉전문제에 너무 열중함으로써 그의 국내에서의 능률은, 특히 강력한 반대에 마주쳐서 방해를 받았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뉴딜 정책이 확립한 기본적인 정부 책임을 받아들였지만, 대통령의 역할을 제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기의 접근방식을 "활력적인 보수주의" 또는 "현대적 공화주의"라고 명명했는데, 이것은 "돈의 경우에서는 보수주의적이며, 인간의 경우?br>☞ㅌ??자유주의적임"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한 비평가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매우 많은 학교들을 건설하기를 강력히 권고하지만...돈은 제공하려 들지 않는 것"을 주장하는 것 같이 보인다고 반격했다.
아이젠 하워 대통령의 최우선순위 과제는 여러 해의 적자재정후에 정부 예산 수지군형을 잡는 일이었다. 그는 정부 지출을 삭감하고, 세금을 인하하고, 달러화 가치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공화당원들은 인플레를 계속 억제하기 위해 기꺼이 실업의 위험을 무릅쓰고자 했다. 경제의 과도한 자극을 주기를 주저하던 그들은 이 나라가 8년 동안에 세 차례의 경기후퇴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
이밖의 분야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근해 산유지대의 관리권을 연방정부로부터 주정부들로 이양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또한 민주당이 시작한, 에너지원의 공공개발 방식보다는 차라리 민간개발 방식을 좋아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단행한 모든 일에서, 그들의 방침은 기업에 호의적이었다.
자제된 공공역할을 하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성향은 흔히 입법의 정체상태를 초래했다. 그는 배후에서 활동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계획들을 추진했다. 그는 배후에서 활동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계획들을 추진했다. 그리고 그는 백악관에 들어갈 때와 다름없는 인기를 가지고 백악관을 떠나간 극소수 미국 대통령 중의 하나였다.
1950년대에 미국사회에서는 획일의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젊은이들이나 늙은이들이나 다같이 자신의 생각으로 새로운 길을 가기 시작하지 않고 집단 규범을 따랐을 때, 순응주의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남녀 미국민들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고용 패턴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일단 전쟁이 끝나자, 전통적인 역할들은 재확인되었다. 남성은 한가정의 생계를 위해 벌이하는 사람으로 기대되었으며, 여성은 근로여성인 경우일지라도여성에게 알맞은 곳은 가정인 것으로 상정되어 있었다. 사회학자 데이빗 리스먼은 그의 영향력 있는 저서 The Lonely Crowd에서 동류집단 기대의 중요성을 관찰했다. 그는 이러한 사회는 안정과 순응주의를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텔레비전도 일반에게 인정된 사회적 패턴을 나타내는 경험을 젊은이들과 노인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균질화 추세를 초래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미국민들이 이러한 문화기준에 따르지는 않았다. 한 무리의 작가들, 즉 소위 "비트족 세대"에 속하는 작가들은 재래식 가치관에 반항했다. 자발성과 영성을 강조하는 그들은 이성을 능가하는 직관적 통찰력과, 서방의 제도화된 종교를 능가하는 동방 신비주의를 주장했다. 이 "비트족"은 상궤를 벗어나서 인습적인 관습의 패턴에 도전하고 미국의 여타문화에 충격을 주었다.
그들의 문학작품은 그들의 자유주의를 보여주었다. 작가 잭커루액은 75미터 길이의 두루마리 종이에 그의 베스트셀러 소설 On the Road를 타이프라이터로 타자했다. 일반에게 인정된구두점과 문장의 절 구조가 없는 이 책은 자유생활의 가능성을 찬미했다. 시인 앨런 긴즈버그는 현대의 기계화된 문명을 통렬히 비판한 그의 시 "Howl"로 이와 비슷한 평판을 받았다. 경찰이 그 시를 외설작품이라고 비난하고, 출판된 그 시를 압류했을 때, 긴즈버그는 법원에 성공적으로 제소함으로써 전국적으로 갈채를 받았다.
음악가들과 미술가들도 반항했다. 테네시주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는 흑인 음악을 로큰롤 형식으로 보급시켰으며, 그의 덕테일 머리스타일과 엉덩이를 흔드는 몸짓으로 근엄한 미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엘비스와 그밖의 로큰롤 가수들은 흑인 음악을 좋아하는 백인 청중이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보여줌으로써 미국 문화의 통합이 이뤄지고 있음을 입증했다. 잭슨 폴록과 같은 화가들은 이젤을 버리고, 바닥에 거대한 캠버스를 펴놓고 그위에 페인트, 모래, 그리고 기타 그림물감들을 마구 뿌려댔다. 이들 미술과들과 작가들은 모두가, 그들이 사용하는 매체가 무엇이건 간에, 보다 폭넓게 그리고 보다 깊이 느껴진 1960년대 사회적 변혁의 본보기를 제공했다.
전후기에 아프리카계 미국민들은 점점 더 반항을 하게 되었다. 대전중에 그들은 군대와 노동계에서 흑백 인종차별 대우에 도전했으며, 한정된 성과를 거두었다. 수백만 명의 흑인들이 남부 농장들을 떠나서 보다 나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북부 도시들로 갔다. 그들은 일자리 발견 대신에 도시 빈민가에서 좁은 공간의 생활상을 발견했다. 이제 흑인 군인들이 2급 시민자격을 거부하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일념으로 귀향하는 가운데, 다른 흑인들은 인종적 평등을 위한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재키 로빈슨은 1947년에 야구의 피색 선을 깨뜨리고 메이저 리그에서 야구경기를 시작함으로써 인종문제를 극적으로 부각시켰다. 브루클린 더저스 야구팀의 한 선수인 그는 상대방 선수들과는 물론, 팀 동교들과도 자주 트러블에 빠졌었다. 그러나 첫 시즌 경기에서 맹활약을하여 그가 받아들여지게 되자, 다른 흑인선수들에게도 길이 열리게 되고, 이들은 이제 묶이어 있다시피했던 '흑인 리그'를 떠나게 되었다.
정부 관인들과 많은 미국민들이 인종문제와 냉전정치간의 관련성을 발견했다. 자유세계의 지도국으로서, 미국은 아프리카 및 아시아 지역에서의 지지를 추구했다. 미국내에서의 인종차별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친구들을 얻으려는 노력에 방해가 되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민권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비록 사회적인 평등은 아닐지라도 정치적인 평등은 신봉했으며, 흑인 도시로의 점증하는 중요성을 인정했다. 남부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린치와 기타 형태의 민중의 힘이 1946년에 알려지게 되자, 그는 인종 및 종교에 입각한 흑백 차별대우를 조사하기 위한 민권위원회 위원들을 임명했다. 그 이듬해에 발표된 보고서는 미국 생활에 있어서의 흑인들의 2급 지위를 상세히 기록했다. 그 보고서는 모든 미국민들에게 보장되어 있는 권리들을 연방정부가 국민들에게 확보해주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10개항 민권계획을 의회에 송부함으로써 이에 응답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보다 강력한 민권옹호 자세에 성난 남부 민주당원들이 1948년 민주당을 떠났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연방정부 고용분야에서 흑백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리고, 군대 내에서의 평등한 대우를 명령하고, 그리고 군대 내의 흑백 인종차별을 끝내는 방향의 일을 하기 위한 위원회 위원들을 임명했다. 군대 내에서의 (흑인에 대한) 마지막 제한은 한국전쟁 중에 끝났다.
남부의 흑인들은 민권과 정치적인 권리를 거의 향유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100만명을 웃도는 흑인 병사들이 싸웠지만, 남부 출신 흑인들은 투표할 수 없었다. 투표인 명부에 등록하려고 한 흑인들은 구타, 일자리 상실, 신용 상실, 아니면 그들이 살고 있던 땅으로부터의 축출 등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린치는 여전히 발생했으며, 짐 크로우법(남부의 흑인종 차별법)은 전차, 열차, 호텔, 레스토랑, 병원, 유락 시설등에서 흑백 인종차별을 강행했다.
흑인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자기들 스스로 감당했다.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NAACP)는 시설이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하기만 하면", 학교에서의 흑백 학생들의 분리는 합헌적이라는 1896년의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 법원이 확립한 사법상의 정설을 뒤집어엎기로 작심하고 있었다. 그 판결은 시설이 결코 평등하지 못했던 남부에서의 엄격한 흑인 인종 분리를 용인하는데 수십년 동안 사용되어 왔었다.
흑인들은 연방대법원-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임명한 연방대법원장 얼 워런이 주장했음-이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사건에 판결을 내린 1954년에,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의 판결을 뒤집어 엎으려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했다. 연방대법원은 "분리된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전원합의로 선언하고, "분리된 평등" 원칙은 이제 공립학교에서 사용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1년 후, 연방대법원은 지방 학교 이사회들이 "매우 신중한 속도로"움직여서 이 판결을 실천에 옮기도록 요구했다.
남부가 주요한 변천기에 마주쳤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남부가 필요한 것들에 호의적이었지만, 흑백 인종차별철폐 법률이 확정되도록 하기 위해 신속히 행동했다. 그는 워싱턴 D.C에 있는 학교들에게 흑백 인종차별을 철폐하여 이 나라의 여타 지역을 위한 본보기 구실을 하라고 명령했으며, 여타 지역에서도 인종차별을 종식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1957년 아칸소주 리틀록시에서 큰 위기에 마주쳤다. 이제까지 백인일색이었던 고교에 대한 흑인 학생 9명의 입학허가를 요구하는 인종차별 철폐 계획을 시행하기 직전에, 아칸소 주지사는 폭력사태가 일어날 것 같다고 선언하고, 주방위군을 배치한 다음, 흑인 학생들을 되돌아가게 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려고 했다. 연방법원이 주방위군을 연방정부 지휘권에 들어가게 한 다음, 흑인 학생들을 되돌아가게 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려고 했다. 연방법원이 주방위군의 철수를 명령하자 흑인 학생들은 학교로 왔는데, 호전적인 조롱에 마주칠 뿐이었다. 폭력분자들이 적개심을 나타내게 되자, 흑인 학생들은 떠나갔다.
이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주방위군을 연방정부 지휘권하에 들어가게 한 다음, 그들을 리틀록市로 다시 파견하도록 했다. 남북전쟁 후의 재건기가 끝난 이래 연방정부군이 흑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렇게 하기를 주저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흑백 인종차별 철폐는 '법의 지배'를 확보하기 위해 병사들을 교실에 배치해놓고 시작되었다.
민권운동에 있어서의 또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은 1955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서 일어났다. 42세의 흑인 여자 재봉사 로자 파크스여사(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 앨라배마주지부 !사)가 법과 관습에 의하여 백인 전용으로 되어 있는 구역인 버스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뒷자리로 옮겨달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경찰이 나타나서 흑백 인종분리법 위반으로 그녀를 체포했다. 이러한 사건을 기다리고 있던 흑인지도자들이 버스 배척 운동을 시작했다. 흑인들이 회동하는 침례교회의 젊은 목사 마틴 루터 킹이 항의를 위한 대변인이 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잔인한 압제의 발길에 채이는 일을 참을 수 없게 되는 때가 온다"고 말했다. 킹 목사는 거듭 거듭 항의하려고 들었기 때문에 체포되었지만, 몽고메리시의 흑인들은 버스 배척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버스 회사의 총수입을 65%나 감소시켰다. 약 1년 후, 연방대법원은 학교에서의 흑백 인종분리와 마친가지고 버스에서의 흑백 인종분리도 위헌이라고 판시했다. 버스 배척은 끝났다. 민권운동은 또 하나의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마틴루터 킹 목사가 민권운동의 가장 강력하고, 사려깊고, 웅변력있는 지도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프리카係 미국인들은 또한 자기들의 투표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미국 헌법 수정 제15조가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만, 많은 주들이-인두세나 '읽고 쓰는 능력'테스트로-법을 피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상원의 다수당 원내총무 린든 B. 존슨위원과 협력하면서 투표권을 보장하려는 위원측 노력을 지지했다. 82년만에 처음으로 제정된 1957년의 민권법이 흑인들에게 투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은 사건에 대한 연방정부의 개입을 승인했을 때, 이 민권법은 한걸음 나아간 것임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허점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래서 민권운동가들은 1960년의 민권법을 성공적으로 추진햇다. 이 민권법은 투표 방해에 대한 보다 엄격한 벌칙을 정했지만 연방정부 관리들에 의한 흑인 등록은 여전히 승인하지 않았다.
민권운동은 흑인 자신들의 노력에 의존함으로써 전후기에 힘을 얻었다. 민권운동 지지자들은 1960년대에 연방대법원과 의회를 통해서 한층 더 광범위한 민권운동을 위한 기반을 만들었다.
미국 지도 펼쳐 보고 미국 여행 하자.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지도 검색 블로그)
|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한 대조병창이 되어야 한다" -- 플랭클린 D.루즈벨트, 1941년. |
1933년 새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신뢰와 낙관론이 감도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뉴딜로 알려진 그의 정책의 기치하에 국민들이 재빨리 모여들게 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 라고 선언했다.
어느 의미에서 뉴딜정책은 약 한세대 남짓 동안이나 여러 유럽인들이 익히 잘 알고 있던 사회적 및 경제적 개혁을 미국에 도입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온당하다. 뿐만 아니라 뉴딜정책은 1880년대의 철도규제 조치와 그리고 디어도어 루스벨트 및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진보주의적인 시대에 홍수같이 쏟아져 나왔던 주 및 연방정부의 개혁 입법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자유방임 자본주의 포기를 향한 장기적인 추세의 최고조를 나타냈다.
그러나 뉴딜정책의 신기한 점은 과거에 수세대가 걸렸어야 할 일들을 이 정책이 해낸 그 속도였다. 사실 많은 개혁안들이 성급하게 작성되고 허약하게 집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 개혁안들은 서로 모순되기도 했다. 뉴딜정책이 실시된 전기간중 국민들의 대정부비판과 논의는 결코 방해되거나 중지당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뉴딜정책은 정부에 대한 개개 국민의 관심을 크게 소생시켰다.
루즈벨트 대통령 당선자가 대통령 취임 연설을 했을 때, 이 나라의 금융 및 신용제도는 마비 상태에 있었다. 이 나라의 은행들은 처음에 놀랄만한 속도로 문을 닫았으나 그 후 지불능력만 있으면 다시 문을 열었다. 정부는 상품 가격들이 올라가는 추세를 조정할 뿐만 아니라 채무자들의 부담을 얼마간 덜어주기 위해 알맞은 통화팽창정책을 채택했다. 신설된 정부기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저축은행 예금을 최고 5,000달러까지 보험계약 해주었으며 증권거래소의 증권판매에는 엄격한 규제가 가해졌다.
1933년에 미국민 수백만 명이 실업자였다. 실업자 빈민들이 식료품을 무료배급 받으려고 서있는 줄은 대부분의 도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음식, 일거리, 숙소 등을 찾아서 헤매고 돌아다녔다. "형제여, 한푼만 나누어 줄 수 있을까요?"라는 유행가 후렴이 나돌았다.
실업자들을 위한 한 조치는 18세부터 25세까지의 청년들을 구제하기 위해 연방의회가 확정한 계획인 민간식임치수단(CCC)의 형태로 나타났다. 반군대식으로 운영되는 민간식림치수단은 전국에 산재하고 있는 근로대에 무직청년들을 입대시켜 한달에 약 30달러를 주도록 했다. 10년동안에 청년 약 200만 명이 이 계획에 참가했다. 그들은 토양침식작용을 막고 국유림을 늘리기 위한 식목, 하천오염제거, 물고기, 맹수, 조유 등의 보호구역 신설, 그리고 석탄 석유, 가스 , 이판암 나트륨, 헬륨 광상 보존등을 포함하여 갖가지 천연자원 보존 사업계획에 참가했다.
실업경제는 토목사업청의 형태로 나타났다. 일부러 일거리를 만든다는 비판은 받았지만 자금을 공급받은 일거리들은 도랑파는 일에서부터 도로 보수공사.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1933년 11월에 신설된 이 토목사업청은 1934년 봄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핵심 관리들은 국민의 복지수당보다는 오히려 일자리에 바탕을 둔 실업구제 프로그램들을 계속 선호했다.
뉴딜정책 시대의 특징은 보다 큰 규제조치가 아니라 이 나라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라는 신념이었다. 예컨대, 1933년 의회는 농민들에게 경제적 구제책을 제공하기 위해 농업조정법(AAA)을 통과시켰다. 농업조정법의 핵심에는 농민들의 자발적인 감산에 대한 보상을 해주기 위한 보조금을 농민들에게 지급함으로써 농산물 가격을 인상하려는 계획이 들어있었다. 이 보조금 지급을 위한 자금은 농작물 가공산업에 부과하는 세금에 의하여 조성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AAA가 법률로 확장되었을 때에 농작물 성장 시기는 꽤 많이 지나갔으며 AAA는 농민들로 하려금 그들의 풍요로운 농작물을 갈아엎도록 권장했다. 헨리 A. 윌러스 농무장관은 이러한 활동을 "우리의 문명에 대한 충격적인 비평"이라고 했다. 하지만 농업조정법과 저장해 놓아서 매물로 나와있지 않은 농산물에 대해 융자해주는 프로그램인 상품신용공사(CCC)로 해서 농산물 생산고는 떨어졌다.
1932년부터 1935년까지의 사이의 농가소득은 50%이상이 증가했는데 어느 정도는 연방정부의 원조계획 덕택이었다. 농민들에게 휴경-차지인들과 소작인들을 쫓아내는일이 권장되고 있던 당시 대평원 주들에 가뭄이 엄습하여 농산물 생산고가 대폭 줄어들었다. 1930년대 특히 1935년부터 1938년까지의 기간중에 강한 바람과 황진폭풍이 "황진지대"로 알려지게 된 남부 기계들은 파괴되고, 사람들과 동물들은 상처를 입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흔히 "오우키즈"(1930년대의 오클라호마주출신의 뜨네기 농부들)라고 불리운 약 80만명의 이동 농업노동자들이 오클라호마주는 물론 아칸소주, 텍사스주, 미주리주 등을 떠났다. 이들의 대부분은 한층 더 서쪽에 있는 전설과 약속의 나라, 자기들의 생활이 농경지역사회의 건전도와 연걸되어 있는 전문직업인들과 소매상인 등이었다. 캘리포니아 주는 적어도 당초에는 그들의 꿈의 땅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지극히 낮은 임금으로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계절적인 일거리를 서로 얻으려고 경쟁하게 되었다.
정부는 1935년에 토양보존국(SCS)을 신설하여 농민들에게 원조를 제공했다. 토양에 해를 주어온 농업관행으로해서 폭풍에 의한 피해가 더 심해졌기 때문에 토양보존국은 농민들에게 토양침식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뿐만 아니라 바람의 힘을 막기 위해 약 3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이에 식목을 했다.
농업조정법은 대부분 성공적이었지만 식품 가공업자에 대한 과세는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온 1936년에 폐지되었다. 6개월 후에 의회는 보다 효과적인 농업 구제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토양을 메마르게 하는 농작물들의 지배를 줄인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게 부여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토양보존 관행을 통해서 농산물의 감산이 이루어졌다.
1940년에 이르기까지 약 600만 명의 농민들이 이 계획 하에서 연방정부 보조금을 받고 있었다. 이 신법도 마찬가지로 잉여 농산물에 대해 융자해주고 소맥에 보험계약을 주고 그리고 안정된 식품 공급을 확보하기 위해 계획된 농산물 저장 체제를 제공했다. 이윽고 농산물 가격은 올랐으며 농민들의 경제적 안정은 가능한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전국산업부흥법(NIRA)와 함께 1933년에 신설된 전국부흥청(NIRA)은 보다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럼으로써 보다 많은 구매력을 창출하기 위해 공정경쟁 관행 규약을 설정함으로써 살인적인 경쟁을 종식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당초에 전국부흥청은 환영을 받았지만 부흥이 시작하자 업계는 과도한 구제에 심한 불평을 했다. 1935년에 전국부흥은 위헌이라고 선언되었다. 당시에 기타 정책들은 부흥을 촉진시키고 있었으며, 정부는 이윽고 특정 업종에 있어서의 관이실격은 국가경제의 심한 낭비일뿐만 아니라 부흥에 대한 장애요인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조직노동자들이 미국 역사상의 과거 어느시기보다도 더 많은 이득을 본 것도 뉴딜정책실시기간중이었다. 전국산업부흥법은 노동자들에게 노사간의 단체교섭권을 보장해주었다. 그리고 1935년에 의회는 전국노동관계법(NLRA)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부당 노동관행을 정의하고 근로자들에게 자신들이 선택한 노동조합을 통해 단체교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고용주가 노동조합 활동을 방해하지 못하게 했다. 이 법은 또한 단체교섭을 감독하고 선거를 관리하고 그리고 고용주와의 교섭에서 자신을 대표해야 할 노조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근로자들에게 보장해주기 위해 전국노동관계안원회를 신설했다.
노조에서 이룩한 대발전은 공동 이해관계 의식을 점점 더 많이 근로자들에게 가져왔으며, 근로자들의 힘은 산업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증대되었다. 이 힘은 주로 양대 정당의 테두리 안에서 행사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노조측 지지를 더 많이 받았다.
뉴딜정책은 초기에 괄목할 만한 입법 계획들을 후원했으며 생산과 물가를 대폭 상승시켰지만 대공황을 종식시키지는 못했다. 그리고 절박한 위기의식이 누그러짐에 따라 새로운 요구들이 나타났다. 실업인들은 자유방임의 종식을 한탄하고 전국노동관계법의 단속하에 안달했다. 몽상가, 음모가, 정치가들이 모두 부흥 속도에 불만을 품고 있는 광범위한 청중을 끌은 경제적 만병통치학을 가지고 나오게 되자. 좌우 정파로부터의 시끄러운 구두 공격도 거세어졌다. 이 경제적 만명통치약들에는 프랜시스 E.타운센드의 후한 노년연금계획, 반유태주의 이미지가 진하게 가미된 연설에서 국제금융가들을 비난한 라디오방송 성직자 커플린 신부의 인플레 조성 제안, 그리고 루이지애나 주지사였던 휴이 P.룽 상원의원의 가공할 "객인은 왕"이라는 계획등이 들어있었다. 롱 상원의원은 주를 개인 영지처럼 운영하던, "황진지대"를 떠난 사람들의 강력하고도 냉혹한 대변인이었다.(만약 그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그가 1936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도전하여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좌우 정차로부터의 이러한 압력에 마주치면서 새로운 일련의 경제적 및 사회적 조치들을 지지했다. 이러한 조치들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빈곤퇴치조치, 사업에 의한 실업대책, 그리고 사회안전강(최저의 생활을 보장하는 사회복지 계획)의 제공등이었다.
소위 제2의 뉴딜정책의 주된 실업구제 기관인 공공사업촉진청(WPA)은 복지수당보다는 차라리 일거리를 제공하려는 하나의 시도였다. WPA계획하에서 빌딩, 도로. 공항. 학교 등이 건설되었다. 배우들, 화가들, 음악가들. 저술가들은 연방연극사업계획, 연방예술사업계획, 연방저술가사업계획 등을 통해서 고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청소연지도청(NYA)은 학생들에게 파트 타임 일거리들을 제공하고 훈련프로그램을 만들고 그리고 직업 없는 청소년들을 도와주었다. WPA의 도움을 받은 청소년들은 초기에 약 300만명이었지만 WPA가 폐지된 1943년에 이르러서는 WPA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900만명에 달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 따르면 뉴딜정책의 초석은 1935년의 사회보장법이었다. 사회보장법은 연노자, 실직자, 불구자 등을 위해 근로자들과 고용주들의 각출금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보험제도를 창설했다. 다른 여러 선진공업국들은 이미 이러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지만 1900년대에 미국에서 이러한 계획에 대한 진보파측의 요구는 주목받지 못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사회보장제도가 미국의 전통에 위배된다고 불평했지만, 실제에 있어서 미국의 사회보장제도는 비교적 보수적인 것이었따. 미국의 사회보장제는 주로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단일 고정세율로 모든 근로자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에 의하여 그 자금이 공급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는 사회보장 프로그램에 대한 이러한 제한들은 의회에서의 통과를 확보하기 위한 타협조건들이었다. 사회보장제도는 당초에는 매우 소규모로 시작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미국정부가 관장하고 있는 가장 큰 국내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 되어있다.
1936년에 공화당은 루스벨트에 대항하기 위해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앨프레드 M.랜던(캔저스 주지사)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뉴딜정책에 대한 많은 불평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는 193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가일층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유권자 60%의 지지를 얻었으며, 메인주 버몬트주를 제외하고 모든 주를 석권했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과 제휴한 광범위한 새로운 연합세력, 즉 근로자들, 대부분의 농민들, 그리고 동유럽 및 남유럽 출신의 이민들과 도시 소수민족그룹들, 아프리카계 미국민들 등으로 구성된 새로운 연합세력이 나타났다. 공화당은 실업계의 지지와 소도시 및 교외 중류층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정치적 제휴는 약간의 변동은 있었지만 수십년 동안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32년부터 1938년까지 뉴딜정책이 미국의 정치 및 경제생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미에 관한 토의가 미국민들 사이에 널리 행해졌다. 정부가 국민의 복지에 관한 토의가 미국민들 사이에 널리 행해졌다. 정부가 국민의 복지에 대한 보다 많은 책임을 지기를 미국민들이 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실제로 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현대 복지국가 기반을 확립한 공적을 뉴딜정책에 돌린다. 일부 뉴딜정책 비판자들은 정부기능의 무한한 확대는 마침내 국민들의 자유권들을 파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은 경제적 복지를 증진시키는 조치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강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8년 한 라디오 방송연설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미국민들에게 일깨워주었다.
몇몇 강대국들에서 민주주의는 사라져버렸다. 이것은 그나라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싫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나라 국민들이 실업과 불안정에 지치고 영도력의 결핍으로 해서 생긴 정부의 혼란 및 허약성에 마주쳐서 난감해 하고 있는 동안 자기들의 자녀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는데 지쳤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절망속에서 먹을 것을 얻기를 바라면서 자유를 희생시키기를 선택했다. 미국의 우리들은 우리의 민주제도가 보존될 수 있고, 또 기능을 발휘하게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제도를 보존하기 위해서...민주정체의 실제운영이 국민의 안전을 보호하는 일과 똑같은 일이라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미국민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자기들의 자유권들을 수호하는 일에서 국민의 의견이 일치되어 있으며, 또 그 수호의 제 1선은 경제적 안전의 보호에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많이 지나가기 전에 그의 국내계획은 보통 미국민들이 별로 알아차리지 못한 새로운 위험에 가리워지고 말았다. 즉 새로운 위험은 일본, 이탈리아, 독일 등의 전체주의 정권들의 팽창주의 계획이었다. 1931년 일본은 만주를 침공했으며 중국의 저항을 분쇄했다. 1년후에 일본은 만주국 괴뇌정권을 수립했다. 파시즘 세력이 장악한 이탈리아는 리비아에서 그 국경선을 확대했으며, 1935년에 이디오피아를 침공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국가사회당을 조직하여 1933년에 통치권을 장악한 독일은 라인란트를 다시 점령하고 대규모의 재무장을 했다.
전체주의의 진정한 성질이 분명해지고 독일과 이탈리아와 일본이 침략을 계속하게 되자, 이에 대한 미국민들의 우려가 고입주의 감정을 증대시켰다. 1938년 히틀러가 독일제국에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덴란트를 요구하게 되자, 유럽에서는 전쟁이 어느 순간에라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십자군의 실패로 환멸을 맛본 미국은 전쟁에 말려든 나라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미국에게 원조를 기대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1935년부터 1937년까지 하나씩 하나씩 제정된 중립법은 교전국과의 통상이나 교전국에 대한 차관을 금지했다. 그 목적은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미국이 비미국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막으려는 데에 있었다.
세계의 사건들에 대한 미국민들의 감정은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1939년에 나치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자, 독립주의 감정은 증대되었다. 미국민의 감정은 히틀러의 침공의 희생자들에게 분명히 호의를 보였으며, 독일의 팽창에 반대하고 있던 연합국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하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개입에 관한 미국민의 여론이 사건들에 의하여 변하게 될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1940년의 프랑스의 패망과 독일의 대영공중전으로 해서 민주국가들에 대한 지원을 찬성하는 사람들과 중서부지역 보수주의자들 및 좌경 평화주의자들로부터의 지지를 받는 미국제1주의 위원회를 중심으로 뭉친 고립주의파들 사이에서 토의가 격렬해졌다. 결국 오래끈 국민 토의에서 관여주의자들의 주장이 주로 '연합국지원'에 의한 미국수호안의회(Committee to Defend America By Aiding Allies)의 지원을 받아 승리했다.
미국은 상호방위안원회에서 캐나다와 합세했으며, 서반구 국가들에게 집단보호 조치를 제공하는 일에서 중남미 국가들과 제휴했다. 점점 심각해지는 위기에 마주친 의회는 재무장을 위한 막대한 금액의 지출을 가결했으며, 1940년 9월에는 미국사상 최초의 평화시 미집 법안을 통과시켰다. 비록 하원에서 단 한표 차이로 통과된 것이었지만 1941년초에 의회는 무기대여법을 승인했는데 이 법으로 해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방위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나라(특히 영국, 소련, 중국)에게 무기와 군장비를 넘겨줄 수 있었다. 대전이 끝날무렵의 무기대여법에 의거한 무기원조 총액은 500억 달러를 웃돌았다.
1940년의 대통령 선거운동은 독립주의자들이 시끄럽게 떠들기는 했지만 전국적으로 이들에게 비교적 추종자들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적이었던 공화당의 웬델 월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지지하고 또 루스벨트대통령의 국내 계획을 대부분 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한 흥미를 돋우는 정점을 가지고 있기 않았다. 그래서 11월의 선거는 루스벨트에게 절대 다수표를 안겨주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3선 대통령이 나타났다.
대부분의 미국민들이 유럽의 전쟁과정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아시아에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자국의 전략적 입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고 있던 일본은 태평양전역에서 일본이 패권을 행사하게 될 '신질서"를 대담하게 선언했다. 나치 독일에 대항하여,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던 영국은 어쩔 수 없이 상해로부터 철수하고 미얀마통로(버마의 라시오로부터 중국 운남성 곤명으로 이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전략적 도로)를 잠정적으로 폐쇄했다. 1940년 여름에 일본은 프랑스의 허약한 비시 정부로부터 인도차이나 비행장들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그 해 9월에 일본은 로마-베를린 추축에 가담했다. 미국은 이에 대한 대항수단으로서 대일 고철수출을 금지시켰다.
일본은 영영 말레이 반도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석유, 주석, 고무등을 얻으려고 남진할 것같았다. 1941년 일본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잔여지경을 점령했으며, 미국은 이에 대한 대응조치로서 일본인 재산을 동결했다.
1941년 10월에 도조 히데키 장군이 일본의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 해 11월 중순에 그는 미국에 특사를 파견하여 코델 헐 국무장관을 만나게 했다. 무엇보다도 일본은 미국이 일본인 재산동결을 해제하고 태평양 지역에서의 미해군 팽창을 중지하기를 요구했다. 헐 국무장관은 이러한 일본측 요구에 일본인 재산동결 해제조치의 교환조건으로 중국 및 인도차이나 반도로부터 일본이 철수해달라는 제안으로 대응했다. 일본은 이 제안을 연구하게 위해 2주일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12월 1일 이 제안을 거부했다. 12월 6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황 히로히토에게 직접 호소를 했다. 그러나 12월 7일 아침 일본의 항해 함재기들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태평양 함대를 기습공격했다. 군함 5척을 포함한 19척의 군함과 미국 비행기 약 150대가 파괴되었으며, 미군 병사, 수병, 민간인 등 2,300여명이 피살되었다. 그날 단 한가지 사실만이 미국에게 유리했다. 즉, 그 이후의 태평양 해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미국 항공모함들이 해상에서 항해중이었으며, 진주만에 정박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와이, 미드웨이, 웨이크, 괌 도 등에 대한 일본의 기습공격 상보가 미국의 각 라디오에서 요란하게 방송되자 설마하고 의심하고 있던 미국민들의 마음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이른바 "불명예로 남아있게 될 그날"에 대한 분노로 변했다. 12월 8일 미국 의회는 일본과의 전쟁 상태를 선언했으며, 3일 후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대미선전포고를 했다.
미국은 미국민들과 미국의 全산업 능력을 동원하는 체제로 신속히 들어갔다. 1942년 1월 6일 어마어마한 생산목표, 즉 그해 안에 항공기 6만대, 전차 4만 5,000대, 고사포 2만대, 총 1,800만 중양톤의 상선대를 인도하는 목표를 발표했다. 이 나라의 모든 활동, 농업 제조업, 무역, 노동, 투자, 통신, 심지어는 교육 및 문화 사업까지--은 갖가지 방식으로 새롭고도 확대된 통제하에 들어갔다. 이 나라는 거액의 돈을 모금해서 선박, 장갑차, 항공기 등을 대량생산하기 위한 거대한 새 산업들을 만들었다. 인구의 대이동이 일어났다. 일련의 징집조치에 의하여 미군의 총병력은 1,510만명에 달하게 되었다. 1943년말, 정복군인이거나 전쟁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는 미국인 남녀총수는 약 6,500만 명이었다.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해서 고립주의자들의 호소력은 제거되었으며, 신속한 군대동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진주만 피습 사건과 아시아인 간첩행위에 대한 두려움의 결과로서 미국민들은 편협한 행위, 즉 일본계 미국민들의 강제수용을 자행했다. 1942년 2월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고 있던 약 12만명의 일본계 미국민들이 그들의 집으로부터 철조망이 쳐진 10개의 임시수용소로 이동 수용되었으며 후에 외딴 서남부 소도시들 외곽에 있는 강제 격리 수용소들로 이송되었다. 이들 일본계 미국민들의 약 63%는 미국 태생의 니세이(2세)였으므로 이들은 미국민이었다. 이들이 간첩행위 한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하와이와 미국 본토 출신의 일본계 미국인들은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 2개 보병부대에서 용감하게 싸워 두드러진 태평양 지역에서 통역과 번역관으로 복무했다. 1983년에 이르러서야 미국정부는 그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수용한 일이 부당했음을 인정하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미국이 참전한지 얼마 안되어서 서방 연합국들은 주요한 군사노력을 적의 힘의 핵심에 있는 유럽에 집중시키고 태평양 지역은 2차적으로 다루어야 했다.
1942년 봄과 여름에 영국군은 이집트를 목표로 한 독일군의 진격을 분쇄하고 독일군의 에르빈 로멜 장군을 리비아로 후퇴시킴으로써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에 대한 위협을 없앴다.
1942년 11월 7일 미군은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했으며 격전 끝에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은 크게 격파했다. 1942년은 또한 막대한 손실을 입어 고통받고 있던 소련이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문턱에서 나치의 침략을 저지시키고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패배시킨 동부전선에서의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1943년 7월 영국군과 미군은 시칠리아로 침공했으며 늦여름에 가서는 지중해 남부 연안의 파시스트 군대는 일소되었다. 연합군은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으며 이탈리아 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수락했지만 이탈리아 전역에서 나치 군대에 대항하는 전투는 치열하고도 오래 끌었다. 로마는 1944년 6월 4일에야 비로소 해방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도 연합군은 루마니아의 플로스티시에 있는 독일 석유보급창을 포함하여 독일의 철도, 공장, 무기설치 장소 등에 대대적인 공습을 단행했다.
1943년 말엽에 연합국들은 전략에 관한 토의를 여러 차례 거듭한 후에 독일로 하여금 러시아 전선으로부터 훨씬 더 많은 병력을 서부로 돌리지 않을 수 없도록 위해 서부전선을 열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장군이 유럽의 연합군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어마어마한 준비를 한 후 1944년 6월 6일 미, 영, 카나다 군의 선봉대가 우월한 공군의 엄호를 받으면서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다. 치열한 전투를 한 후 확보한 해안 교두보를 통해서 보다 많은 연합군이 진입했으며 많은 독일 수비병들이 연합군의 협공작전에 의해 고립되어 포로가 되었다. 연합군은 프랑스를 가로질러 독일을 향해서 진격하기 시작했다. 8월 25일 파리는 재탈환되었다. 연합군의 진격은 독일 국경에서 완강한 반격을 받아 지연되었지만 1945년 2월과 3월 서부로부터 독일로 진압했으며 독일군은 서부의 러시아인들 앞에서 무너졌다. 5월 8일 독일 제3제국의 육해공군은 모두 항복했다.
한편, 미군은 태평양에서 진격하고 있었다. 1942년 초엽에 필리핀에서 미군은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후 2,3개월 안에 연합국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제임스 "지미"두우리틀 장군이 4월에 미군 폭격기들을 이끌고 동경 폭격을 했는데 이 폭격은 군사적으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만 미국민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심리적인 격려가 되었다. 그 다음달의 산호해 해전 항해 함재기들 만이 싸운 사상 최초의 해전에서는 일본 해군이 막대한 손실을 입어 오스트레일리아를 공격하려던 생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월 중앙 태평양에서의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해군에게 항공모함 4척을 잃은 최초의 대패를 맛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중앙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일본의 진격을 종식시킨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연합국들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이밖의 다른 전투들도 연합국의 성공에 기여했다. 1942년 11월에 미군이 결정적으로 승리한 과달카날 전투는 태평양에서의 미군의 최초의 대공격이었다. 그후 2년동안의 대부분의 기간 중에 미군과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수륙 양면공격으로 솔로몬 군도, 길버트 군도, 마샬 군도, 마리아나 군도, 보닌 군도 등을 점령하면서 중앙 태평양의 , "사닥다리"를 따라 북진했다.
연합국의 군사적인 노력에는 전쟁의 정치적 목적에 관한 일련의 중요한 국제적인 회담들이 병행되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회담의 첫 회담은 미국이 아직 참전하지 않고 있었으며, 군사적인 정세가 스산하게 보이고 있었을 때인 1941년 8월에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사이에서 있었다.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근처의 순양함상에서 만난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다음과 같은 목표들을 승인한 목적 성명서인 대서양헌장을 발표했다. 즉 영토확대의 불허, 관계 국민들의 승인 없는 국경선 변경의 불허, 자신들의 정체를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국민들의 권리, 자주장부를 박탈당하고 있는 인민들의 자주정부 회복, 모든 국가들 사이의 경제협조, 모든 사람들의 전쟁, 공포, 결핍으로부터의 해방, 공해의 자유, 그리고 국제정책의 수단으로서의 무력이용의 포기 등이었다.
1943년 1월 모로코의 카사블란카에서 개최된 영미회의는 무조건항복조건이 아니면 추축국들 및 그들의 발칸 위성국들과 강화조약을 체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장한 이 조건의 목적은, 파시스트 및 나치의 대표들과는 어떠한 강화협상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대표들이 그들의 잔재세력들을 구출하기 위한 어떠한 흥정도 하지 못하게 하며, 또 독일 이탈리아 일본 국민들에게 최종적인 강화조건을 제시하기에 앞서 이들 나라의 군벌들이 전세계 앞에서 자신들의 완전하고도 전적인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들을 모든 참전국 국민들에게 다짐하려는 데에 있었다.
1943년 11월 22일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카이로에서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일본에 대한 조건에 합의했는데 이에는 일본이 과거의 침략에서 얻은 것들을 포기하게 한다는 조건이 들어있었다. 그해 11월 28일 테헤란에서 루스벨트, 처칠 그리고 스탈린은 새로운 국제기구인 국제연합(유엔)을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약 2년 후인 1945년 2월에 그들은 승리가 거의 확실하게 보이는 가운데 얄타에서 회담했다. 소련은 독일이 항복한 후 얼마 안되어 일본과 전쟁하기로 비밀리에 동의했다. 폴란드의 동부 국경선은 대체로 1919년의 쿠르존선으로 정해졌다. 독일로부터 받아낼 막대한 전쟁 배상-스탈린이 요구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반대했음--에 대한 의논이 있은 후에 그 결정은 연기되었다. 연합군의 독일 점령과 전범자들의 재판 및 처벌에 관한 특별 조치가 마련되었다.
또한 얄타 회담에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강대국들이 그들의 안보에 영향을 주는 문제에서 거부권 가져야 한다는데 합의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얄타로부터 귀국한지 2개월 후에 조지아 주에서 휴가중 뇌일혈로 사망했다. 미국 역사상 그렇게도 심심한 애도를 받은 인물은 거의 없었으며, 한 동안 미국민들은 보상받을 수 없는 손실로 인한 허탈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주리주 상원의원이었던 해리 S. 트루먼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 했다.
태평양전쟁은 독일이 항복한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마지막 전투들은 가장 격심한 전투들이었다. 1944년 6월초 필리핀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크게 격파되어 도조 일본수상은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2년에 일본군에게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필리핀을 마지못해 떠났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1944년 10월에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와서 미 해군을 위한 진격의 길을 열었다. 레이티만 해전은 일본 해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필리핀 해성에서의 연합국의 지배력을 회복시켜주었다.
1945년 2월 미군은 마닐라를 점령했다. 다음에 미국은 마리아나 군도와 일본사이의 중간쯤에 있는 보닌 군도의 유황도(이오지마)를 목표로 정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 섬을 수호하기로 결심하고 있었으며, 천연 동굴과 바위 많은 지세를 가장 잘 이용했다. 미군의 폭격은 일본군의 해상운송과 비행장들에 대한 대한 광범위한 공습을 시작했다. 5월부터 8월까지 미 제 20공군은 일본열도에 대한 파상 공습을 단행했다.
미영소 정부 수반들은 대일 작전, 유럽의 평화해결, 독일의 미래를 위한 정책등을 의논하기 위한 정책 등을 의논하기 위해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회동했다.
이 회의에서는 나치즘 하에서 자라난 독일인 세대의 재교육을 돕고 또 이 나라에 민주정치 생활을 부활시키는 일에 적요오딜 광범위한 원칙을 명백히 정할 필요성에 대해 의견이 일치되었다. 이 회의 참석자들은 또한 독일에 대한 배상청구를 의논하고, 인도에 반하는 범죄 혐의로 고발된 나치 지도자들의 재판에 합의하고 그리고 (점령지에서의)소련에 의한 공장시설 및 재산의 철거 방식을 규정했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이미 제기된 총 100억 달러에 달하는 배상청구는 앞으로의 논의 대상으로 남았다.
포츠담 회담이 시작되기 바로 전 날, 뉴멕시코 주 앨라모고도에서 원자폭탄의 폭발시험에 있었는데 이것은 맨해튼 계획으로 알려진 계획에 의하여 미국 전역의 여러 연구소에서 3년 동안 집중적인 연구가 계속된 끝에 얻어진 결정이었다. 보다 신속하게, 그리고 일본 본토를 침공하는 것보다 적은 사상자를 내고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원자폭탄이 사용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은 만약 일본이 8월 3일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원자폭탄을 사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연합국은 일본이 항복만 하면 파괴되지도 않고 노예가 되지도 않을 것이지만 만약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일본은 '전멸'하게 될 것임을 다짐하면서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미국의 군부 및 정계 요인들, 그리고 과학자들로 구성된 한 안원회가 새 무기의 투하 목표지 선정 문제를 심의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오직 군사시설 만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기술한 바 있다. 예컨대 헨리, L. 스팀슨 육군장관은 일본의 옛 수도이자 많은 국보 및 종교적 귀중품들을 간직한 교토는 원폭투하 목표지 선정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시켰다. 전시산업 및 군사직전의 한 중심지인 히로시마시가 원폭투하 목표지로 선정되었다.
8월 6일 미군 폭격기 '에놀라 게이'機(B-29)가 히로시마 시에 한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8월 8일 두 번째 원자폭탄이, 이번에는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미국민들은 이 폭탄이 전쟁종결을 가속화한 것을 보고 안도감을 가졌었다. 이 폭탄의 가공할 파괴력은 후에 알려지게 된다. 8월 14일 일본은 포츠담 회담에서 정해진 조건에 동의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은 정식으로 항복했다.
포츠담 회담에서 규정된 나치 지도자 형사재판 1945년 11월에 열렸다. 영 불 소 미 의 한 무리의 저명한 재판관들 앞에서 나치 지도자들은 침략전쟁을 모의,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홀로 코오스트로 알려져 있는 유럽 거주 유태인 및 기타 기타 인종들의 조직적인 대량 학살에서 전쟁 법규와 인도의 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전범 재판은 10개월 남짓 계속되었으며, 3명 제외한 피고 전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태평양 지역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유럽 전쟁이 총국을 맞이하던 1945년 4월 25일 전후 세계 형성에 관해서 미래를 가장 멀리 내다보는 쾌정 중의 하나가 내려졌다. 국제연합(유엔)의 기틀을 만들기 위해 50개국의 대표들이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희동했다. 그들이 기초한 헌장은 국제간의 의견차이를 평화적으로 의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굶주림 및 질병에 대해서 공동전선을 펼 수 있는 세계기구의 윤곽을 표시했다. 미국 상원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을 거부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엔헌장을 89대 2로 신속히 고립주의 정신의 종식을 확인하고 국제문제에서 미국이 주요한 역할을 할 작정임을 세계에 알린 것이었다.
미국에서 1920년대는 번영의 시대였지만 철강, 자동차, 고무, 직물 등과 같은 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다른 많은 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보다 이득을 덜 보았다. 대부분의 그러한 산업들의 노동조건은 전세기(19세기)나 다름없이 열악했다. 예컨대, 1923년까지 미국의 보통 철강 근로자는 2주일마다 하루밖에 없는 휴일에 하루 12시간의 근로를 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1920년대에 대량생산 산업의 소유주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미국영동총연맹(AFL)산하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누리던 노조들의 득세를 막으려는 노력을 배가했다. 그들의 노력은 스파이 및 무장 파업파괴자의 이용, 노조 동맹 혐의자의 파면 등을 포함하여 여러자기 형태로 나타났다. 독자적인 노조들은 흔히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동시에 많은 회사들은 자사의 노조를 결성했다.
전통적으로, 주의회는 노조가 전 근로자를 전적으로 대표하지는 못하게 하는 오픈숍(비조합원도 고용하는 사업장)의 개념을 지지했다. 이것으로 해서 회사들은 노조에게 단체교섭권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법원의 강제에 의하여 노조 결성 및 가입을 보다 수월하게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보다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1920년대의 일부 회사들은 근로자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갖가지 수당, 노사의 이익분배제, 회사 종업원의 주식매입 선택권, 보건계획 등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1919년 철강회사를 필두로 하여 회사들은 대량생산 산업에 있어서의 일련의 파업을 심하게 억압했다. 그 결과로 1920년부터 1929년까지의 사이에 미국의 노조 가입자수는 약 500만 명으로부터 35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세계대공황이 시작되자, 모든 산업의 생산에 대한 수요가 갑자기 줄어들었다. 그 결과로 실업이 늘어났다. 1933년에 미국의 실업자수는 1,200만명을 웃돌았다. 예컨대, 1929년부터 1933년 사이에, 자동차 산업의 근로인력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동시에 임금은 3분의 2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플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당선은 산업 근로자들의 상태를 영원히 바꾸어버렸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근로자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진 첫 징후는 저명한 작업장 개혁 주창자인 프랜시스 퍼킨즈 여사의 노동장관 임명으로 나타났다.(퍼킨즈여사는 또한 각료급 지위를 가진 최초의 여성이었다)1933년 6월 먼 장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전국산업부흥법(NIRA)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임금인상, 주동노 시간 제한, 미성년자 고용금지 등을 추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법이 한 사업장 만의 단독 어용조합 에 가입하도록 회사가 고용자들에게 가입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고용자들이 "자기들 자신이 선택한 대의자들에 의하여 노조를 결성하고 단체교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뉴딜정책이 근로자들에게 의미한 바를 다른 어느 노동 지도자보다도 더 이해한 사람은 성급하고 이론이 정연한 존 L.루이스 전미광산 노동조합(UMW)장이었다. 루이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원을 강조하면서 교묘하게 노조운동을 함으로써 UMW의 조합원수를 1년 내에 15만명으로부터 50만명을 웃돌게 만들었다.
루이스는 자기가 간부회의의 일원이었던 미국노동총연맹(AFL)으로 하여금 대량생산 산업에서도 이와 비슷한 운동을 시작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숙력 노조 노동자들에 초점을 두고있던 AFL은 그렇게 하려고 들지 않았다. 심한 내부 불화 끝에 루이스와 그밖의 몇몇은 AFL과 결별하고 후에 산업별 노동조합회의라고 불리게 된 산업별 노동조합안원회(CIO)를 신설했다.
루이스와 CIO의 첫 목표는 악명높게 노조를 금지하고 있던 자동차 산업과 철강산업이었다. 1936년 말엽에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시와 미시건 주 플린트시의 제네럴 모터즈 사 공장들에서 일련의 자연발생적인 연좌항의 파업이 발생했다. 루이스는 이에 신속히 대응하여 파업자들을 돕기 위해 노조 결성팀과 자금 10만 달러를 보냈다. 이윽고 근로자 13만 5,000명이 이 파업에 참가하여 이 산업은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노동운동에 동정적인 미시건주지사의 도움으로 1937년 이 노동 쟁의는 해결을 보게 되었다. 그해 9월, 전미자동차 노동조합(UAW)은 자동차 산업에 관련된 400개 회사들과 단체협약을 체결함으로써 근로자들에게 시간당 75퍼센트의 최저임금과 주 근로시간 40시간을 보장해주었다.
미국의 철강제조업 중심지인 펜시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시에서는 철강산업대표들이 루이스를 빨갱이 그리고 흡혈귀라고 출판물을 공격했다. 그러나 1936sys의 전국노동관계법(NLRA)의 통과와 루스벨트 대통령의 재선은 노동세력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루이스의 보좌역인 필립 머리가 이끈 철강노동자 노조결성안위원(SWOC)은 이 위원회가 설치된지 6개월만에 12만 5,000명의 철강 노동자들을 노조에 가입시켰다.
제네럴 모터즈사의 항복은 철강회사 "유에스 스틸사"에 뚜렷한 영향을 주었다. 유에스 스틸사는 시대가 변했음을 알아차리고 1937년 CIO와 타협하게 되었다. 같은 해(1937)에 미국 연방대법원은 전국노동관계법의 합헌성을 확인,인정했다. 그 후 전통적으로 유에스 스틸사보다 한층 더 노조를 금지하고 있던 군소회사들고 CIO 노조들과 협약을 체결했다. 다른 산업들, 즉 고무산업, 유류산업, 전자기기산업 직물산업등도 하나씩 차례로 다른 회사가 하는 대로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대량생산 산업 노동자들은 이제 외롭지 않게 되었다.
미국 지도 펼쳐 보고 미국 여행 하자.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지도 검색 블로그)
| "미국민들의 첫째가는 일은 사업이다" -- 캘빈 쿨리지, 1925. |
1914년 유럽에서의 전쟁 발발은 당시의 미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당초에는 그 전쟁이 미국에게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그 전쟁이 미국에게 주는 경제적 및 정치적 영향은 급속하고도 깊었다. 1915년에 이르러, 경미한 불황에 빠져 있던 미국 산업은 서방 동맹국들로부터의 군수품 주문으로 다시 번영하고 있었다. 교전 당사국 쌍방은 미국민들의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선전책을 이용했다. 제3자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은 외국 태생의 양부모를 가지고 있거나, 두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외국 태생인 부모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과 독일은 공해상의 미국 선박의 항해를 방해하는 일을 했으며, 이로 해서 우드로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신랄한 항의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과 독일간의 분쟁은 점점 더 커져서 불길한 징조를 보이게 되었다.
1915년 2월 독일 군부 지도자들은 영국 제도 연해의 모든 상선 해운에 공격을 가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미국은 중립국으로서의 미국의 전통적인 권리, 즉 공해상에서 무역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윌슨 대통령은 경고했다. 이것은 독일과 영국이 함께 하지 않은 중립권 견해였다. 윌슨 대통령은 미국 선박들이나 미국민들의 인명의 손실에 대해 미국은 독일에게 "엄격한 문책"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후 1915년 봄에 미국인 128명을 포함하여 승객 약 1,200명을 태우고 있던 영국 기선 루시태니아호가 격침되었을 때, 미국민들의 분노는 격렬한 흥분상태에 이르렀다.
미국의 선전포고를 피하고 싶었던 독일은 독일 잠수함 선장들에게, 설사 항해 선박들이 적기를 게양하고 있을지라도 그들에게 발포하기 전에 경고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8월 19일 영국 기선 애러빅호가 경고 없이 격침되었을 때, 이러한 명령은 무시되고 말았다. 1916년 3월 독일 잠수함 수병들이 프랑스 선박 시섹스호를 어뢰로 공격하여 미국인 5, 6명이 부상을 당했다. 윌슨 대통령은 독일이 잠수함 전법을 포기하지 않으면 미국이 단교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독일은 (그 전법을 포기하기로) 동의했다.
그 결과로, 윌슨은 그의 정당이 내건 "그는 우리들로 하여금 전쟁을 모면하게 했다"는 슬로건에 얼마간 힘입어 그 해에 대통령으로 재선될 수 있었다. 1917년 1월까지만 해도, 윌슨 대통령은 상원에서의 연설에서 "승리없는 평화"를 요구하고, 이것은 지속될 수 있는 유일의 종류의 평화라고 말했다.
1917년 1월 22일 독일정부는 제한 없는 잠수함전을 재개하겠다고 통고했다. 4월에 5척의 미국 선박이 격침되었을 때,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했다. 즉시 미국정부는 군사 자원 산업, 노동력, 그리고 농업 등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연합국이 승리하기 직전인 1918년 10월에 175만 명을 웃도는 미군이 프랑스에 배치되어 있었다.
영국이 독일 잠수함대의 봉쇄망을 깨뜨리는 일을 돕는 일에서 미국 해군은 매우 중요했으며, 1918년 여름 오랜 동안 예측되었던 독일 측 공격이 시작되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새로 도착한 미군 부대들은 존 J. 퍼싱 장군 지휘 하에 지상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예컨대, 11월에 미군은 자만하고 있던 독일의 '힌덴부르크 선'을 분쇄한 '모이제-아르곤느 대공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윌슨 대통령은 연합국들의 전쟁 목적을 명백히 밝히고, 이 전쟁은 독일 국민들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독재정부에 대항해서 수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조기 종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공정한 평화를 위한 기초로서 1918년 1월에 미국상원에 제출된 그의 유명한 '14개항'은 비밀 국제협정의 포기, 공해의 자유의 보장, 국가 간의 관세장벽의 제거, 각 국의 군축 그리고 식민지에서의 관계 주민들의 이익을 정당하게 고려하여 식민지 측 요구를 조정하는 일 등을 요구했다. 이 밖의 다른 항목들은 유럽 국민들의 자치와 방해받지 않는 경제발전의 보장을 추구했다. 제14항은 윌슨 대통령의 평화안, 즉 "대국들에게나 소국들에게나 똑같이 정치적인 독립과 영토보전을 서로 보장할"수 있는 국가 간의 연합체의 형성안의 기조를 이루었다.
1918년 여름 독일군이 패배하여 후퇴하고 있었을 때, 독일정부는 그 '14개항'을 기초로 하여 협상하자고 윌슨 대통령에게 간청했다. 윌슨 대통령은 연합국들과 협의했으며, 연합국들은 독일 측 제안에 동의했다. 11월 11일 휴전조약이 체결되었다.
최종조약이 "협상에 의한 강화"의 성질을 갖게 되는 것이 월슨 대통령의 희망이었지만, 그는 전쟁이 불러일으킨 격정으로 해서 연합국들이 가혹한 요구를 하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 점에서 그는 옳았다. 민족자결의 개념은 실행 불가능한 것임이 입증되었다. 평화를 위한 자기의 최대 희망인 국제연맹이 연합국들에게 자기가 여러 가지 양보를 하지 않는 한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윌슨 대통령은 파리의 강화협상 기간 중에 민족자결 문제, 그리고 이 밖의 특정 사항들에 관해서 양보했다. 그러나, 그는 라인란트 전역을 독일로부터 떼어내자는 조르즈 클레망소 프랑스 수상의 요구에 저항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가 자아르 분지를 병합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이 독일에게 전쟁 배상의 무거운 부담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전쟁 비용 전액을 독일에게 배상시키자는 제안은 좌절시켰다.
결국에 가서, 관대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위한 윌슨 대통령의 제안들은 국제연맹을 제외하고는 남은 것이 없었으며, 윌슨 대통령은 자기 자신의 나라까지도 국제연맹 가입을 일축하는 마지막 아이러니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당시 윌슨 대통령은 판단을 정확하게 하지 못한 것이 일부 원인이 되어 강화안원단 편성에서 야당인 공화당의 한 주요 인사를 파리에 데리고 가지 않은 정치적 실수를 했다. 그가 미국의 국제연맹가입을 호소하려고 귀국했을 때에도 그는 공화당이 우세했던 상원에서 비준을 얻기 위해 필요한 대수롭지 않은 양보마저도 거부했다.
워싱턴에서 패배한 윌슨 대통령은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미국민들에게 호소하였다. 고된 강화협상과 전시 대통령 직무 수행의 중압으로 해서 몸이 쇠약해진 그는 1919년 9월 25일 콜로라도주 푸에블로에서 뇌졸중을 일으켜 반신불수가 되었으며, 끝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1920년 3월 상원은 그 최종 표결에서 베르사이유 조약과 국제연맹 규약을 모두 거부했다. 그 결과로, 미국이나 러시아가 참가하지 않은 국제연맹은 허약한 기구로 남아 있게 됐다.
전쟁과 평화를 위한 도덕적 및 법적 근거에 대한 윌슨 대통령의 신념은 미국민들을 격려해왔었다. 그러나, 사건들이 이러한 낙관적인 기준에 따라 전개되지 않았을 때 윌슨 식 이상주의는 마침내 환멸을 자아냈으며, 미국은 고립주의로 빠져 들어갔다.
대전에서 평화로 접어드는 이행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소란스러운 시기였다. 1917년 봄에 유럽 전역에서 급속히 만연되던 유행성 독감이 1918년 봄에 미국에서 창궐했다. 그 독감의 발생과 마찬가지로 그 독감은 1년 후에 원인 불명으로 사라지기에 앞서, 50만 명을 웃도는 미국인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대전 직후의 벼락 경기는 높은 기대를 갖게 했지만, 그 기대는 전후 경제가 정상상태로 되돌아가게 되자, 재빨리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근로자들은 앙등일로의 생계비, 장시간의 근로시간, 동정심 없는 경영 등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1919년 한 해만 해도 400여만 명의 근로자들이 파업을 했다. 뿐만 아니라, 그 해 여름에 인종 폭동은 미국 남북부에서 모두 발생했다.
그러나 최대의 전국적인 반대와 염려를 도발한 사건이 2년 전에 미국 바깥에서 발생했었다. 즉, 1917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볼셰비키 혁명이다. 사기가 낮은 미국민들은 러시아에서 한 작은 도당이 정권을 장악했듯이, 한 도당이 미국을 장악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었다. 1919년 4월 미국의 체신 공무원들이 저명한 미국민들 앞으로 송부되는 약 40개의 폭탄들을 도중에서 가로챘을 때에 이러한 두려움은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났다.
미첼 파머 법무장관은 법무성 내에 방첩을 담당하는 한 국을 신설하고, 에드거 후버를 그 국장으로 임명했다. 후버 국장은 유명한 극렬분자들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하고 갖가지 단체들을 급습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국외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파머 법무장관의 무서운 경고로 해서 이른바 "적색 위협"은 계속 증폭되었지만, 이러한 위협은 실제로 현실화되어 나타나지는 않았으며, 1920년 여름에 이르러 미국민들은 미국이 무정부 상태가 될 위험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92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워렌 G. 하딩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은 대체로 국민들이 윌슨의 국제주의와 이상주의를 거절하는 최종적인 증거였다. 저널리스트인 윌리엄 앨런 화이트는 (당시의) "미국민들은 쟁점을 다루는 일에 지치고, 이념에 넌더리나고, 그리고 고매하게 되는 일에 싫증났다"고 설명했다.
1920년의 선거는 도한 미국 전역에서 여성들이 대통령 후보에게 투표한 최초의 대통령 선거였다. 1919년에 연방의회는 헌법 수정 제19조항을 주들에게 제출한 바 있었으며, 이 헌법 수정 제29조항은 다음 해에 여성들이 투표할 수 있도록 때늦지 않게 비준되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 나라의 도시 지역에 있어서의) 도처에서 보이는 번영을 유지하는 일에서, 1920년대의 미국정부 정책은 현저하게 안보주의적이었다. 그 정책은 정부가 민간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만 한다면, 번영은 마침내 미국의 나머지 인구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까지 스며들게 될 것이라는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공화당 정책의 목적은 미국산업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는 데에 있었다. 1922년과 1930년의 관세법들은 관세장벽을 새롭게 높임으로써 미국의 제조업자들이 분야마다 차례로 국내시장을 독점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 이들 관세법들의 두 번째 것인 1930년의 '스무트-홀리법'은 관세율을 너무나 높였기 때문에, 1,000여 명의 경제전문가들이 후버 대통령에게 그 관세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진정했다. 그 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다른 나라들이 값비싼 보복을 할 것이라는 그 경제전문가들의 예언을 확증했다. 동시에, 연방정부는 고율의 소득세가 부자들의 새로운 기업투자를 막는다는 앤드루 멜론 재무장관의 소신을 반영시켜서, 감세계획을 시작했다. 연방의회는 192년부터 1929년까지의 사이에 통과된 일련의 법안들에서, 전시 소득세, 초과 소득세, 법인세 등을 즉시 폐지하거나 격감시켜야 한다는 멜론 장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고집 센 버몬트주 태생의 부통령으로서 1923년 하딩 대통령이 사망한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캘빈 쿨리지는 "미국민들의 첫째가는 사업"이라고 선언했으며, 192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당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쿨리지 대통령은 공화당의 보수주의적인 경제정책을 고분고분 따랐지만, 운 나쁜 하딩 대통령보다는 훨씬 유능한 행정관이었다. 하딩 대통령의 행정부는 하딩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 몇 달 동안 부패 비난으로 해서 곤경에 빠져 있었다.
1920년대 내내, 민간기업은 건설 융자, 이윤 많은 우편배달 청부계약, 그리고 기타 간접적인 보조금 등을 포함하여 상당한 혜택을 받았다. 예컨대, 1920년의 운수법은 대전 중에 정부의 통제 하에 있던 이 나라 철도들에게 민간경영을 이미 복구시켜놓고 있었다. 그리고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정부가 소유하고 있었으며, 대체로 정부가 운영하고 있던 미국 상선대는 민간업자들에게 매각되었다.
그러나 공화당의 농업정책에 대한 비판은 점점 많아졌다. 왜냐하면 농민들은 1920년대의 번영에서 가장 작은 몫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1900년부터 1920년까지의 기간은 미국 농산물 생산을 강력하게 자극한, 전례가 없는 전시 미국 농산물 수요로 해서 농민들이 전반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농산물 가격은 앙등일로에 있던 시기였다. 농민들은 오랜 동안 휴한지로 남아 있거나, 아니면 과거에 전혀 경작한 적이 없는 보잘것없는 땅들을 개간했었다. 미국 농산물 가격이 올라감에 따라, 미국 농민들은 과거에 구입할 수 없었던 상품과 기계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0년 말에 이르러 전시 수요가 갑자기 없어지게 되자, 소맥(밀) 및 옥수수와 같은 주요 곡물을 생산하는 농업은 급격히 쇠퇴했다. 미국 농업의 불황을 초래한 요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요인은 외국시장의 상실이었다. 미국 농민들은 미국 자체의 수입관세로 해서 미국이 상품 수입을 하고 있지 않은 외국지역에서 미국 농산물을 쉽사리 판매할 수는 없었다. 세계시장의 문호는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1930년대에 전 세계에 전반적으로 대공황이 들이닥쳤을 때, 이 공황은 이미 취약해져 있던 미국의 농업을 결단냈다.
1920년대의 미국의 이민 제한은 미국정책의 중요한 변화를 나타냈다. 미국의 이민은 19세기 말엽에 폭증했으며 20세기 초엽에는 최고도에 달했다. 예컨대, 1900년부터 1915년까지의 기간 중에 1,300만 명을 웃도는 이민들이 미국으로 들어왔는데, 남유럽과 동유럽으로부터 많이 들어왔다. 이들의 대부분은 유태인들이거나, 아니면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이것은 주로 앵글로 색슨족(영국계 미국인) 및 프로테스탄트였던 많은 옛 가계의 미국인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이들의 일부는 새로 들어온 이민들이 낮은 임금의 일자리를 위해 경쟁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 분개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새로 들어온 이민들이 구(舊)세계의 관습을 유지하고, 흔히 도시의 고립된 특정 민족문화 내에서 생활하면서, 보다 광범위한 미국문화 속으로 동화되어 들어가는 일에 저항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러했다.
1차대전 후의 이러한 이민 폭증의 결과로, 미국 토착문화 보호주의자들의 호소력은 강화되었다. "100퍼센트 미국풍"을 요구하는 재조직된 3K단(큐클럭스클랜)이 나타났다. 재건기(1865년-77)의 3K단과는 다르게, 이 새로운 3K단은 그 단원 자격을 미국태생의 백인 프로테스탄트로 제한했으며, 가톨릭 신자, 유태인 이민, 아프리카계 미국인 등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 3K단은 자기들의 적을 재정의함으로써 호소 대상 지역을 북부 및 중서부의 일부 지역으로까지 넓혔는데, 한 동안 그 단원은 증가했다.
반(反)이민 감정은 일련의 법안들을 통해서 법제화되어 마침내 1924년의 이민쿼터법과 1929년의 이민법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법들은 연간 이민수를 15만 명으로 제한하고, 그것을 국민들에게 1920년에 이미 미국에 와 있는 그들 나라 사람들의 수에 비례하여 배정했다. 이러한 이민제한 조치의 하나의 결과로 미국 토착문화 보호주의 단체들의 호소력이 줄어들었으며,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 또한 이민 격감현상을 초래한 한 원인이었다.
도시 세속 사회가 점점 더 옛 시골풍의 전통과 충돌하게 됨에 따라, 일부 미국민들은 가정과 종교에 초점을 두면서 1920년대의 현대 생활의 성격에 불만을 표명했다. 예컨대, 프로 야구 선수로부터 복음 전도사로 전향한 빌리 선데이와 같은 기독교 원리주의 전도사는 단순한 생활을 하던 과거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출구를 제공했다.
아마 이러한 갈망을 가장 극적으로 나타낸 것이 기독교 성서의 해석과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서로 싸움 붙인 기독교 원리주의 운동이었을 것이다. 1920년대에 진화론을 가르치는 일을 금지하는 법안들이 중서부 및 남부의 주의회들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믿어지지 않게도, 연로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옹이 이 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그는 진화론은 "정신적인 갱생의 필요성이나 가능성을 부정함으로써 모든 개혁을 저지한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반(反)진화론적 행동주의와 자기의 초년의 급진주의적인 경제 개혁안을 교묘하게 양립시켰다.
이 문제는 1925년 테네시주에서 절정에 달하게 되었는데, 당시 미국 공민자유권연맹(ACLU)은 이 나라의 최초의 진화론금지법에 도전했다. 젊은 고교 교사 존 스토우프스는 생물학 수업 시간에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세간의 이목을 강하게 끈 이 사건에서, 주를 대표하고 있던 브라이언옹은 피고측 변호인 클래런스 대로우의 심문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스코우프스 교사는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판례상의 법절차 미비 관계로 석방되었으며, 브라이언옹은 이 재판이 끝난 후 2,3일 만에 사망했다.
중요한 문화 충돌의 또 하나의 예--이것은 이 나라에 훨씬 더 큰 결과를 초래한 문화 충돌이었음--는 금주법이었다. 거의 100년에 걸친 논의 끝에, 알코올성 음료의 제조, 판매 또는 운송을 금지하는 헌법 수정 제18조가 1919년에 시행되었다. 금주법은 그 제정 목적이 술집과 주정꾼을 미국사회에서 없애는 데에 있었지만, 예상외로 "스피키지"(무허가 술집)라고 불리는 불법 음주 장소들과, "부우트레깅"(주류밀매)으로 알려진 주류 운송행위와 같은, 점점 더 이윤을 많이 올릴 수 있는 형태의 범죄 행위들을 조성하는데 이바지했다. "고상한 실험"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던 이 금주법은 1933년에 폐지되었다.
기독교 원리주의의 부활과 금주법과 같은 서로 공통점이 없는 현상들을 연계시키는 공통의 실은 어느 의미에서, '재즈시대', 불절제의 시대, '광란의 1920연대' 등과 같이 갖가지로 일컬어진 당시의 사회적 및 지적 혁명에 대한 반동이었다. 특히 대학 캠퍼스에서의 미국 젊은이들의 매너, 도덕관, 유행 등의 변화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많은 지성인들 가운데서, 미국생활에 있어서의 허위와 황금만능주의를 가차없이 비난하고 있던 저널리스트이자 평론가 H.L. 멘큰은 영웅이 되었다. 작가 F. 스코트 피츠제럴드는 그의 단편 소설들과 그리고 The Great Gatsby와 같은 장편 소설들에서 1920년대의 정력, 소동, 환멸 등을 잘 묘사했다.
피츠 제럴드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잃어버린 세대)이라고 일컬어진, 소수이지만 영향력 있는 운동을 하고 있던 작가들 및 지성인들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제1차 대전의 대량 학살로 해서 충격을 받았으며, 이들이 인식한 미국생활의 물질주의와 정신적 공허를 불만으로 여겼다. 이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예를 들어 이들의 가장 유명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은--유럽으로 가서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아프리카계 미국민들도 이러한 국민적인 자성의 정신에 동참했다. 1920년부터 1930년까지의 기간 중에, 남부로부터 북부로 대량적인 흑인 이주가 있었으며, 1015년부터 1916년까지의 기간 중에 그것은 최고도에 달했다. 이주한 흑인들의 대부분은 농촌인 남부보다 일자리를 얻을 기회와 개인적인 자유가 더 많은 디트로이트시(市) 및 시카고시(市)와 같은 도시 지역에 정착했다. 1910년 흑인 저술가 W.E.B. 듀보아와 이 밖의 지식인들이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NAAP)를 창설했는데, 이 협회는 중요도가 점점 커지게 될 전국적인 목소리를 미국흑인들이 얻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동시에, "할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미국흑인 문예운동이 나타났다. 랭스턴 휴즈 등과 같은 작가들은 미국 생활의 현실을 다루기는 했지만, "로스트 제너레이션"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중류층의 가치관과 재래식 문학 형식을 거부했다.
1929년 10월 주식시세는 폭락했으며, 보통주의 액면 가격의 40%가 날라갔다. 그러나 주식시세가 폭락한 후에도 정치가들과 산업 지도자들은 이 나라의 경제에 대하여 계속 낙관적인 예언을 했다. 하지만 공황은 깊어졌고, 신뢰도 사라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평생 모아둔 저축을 잃었다. 1933년에 뉴욕 증권거래소의 주식 가격은 1929년 당시의 최고 가격의 5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상점들은 문을 닫았으며, 공장들은 폐쇄되고 은행들은 파산했다. 농가 소득은 약 50%나 줄어들었다. 1932년에 미국민 약 4명 중 1명은 실업자였다.
문제의 핵심은 이 나라의 생산능력과 국민들의 소비능력의 불균형이었다. 대전 중과 대전 후의 생산 기술의 대혁신으로 산업의 생산고는 미국 농민들과 임금 근로자들의 구매력 이상으로 증가되었다. 건전한 투자 가능성을 훨씬 넘어서 증가되고 있던 부유층 및 중류층의 저축 자금은 주식이나 부동산의 광적인 투기의 자금으로 끌려 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증권시장의 붕괴는 몇 가지 폭발 현상 중의 하나에 불과했었데, 그 속에서 투기의 취약한 구조는 무너져버렸던 것이다.
1932년의 대통령 선거는 주로 세계 대공황의 원인과 가능한 구제책에 관한 논쟁이었다. 불운하게도 증권시장이 붕괴되기 8개월 전에 백악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산업의 수레바퀴를 다시 가동시키기 위해 지칠 줄 모르게 노력했었다. 위기가 증대되고 있는 동안에 뉴욕 주지사로서 이미 평판이 좋았던 그의 민주당 정적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대공황이 미국경제의 기저에 있는 결함들로 해서 생겼으며, 이 결함들을 1920년대의 공화당 정책들이 악화시켰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버 대통령은 미국경제는 근본적으로 건전하지만, 전 세계적인 불경기의 영향을 받아 흔들렸던 것이며, 세계적인 불경기의 원인은 대전때문이라고 응답했다. 이러한 논쟁의 배후에는 하나의 명백한 함축적인 의미가 있었다. 즉, 루즈벨트는 과감한 실험적인 구제책들을 위해서 연방정부의 권한을 사용할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후버 대통령은 주로 자연스러운 경제회복 과정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선거의 결과는 후버가 얻은 1,570만 표에 대하여 22,80만 표를 얻은 루즈벨트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미국은 바야흐로 새로운 경제적 및 정치적 변화의 시대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미국 지도 펼쳐 보고 미국 여행 하자.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지도 검색 블로그)
| "위대한 민주주의라 해도 진보적이 아니면 위대하지도 않고 민주주의도 아니다" -- 디어도어 루스벨트, 1910년경. |
19세기 미국 농민들은 괄목할 만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되풀이하여 일어나는 고난의 시기를 겪었다. 이에는 지방의 쇠진, 자연의 변덕, 자급자족제의 감소, 그리고 충분한 법적 보호와 원조의 부족과 같은 몇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과잉생산이었다.
철도가 부설되고 대평원의 인디언들이 점차적으로 보호 지구로 옮겨감으로써 서부지역에의 정착을 위한 새로운 터전이 열린 가운데, 1 헥타르당 농작물 산출량을 크게 증가시킨 농기계의 개량과 더불어 경작농토 면적은 19세기 후반 전체에 걸쳐 급속히 늘어났다. 캐나다, 아르헨티나 및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나라들에서도 일어난 미국과 유사한 농토의 팽창은, 이제는 미국의 농산물의 많은 부분이 팔리던 국제시장에서 문제들을 더욱 심화시켰다.
정착민들이 서부로 더 멀리 진출하면 할수록, 그들은 산품을 수송하기 위해 철도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동시에 서부지역의 공업 분야 대기업체들의 뒷받침을 받은 의회가 오랫동안 지지해 온 보호관세가 부과되는 결과로, 농민들은 공산품에 비싼 값을 치렀다.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중서부 지역과 서부 지역의 농민들은 그들의 저당물을 잡은 은행에 더 많이 빚지게 되었다.
남부에서는 남부동맹의 몰락으로 농업 분야의 관행이 크게 변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변화가 소작제도인데, 소작인들은 종자와 필수적인 영농 보급품을 제공받는 대신 수확고의 절반 정도까지를 지주가 차지했다. 남부의 흑인 농부의 80퍼센트, 그리고 백인 농부의 40퍼센트로 추정되는 농민들이 남북전쟁 이후, 그들을 궁핍하게 만드는 이같은 제도 아래서 살았다.
대부분의 소작인들은 빚더미에서 헤어나지 못했는데, 이 곤경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희망은 농사를 더 많이 짓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목화와 담배가 과잉 생산되었고, 따라서 가격이 하락하고 지방이 가일층 쇠퇴했다.
전반적인 농사 문제를 다루기 위한 첫 노력은 '농민공제조합(Grange)'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867년 농무부 직원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조합원들은 처음에는 대부분의 농민 가정들이 당면했던 사회로부터의 소외 에 대처하는 사회활동에 주력했다. 여성들의 참여가 적극적으로 장려되었다. 1873년의 공황에 자극받아 농민공제조합의 지부는 곧 2만개로 확대되었고, 조합원 수도 150만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공제조합의 대부분이 궁극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의 판매망, 상점, 가공 공장, 생산 공장 및 협동 조직을 설치했다. 이 운동은 또한 1870년대에 어느 정도의 정치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몇몇 주에서는 "농민공제조합 원법"을 제정하여 철도 요금과 창고 사용료를 제한하기도 하였다.
1880년에 이르러서 이 공제조합 운동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대신 "농민동맹(Farmers' Alliance)" 운동이 일어났다. 1890년에 이르러서는, 이 동맹은 뉴욕州에서 캘리포니아州까지 전국에 걸쳐 약 150만명의 회원을 갖게 되었다. 이 농민동맹과 나란히 활동을 벌인, 아프리카系 미국인들의 조직인 "유색농민 전국연합(Colored Farmers National Alliance)"의 회원은 100만명이 넘었다.
시초부터 농민동맹은 정성들여 수립한 경제 계획을 가진 정치적 조직이었다. 이 동맹의 초기의 한 강령에 따르면, 이 동맹의 목적은 "계급 차별적인 입법과 집중된 자본의 침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농민들을 단결시키는 데에"있었다. 그들의 계획은 철도 사업을 (완전한 국유화가 아닐지라도) 규제하고, 빈민구제를 위해 통화를 증발하고 , 관세를 인하하며, 정부가 소유하는 창고 및 저금리 대여시설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1880년대 말기에 있었던 일련의 가뭄으로 서부의 대평원이 황폐화했다. 캔자스의 서부 지역은 그 당시 4년 동안에 인구가 번으로 줄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1890년에 제정된 "매킨리 관세법"이었는데, 이 법에 따른 관세율은 미국에서 그때까지 가장 높은 것에 속했다.
1890년에 와서는 농민들의 궁핍은 그 어느 때보다 심했다. 농민동맹은 남부의 동조적인 민주당원들 및 서부의 소규모의 제 3당들의 당원들과 제휴하여 정치적 세력을 얻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이 같은 요소들을 기반으로 하여, 인민당으로 알려진 제 3의 정당이 대두했다. 대초원과 목화밭 지역을 휩쓴 인민당 열풍은 미국의 정치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1890년의 선거에서 이 새 정당은 남부 및 서부의 10여 개 주에서 세력을 얻어, 20여명의 인민당 출신 상·하원 의원을 연방의회에 보냈다.
인민당의 첫 전당대회는 1892년에 열렸는데, 농장 노무자 그리고 개혁 단체 출신의 대의원들이 네브라스카주의 오마하에서 회동하여, 그들이 보기에는 상공부문 기업합동(trust)들의 財力에 의해 절망적인 정도에까지 부패한 미국의 정치 제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할 것을 마침내 결의했다. 이 당의 정강은
"우리는 나라가 도덕적, 정치적 및 물질적 파멸 직전에 처한 가운데 이곳에 모였다. 부패가 투표소, 주 및 연방 의회에 만연되어 있고, 심지어 法官에까지도 미치고 있다.... 불의의 통치라는 태(胎)에서 두 개의 큰 계급이, 즉 뜨내기와 백만장자의 두 계급이 태어나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이 정강의 실용적인 부분은 토지와 수송 문제, 그리고 은화의 무제한 발행을 포함하는 금융문제 등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1892년의 선거에서 인민당은 서부와 남부에서 놀라운 세력을 과시했는데, 이 당의 대통령 후보는 100만 표 이상을 얻었다. 하지만, 이윽고 다른 모든 쟁점에 앞서 정면으로 부상했던 쟁점은 은본위 주창자들을 금본위 찬성자들과 맞붙게 만든 통화문제였다. 서부와 남부의 농민층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동부의 공업 중심지들의 노동단체들의 지지를 얻어 은화를 제한없이 발행하는 제도로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당면한 어려운 일들이 유통되는 화폐의 양이 부족한 데서 생겼다고 확신한 그들은 통화량을 늘리면 간접적으로 농산물의 가격을 상승시키고 공업부문의 화금을 인상시키게 되어, 따라서 채무자들로 하여금 증발된 화폐로 빚을 갚도록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적인 집단들과 금융계는 그같은 정책은 재난을 몰고 올 것이라고 믿고, 인플레이션이 일단 일어나면 이를 멈추도록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금본위 만이 안정을 보장해 준다고 말했다.
1893년에 일어난 금융공황은 이같은 논쟁의 긴장도를 높여 주었다. 남부와 중서부에서는 파산하는 은행들이 많았다. 실업자들이 속출했고 곡물 가격은 크게 하락했다. 이같은 위기는, 이를 해겨하지 못하는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무능력과 아울러 민주당을 거의 파종으로 몰고갔다. 1896년의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지자 은본위를 지지하는 민주당원들이 인민당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그해에 있었던 민주당의 전당대회에서는 미국의 정치사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에 속하는 한 연설이 행해졌다. 대회 참석자들에게 "인류를 금의 십자가에 못박지 말라"고 호소한 네브라스카州 출신의 젊은 은본위 옹호자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받았다.
인민당 역시 브라이언을 지지했다. 이제는 그들의 높은 인기도를 증명해 보일 때가 왔다. 남부 전역과 캘리포니아주 및 오리건주를 제외한 서부 주들을 석권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은 인구가 더 많은 공업 지역인 북부와 동부에서 패배하여, 공화당 후보 윌리엄 매킨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다음 해에 이 나라의 금융 사정은 호전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알래스카와 유콘강 유역에서 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1898년에는 인민당이 제기하는 쟁점들보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국민의 주의를 더 강력히 끌어 당겼다. 인민당이 벌였던 운동이 사라졌다해도 그 운동이 추구했던 아이디어는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같은 아이디어 중 많은 것들이 다음 20년 안에 법률로 제정되었던 것이다.
19세기의 미국의 공업 부문 근로자들의 생활은 결코 쉬운 생활이 아니었다. 호황기에조차도 임금은 낮았고, 작업 시간은 길었으며, 근로 조건은 위험했었다. 국가의 성장으로 생겨난 부는 근로자들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부녀자와 아동 노동자의 경우 상황은 더 열악했는데, 일부 업계에서는 노동력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그들이 성인남자 노동자가 벌 수 있는 임금의 극히 일부만을 받을 때가 흔했었다. 정기적으로 경제적 위기가 이 나라를 휩쓴 결과, 공업 부문의 임금을 가일층 낮아지게 만들었고, 높은 율의 실업 사태가 벌어졌다.
동시에, 미국의 생산성 제고에 크게 이바지했던 기술적 향상은 계속해서 숙련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감소시켰다. 그런데, 일자리를 애타게 찾는, 전례없이 많은 수의 이민들이-1880년부터 1910년까지의 이들 이민의 수는 1,800만 명에 달했다- 미국으로 들어오는 가운데 비숙련 노동자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1874년에 매사추세츠주가 부녀자와 아동 공장 노동자들의 하루 작업 시간을 10시간가지로 제한하는 법률을 미국에서 처음으로 제정했는데, 그 이전에는 미국에서는 노무관계 법률이 사실상 없었다. 연방정부는 193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노동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노동문제의 분야는 주나 지방 당국들이 맡고 있었는데, 그 당시 부유한 공업가들ㅇ릐 요구에 부응하는 정도만큼 근로자들의 요구를 보살피는 당국은 거의 없었다.
19세기 후반을 지배했고, 엄청난 부와 권력을 집중적으로 손에 넣은 자유방임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제도에 도전한 사람들에게 번번이 불법 판정을 내렸던 사법부에 의해 뒷받침 되었다. 이 점에서 사람들은 널리 보급된 '시대의 철학'을 따랐을 뿐이었다. "대기업체의 성장은 적자생존일 뿐이다" 라고 존 D. 록펠러가 표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회적 진화론"으로 알려진 이같은 견해는, 실업활동을 규제하려는 그 어떤 기도도 종(種)의 자연적 진화를 가로막는 처사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지지자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자본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비쌌다. 수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생활조건과 근로조건은 열악했고, 평생을 통한 빈곤에서 벗어날 가망성은 희박했다. 1900년에 와서도 미국의 직업 관련 사망률은 세계의 공업국들 중에서도 가장 높았다. 대부분의 공업 부문 근로자들은 아직도 하루에 10시간 일했으며 (제강업계에서는 하루 12시간 노동이었다), 그런데도 웬만한 수준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최저 생계비에서 20퍼센트 내지 40퍼센트가 부족한 임금밖에는 벌지 못했다. 상황은 아동 노동자의 경우 더 열악했는데, 노동력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수는 1870년부터 1900년 사이에 두 배로 늘어났다.
전국적인 규모로 근로자의 단체들을 조직하기 위한 주요한 첫 노력의 결과 1869년 '고귀한 노동기사단(The Noble Order of the Knights of Labor)이 탄생했다. 원래는 이는 필라델피아의 의류 부문 근로자들에 의해 조직된, 의체에 치중하는 비밀 단체였는데, 후에 흑인, 부녀자 및 농민들을 포함하는 모든 근로자들에게 개방되었다. 이 단체는 서서히 성장하여, 마침내는 1885년에 단행한 파업에서 철도왕 제이 굴드를 위압하는 데에 성공할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한 해 사이에 50만 명의 근로자가 이 단체에 새로 가입했다.
하지만 이 '노동기사단'은 곧 쇠퇴하게 되어, 노동운동에서 이 단체가 차지했던 자리를 미국 노동기사단(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이 점차 차지하게 되었다. 이전에 시가아(cigar)문호를 모든 근로자들에게 개방하지 않고 숙련근로자들에게 추점을 두었다. 그가 추구한 목표는 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그리고 근로조건 개선 등 "순수하며 단순하며"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 것들이었다. 이같은 목표를 추구한 결과, 곰퍼즈는 노동운동의 방향을 초기의 노동지도자들이 신봉하던 사회주의적 견해의 노선으로부터 돌려놓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목표들과,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부여하는 데에 대한 자본가들의 소극적 태도는 서로 충돌하여 미국 역사에서 가장 광폭한 노동쟁의를 빚어냈다. 이같은 첫 노동쟁의는 10퍼센트의 임금 삭감에 반대하여 전국의 철도 근로자들이 파업을 단행한 1877년의 대철도파업이었다. 파업을 와해시키려는 기도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시, 일리노이주 시카고시,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시, 뉴요크주 버팔로시, 그리고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등 서너 도시들에서 폭동과 광범한 파괴를 유발했다. 마침내 파업을 끝내기 위해 연방군 병력이 몇몇 지점에 파견되어야만 했었다.
이로부터 9년 후, '헤이마키트'광장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시카고에 있는 매코믹 수확기 제작사회에서 진행중인 파업에 대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던 회의장에 누군가가 폭탄을 던짐으로써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어서 벌어진 난투 끝에 9명이 죽고 약 60명이 부상했다.
다음은 1892년 펜실베이니아주 홈스티드에 있는 카네기 제강소에서 벌어진 폭동이었다. '제강·철강
☞주석 노동자 통합협회'가 단행한 파업을 와해시키기 위해 이 회사측이 고용한 300명의 사설탐정들이 총살당해 10명이 죽었다. 그 결과 주방위군이 투입되었고, (파업중인 노조원들 대신) 비로조원 근로자들이 채용되었으며, 마침내 파업은 와해되었다. 그후 1937년까지도 이 회사는 노조가 이 제철소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2년 후, 시카고시 바로 교외에 자리잡은 '풀먼 팰리스 카'회사가 임금을 삭감함으로써 미국철도연맹의 지원을 받는 파업이 벌어졌다. 이 파업은 이내 미국 전역의 여러 철도들과 연대를 맺었다. 사태가 악화하자, 이전에 철도회사 변호사였던 법무장관 리처드 올니는 철도를 개통시키기 위한 기도에서, 파업중인 철도 직원 대신에 300명의 직원을 임명했다. 이에 이어 노조의 철도 운행 방해를 금지하는 한 연방법원의 명령이 뒤따랐다. 이에 따라 폭동이 일어나자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현지에 연방군 병력을 투입했고, 파업은 드디어 와해되었다.
가장 투쟁적이고 파업을 자주하는 노조는 '세계국제로동자'(IWW: International Workers of the World)였다. 서부의 광업계에서 보다 나은 근로조건 획득을 위해 투쟁하던 노조를 규합하여 결성된 IWW는 1903년에 그들이 콜로라도주 광산에서 벌였던 노동쟁의와, 이 쟁의를 진압하는 둘도 없이 무자비했던 방식으로 해서 특히 두드러진 존재가 되었다. 공공연하게 계급투쟁을 부르짖는 IWW는 1912년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 있는 한 방직공장에서 벌였던 힘든 파업에서 승리한 후,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IWW가 작업중단 운동을 벌인 결과 정부가 IWW를 탄압하게 되어, IWW는 사실상 파괴되고 말았다.
1900년의 대통령 선거는 미국민에게 매킨리 행정부에 대해, 특히 그의 외교정책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기회를 부여했다. 공화당원들은 필라델피아에 모여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거둔 성공적인 결과와 미국이 번영을 되찾게 된 것에 대해, 그리고 "문호개방"정책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획득하는 노력에 대해 기쁨을 표시했다. 매킨리의 대통령 당선은 처음부터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매킨리 대통령은 그의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에 충분할만큼 오래 살지 못했다. 1901년 9월 그는 뉴요크주 버펄로시에서 열린 전람회에 참석했다가 암살자의 초안에 쓰러졌다. (그는 남북전쟁 이래 린컨 대통령과 가필드 대통령에 이어 그때까지 세 번째로 암살당한 미국의 태동령이었다.).
매킨리 대통령의 부통령이었던 디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국제문제 뿐만 아니라 국내문제에서도, 루스벨트의 대통령직 계승은 미국민의 정치 생활에서의 새로운 기원과 때가 일치되는 것이었다. 미대륙의 인구는 크게 늘어났고, 미개척의 변경지역은 사라지고 있었다. 이전에는 몸부림쳤던 작은 공화국이 세계의 강국이 된 것이다. 이 나라의 정치적 기반은 외국과의 전쟁과 내전의 풍파를, 그리고 번영과 침체의 물결을 견디어 냈다. 농업과 공업에서 비약적인 발전이 이룩되었다. 무료 공립학교교육이 광범히 실현되었고, 자유 언론이 유지되었다. 종교 자유의 이상도 떠받쳐졌다. 하지만, 대기업체의 영향력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지방 및 시의 정부가 부패한 정치인들의 수중에 들어가는 일이 흔히 있었다.
19세기 資本主義의 지나친 점과 정치적 부패에 대응하여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개혁운동이 일어났는데, 대략 1890년부터 1917년 미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때까지 미국의 정치와 미국민의 사상은 이 주의의 특수한 성격의 영향을 받았다. 진보주의자들은 자신의 운동을 도회지의 정계 두목들과 부패한 악덕 대실업가들이 끼치는 폐해에 항거하는 강력한 민주적인 개혁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폭넓은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정직한 정부, 기업체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규제, 그리고 헌신적인 공무 수행 풍토의 부흥 등이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통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미국사회의 진보와 미국 시민의 복지 향상을 확실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시대의 거의 모든 저명인사들은, 그들이 정치, 철학, 학문 또는 문학 등 그 어떤 분야의 인사이든 간에,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 개혁 운동과 연관을 맺고 있었다.
1902년부터 1908년까지의 시기는, 작가와 언론인들이 농경생활을 위주로 하는 18세기의 공화국으로부터 물려받은 관행과 원칙들은 도시생활을 중심으로하는 20세기의 국가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고 강력히 항의하는 가운데, 가장 큰 개혁 활동이 벌어졌던 시기였다. 이보다 여러 해 앞서 1873년에, 마크 트웨인은 "Gilded Age" (호경기시대)에서 미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파헤쳤다. 이제는 기업합동(트러스트), 금융계, 불량식품 및 철도회사들의 횡포 등에 관한 기사가 일간신문과 "McClure's" 및 "Cillier's"와 같은 인기 있는 잡지들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스탠다스 오일 트러스트'를 상대로 개혁의 필봉을 휘둘렀던 아이다 메이 다벨 기자와 같은 필자들은 "추문 폭로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업턴 싱클레어는 센세이션을 일으킨 그의 소설 "The Jungle"에서 시카고의 대규모 정육업소들의 비위생적인 상태와 미국의 육류 공급을 쇠고기 부문 기업합동이 장악하고 있는 양상을 폭로했다. 디어도어 드라이저는 "The Finacier"(금융업자)와 "The Titan"(巨人)에서 문외한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대기업체들의 간계를 묘사했다. 프랭크 노리스의 "The Pit"(시카고 곡물거래소)는 비밀 조작이 시카고의 곡물시장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폭로함으로써 농민들의 항의를 고무했다. 링큰 스테펀즈의 'The Shame of th Cities"(도시의 수치)는 정치적 부패상을 폭로했다. 이같은 "폭로문학"은 행동을 취하도록 시민들을 각성시킴에 있어 지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타협을 모르는 작가들의 강력한 영향과 점점 높아가는 대중의 각성은 정치 지도자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방책을 위하도록 만들어다. 많은 주들이 국민들의 생활과 근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들을 제정했다. 제인 애덤즈와 같은 저명한 사회비평가의 촉구에 따라 아동로동법이 강화되었고 새로운 법규가 채택되었는데, 아동 노동의 연령 하한선을 올렸고, 근로 시간을 단축시켰고, 아동 작업을 제한했으며, 아동들을 반드시 취학시키도록 규정했다.
20세기 초엽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대도시의 대도시와 주들의 반수이상이 공공기관의 근무 시간을 하루 8시간으로 하는 제도를 수립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근로자들을 위한 보상법이 제정된 사실인데, 이 법률은 근로자들이 작업중에 입은 상해에 대해 고용주들이 법적으로 책임을 지도록 규정했다. 새로운 세입법이 또한 제정되었는데, 이는 상속 재산, 소득 및 법인의 재산이나 소득에 과세함으로써 정부의 부담을 지불 능력이 가장 나은 사람들이 짊어지게 하는 취지였다.
개혁 운동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일들은 전국적인 규모로 다루어져야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여러 사람들, 특히 디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위스콘신주 출신 상원의원 로버트 라폴레트 같은 의회의 진보주의 지도자들에게는 분명해 보였다. 개혁에 열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자신의 표현대로 "공정한 업무 처리"를 국민에게 해주기로 결심하고 있었던 루스벨트는 '기업합동(트러스트)방지법'을 시행함에 있어 정부의 감독을 강화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뒤이어 정부의 감독을 철도회사에까지 확대함으로써 철도 관계의 주요 규제법안들이 통과되도록 만들었다. 이들 법안의 하나는 公表된 철도 요금율을 합법적인 표준으로 하였고, (환불 방식에 의한)요금할인에 대해서는 철도회사와 마찬가지로 하주들도 역시 표준 요금을 지키도록 규정한 법안이었다.
루스벨트의 걸출한 인품과 그의 "트러스트 파괴"활동은 일반 시민 개개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의 진보적 조치에 대한 지지는 초당적이었다. 풍요를 구가했던 이 시기의 미국의 번영은 국민들로 하여금 집권당을 만족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190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그가 거둘 승리를 보장되어 있었다.
대통령 선거전에서의 압도적인 승리에 힘입어, 루스벨트는 개혁 운동에 새로운 박차를 가했다. 그는 대통령으로 재선된 후 처음으로 의회에 보낸 연두교서에서 더욱 과감한 철도회사 규제책을 제창했는데, 의회를 1906년 6월 '헵번법'(Hepburn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은 주간통상위원회(Interstate Commerce Commission)에게 철도 요금을 규제함에 있어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고, 이 위원회의 관할권을 확대했으며, 철도회사들로 하여금 선박회사 및 석탄회사와 결부된 그들의 이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의회는 연방에 의한 통제의 원칙이 가일층 광범이 적용되도록 만드는 기타의 조치도 취했다. 1906년에 제정된 순수식품법을 "유해한 약품, 화학품 또는 방부제"를 조제약과 식품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법률은 이윽고 주간의 통상을 통해 육류를 판매하는 모든 회사들이 연방정부의 검사를 받도록 규정한 법률에 의해 보강되었다.
한편, 의회는 행정부에 상무-노무부를 신설하고, 이 부서의 장관이 대통령의 각료가 되게 하였다. 신설된 이 부서의, 대기업체들의 통합체에 관한 사항을 조사하는 권한이 부여된 한 국은 1907년 '아메리칸 제강회사'가 정부의 눈을 속여 거액의 수입관세를 포탈했음을 적발했다. 이에 따라 법적 조치가 취해진 결과 400만 달러가 넘는 관세가 회수되었고, 이 회사의 서너 명의 간부들이 처벌당했다. 또 인디애나주의 '스탠다드 석유회사'는 '시카고 앤드 앨턴 철도회사'로부터 비밀리에 철도 운임을 할인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1,462건에 달하는 개별 운송계약에 부과된 2,924만 달러에 달하는 벌금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었다.
전국의 천연 자원을 보존하고, 원료의 낭비적인 채굴에 종지부를 찍으며, 광대한 유목지를 개간한 것은 루스벨트 시대에 이룩된 다른 주요한 업적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찍이 1901년에 의회에 보낸 첫 연두교서에서 자원 보전, 유휴지 개간 및 관개를 위한 파급 효과가 큰 통합 계획의 수립을 제창했던 것이다. 그의 전입자들은 1,880만 헥타르의 삼림지를 지정했었으나, 그는 이 면적을 5,920만 헥타르로 늘렸고, 산불 방지와 수목이 고갈된 지역에 대한 식수를 위한 체계적인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루스벨트의 인기는 1908년의 대통령 선거운동이 다가오자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그 어느 대통령도 2회 이상 집권하지 않았다는 전통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는 출마하는 대신 윌리엄 태프트를 지원했는데, 태프트는 대통령에 당선되어 전임 대통령의 개혁 계획을 계속하여 추진하고자 힘썼다. 판사, 필리핀 총독, 그리고 파나마 운하 행정관의 직책을 역임한 바 있는 태프트는 어느 정도의 진전을 이룩했다. 그는 기업합동(트러스트)의 추소를 계속했고, 주간통상위원회를 가일층 강화했고, 우편저금과 우편소포제도를 수립했고, 공무원 제도를 확대했으며, 2개의 헌법 수정조항의 제정을 발의했다.
헌법 수정조항 제 16조는 연방 소득세 징수를 승인하는 것이었고, 1913년에 비준된 제 17조는 주민들이 연방 상원의원들을 직접 선출하도록 함으로써, 주의회에 의해 선임되는 제도를 대치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업적들을 이룩한 반면, 그는 진보
☞자유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격분시켰던 일종의 보호관세를 채택했고, 애리조나주헌법이 진보
☞자유적이라는 이유에서 이 주의 연방 가입을 반대했으며, 그가 소속한 당(공화당)의 보수세력에 점점 더 의존했었다.
1910년에 와서는 그가 소속한 당은 분열했고, 압도적 다수표를 차지한 민주당원들이 다시 의회를 장악하게 되었다. 2년 후, 뉴저지주의 진보주의적 지사였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우드로 윌슨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태프트와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지 못한 후 제 3당인 진보당을 조직한 루스벨트를 상대로 선거전을 벌였다.
활발한 선거운동을 벌인 윌슨은 두 경쟁 상대를 물리쳤다. 윌슨의 영도하에 새로운 의회를 미국 역사상 가장 특기할 만한 입법 계획들을 추진했다. 의회가 다루어야 했던 첫 과제는 관세관계 법률의 수정이었다. 윌슨은 "우리는 관세제도를 수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특권 비슷한 것은 모두 폐지해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1913년 10월 3일에 서명된 '언더우드 관세법'은 수입된 원자재 및 식료품, 면제품 및 모제품, 철강 등에 대한 관세율을 크게 낮췄고, 100개가 넘는 기타 품목에 대해 관세를 폐지했다. 이 법률은 많은 보호무역적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시민의 생활비를 낮추려는 기도의 소산이었다.
민주당이 추진했던 입법 계획의 두 번째 과제는 오래 전부터 현안이 되어 왔던, 신축성 없는 금융 및 통화 제도의 철저한 개편이었다. 윌슨은 "금융 통제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어야만 하고, 그 통제의 행사권은 정부 자체에 귀속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은행들은 실업, 개인기업, 그리고 이니셔티브에 군림하는 주인이 아니라 이들에게 봉사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라고 역설했다.
1913년 12월 23일에 제정된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은 윌슨의 가장 영속적인 입법 분야의 업적 중의 하나였다. 이 법률은, 전국을 12개 연방준비구로 나누고, 각 지구에 연방준비은행을 하나씩 두고, 연방준비제도 이사회가 이들 은행 모두를 감독하는 새로운 기구(中央銀行)를 기존하는 은행들 위에 설치했다. 이들 연방준비은행은 이 제도에 가맹한 은행들의 예금 지불 준비금의 보관소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연방준비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미국정부는 정부가 수행해야 하는 통화공급의 통제를, 규제를 받지 않는 사설은행에 주로 맡겼었다. 去來의 공식적인 매체는 금화였으나 대부분의 대부와 지불은 (요구가 있을 때 지폐를) 금으로 상환한다는 약속 아래 은행권으로 이루어졌다. 이 제도의 폐단은 은행들이 예금 지불 준비금 이상으로 은행권을 발행하고싶어한다는 점이었는데, 그 결과 불안한 예금주들이 앞다투어 은행권을 주화로 환전하는 사태를 빚어내는 금융공황이 정기적으로 일어나곤 했다. 그러나 연방준비법이 제정됨으로써 통화 공급이 보다 큰 신축성을 보장받게 되었는데, 기업체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연방준비권(은행권)을 발행하는 규정이 제정되었던 것이다.
다음의 중요한 과제는 기업합동(트러스트)을 규제하고, 주식 회사들의 폐해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그때까지의 경험으로, 주간통상위원회가 철도회사들에 대해 행사하는 통제와 유사한 통제 제도가 필요할 것같았다. 의회는 연방통상위원회가 대기업체들이 주간 통상에서 "불공정한 경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는 것을 승인했다. 윌슨 대통령의 두 번째 입법 분야의 공적은 '클레이턴 기업합동(트러스트) 방지법'(Clayton Antitrust Act)이었는데, 이 법률은 (한 임원이 여러 회사의 이사직을 겸임하는) 겸임이사제, 구매자들에게 차별적 가격을 적응하는 행위, 노동쟁의가 일어났을 때 회사가 법원이 내리는 금지 명령을 이용하는 행위 및 한 법인이 유사한 기업체들의 주를 소유하는 행위 등 그때까지는 구체적인 규탄을 받지 않았던 주식회사들의 많은 관행을 금지했다.
농민 및 기타 부문의 근로자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연방 영농융자법은 농민들로 하여금 낮은 금리로 신용 대부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1915년에 제정된 선원법은 외항선과 호수나 하천을 운항하는 선박에서 근무하는 종업원들의 생활 및 근로조건을 개선하도록 규정했다. 1916년의 근로자보상법은 공부원이 근무중에 불구가 되었을 때 그들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것을 승인했다. 같은 해에 제정된 '애덤슨법'(Adamson Act)은 철도 근로자들을 위해 하루 8시간 근로제도를 확립했다.
이같은 윌슨 대통령의 업적의 기록은, 그가 선두를 달린 이 나라의 정치개혁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미국 역사에서의 그의 지위를 굳혀 놓았다. 하지만 그의 국내적 명성은, 미국을 승리로 이끌기는 했지만 전쟁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평화안에 대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전시대통령으로서의 기록에 의해 이윽고 가리워지게 되었다.
그 어떤 나라의 역사도 미국역사만큼 移民과 밀접하게 연관된 역사는 없다. 20세기초 15년 동안에만도 1,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왔는데, 그중 많은 사람이 1892년에 뉴욕항내 엘리스 섬에 개설된 연방이민검역소를 통과하여 미국으로 들어왔다. 엘리스 섬의 이 시설은 이제는 운영되고 있지 않으나, 미국의 문지방인 이곳을 넘어온 수백만 명의 이민들을 기념하기 위해 1992년 이 시설이 관광객들에게 다시 개방되었다.
1790년에 미국에서 처음 실시된 국세조사의 결과는 미국인 수를 392만 9,214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원래 영국의 식민지였던 13개의 주의 인구의 약 반 수는 영국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독일계, 네덜란드계, 프랑스계, 스웨덴계, 웨일스계 그리고 핀란드계 사람들이었다. 이들 백인 유럽인들은 대부분이 (기독교) 개신교 신도들이었다. 인구의 5분의 1이 노예가 된 아프리카 인들이었다.
일찍부터 미국인들은 이민을 값싼 노동력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1920년대까지 미국으로 이주하는 데에는 공식적인 제한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이민들이 미국으로 들어오자, 일부 미국인들은 그들의 문화가 위협당하고 있다고 겁을 먹게 되었다.
건국원로들, 그 중에서도 특히 토머스 제퍼슨은 이 지구의 각처로부터 모여드는 사람들을 미국이 환영해야 하는지의 여부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감정을 갖고 있었다. 미국 독립선언문 기초자인 제퍼슨은 민주주의가, 군주를 경외했던 나라들이나 왕정을 뒤엎고 폭도들ㅇ리 통치했던 나라들에서 온 사람들의 수중에서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을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기를 쓰고 노동력을 얻고자 했던 이 나라에서 신참이민들에 대한 문호폐쇄를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쟁들이 대서양 횡단 여행을 가로막고, 유럽 나라들의 정부가 군복무 해당 연령층의 젊은 사람들의 이주를 제한한 18세기 말엽과 19세기 초엽에는, 미국으로의 이주는 정체되었다. 1750년 이후에는, 의료 및 위생 분야의 향상에 따라 유럽인들의 사망률은 낮아졌다. 윤작과 체계적인 시비가 표준 농법이 되자 식품 보급이 늘어났다. 그러나 그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가족들이 겨우 생존할 수 있을 정도의 좁은 농토에 밀집하여 농사를 짓고 있었다. 더욱이 가내공업은 기계화된 생산을 몰고 온 산업혁명에 의해 희생당하고 있었다. 공장에서 일자리를 찾고자 하지 않았거나 찾을 수 없었던 수천 명의 기능공들이 실직하고 말았다.
184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아일랜드에서 감자 마름병이 번지고 독일 본토에서 혁명이 계속 일어난 결과, 수백만 명이 더 미국으로 이주했다. 한편, 그 대부분이 가난에 허덕이던 중국 남동부에서 드문드문 미국으로 이주해 온 중국인 이민들이 미국 서해안 지역에 이주하기 시작했다.
184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아일랜드에서 감자 마름병이 번지고 독일 본토에서 혁명이 계속 일어난 결과, 수백만 명이 더 미국으로 이주했다. 한편, 그 대부분이 가난에 허덕이던 중국 남동부에서 드문드문 미국으로 이주해 온 중국인 이민들이 미국 서해안 지역에 이주하기 시작했다. 1890년부터 1921년까지 거의 1,9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왔는데, 1921년 미국 의회는 이민수를 크게 제한하는 법률을 처음으로 통과시켰다. 대부분의 이민들은 이탈리아, 러시아, 폴란드, 그리스 및 발칸반도 제국 출신이었다. 비유럽인들도 역시 이주해 왔는데, 일본으로부터는 동쪽을 향해, 캐나다로부터는 남쪽을 향해, 그리고 멕시코로부터는 북쪽을 향해 이민들이 미국으로 왔다.
하지만, 1920년대에 와서는 임금의식이 강한 조직된 노동자들과, '쿠 클룩스 클랜'(Ku Klux Klan) 및 이민제한연맹(Imm,agration Restriction League)처럼 인종적 및 종교적 이유에서 이민의 제한을 주장했던 사람들 사이에는 동맹관계가 다져졌다. 1924년에 제정된 '존슨-리드 이민법'은 신참 이민들의 유입을 출신 국가별로 계산된 쿼터로 항구적으로 축소시켰다.
1930년대의 대공황은 이주의 속도를 극적으로 가일층 더디게 만들었다. 여론이 핍박받는 유럽의 소수민족에 대해서조차도 이민을 대체적으로 반대하는 가운데,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였다.
그후 20년에 걸쳐 미국은 구가별 이민 쿼터제를 계속 고수했다. 1952년 제정된 '매카렌-월터법'의 지지자들은 쿼터제를 느슨하게 풀어주면 미국은 동구 국가들의 마르크스주의 파괴분자들로 가득찰 것이라고 주장했다.
1965년 의회는 국가별 쿼터제를 반구별 쿼터제로써 대치했다. 미국에서는 그 수가 모자라는 기능공들이 이민의 우선권을 받았던 것처럼, 미국시민의 친척들도 이민의 우선권을 받았다. 1978년에 이 반구별 쿼터제는 전세계적인 이민 상한선을 연간 29만 명으로 하는 제도로써 대채되었는데, 이 한계 인원수는 1980년에 피난민법이 통과됨에 따라 27만 명으로 줄었다.
1970년대 중반 이래 미국은 아시아와 중남미로부터의 이민의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여 왔는데, 특히 이들 이민은 이 나라 전체에 걸쳐 지역사회의 모습을 바꾸어놓고 있다. 현재의 推計마다 서로 다르지만, 일부 추계는 연간 60만이나 되는 불법 이민들이 미국에 들어오고 있다고 시사한다.
하지만 이민쿼터와 피난민쿼터는 실제적인 수요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불법적인 이민이 아직도 주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멕시코인들과 중남미인들이 일자리, 높은 임금,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위한 보다 향상된 교육과 의료의 기회를 찾아 날마다 미국의 남서부 국경을 넘어오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이레, 중국 및 기타 아시아의 나라들과 같은 세계의 나라들로부터 많은 수의 불법 이민이 들어오고 있다. 추계마다 서로 다르지만, 일부 추계는 연간 60만이나 되는 불법 이민들이 미국에 들어오고 있다고 시사한다.
"미국은 우리에게 손짓한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우리를 거부한다"라는 이민들의 옛 속담이 있다. 이민의 조류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미국의 주류 속에 흘러 들어가고 있는 가운데, 이민 문제에 관한 논쟁은 격화되어 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는, "자유의 숨을 애타게 쉬고싶어 하는"사람들을 환영하면서 "황금의 문" 앞에서 등잔을 쳐들어 올리고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바로 미국의 상징이라는 신념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이같은 신념과, 그들의 먼 조상들도 한때는 아메리카로 이민온 사람들이었다는 확실한 지식이 미국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나라로 유지해 왔다.
미국 지도 펼쳐 보고 미국 여행 하자.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지도 검색 블로그)
| "문명 그 자체가 재산의 신성함에 의존한다." -- 앤드류 카네기, 1889년. |
두 대전, 즉 남북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사이에 미국은 성년으로 자라났다. 50년도 안되는 기간에 미국은 농업국에서 도회지 국가로 변모한 것이다. 변경지방은 자취를 감추었다. 큰 공장과 제철소, 대륙횡단 철도, 번성하는 도시, 그리고 광대한 농토들이 땅을 뒤덮었다. 이같은 경제적 성장과 풍요에는 이에 상응하는 문제들이 수반하게 되었다. 전국에 걸쳐, 기업체들이 독자적으로 또는 다른 기업체들과 합작하여 전체 산업을 지배하게 되었다. 근로 조건은 열악한 경우가 흔히 있었다. 도시들은 너무 빨리 성장했기 때문에 늘어나는 인구를 적절히 수용하거나 통제하지 못했다.
어느 작가는 "남북전쟁은 미국 역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이 전쟁은 이보다 20년 내지 30년 전에 일어나기 시작했던 변화를 극적으로 단숨에 일어나도록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전시의 필요성은 제조산업을 크게 촉진시켰고, 철 및 전력의 활용과 아울러 과학의 발전과 잇따른 발명에 입각한 경제 활동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1860년 이전에 미국에서 부여된 특허권은 3만 6,000건이었으나, 그 후 30년 동안에 44만 건의 특허권이 부여되었고, 20세기의 첫 25년 동안에 부여된 특허권은 거의 100만 건에 달했다.
일찍이 1844년에 새뮤얼 F.B. 모스는 전신을 완성하였고, 곧이어 미국 대륙의 멀리 떨어진 지역들이 전주와 전선망으로 서로 연결되었다. 1876년에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기를 선보였고, 이로부터 반세기 안에 1,600만 대의 전화기가 가설되어 국민의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 1876년에는 타자기가, 1888년에는 계산기가, 그리고 1897년에는 현금 출납기가 발명되어 기업체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1886년에 발명된 자동제 식자기(라이노타이프), 윤전기 및 종이 접는 기계는 8면 신문을 1시간에 24만 부나 인쇄할 수 있게 하였다. 토머스 에디슨이 발명한 백열등은 수백만의 가정을 밝게 해주었다. 에디슨은 말하는 기계, 즉 축음기를 역시 완성했는데, 그는 또 조지 이스트먼과 함께 활동사진의 개발을 도왔다. 이런 것들과, 과학 및 창의성의 다른 많은 응용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수준의 생산성을 낳게 했다.
동시에 미국의 기간산업인 철강산업은 고율의 관세의 보호를 받고 성장을 계속했다. 이전에는 동부 제주에 집중되어 있었던 제철산업은 지질학자들이 새로운 광상들을 발견함에 따라 서부로 이동해 갔다. 이들 광상 중에서 특히 슈피어리어호의 상단 물목에 잇는 거대한 메사비 철광지대는 세계 최대의 철광 산지의 하나가 되었다. 이 철광은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채광이 용이했고 또 비용도 저렴했다. 화학적 불순물이 놀랄만큼 섞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철광을 가지고 그 전까지의 일반적인 비용의 약 10분의 1의 비용으로 품질이 우수한 강철을 만들 수 있었다.
앤드루 카네기는 강철 생산이 크게 발전하도록 만든데서 공로가 지대한 사람이었다. 12세의 어린나이에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카네기는 솜 공장의 얼레잡이 일자리부터 시작하여, 전신소의 직원을 거쳐, 펜실베니아 철도국의 직원이 되었다. 그는 30세가 되기 전부터 약삭빠르고 선견지명이 있는 투자를 해왔는데, 1865년에 와서는 그의 투자는 제철산업에 집중이 되었다. 몇 년이 안가서 그는 철교, 레일(鐵路) 및 기관차를 제작하는 회사들을 설립하거나 그같은 회사들의 주를 사들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가 펜실베이니아州 모논가헬라강 강변에 세운 제철소는 미국 최대의 것이 되었다.
카네기는 신설 제철소 뿐만 아니라, 코크스 제조 시설 및 탄광, 슈피어리어湖 지역에서 나오는 철광, 5대호의 증기선단, 이리 호의 한 항구도시, 그리고 한 연결 철도 등에 대한 지배권도 역시 장악했다. 다른 10여개 업체와 제유한 그의 사업은 철도회사와 해군회사에서 제공하는 유리한 조건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었다. 글의 재원은 공장과 종업원을 방대한 규모로 늘리는데 충분했다. 미국의 공업 발전에서 이와 견줄만한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카네기가 제강산업을 오랫동안 지배했지만, 그는 제강에 관련된 천연자원 수송 및 공장들을 완전히 독점하지는 못했다. 1890년대에 이르러 새로 나타난 회사들이 그의 정상의 자리에 도전했는데, 카네기는 처음에는 경쟁에 자극을 받고 더 강력한 종합 사업체를 만들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노쇠해진 그는 미국내 대부분의 중요한 제철 및 제강 시설을 흡수하게 된 한 회사와 자기회사를 合倂하도록 설득당했다.
1901년에 이루어진 이같은 합병의 결과로 생겨난 미국제강회사(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는 30년 동안 계속되었던 한 과정, 즉 공업 분야의 독립된 기업체를 연합강 체제로 조직된, 또는 단일 중앙집권식 관리를 받는 체제로 조직된 회사들에 통합시키는 대표적 과정을 열시해주었다. 남북전쟁 기간중에 시작된 이같은 추세는 실업인들이 과잉 생산으로 제품의 가격이 떨어지고 이윤이 적어지리라고 우려하기 시작했던 1870년대 이후에 더 강해졌다. 실업인들은 만약 생산과 시장을 통제할 수 있다면 서로 경쟁하는 회사들을 단일 조직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식회사"와 "기업합동"이 발전하게 되었다.
막대한 자본금을 동원할 수 잇고 또 기업체에게 항구적인 존속과 관리의 계속성을 부여하는 주식회사는 예상되는 이윤과 또한 사업이 실패할 경우에도 책임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투자자들의 마음을 끄었다. 반면 기업합동은 실제에 있어서는 주식회사들의 통합체로서 각회사들의 주주들은 자신의 주를 경영을 책임지는 수탁자에게 맡겼다. 그같은 기업함동은 대규모적인 관리적 통합체, 중앙집권식 관리와 경영, 그리고 특허의 공동관리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들의 막대한 자본 자원은 기업을 확장하고, 외국의 상사들과 경쟁하며, 효과적인 조직을 갖기 시작한 노조와 맞서 힘든 협상을 할 수 있는 보다 큰 힘을 제공해 주었다. 그들은 또한 철도로부터 유리한 조건을 얻어낼 수 있었으며,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었다.
존 D. 록펠러가 창립한 스탠다드 석유회사(Standard Oil Company)는 가장 초기의, 그리고 가장 강력한 주식회사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 회사에 이어 면실유, 연, 설탕, 담배 그리고 고무 등의 부분에서도 다른 영리적 결합체들이 급속히 생겨났다. 곧 의욕적인 개인 기업가들도 그들 자신의 산업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필립 아무어, 그리고 구스타부스 스위프트와 같은 대업자를 위시한 4대 정육업자들은 쇠고기 기업합동을 설립했다. 사이러스 맥코믹은 수확기 제작 사업에서 타회사의 추종을 불허했다. 1904년의 한 조사 결과는 이전에는 독립했던 5,000개 이상의 업체들이 약 300개의 공업 부문의 기업합동으로 통합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같은 시업체 합병추세는 기타의 분야, 특히 수송과 통신 분야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통신회사들의 대규모적인 영리적 통합체 중에서 가장 먼저 생긴 '웨스턴 유니언'에 이어 '벨텔리폰 시스템'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미국전화전신회사(American Telephone and Telegragh Company)가 생겨났다. 1860년대에는 코넬리우스 밴더빌트가 개별적으로 운영되는 13개의 구간 철도를 통합하여 거의 8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뉴욕시와 버펄로를 연결하는 단일 철도 노선으로 만들었는데 이리하여 '뉴욕 센트럴 레이로드 시스템'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또 다른 철도회사들의 합병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는데, 전국의 주요 철도는 곧 소수인에 의해 운영되는 간선철도로 조직되었다.
이같은 새로운 산업 질서 속에서, 도시는 방대한 자본의 축적, 실업 및 금융기관, 광대한 철도 조차장, 연기를 내뿜는 공장, 그리고 수많은 일단의 육체노동자 및 사무원 등과 같은 이 나라의 모든 활기찬 경제활동을 떠맡는 중추신경의 역할을 했다. 마을은 시골과 바다건너 사람들을 끌어들여 소도시로 자랐고, 소도시는 거의 하룻밤 사이에 대도시로 자랐다. 1830년에는 15명중 한 명 만이 인구 8.000명 이상의 지역사회에서 살았는데, 1860년에는 이 비율이 6명중 거의 한 명 꼴이 되었고, 1890년에와서는 10명중 3명이 되었다. 1870년에는 주민 100만명 이상을 가진 도시는 단 하나도 없었으나, 30년 후의 뉴욕시 인구는 150만이었고, 일리노이주의 시카고시와 펜실베이니아주의 필라델피아시의 인구는 각각100만을 넘었다. 이 30년 기간에 필라델피아시와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시의 인구는 2배로, 미주리주의 캔자스시와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시는 4배로,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시는 6배로, 시카고시는 10배로 늘어났다. 미네소타주의 미니애폴리스와 네브라스카주의 오마하, 그리고 이들처럼 남북저쟁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한촌이었던 많은 지역회사들이 인구가 50배 이상이나 늘어난 도시가 되었다.
철도는 팽창하는 미국에게 점점 더 중요하게 되었고, 철도회사들의 불공정 관행이 확산했다. 대규모 화주들로부터는 요금의 일부를 환불하는 '리베이트'방식으로 보다 저렴한 요금을 받던 관행은, 소규모 화주들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또한 일부 철도회사들은, 어떤철도 구간에서는 거리에 상관없이 일부 화주들로부터는 다른화주들보다 비싼 요금을 멋대로 받았다.
더욱이, 서너개 철도회사의 노선이 연결되는 도시들 사이의 화물 요금은 경쟁 때문에 억제되었지만, 반면 단일 철도회사가 운영하는 철도 구간의 화물요금은 지나치게 비쌌다. 따라서 물건을 시카고시에서 뉴욕시까지 1,280 킬로미터 운송하는 요금이 시카고시에서 수백 킬로미터 운송하는 요금보다 저렴했다. 또 경쟁을 회피하는 철도회사들의 공동 조치, 즉 영업 공동금리제도(pooling)을 통해, 경쟁회사들은 사전에 정한 계획에 따라 운송업무를 분담했으며, 총 수입은 공동 기금에 적립하고 후에 분배했다.
이같은 관행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주정부로 하여금 서둘러 규제 조치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이같은 규제는 더러는 좋은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가전국적인성격을 띤 것이기 때문에 연방의회의 조치가 필요했다.
1887년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과다한 요금, 영어 공동관리 제도, 요금 환불 및 차별적 비율을 금지하는 주간 통상법(Interstate Commerce Act)에 서명했고, 이 법의 위반 행위를 감시하고 철도 요금과 철도회사의 관행을 규제하기 위해 주간통상위원회(InterstateCommerce Commissio: ICC)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 법률이 제정된 후 첫 10년 동안은 철도회사들이 규제를 실시하고 요금을 인하시키려는 ICC의 거의 모든 노력을 좌절시키기 위해, 대법원이내린 보수적인 판결들을 활용했다.
클리블랜드는 또한 그율의 관세제도를 철폐하기 위해서도 활발히 노력했다. 당초 전시의 비상 조치로 채택되었던 고율의 관세 제도가 그 시대의 정치를 지배했던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에 의해 항구적인 국가 정책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민주당 출신인 클리블랜드는 이 고율의 관세가 생계비의 부담스러운 증가와 기업합동의 급속한 발전의 큰 원인이 되고 있다고 간주했다. 고율 관세 문제가 정치적 쟁점이 되지 않은 채 여러 해가 지난 후, 민주당원들은 1880년 "세입만을 위한 관세"를 주장하게 되었고, 곧 개혁을 부르짖는 끈질긴 목소리가 일어났다. 1887년 클리블랜드는 이 말썽많은 문제를 다루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의회에 보낸 연두교서에서 미국의 산업을 외국의 경쟁으로부터 보호하는 원칙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추구되어 왔다고 비난함으로써 국민을 놀라게 하였다.
관세 문제는 1888년의 대통령 선거 운동의 주요 쟁점이 되었고, 보호무역주의 옹호자인 공화당 후보 벤자민 해리슨이 백중한 선거전에서 승리하였다. 헤리슨 행정부는 1890년에 이른바 "유치산업"의 육성은 물론 이미 설립되어 있는 산업들의 보호를 위해 구상된 방책인 "매킨리 관세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선거 공약을 지켰다. 이 법률에 따라 책정된 일반적으로높은 관세율은 소매가격을 비싸게 만들었고, 국민의 불만이 광범히 학산하게 하였다.
이 기간에, 기업합동에 대한 일반 대중의 반감이 높아졌다. 1880년대를 통하여 헨리 조지 및 에드워드 벨라미와 같은 개혁가들의 신랄한 공격을 받은 미국의 거대한 주식회사들이 치열한 논쟁을 불러 일으킨 정치 쟁점이 되었다. 독점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1890년에 제정된 '셔면 기업합동 방지법'은 주간 통상을 제약하는 모든 영리적 결합행위를 금지했고, 엄한 벌칙으로써 이 법률을 시행하는 몇 가지 방법을 규정했다. 그런데 이 법률의 애매모호한 일반적 원칙 때문에, 이 법률자체는 통과된 직후에는 거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10년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행정부 때 이 법률이 효과적으로 적용된 경과, 루스켈트 대통령은 "기업합동 파괴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공업의 비약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농업은 여전히 이 나라의 기본적 생업으로 남아있었다. 남북전쟁 후에 이룩된 공업혁명에 필적하는 농업의 혁명은, 육체 노동에서 기계 영농에로의, 그리고 생존을 위한 농업에서 상업을 위한 농업에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1860년부터 1910년 사이에 미국의 농장 수는 3배 이상 증가하여 200만에서 600만으로 늘어난 반면, 농경 면적은 2배 이상 증가하여 1억 6,000만 헥타르에서 3억 5,200만 헥타르로 늘어났다.
1860년과 1890년 사이에 밀, 옥수수 및 목화와 같은 기본 농산물의 생산량은 모두 미국의 이전의 생산량을 훨씬 능가했다. 동일한 기간에 미국의 인구는, 도시에서 가장 많은 성장을 보이면서 2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미국의 농민들은 미국의 근로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공급하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항상 늘어나는 잉여 생산량을 낳기에 충분한 곡물과 면화를 재배했고, 쇠고기와 돼지고기, 그리고 양모를 생산했다.
이와 같은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룩한 데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었다. 그 한 요소는 서부에로의 확장이었다. 또 다른 요소는 영농을 위한 기계의 응용이었다. 1800년의 농부 한 사람은 하루 동안에 낫으로 5분지 1 헥타르의 밀을 벨 수 있었다. 30년 후에는 덧사을 os 낫을 가지고 하루에 10분지 8 헥타르의 밀을 벨 수 있었다. 그런데 1840년 사이러스 맥코믹은 그가 거의 10년에 걸쳐 개발해 온 이상한 기계인 수확기를 사용하여 하루에 2헥타르 내지 2.5 헥타르의 밀을 베는 기적을 이룩했다. 이 기계의 수요를 예견한 그는 서쪽에 있는 草原의 신흥도시 시카고로 가서 그곳에 공장을 세웠다. 그는 1860년까지는 25만대에 달하는 수확기를 판매하였다.
자동식 '와이어 바인더', 탈곡기, 수확 탈곡기, 즉 '콤바인'등의 영농기구가 급속히 잇달아 개발되었다. 또 파종기, 절단기, 타작기 및 껍질 벗기는 기계등이 나타났는가 하면, 크림 분리기, 비료 징포기, 감자 식촌기, 가금류 부화기 등을 위시하여 다른 수백가지 영농기구가 발명되었다.
농업혁명에서 기계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과학이었다. 1862년에 '모릴 토지공여대학법'은 농과대학과 산업대학을 설립하도록 주마다 공유지를 할당했다. 이 대학들은 교육기관으로서, 동시에 과학적 영농법의 연구 센터로서 이바지 했다. 의회는 이어 전국에 농사실험소를 설치하기 위한 자금을 배당했고, 또한 연구 목적에 사용하도록 자금을 농무부에 직접 교부했다. 새 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미국 전역에 걸쳐 과학자들이 다양한 농업 연구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얄궂게도 농민들로 하여금 수확을 확대시킬 수 있게 만든 연방정책이 궁극적으로는 막대한 잉여농산물을 낳게 만들어 시장가격을 하락시킨 결과 농민들을 실의에 빠지게 했다.
이들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인 마크 칼턴은 농무부의 위촉을 받고 러시아를 여행했다. 그는 그곳에서 녹병과 가뭄에 강한 겨울(冬)밀을 발견하여, 이를 고국 미국으로 보냈는데, 이 품종은 현재 미국의 밀 생산량의 半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다른 과학자 매리온 도세트는 무서운 돼지 콜레라를 정복했는가 하면, 다른 과학자 조지 몰러는 9가축의 입 발굽에 걸리는 전염병인) 구제역을 예방하는 방법을 창안했다. 한 연구원은 북아프리카로부터 '카피르' 옥수수를 가지고 돌아왔으며, 또 다른 연구원은 투루케스탄으로부터 노란 꽃이 피는 목초 '알팔파'를 들여왔다. 캘리포니아州에서는 루터 버뱅크가 20여가지의 새로운 품종의 과일과 채소를 생산했고, 위스콘신州에서는 스티븐 배브코크가 우유의 유지방 함량을 결정하는 시험 방법을 고안했으며, 앨라배마州의 터스키지 연구소에서는 아프리카系 미국인 과학자 조지 워싱턴 카버가, 고구마 및 완두콩의 수백가지의 새로운 용도를 발견했다.
1880년대에 남부는 공업을 유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투자가들에게는 강철, 목재, 담배 및 직물등의 산업을 발전시키도록 많은 유인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1900년에 와서도 남부가 차지하는 미국의 산업 기반의 몫은 1860년대에 차지했던 몫과 거의 똑같은 수준이었다. 더욱이, 이같은 공업화를 추진하는 노력의 대가는 값비싼 것이었다. 공장들이 들어선 도시에서는 질병이 만연하고 미성년자 노동이 성행하였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30년이 지난 후에도 남부는 여전히 대부분 주민이 가난했고, 농업이 압도적인 생업이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의존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남부의 사회는 흑인과 백인의 엄격한 사회적 분리를 실시했고, 되풀이되는 9흑인에 대한) 인종적 폭력행위를 묵인하였다.
워싱턴의 중앙정부에서 차지하던 지위를 이용하여 남부의 연방 재편입에 저항했던 비타협적인 남부의 백인들은 백인 지배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州의 통제 기능을 주장하는 방도를 찾아냈다. 1870년대부터 대법원의 몇몇 판결이 국가적 권력과 州의 권력은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보수적 견해를 지지하기 시작함으로써, 이같은 남부인들의 견해를 북돋아 주었다.
1873년 대법원은 (시민권이 축소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미국헌법 수정조항 제 14조가 아프리카系 미국인을 州의 권력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사람들에게 특권이나 면책권을 부여하고 있지 않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883년에는 미국헌법 수정조항 제 14조가, 州가 아닌 개인이 (흑인을) 차별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판시했다. 또 '플레시 대 퍼쿠슨' 사건(1896년)에서 대법원은 기차나 식당과 같은, 흑인을 위한 '흑 백이 분리되었으나 평등한" 공공 수용시설은 흑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시했다.
이윽고 인종을 차별하는 (흑백)분리의 원칙은 철도에서 식당, 호텔, 병원 및 학교에 이르기까지 남부의 시민 생활의 모든 분야에 확대되었다. 더욱이, 법에 의해 (흑백)분리가 되어 있지 않은 시민 생활의 분야가 있으면, 이는 관습과 관행에 의해 분리되었다. 널리 퍼진 차별 제도에 직면한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의 가장 저명한 흑인 지도자 부커 T. 워싱턴의 계획을 지지했는데, 그는 알맞은 경제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당분간 사회적 차별을 받아들이라고 그들에게 조언했다. 아프리카계 지성인 W.E.B. 듀 보리스에 의해 영도되는 다른 아프리카系 미국인들은 정치적 행동을 통해 (흑백)분리에 도전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들 주요 흑인 지도자 두 派가 제휴하여 벌인 인종적 正義의 요구는 거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남부에서는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도 (흑백)분리의 법률들은 여전히 흔하게 남아있었다.
1865년에는 (개척지와 미개척지 사이의) 환경선은 대체적으로 미시시피강과 인접한 州들의 서쪽 한계선을 따라가다가 (서쪽으로 불룩이 나와, 캔자스와 네브라스카의 동쪽 일부 지역에 이룩해 놓은 농장들의 가느다란 경계지대 너머에는 대초원과 쑥으로 뒤덮인 땅이 록키 산맥 기슭에 까지 뻗어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금과 은, 그리고 기타 광물들이 풍부히 매장되어 있는 산맥들이 근 1,600킬로미터에 걸쳐 그 거대한 모습을 아련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들 산맥 너머 멀리 서쪽으로는 인적미!의 평원과 사막이, 수목이 울창한 해안지대의 산맥이나 태평양 연안에 까지 뻗쳐 있었다. 캘리포니아 지방의 정착지구들과 산재해 있는 변경 居!지를 제외하고는, 이 광대한 내륙 지역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수족과 블랙푸트족, 포니족, 나바호족 및 호피족의 문화와 같은 남서지역의 인디언 文化들이 있었다.
불과 25년 사이에 미국의 거의 전역이 州와 준주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광산업자들은 산간지방을 두루 헤메다니며 땅 속을 뒤졌고 네바다, 몬태나 및 콜로라도에 작은 마을들을 세웠다. 목축업자들은 광대한 초지를 확보하고자, 텍사스에서 미시시피江 상류까지에 걸친 광활한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양사육자들은 계곡과 산의 !! 지역을 찾아갔다. 농민들은 들판과 江의 유역을 쟁기로 갈고 동부와 서부사이의 격차를 좁혔다. 1890년에 와서는 환경지대는 사라졌다.
정착은 1862년의 '홈스테드法'(Homestead Act)에 의해 촉진되었는데, 이 법은 토지를 점유하고 이를 일구려는 사람에게는 농장을 64헥타르까지 무상으로 제공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농사를 짓고자 했던 사람들이 보기에는 토지 그 자체가 농사보다는 가축사육에 더 적합했으며, 1880년에 와서는 개척자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된" 거의 2,240만 헥타르에 달하는 토지가 목축업자들이나 철도회사들의 손에 들어갔다.
1862년, 의회는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의 설립을 승인해는데, 이 철도회사는 병사 출신 노무자들과 아일랜드系 이민 노무자들을 주로 고용하여 아이오와州의 카운설 블러프스에서 서쪽으로 철도를 부설해 나아갔다. 이와 동시에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는 중국인 노무자들에게 크게 의존하면서 캘리포니아 州 새크라멘토에서 동쪽을 향하여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두 철도노선이 서로 점점 더 접근해 가서 마침내 1869년 5월 10일 유타 州의 프로몬토리 포인트에서 서로 연결되자 전국은 흥분에 휩싸였다. 지금까지는 수개월이나 걸렸던, 서로 떨어진 양대양 사이의 힘든 여행길이 이제는 약 6일간의 철도 여행으로 단축되었다. 대륙횡단 철도산업이 꾸준히 성장했고, 1884년에 와서는 4개의 주요노선이 미시시피 江 중부유역을 태평양과 연결했다.
처음에 극서지역으로 떼지어 몰려든 인구는 산간지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캘리포니아의 산간지방에서는 1848년 金이 발견되었고, 이로부터 10년 후에는 콜로라도와 네바다에서, 1860년대에는 몬태나와 아이오밍에서, 그리고 1870년대에는 다코타의 블랙 힐에서 금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광부들은 그 지방을 새로 개발하고, 마을을 건설했으며, 보다 항구적인 정착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일부 정착민들은 광맥을 찾아 언덕을 파헤치면서 이 지역에 영농과 가축사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몇몇 고장들은 거의 전적으로 광업을 계속 하였지만, 몬태나, 콜로라도, 와이오밍, 아이다호 및 캘리포니아의 진정한 富는 풀과 땅에서 나온다는 것이 밝혀졌다.
오래 동안 텍사스의 중요한 산업이었던 목축업은 남북전쟁 후 기업심이 왕성한 사람들이 텍사스의 '롱혼'종 소(뿔이 긴 소)의 무리를 공유지를 거쳐 북쪽으로 몰고 가기 시작함으로써 더욱 번성했다. 풀을 뜯어먹으면서 이동하는 동안에 출발했을 때 보다 더 크게 자라고 살이 찐 이 소떼들이 캔자스의 철도 수송지점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곧 이 "장정"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오솔길들은 북쪽으로 이동하는 소떼들로 점철되었다. 목축업은 미주리 州를 횡단하는 지역에까지 확산되었고, 엄청나게 넓은 목장들이 콜로라도, 와이오밍, 캔사스, 네브라스카 및 다코타 준주에 나타났다. 서부의 도시들은 소의 도살과 정육업의 중심지로서 번성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목축업은 보기에 멋진 '카우보이'들이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다채로운 정감의 생활방식을 선보였다. 낮은 임금과 고달픈 일과의 연속인 카우보이 생활의 현실은 낭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1870년대의 '싸구려'소설로부터 존 웨인과 클린트 이스트 우드가 주연하는 20세기 후기의 영화에 이르기까지 미국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카우보이 생활의 신화적인 매력은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있다.
1866년과 1888년 사이에 모두 합쳐 약 600만 마리의 소떼들이 콜로라도, 와이오밍 및 몬태나의 고원지대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텍사스로부터 이동해 갔다. 이같은 방식의 목축 붐은 1885년을 고비로 하여 쇠퇴했는데, 소떼들의 이동로 부근의 방목지에는 소떼들이 너무 많이 붐벼 '장정'을 지탱할 만한 목초가 없게 되었고, 방목지를 종횡으로 누비고 철도가 부설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목축업자들의 뒤를 바로 이어 농민들의 포장마차가 그들의 가족, 집수레말, 소 그리고 돼지 등을 데리고 삐걱 거리면서 따라갔다. 이들 농민들은 홈스테드 法에 따라 차지한 그들의 농토의 경계를 말뚝으로 박아표시하고, 새로운 발명품인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쳤다. 목축업자들은 아무런 법적 권리도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던 땅에서 밀려났다. 이리하여 이윽고 '개척시대의 서부'는 사라졌다.
동부에서 인디언들과 갈등을 빚어냈던 것처럼, 광산업자, 목축업자 및 정착민들의 서부의 평원과 산으로 팽창해 나아감으로써 서부의 인디언들과의 갈등이 점점 더 많이 빚어졌다. 서부의 대분지(Great Basin)의 유티스 족에서 아이다호의 네즈 피세즈 족에 이르는 여러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이 수시로 백인들과 싸움을 벌였다. 그 중에서도 북부평원의 수 족과 남서부의 아파치 족이 변경 개척자들의 진출을 가장 크게 가로막았다. '레드 클라우드', '크레이지 호스'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유능한 지도자들이 이끄는 수 족은 특히 기마전에 능숙했다. 아파치 족은 수 족 만큼이나 전투에 능했고 교묘하게 상대를 기만하곤 했는데, 주로 그들의 생활 환경인 사막과 협곡에서 전투를 벌였다.
대평원의 인디언들과의 갈등은 1862년에 백인들의 수 족 인디언들에 의해 학살당함으로써 빚어졌는데, 남북전쟁 기간 전체를 통해 갈등은 계속 되었다. 수 족과의 마지막 대전투는 다코타에서 일어난 금광열기로 광부들이 블랙 힐즈 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간 1876년에 벌어졌다. 육군은 광부들이 수 족의 !!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을 책임이 있었으나 인디언의 땅을 보호하는 대책이 거의 취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미 합중국과) 체결한 조약상의 권리에 따라 수렵 지역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인디언들을 공격하도록 명령이 내려지자 육군은 활발하게 움직였다.
1876년에, 서너 차례에 걸친 수 족과의 승패를 가름할 수 없는 회전이 있은 후, 조지 커스터장군은 '리틀 빅 호온' 강변에 잇는 수족과 그들의 동맹부족의 주야영지를 발견했다. 분유대 분대에서 갈라진 그와 그의 부하들은 이곳에서 벌어진 인디언들과의 전투에서 전멸당했다. 그 후 1890년에, 사우드다코타주 운디드니의 북부 수족 보호구역에서 벌어진 "고스트 댄스"(사자의 혼령과의 교신을 위한 종교적 춤) 의식은 인디언들의 봉기와 마침내는 수백 명의 수족 남녀와 어린이들의 죽음으로 끝난 비극적인 충돌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이전에 평원 인디언들의 생활 양식은 (백인들에 의한) 들소의 대량 도살로 파괴되었는데, 들소는 1870년 이후의 10년 동안에 무차별 수렵으로 거의 별종되었다. 한편 남서부의 아프치족과의 전투는 이 부족의 마지막 !장인 제로니모가 1885년에 사로잡힐 때 까지 질질 오래 끌었다.
인디언 문제에 관한 먼로행정부 이래의 정부 정책은 인디언들을 백인들의 변경 개척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 놓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인디언 보호 구역은 불가피하게 점점 더 작아지고, 좁은 공간에 인원을 더 많이 수용하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대우를 항의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서부에서 살았던 동부인인 헬렌 헌트 잭슨은 1881년에 <불명예로운 한 세기>(A Centry of Dishonor)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인디언들이 처한 곤경을 극적으로 표현하여 이 나라의 양심에 와닿게 했다. 대부분의 개혁자들은 인디언들이 지배적인 문화에 동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방정부는 인디언 젊은이들에게 백인들의 가치관과 신념을 심어주기 위한 기도에서 펜실베이니아주의 칼리일에 학교를 세우기까지 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지금까지 낳은 가장 우수한 운동선수라고 간주하는 짐 터르프가 20세기 초에 명성을 날린 것도 그가 이 학교에 재학중이었을 때였다.)
1887년에 (헨리 로렌스 도우즈가 제안한) '도우즈법'은 미국의 인디언정책을 뒤엎어 놓았는데, 이 법률은 대통령이 인더언 부족들의 전용지를 나누어주고, 인디언 세대주마다 65헥타르의 토지를 분배할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할당된 토지는 25년 동안 이를 정부에 信託하고, 이 기간이 끝나면 소유자가 완전한 권리와 시민권을 차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분배되지 않고 남아있는 토지는 정착민들이 이를 구입할 수 있게 하였다. 제 아무리 선의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이 정책은 재난을 몰고 온 정책이었음이 밝혀졌다. 이 정책은인디언 토지에 대한 가일층의 약탈을 가능하게 했으며, 인디언 부족들의 공동생활체 조직을 파괴함으로써 그들의 전통 문화를 가일층 와해 시켰기 때문이다. 1934년에 미국의 인디언 정책은 '인디언 재조직법'에 의해 다시 반전되었는데, 이 법률은 인디언 보호 구역 안에서의 그들의 부족적 및 공동체적 생활의 영위를 보호하고자 기도했다.
19세기의 마지막 10년은 미합중국에게는 제국주의적 팽창의 시기였는데, 미국이 대서양, 태평양 그리고 중앙 아메리카에 걸쳐 폭넓게 산재한 지역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했거나 때로는 이들 지역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합중국은 유럽제국들을 상대했던 자신의 투쟁과, 자신의 독특한 민주적 발전의 역사 때문에 유럽의 경쟁 상대국들과는 상이한 노선을 따랐다.
19세기 말엽의 미국의 팽창주의의 기원은 여러 가지 상이한 것들이었다. 구제적으로는 이 시기는 유럽 강대국들이 앞다투어 아프리카 대륙의 분할에 나섰고, 새로운 경쟁상대인 일본과 함게 아시아에서의 영향력과 통상의 증대를 경쟁하던 시기였다. 디어도어 루스벨트, 헨리 캐봇 로지 및 이라이휴 루트 같은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포함하는 많은 미국인들은 미국 자체의 권익을 안전히 보호하기 위해서는 미국은 경제적 영향권도 역시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같은 견해는 강력한 해군 로비단의 찬성을 얻었는데, 이 로비단은 미국의 경제적 및 정치적 안보에 필수적인 함대의 증강과 해외항구망의 설치를 요구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처음에는 미국의 아메리카대륙 안에서의 팽창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명시된 운명" 독트린이, 이번에는 미국이 서반구와 카브리해 지역에, 또한 태평양 너머 전세계에 걸쳐 영향력을 뻗히고 미국의 문화를 전파시키는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되살아났다.
동시에 북부의 민주당원들과 개혁의 의지가 강한 공화당원들의 다양한 연합 세력으로부터 나오는 반제국주의 목소리는 여전히 컸고 꾸준했다. 그 결과 "아메리카제국"을 이룩하려는 노력은 일관성없이 조금씩 이루어졌고, 그나마 찬성과 반대의 상반된 반응을 일으켰으며, 식민지 통치는 정치적 통제보다는 통상과 경제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둘 때가 흔히 있었다.
미국이 대륙의 국경 너머에서 처음으로 손댄 모험적 사업은 1876년에 아이누족과 기타 원주민들 만이 드문드문 살고 있던 앨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구입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윌리엄 스워드 국무장관이 취한 앨래스카 구입 조치에 무관심했거나 분개했는데, 앨래스카는 "시워드가 저지른 어리석은 짓"이라거나 "시워드의 냉장고"로 널리 호칭되었다. 그러나 30년 후의 앨래스카의 클론다이크강 강변에서 금이 발견되자 수많은 미국인들이 북쪽으로 앨래스카를 찾아갔고, 그곳에 항구적으로 정착한 사람도 많았다. 앨래스카가 1959년에 미국의 49번째 주가 되자 텍사스주를 제치고 합중국 최대의 州로 부상했다.
1898년에 일어난 미국-스페인 전쟁은 미국 역사에 한 전환점을 가져왔다 이 전쟁이 끝난 후 몇 년 안에, 미국은 카리브해역의 도서들과 멀리 떨어진 태평양 중부 해역의 기타 도서들에 대해, 그리고 더 멀리는 아시아 본토에 가까운 도서들에 대해 통제력이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1890년대에 와서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는 신세계에 있었던, 한때는 방대했던 스페인 식민제국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존재였던 반면, 필리핀군도는 태평양에 존재하는 스페인 세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스페인과의 전쟁이 발발한 데에는, 스페인의 독립 요구에 대한 미국민의 동정심,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강경외교정책"을 표방하거나, 국수주의적이고 선동적인 언론에 자극받은 미국내의 국가적 자기주장의 새로운 정신 등의 세가지 주요원인이 있었다.
1895년, 모국 스페인의 폭정에 대해 쌓여 가던 쿠바 주민의 분노는 독립전쟁으로 폭발했다. 미국은 이같은 봉기의 진전 상황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주시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쿠바인들에게 동정했으나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중립을지키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3년 후인 매킨리 행정부 기간에 아바나항에 정박중이던 미국 군함 메인호가 아직도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 파괴되었다. 250명 이상이 살해되었고, 선동적인 신문 보도에 의해 심화된 분노의 폭발은 전국을 휩쓸었다. 매킨리 대통령은 얼마 동안은 평화를 유지하고자 노력했으나, 몇 달 안가서 개입의 지연이 무익하다고 생각한 끝에 무력 개입을 건의하게 되었다.
스페인과의 전쟁은 속전속결적이었다. 전쟁이 계속된 4개월 동안에 미국은 단 한번도 이렇다할 패전을 당하지 않았다. 전쟁 포고 1주일 후, 당시 홍콩에 있었던 조지 듀이 제독은 6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소함대를 이끌고 필리핀으로 향했다. 그가 받은 명령은 필리핀에 기지를 둔 스페인 함대가 미국 해역에서 작전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었다. 그는 정박중인 스페인함대의 전체 선박을 공격하여, 단 한명의 미국인의 생명도 희생시킴이 없이 이 함대를 격파했다.
한편 쿠바에서는 미군 부대는 산티아고 부근에 상륙하여, 일련의 신속한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산티아고항에 포격을 가했다. 4척의 스페인 철갑해양함이 산티아고에서 달려 나왔으나 몇 시간 후에는 격파당하여 폐선이 되고 말았다.
산티아고를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보스턴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기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국기가 휘날렸다. 신문사들은 쿠바와 필리핀에 특파원을 보냈으며,그들은 이 나라의 새로운 영웅들의 명성을 대서특필했다. 그 중에서 중요한 인물들은 마닐라에서 명성을 떨친 조지 듀이와 쿠바에서 전투에 참여하고자 자신이 모병한 지원병의 기마연대인 "라프 라이더즈"(거칠은 기마대)를 지휘하기 위해 해군차관 자리를 사임한 디어도어 루스벨트였다. 스페인은 곧 강화를 제의했고, 1898년 12월 10일에 체결된 강화조약을 통해 쿠바가 완전히 독립할 때까지 미국이 임시로 점령하고 있도록 쿠바를 미국에 이향했다. 이외에도 스페인은 푸에르토리코와 괌도를 전쟁 배상금 대신 미국에 할양했고, 2,000만 달러를 받고 필리핀을 미국에 내주었다.
해외에 영토를 갖는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 결과 새로운 영토들의 주민들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정치 체제인 민주적 자치체제를 향해 나아가도록 고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필리핀 점령의 첫 10년동안에 필리핀의 무력 독립운동을 진압하면서 자신이 경험해서 잘 알고 있는 식민 통치의 역할을 수행했다. 필리핀 사람들은 1916년에 입법부의 상하원 의원을 선출할 권리를 획득했고, 1936년에는 폭넓은 자치제의 필리핀 연방이 수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6년에 필리핀은 완전한 독립을 획득했다.
하지만 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필리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일어낫던 해에는 또한 하와이 군도와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섰던 하와이와의 접촉은 주로 선교사와 비정기적으로 하와이를 찾아가는 무역상들을 통한 접촉이었다. 하지만 1865년 이후에는 미국인들이 하와이 군도의 자원을-주로 사탕수수와 파인애플을-개발하기 시작했다. 1893년에 왕에 충성하는 하와이 정부가 외국의 영향력을 종식시키려는 의향을 발표하자, 미국 실업인들은 영향력이 강한 하와이 사람들과 합세하여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고, 이 새로운 정부는 하와이를 미국에 합방하도록 미국에 요청했다.
미국 병사의 동원과 식민 통치의 아이디어에 반대하는 미국내의 광범한 항의 때문에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의회는 처음에는 이 합방 요청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미국-스페인 전쟁에 의해 생겨난 국수주의가 고조됨에 따라 의회는 이에 부응하여 1898년 7월 하와이 군도를 미국에 합방할 것을 압도적 다수로 결의했다. 이렇게 해서 진주만에 중요한 해군 기지도 획득하게 되엇다. 1959년에 하와이는 미합중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쿠바는 1902년 미군이 쿠바로부터 철수하자 명목상의 독립을 획득했다. 그러나 미군은 公共질서를 보존하기 위해 개입하는 권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1934년 이 구너리를 포기할 때까지 3회에 거쳐 이 권리를 발동하여 개입했다. 하지만 쿠바가 완전히 독립한 후에도 미국의 경제적 및 정치적 영향력은, 1959년에 피덱 카스트로가 정부를 전복시켜 소련과 긴밀한 유대를 맺은 마르크스주의 정권을 수립할 때까지 여전히 강력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미국은 1902년 쿠바의 관타나모만에 설치한 해군기지를 계속 유지했다.
쿠바 동쪽에 있는 섬 푸에르토리코는 쿠바와 필리핀이 밟은 것과 유사한, 민주적 체제를 수습하는 과정을 밟았다. 1917년 미국 의회는 푸에르토리코인들에게 그들의 의회의원 전원을 선출하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같은 권리를 부여한 법률은 푸에르토리코에게는 (쿠바와 필리핀과는)상이한 진로를 마련했는데, 이 섬을 공식적으로 미국 영토로 만들었고, 더 중요하게는 푸에르토리코인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했던 것이다. 1950년 미국 의회는 푸에르토리코에게 자신의 장래를 결정할 완전한 자유를 부여했다. 푸에르토리코 시민들은 1952년에 실시된 국민투표를 통해 미국의 주가 되거나 완전히 독립하는 길을 거부하고, 대신 미국의 연방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많은 푸에르토리코인들이 미국 본토에 정착했는데, 푸에르토리코인들은 미국 본토에 자유로이 올 수 있고, 또 정착한 본토에서는 미합중국의 기타 시민이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모든 민권은 물론 정치적 권리도 갖고 있다.
스페인과의 전쟁을 계기로, 파나마를 횡단하여 양대양을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는 미국의 관심이 되살아났다. 해로를 통한 무역을 위한 그같은 운하의 유용성은 세계의 주요 상업국들에 의해 오래 전부터 인식되어 왔다. 프랑스는 19세기 말엽 이 운하를 파기 시작했었으나 이에 수반하는 난관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는 카브리해와 태평양을 다같이 세력권에 넣은 강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유사시에 군함들을 한쪽 대양에서 다른쪽 대양으로 보다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는 운하의 군사적 필요성을 인식했다.
20세기 초두에 지금의 파나마 지역은 콜롬비아의 한 북부주였다. 1903년 콜럼비아의회가 미국에게 운하를 건설하고 이를 운영하는 권리를 부여하도록 하는 조약 초안의 비준을 거붛자, 성미가 급한 일단의 파나마인들이 미국 해병대의 지원을 받고 반란을 일으켜, 콜롬비아로부터의 파나마 독립을 선언했다. 모국에서 이탈한 이 나라는 디어도어 루스켈트 대통령에 의해 즉각 승인되었다. 그 해 11월에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파나마는 1,000만 달러와 연간 (파나마 운하) 임대료 25만 달러를 받는 대가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16킬로미터 폭의 파나마 지대를 영구조차지로 미국에게 임대했다. 콜롬비아는 후에 2,500만 달러를 부분적인 포상금으로 받았다.(이로부터 75년 후인 1977년에 미국과 파나마 두 나라 사이에 협상된 파나마 운하조약에 따라 이 운하는 서기 2000년에 가서는 파나마의 주권 아래로 되돌아갈 것이다.)
1914년의 파나마 운하 전성은 조지 W. 고우달즈대령이 지휘한 토목공사가 거둔 주요한 승리였고, 한편 열대 밀림의 말라리아와 황열병의 정복은 예방의학의 탁월한 업적이었다.
중남미 기타지역에서 미국은 단속적으로 개입하는 패턴에 빠져 들어갔다. 예를 들어 1900년부터 1920년 사이에 미국은 6개 서반구 나라에 개입하였는데,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에 대해서는 보호제도를 수립했으며, 니카라과에는 정기적으로 해병대를 주둔시키기도 했다. 1876년 미국은 황제인 맥시밀리온을 지원하는 프랑스군을 철수시키도록 프랑스에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반세기 후, 멕시코혁명에 압력을 가해 영향을 미치려고 했던 군사 행동의 일환으로 미국은 1만 1,000명 병력의 군대를 멕시코 북부지역에 투입하여 반란자이자 무법자인 (혁명 주모자원의 일원) 프란치스코 "판초" 빌라를 생포하려고 노력했으나 허사에 그치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또한 미대룩 나라들 사이의 협력의 제도적 기반을 수립하는 중요한 역할도 수행했다. 1889년 국무장관 제임스 G.블레인은 서반구의 21개 나라들이 분쟁의 평화적 해결 보다 긴밀한 경제적 유대를 위한 한 기구에 가입할 것을 제안햇다. 1890년에 열린 첫 범미대륙회의에서 초기에는 범미연맹(Pan American Union)으로 알려졌고, 오는날에는 미주기구(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로 알려진 항구적인 기구가 탄생했다.
더욱이, 후에 등장한 허버트 후버 행정부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는 중남미 나라들에 미국이 개입하는권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루스벨트의 "미린정책"은 비록 이 정책이 미국과 중남미 나라들 사이의 긴장을 종식시킨 것은 절대로 아니었지만, 초기에 미국이 개입하고 일방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생겼던 (그 지역 주민들의 미국에 대한) 악의를 많이 해소시키는 것을 도왔다.
필리핀에서 새로운 기반을 수립했고, 하와이에서 견고한 기반을 다진 20세기 초두의 미국은 중국과의 활발한 무역을 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한 이래, 여러 유럽 나라들은 중국으로부터 해군 기지와 조차지를 얻어냈고, 중국에 영향권을 수립했다. 유럽 나라들은 또한 인접 지역에서 철도를 부설하고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투자하는 배타적인 권리는 물론, 독점적인 통상권까지 확보했다.
아시아와의 초기의 외교관계에서, 미국정부는 모든 나라들이 동등한 통상 특권을 가질 것을 항상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 대외정책상의 이상주의는 극동에서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과 경쟁하려는 욕망과 갈등을 빚었다. 1899년 9월 국무장관 존 헤이는 관계강국들에게 각서를 보냈는데, 그 결과 중국에서의 모든 나라에 대한 "문호개방"의 원칙에-즉 유럽 강국들이 관장학 hdlt는 지역들에서의 (동일한 관세, 입항세 및 철도 요금 등을 포함하는) 통상기회의 균등 원칙에-합의를 보았다. "문호개방"원칙은 이에 내포된 이상주의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식민지를 억지로 빼앗을 필요없이 식민지의 이점을 손에 넣기 위해 이용되는 교묘한 외교적 수단이 되었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중국인들은 외국인들을 습격했다. 그 해 6월 暴徒들은 북경을 점령하고 이곳의 외국공관들을 공격했다. 헤이 국무장관은 즉각, 미국은 중국의 영토권이나 행정권에 대한, 또는 "문호개방"정책에 대한 그 어떤 방해에도 반대한다고 유럽 강국들과 일본에 발표했다. 일단 폭동이 진압되자, 미국의 계획을 수행하고 엄청난 손해배상으로부터 중국을 보호하는 데는 헤이의 수완이 절대로 필요했다. 그러나 그 해 10월 영국과 독일은 다시 한번 문호개방 정책을 준수하고, 외세의 지배하에 있을 망정 중국의 독립보전을 존중할 것을 다짐했고, 다른 나라들도 이에 따랐다.
1920년대까지 미국의 일본과의 관계는 중국과의 관계와 비슷한 패턴을 따랐다. 1907년 디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인 노무자들과의)경쟁에 대한 미국 노무자들의 불안을 해소시키기 위해 일본정부에 대해 노무자의 미국 이민을 임시로 중단하도록 설득했다. 이런일 말고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접어든 기간에 일본인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는 따뜻했고 평온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일본과의 흔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던 것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노일전쟁(1904-1905)을 중재했던 때인데, 이때 그는 독일과 프랑스에 대해 러시아에 편들어 개입하여 일본에 적대하지 말도록 경고했다. 루스벨트는 이 전쟁의 강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미국 지도 펼쳐 보고 미국 여행 하자.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지도 검색 블로그)
| "내분을 일으키고 있는 집안은 오래갈 수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노예와 반자유를 영원히 지탱해나갈 수는 없다고 믿는다." -- 에이브라햄 링컨, 1858년. |
19세기 중엽이 되자 많은 외국인들이 미국을 꾸준히 방문하기 시작했다. 어느 역사가가 지적했듯이 "어느 모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리고 흔히 낭만적으로 묘사되었던 식민지 개척의 후진적인 상황이 거의 하룻밤 사이에 변모하여 연구해야할 현상, 또 그 가치를 판단해야 하는 정치적 및 도덕적 실험이 되었다."
당시 미국을 방문했던 사람 중에서 프랑스의 작가이며 정치이론가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Tocqeville)보다 더 영속적인 자신의 여행과 관찰에 관한 기록을 남긴 사람은 없다. 1835년에 처음으로 간행된 그의 저서 <미국민주제론>(Democracy in America)은 미국의 사회적 정치적 및 정치적 관행에 대한 가장 명쾌하고 통찰력 있는 분석의 하나로 남아있다. 토크빌은 미국에 대해 비평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아주 빈틈없는 관찰자였지만, 그의 미국에 대한 판단은 근본적으로 긍정적이었다. 그는 "부의 분배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의 개념을 수반하듯이 민주주의 정부는 가장 미천한 시민에게까지 부여된 정치적 권리의 개념을 수반한다"라고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크빌은 산업동력자들과 새로운 실업엘리트 사이에 분열을 조정하려고 위협하는, 점차로 성장하는 공장제도에 직면하여 그 같은 전반적인 평등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의 여부를 우려했던 많은 사상가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다.
다른 여행자들은 이 나라의 성장과 활력에 경탄했는데. 그들은 이 나라에서 "가는 곳마다 농업과 상업, 그리고 대규모의 공공 토목공사에서 번영과 급속한 발전의 매우 뚜렷한 증거"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실험에 대한 그 같은 낙관적인 견해들은 절대로 보편적인 견해가 아니었다. 회의주의의 한사람은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였는데, 그는 1841년부터 1842년 사이에 미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그는 한 서한에서 "이 나라는 내가 보고자 찾아온 공화국이 나이다. 이 나라는 내가 상상한 공화국이 아니다...내가 이나라의 젊음과 활기찬 힘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의 눈에는 이 나라는 온갖 면에서 더 초라하고, 더 하찮게 보인다. 이 나라가 자랑해 온 모든 것이 국민의 교육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동들을 돌보는 일을 제외하고는 내가 생각했던 수준에 훨씬 못 미친다."라고 썼다.
미국을 그렇게 보는 사람은 디킨스만이 아니었다. 19세기의 미국은 미국 역사 전반을 통해 그러했듯이, 보다 세속적이고 보다 복잡한 현실과 걸맞지 않는 기대와 열정을 낳게 했다. 당시에 미국의 크기와 다양성은 이미 미국을 쉽게 일반화하여 논할 수 없게 만들었고 모순을 낳게 했다. 즉 미국은 자유를 사랑하면서도 노예를 보유하는 사회였고 상업이 번창하고 공업화를 이룩한 도시들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광대하고 태고 그대로의 변방지역을 가진 나라였다.
1850년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국토는 삼림과 평원과 산맥을 넘어 뻗어 있었다. 그같이 넓게 펼쳐진 국토 안에서 31개 주로 구성된 연방체제 아래 2,300만 인구가 살고 있었다. 동부에서는 공업이 갑자기 호황을 누렸다. 중서부와 남부에서는 농업이 번창하였다. 1849년 이후에는 캘리포니아주의 금광들에서 캐낸 금이 여러 무역 경로를 통해서 거래되었다.
뉴잉글랜드지방과 중부 대서양연안의 주들은 제조업, 상업 그리고 금융의 주요한 중심이었다. 이들 지역의 주산물은 직물, 목재, 의류, 기계, 피혁 및 모직물이었다. 동시에 해운업은 번영의 결정에 달했으며, 미국선적선박들이 7대양을 누비면서 모든 나라의 상품을 유통시켰다.
대서양연안에서 미시시피江과 그 이원에 이르는 남부는 농업 중심경제가 그 특징이 되어있는 비교적 꽉 짜여진 정치적 단위였다. 연초는 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 및 노드캐롤라이나주의 경제에 중요했다. 사우드 캐롤라이나주에서는 쌀이 풍부한 수확을 올리는 작물이었고, 루이지내아의 기후와 토양조건은 사탕수수의 재배를 장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마침내 목화가 남부의 지배적인 작물이자 남부의 특징을 이루는 작물이 되었다. 1850년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남부는 세계의 목화의 80퍼센트 이상을 지배했다. 이들 모든 작물을 재배하는 데에, 무엇보다도 목화 재배에 노예들이 사용되었다.
중서부는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과 급속히 불어나는 인구를 통해 번성했다. 유럽과 미국내의 오래된 정착지들이 중서부에서 생산하는 밀(소맥)과 육류를 필요로 하였다. 노력... 농기구의 특히 '머코믹' 수확기의 출현은 농작물 생산의 유례 없는 증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한편, 이 나라의 밀 산출고는 1850년에 3,500만 헥토리터(hectoliter)이던 것이 1860년에는 거의 6,100만 헥토리터로 증가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중서부에서 재배되었다.
서부의 번영에 큰 자극을 준 것은 수송시설의 일대혁신이었다. 1850년부터 1857년에 이르는 기간에 중서부와 동부를 연결하는 5개 간선철도가 애팔래치아산맥의 장벽을 뚫고 나아갔다. 이같은 연결은 (남부전쟁기간인)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연방(북부)의 주들 사이의 정치적 동맹을 떠받쳤던 경제적 이해관계를 낳게 했다. 남부에서는 철도강확장이 처음에는 저조했다. 1850년대 말기에 와서야 비로소 산맥을 관통하는 한 연속선로가 미시시피 강 하류지역과 남부 대서양 연안지방을 연결하였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 즉 노예문제가 남부와 북부 사이의 경제적 지위 및 지역적 이견을 심화시켰다. 북부 실업인들이 목화 장사로 폭리를 취하고 있는 데에 분개한 남부인들은 그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후진상태를 북부의 세력 확대 탓으로 돌렸다. 한편 북부인들은 남부가 그 경제에 절대로 필요하다고 간주하는 "독특한 제도"인 노예 제도가 남부 지역의 후진성의 전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일찍이 1830년대부터 노예문제를 놓고 남북부사이에는 차이지는 지방적 경향이 굳어져갔다. 북부에서는 노예제도 폐지의 기운이, 아직도 주로 편성되지 않은 서부지역에 노예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완강하게 반대하는 '자유토지' 운동에 힘입어, 더욱더 강화되었다. 1850년대의 남부인들에게는, 노예제도는 그들이 일상 사용하는 영어나, 그들의 대의제도에 못지않는 생활의 한 여건이었다. 일부 해안 지역에서는 1850년대 이전 200년이 훨씬 넘는 옛날부터 노예제도가 있어 왔으며, 노예제도는 이 지역의 기본경제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 있었다.
남부의 백인들 중 소수만이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대농장주를 적어도 20명의 노예를 소유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때, 1860년에는 노예를 가진 주들 전체를 통해 대농장주들은 모두 합쳐 4만 6,274명이었다. 전체 노예의 절반 이상이 대농장에서 일했다. 일부 자작농들은, 그들의 70퍼센트가 40헥타르 미만의 토지를 갖고 있었는데, 노예를 서 너명씩 갖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노예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가난한 백인"들은 남부사회의 최하계층에서 살았고, 노예를 갖고있지 않았다. 노예 소유에 대한 대농장주들의 관심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그들이 노예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작농과 가난한 백인들도 역시 노예제도를 지지했었다. 그들은 노예들이 해방되면 이 흑인들이 토지를 놓고 그들과 경쟁을 벌일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이와 똑같이 중요한 점은 노예의 존재로 말미암아 자작농과 가난한 백인들의 사회계층상의 지위가 높여졌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노예제도에 반대하여)이 같은 지위를 기꺼이 포기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부의 정치지도자, 전문 직업인들, 그리고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북부여론의 압력과 싸우는 가운데 이제는 노예제도를 더 이상 변명하지 않고 이 제도를 옹호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남부의 정치 평론가들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는 북부의 임금제도 아래에서보다 노예제도 아래에서 더 인도적이라고 주장했다.
1830년대 이전에는 주인이 자기 노예를 직접 감독하는 즉 가장이 농장을 관리하는 제도가 계속 특징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최남부 지방에 대규모 목화생산체제가 도입되면서, 농장주인은 점차적으로 자신이 직접 노예를 면밀히 감독하는 일을 그만두고 직업적인 감독자들을 고용했는데 그 고용기간은 그가 노예로부터 최대의 작업량을 짜내는 그들의 능력에 죄우되었다.
노예제도는 본래 구타행위와, 노예를 매매함으로써 그들의 가족을 이산시키는 일이 예사고 행하지는, 잔인하고 위압적인 제도였다. 하지만 노예제도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은 노예에 대한 농장 주인이나 감독자 개개인의 형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자유라는 뺏을수 없는 권리를, 노예에 대해서는 이를 근본적으로 침해한 데에 가해졌다.
전국적 정치에서 남부인들은 목화-노예로 대표되는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확대하는 것을 주로 추구했다. 확장은 필요 불가결하다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단일작물, 즉 목화만을 계속 재배한 결과 지력을 급속히 고갈시켜 새로운 비옥한 토지의 필요성을 증대시켰기 때문이다. 더욱이 남부는 새로 탄생한 자유주들의 연방가입을 상쇄하기 위해, 노예제들을 추가로 설치하기 위한 영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북부인들은 남부의 이같은 견해 속에 노예제도 지지세력의 확대를 위한 음모가 있음을 알아차렸고, 1830년대에 북부인들의 노예제도 반대는 치열해졌다.
미국 독립전쟁의 결과로 파생한 초기의 노예제도 반대운동은 1808년에 미국의회가 아프리카와 노예무역을 폐지시켰을 때에 가장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에[는 주로 퀘이커교도들이 노예제도에 반대했는데, 그들이 온건하고 별로 효과 없는 항의를 계속하는 동안 조면기의 등장과 서부를 향한 미시시피강 하류지역에로의 확장은 노예의 수요를 증가시키고 있었다.
1830년대 초에 대두한 노예제도 폐지 운동은 전투적이고 非타협적이었으며 노예제도의 즉각적인 폐지를 요구하였다. 이 같은 접근방법을 추구하는 노예제도 폐지 운동은 그들의 지도자들로서 미시시피州 출신의 청년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을 추대하였는데, 그는 순교자의 영웅적 자질과 민중선동자로서의 개혁추진열의를 겸비하고 있었다. 1831년 1월 1일 개리슨은 그의 신분 <해방자>(The Liberator)의 창간호를 발행하였고,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성명이 게재되어 있었다. "나는 우리의 노예계층을 즉각 해방하기 위해 불굴의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이 문제에 관해 나는 온건하게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또는 글을 쓰기를 원치 않는다...나는 진지하다...나는 모호한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나는 가차없이 일을 해내 갈 것이다--나는 단 한치도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나의 뜻을 관철할 것이다."
세상을 놀라게 한 이 같은 게리슨의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바꿀 수 없다고 간주해온 한 제도의 사악성에 대해 북부인들을 각성시켰다. 그는 노예제도의 가장 불쾌한 국면을 일반 국민들의 눈앞에 드러내 보이고 노예 소유자들을 인간 생명의 고문자이며 불법 거래자로 매도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노예소유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타협을 용인하지 않았으며 지연을 용납하지 않았다. 다른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은 그의 법을 무시하는 전술에 가담하기를 꺼려했고 개혁은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수단으로 이룩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개리슨의 활동에는 매사추세츠주 반노예제도협회 대변인으로서, 그리고 후에는 노예제도 폐지 운동자들의 주간신문<북극성>(Northern Star) 의 웅변적인 편집자로서 北部의 독자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던, 도망한 노예인 프레드릭 더글라스의 강한 목소리가 합세했다.
반노예제도운동의 한 활동은 노예들이 북부나 국경 너머 캐나다에 있는 안전한 피난처로 도망하는 것을 돕는 일이었다. 1830년대에는 북부의 모든 지역에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교묘한 비밀 통로망이 확립되어 있었다. 그것을 가장 성공적으로 운영한 곳이 옛 "서북부 지방"(Northwest Territory:오하이오강, 미시시피강 및 캐나다 국경에 에워싸인 삼각지역의 구칭이었다. 오하이오州에서만도 1830년에서 1860년대까지 최소한 4만 명의 도망 노예들이 자유를 찾는데서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추산된다. 지방의 反노예제도 단체들의 수는 1840년대에 와서는 약 2,000명을 헤아리고, 그 회원 수는 어쩌면 2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늘어났다.
농예제도를 양심의 문제로 부각시키려는 폐지운동자들의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북부인들은 反노예제도 운동에 초연한 태도를 취했거나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예를 들어, 1837년에 일리노이주 올턴에서 분노한 일단의 폭도들이 反노예제도 간행물의 편집인 이라이저 러브조이를 공격, 살해했다. 그러나 남부가 취한 어떤 행동들은 노예제도 폐지운동자들로 하여금 노예제도 문제를 백인들의 공민적의 자유를 위한 운동에 결부시키도록 만들었다. 1835년 성난 일단의 폭도가 사우드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우체국에서 노예제도 폐지운동론자들의 인쇄물을 파괴했다. 우체국장이 노예제도 폐지 운동론자의 우편물을 배달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자, 연방의회에서는 신랄한 논쟁이 벌어졌다. 게다가 노예제도 폐지운동자들은 의회에 대해 콜럼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에서 노예제도를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을 물밀 듯이 보내기로 결정했다. 1836년 연방 하원은 청원의 심사를 자동적으로 무기한 연기시키도록 결정함으로써 청원을 효과적으로 묵살했다. 1830년에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前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는 이같은 이른바 "함구령"를 헌법 수정사항 제1조의 위반이라고 하여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벌였다. 하원은 1844년에 이 함구령을 폐지했다.
1820년대 전체에 걸쳐 미국인들은 광활한 텍사스 지방에 정착했는데, 멕시코 정부로부터 토지를 공여 받는 일이 흔히 있었다. 하지만 급격히 늘어나는 정착민들의 수는 멕시코 당국을 경계하게 만들어, 1830년에는 그 이상의 이주가 금지되었다. 1834년 안토니오 로페즈 드 산타 안나장군이 독재정권을 수립했는데, 다음해에 텍사스의 미국인 주민들이 반란들 일으켰다. 산타 안나는 1836년 초 저 유명한 앨라모 점령을 계기로 미국인 반도들을 패배시켰다. 그러나 샘 휴스턴 지휘하의 미국인 주민들은 한 달 후에 있었던 산 저신토강 전투에서 멕시코 군을 패배시키고 산타 안나를 사로잡았다. 이로부터 거의 10년 동안 테사스는 독립공화국으로 머물었고, 1845년에 미국의 28번째 주가 되었다.
멕시코는 텍사스가 미국의 주가 된 문제를 놓고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했으나 가장 논쟁이 심했던 문제는 이 새로운 주경계문제였는데, 텍사스주는 (멕시코와의)경계가 리오그란데 강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멕시코는 이 경계가 누에세스강의 훨씬 북쪽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많은 미국인들이 미합중국은 서쪽으로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확장하는 "명백히 나타난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던 시기에 정착민들이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로 물밀 듯이 몰려 들어갔다.
뉴멕시코 지방과 캘리포니아 지방을 매입하려는 미국의 기도는 실패했는데, 리오그란데강 연안에서 멕시코군과 미국군이 충돌한 후 미국은 1846년 전쟁을 포고했다. 미국군은 뉴멕시코지방을 점령했고, 캘리포니아 지방에서의 정착민들이 (對멕시코)반란을 지원했다. 재커리 테일러가 지휘하는 미국군이 멕시코를 침공하여 몬테리아와 부에나 비스타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러나 멕시코를 협상의 탁자로 끌어내지는 못하였다. 1847년 3월, 원필드 스커트가 지휘하는 미국군이 멕시코의 동해안 베라 크루즈 부근에 상륙하여 일련의 치열한 교전 끝에 멕시코 시티로 입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산타 안나가 사임하고난 후에야 비로소 멕시코와 '과달루페 힐다고' 조약을 협상할 수 있었는데 멕시코는 이 조약에 따라 남서지역과 캘리포니아를 1,50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 할양하였다.
이 전쟁은 후에 남북전쟁에서 남군과 북군으로 나뉘어 싸우게된 미국군 장교들을 위한 훈련장 역할을 하였음이 증명되었다. 이 전쟁은 또한 反노예제도 노선의 휘그당이 민주당의 제임스 K.폴크 대통령 행정부를 팽창주의를 추구한다고 비평하게 된 정치적 분열을 안겨준 전쟁이었다.
멕시코전쟁이 매듭지어짐에 따라 미국은 현재의 애리조나, 네바다, 캘리포니아, 유타 등의 제주와 뉴멕시코주, 콜로라도주 및 와이오밍주 등의 일부를 망라하는 136만 평방킬로미터나 되는 광활한 영토를 얻었다. 그러나 이는 또한 국내 정세를 악화시킨 영토 획득이었는데 당시 미국정치에서 가장 폭발적인 물음, 즉 새 영토들이 노예주가 되느냐, 아니면 자유주가 되느냐 하는 물음을 다시 재기했기 때문이었다.
1845년까지만 해도 노예제도는 당시 노예제도가 이미 존재했던 지역 내에 국한될 것처럼 보였다. 노예제도는 1820년의 "미주리 타협안"에 의해 그 실시 지역이 한정되었으며, 또 그 지역 밖을 확산되는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새로운 영토들은 노예제도의 팽창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많은 북부인들은 노예제도가 확산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이 제도는 궁극적으로 쇠퇴하여 없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새로운 노예주의 추가에 대한 그들의 반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북부인들은 워싱턴과 제퍼슨의 성명을 그리고 노예제도가 북서쪽으로 확장하는 것을 금지한 1787년의 북서부령(Northwest Ordinate)을 지적하였다. 이미 노예제도를 허용한 텍사스는 자연히 노예인수를 준비하고 있을 때 이들 지역에서의 노예제도 문제에 대해 상충되는 제의들이 있었다.
남부의 극단주의자들은 멕시코로부터 획득한 모든 땅을 노예소유자들에게 개방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북부인들은 새로 얻은 모든 지역에서 노예제도를 금지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일단의 온건주의자들은 "미주리 타협안"선을 태평양연안에까지 연장하여, 그 선 이남을 노예주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다른 집단은 이 문제를 "국민주권"에 맡기자고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정부는 정착민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노예를 갖거나 또는 가지지 않고 주로 편성할 시기가 왔을 때 주민들 자신으로 하여금 이 문제를 결정하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남부의 여론은 모든 영토들이 노예제도를 승인하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부는 그 어떤 영토도 그 같은 권리를 갖고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1848년에는 거의 30만 명에 달하는 남성 유권자들이 '자유토지당'(Free Soil Party)의 입후보자들에게 투표하였는데 이 정당은 최선의 정책이 "노예제도를 제한하고 국지화하여 이를 억제하는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메릴랜드, 켄터키, 미주리 등 중서부와 변경지대의 주들은 더욱 분렬되어 있었는데 타협안으로서 주권재민주의를 지지하는 주가 많았다.
1848년 1월 캘리포니에서 금이 발견됨으로써 1849년의 단 한해동안에 8만 명이 넘는 정착민들이 앞을 다투어 이곳에 모여들게 만든 금광열을 촉진시켰다. 이리하여 캘리포니아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는데 조직된 정부가 이곳에 수립되기 전에 연방의회가 이 새로운 지역의 (노예제도 유무의)성격을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미국민은 앞서 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두 번이나 타협안을 들고 나왔던 상원의원 헨리 클레이에게 또다시 기대를 걸었다. 그는 복잡하지만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은 계획을 가지고 地方사이의 위험한 다툼을 다시 한번 멈추게 했다.
(후에 연방의회에서 수정된)그의 타협안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관권적인 규정이 포함되어있다. 즉, 캘리포니아를 (노예제도가 금지된)자유토지 헌법을 가진 주로서 연방에 받아들인다. 잔여의 합병된 영토는 뉴멕시코와 유타의 2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노예제도에 대한 언급없이 준(準)주로 조직한다. 뉴멕시코의 일부에 대한 텍사스의 권리주장은 1,000만 달러를 지불하여 이를 충족시킨다. 도망한 노예를 붙잡아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 보다 더 효과적인 기관을 설치한다. 그리고 콜럼비아 특별구에서는 노예의 매매를 (노예제도가 아님) 폐지한다는 규정이었다. 미국역사에서 "1850년의 타협안"으로 알려진 이 조치들은 의회를 통과하였으며 이 나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3년 간, 이 타협조치는 표면적으로는 모든 의견차이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새로 제정된 도망노예법은 숱한 북부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는데 그들은 노예를 잡기 위한 어떠한 역할도 이를 거부하였다. 북부인들은 탈주자들을 도피하도록 도왔고, "지하철도"를 과거보다 더 효과적이고 더 대담하게 활용했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1850년대들, 나라의 지도자들이 국론을 분열시키는 노예제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거나 이 문제를 억제하기조차 못했던 실패의 10년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예를 들면 1852년 여류작가 해리에트 비처 스토우가 <엉클톰의 오두막집>(Uncle Tom's Cabin)을 펴냈는데, 이는 도망노예법의 제정에 화가 나서 쓴 소설이다. 스토우 여사가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오로지 단편적인 묘사에 그칠 것을 생각했으나. 저술이 진행되면서 그 범위가 넓어졌다. 이 소설이 출판되자마자 첫해에만 30만 부 이상이 팔렸고, 수요를 채우기 위해 인쇄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아갔다.
이 소설 <엉클 톰의 오두막집>은 감상적이고 판에 박힌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필치로 노예제도의 잔인성과 자유사회와 노예사회가 근본적으로 얼마나 조화될 수 없는 것인가를 묘사했다. 북부의 젊은 세대의 유권자들은 이 소설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소설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에 즉 부정에 대한 분노와 무자비하게 착취당하고 있는 무력한 개인들에 대한 연민을 호소하면서 노소를 막론한 많은 사람들 사이에 노예제도 반대 운동에 대한 열성적인 지지를 불러 일으켰다.
1854년에 이르러 준(準)주들에서는 오히려 노예문제에 대한 논란들이 재연되었고 논쟁은 더 치열해졌다. 지금 캔자스 주와 네브래스카 주를 구성하고 있는 지역에는 당시 급속도로 정착민들이 늘어나고 있었으며, 준(準)주정부의 수립, 궁극적으로는 주정부의 수립을 위한 압력이 증대하고 있었다.
1820년의 "미주리 타협안"의 조건에 따라, (연방에 아직 가입하지 않았던)준(準)주들 전성에서는 노예제도가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1850년 미주리 타협안을 놓고 노예제도 문제가 재론되었다. 미주리 주에서 지배적 세력을 가진 노예 소유자들을 캔자스가 자유토지 준(準)주로 되는 것을 반대했는데, 왜냐하면 캔자스가 그렇게 되는 경우 미주리주가 3개의 자유토지 주(일리노이, 아이오아 및 캔자스)들과 인접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미주리 주에도 역시 자유주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을 우려했던 것이다. 의회에서 한때 얼마동안은, 남부인들의 지지를 받은 미주리주 출신 의원들이 이 지역(캔자스)의 준(準)주 정부 수립 노력을 모두 봉쇄했다.
그 시점에서 이리노이주 출신의 고참 상원의원 스티븐 A. 더글러스는 모든 자유토지창도자들을 격분시킨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안"을 제출하여 폭풍을 불러 일으켰다. 더글러스 의원은 1850년의 타협 조치('미주리 타협안')가 유타와 뉴 멕시코로 하여금 노예제도 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하도록 하였으므로 이 "미주리 타협안"은 효과를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계획은 캔자스 준(準)주와 네브라스카 준(準)주를 설치하여 정착민들이 이들 지역에 노예를 데라고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고 자유주든 노예제든 간에 정착민 자신들이 선택한 형태로 연방에 가입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북부인들은 더글러스 의원이 1856년에 대통령이 되려고 남부에 아첨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 법안의 심의는 노기에 찬 토론 속에 진행되었다. 자유토지를 지지하는 신문들은 그 법안을 맹렬히 비난했고, 북부의 성직자들도 그 법안을 공격했다. 지금까지 남부에 우호적이었던 실업인들이 갑자기 그 태도를 180도 바꾸었다. 그런데도 1854년 5월 이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안"은 남부의 열성분자들이 축포를 발사하는 가운데 상원을 통과했다. 그 후 더글라스 의원이 자신의 정치행위를 보호하기 위해 시카고를 방문했을 때 항구에 정박했던 선박들은 조기를 달았고 교회는 1시간동안 조종을 울렸으며 1만 명의 군중이 야유는 소리는 그의 연설을 들을 수 없게 만들었다. 더글라스가 잘못 추진한 이 조치의 즉각적인 결과는 굉장하였다. 노예제도 확장 문제에 대해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했던 휘그당은 사라졌고 그 대신 새로운 강력한 정당인 공화당이 대두하였다. 공화당의 일차적 요구는 모든 준(準)주에서 노예제도를 배제하라는 것이었다. 1856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은 존 프레몬트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는데 그는 서너 차례에 걸쳐 극서부를 탐험 여행하여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비록 프레몬트는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공화당은 북부의 많은 지역을 휩쓸었다. 새먼 P. 체이스와 윌리엄 수워드 같은 자유토지 운동 지도자들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키가 크고 몸집이 호리호리한 일리노이주 출신 변호사 에이브러햄 링컨이 출현하였다.
남부의 노예 소유자들과 노예제도 반대자들의 가족이 다같이 캔자스로 이주해 들어간 겨로가 무장출동이 일어났고, 곧 이 지역은 유혈이 낭자한 캔자스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사건들이 이 나라를 동란으로 더욱 가까이 몰고 갔는데 특히 1957년에 대법원이 드레드 스카트에 관해 내린 유명한 판결이 그리하였다.
스카트는 미주리주의 한 노예였는데 그의 주인이 약 20년 전에 일이노이주와 위스컨신 준(準)주로 데리고 가서 그 곳에서 살게 했었다. 그곳은 북남부령에 의해 노예제도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스카트는 미주리주로 돌아갔는데 이곳에서의 생활이 불만스러워지자 자유의 땅에서 살았다는 것을 이유로 자유를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남부인들이 지배하고 있던 대법원은 스커트는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없고 그가 노예주(미주리주)의 주민이었기 때문에 자유주(일리노이주)의 법률은 그의 신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노예 소유자들에게는 그들의 재산을 연방의 영토 어느 곳에라도 데리고 다닐 권리가 있으며 의회는 노예제도의 팽창을 제한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의 이 같은 판결은 의회가 한 세대에 걸쳐 노예문제 해결을 위해 시도했던 일련의 방도를 송두리째 무효로 만들었다.
드레드 스카트사건에 대한 판결은 북부전역에 걸쳐 격심한 분개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때까지 대법원이 그처럼 호되게 비난받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남부의 민주당원들에게는 이 판결이 하나의 큰 승리를 의미했는데 이 판결이 새 영토 전역에 걸쳐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데에 대한 사법부의 승인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오랫동안 노예제도를 하나의 악으로 간주해왔다.1845년 일리노이주 페오리아에서 행한 연설에서 링컨은 모든 국가적 입법은 그 골격이 노예제도를 제한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를 철폐한다는 원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또한 지방민주권의 원칙은 그릇된 것인데 그 이유는 서부영토들에서의 노예제도는 단지 그 지방의 주민들만이 아니라 합중국 전체의 관심사가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연설은 링컨을 점점 커지는 서부 전역에서 널리 알려지게 만들었다.
1858년 링컨은 일리노이주의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스티븐 A. 더글라스와 맞섰다. 링컨은 그해 6월 17일에 행한 그의 선거 유세를 시작하는 첫 구절에서 앞으로 7년 동안의 미국역사의 기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분을 일으키고 있는 집안은 오래갈 수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노예와 반자유를 영원히 지탱해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연방이 해체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이 집안이 무너지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분열이 끝나게 되는 것을 기대한다."
1858년의 그 후 수개월동안 링컨과 더글라스는 7회에 걸친 일련의 토론을 벌였다. "작은거인"으로 알려진 상원의원 더글러스는 웅변가로서의 부러울 만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더글러스와 그의 진영이 정의한 바와 같은 주권재민주의에 도전한 링컨역시 더글러스에 못지 않는 웅변가였다. 결국 더글러스가 적은 표차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링컨은 전국적 인물로서의 그의 위치를 굳혔다.
지방간의 다툼은 더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1859년 10월 16일 밤 3년 전에 캔자스의 친(親)노예제도 정착민 5명을 붙잡아 살해했던 광신적인 노예제도 반대자 존 브라운은 일단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지금의 웨스트버지니아주의 하퍼즈페리에 있는 연방 무기고를 습격했다. 브라운의 목표는 노획한 무기를 노예들의 봉기를 이끌기 위해 사용하는 데에 있었다. 이틀동안의 전투 끝에 브라운과 살아남은 그의 추종자들은 로버트 E.리 대령이 이끄는 한 합중국 해병부대에 의해 사로잡혔다.
미국의 전국민들이 경악하였다. 많은 남부인들에게는 브라운의 기도는 그들이 두려워했던 최악의 사태를 확증해주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노예제도를 열럴히 반대하는 사람들은 브라운을 대의의 순교자라고 찬양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북부인들은 브라운의 행동을 법과 질서 그리고 사회발전을 증진시키는 민주주의적 방법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하면서 그의 공적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브라운은 음모, 반역 및 살인혐의로 재판을 받고 1859년 12월 2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신의 섭리를 위해 사용되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186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은 에이브러햄 링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당 지도자들이 노예제도가 더 이상 확산되게 할 수 없다고 선언함에 따라 당의 사기는 충천했다. 당은 또한 산업의 보호를 위해 관세를 부과할 것을 약속했고 서부의 개척을 돕는 정착민들에게 무상으로 자작농장을 만들어주는 법률을 제정할 것을 다짐했다. 민주당은 결속되어 있지 않았다. 남부인들은 당에서 이탈하여 켄터키 주 출신인 존 C. 브렉큰리지 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스티븐 A.더글러스는 민주당의 공천후보였다. 경계주들의 완고한 휘그잔당들은 합헌연합당을 결성하고 테네시주의 조 C.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링컨과 더글라스는 북부에서 그리고 브렉큰리지와 벨은 남부에서 경쟁했다. 링컨은 일반투표에서는 39%밖에는 득표하지 못했지만, 대통령 선거인 투표에서는 18개 자유주를 모두 석권하여 180표라는 명백한 대다수 표를 차지했다. 벨은 테네시주, 켄터키주, 그리고 버지니아주에서 승리했다. 브렉큰리지는 더글러스가 승리를 거둔 미주리주를 제외한 기타의 노예주들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더글러스는 일반투표에서 링컨에게만 뒤졌다.
링컨이 당선되는 경우 사우드캐롤라이나주가 연방에서 탈퇴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결론이었다. 이 주는 남부를 반(反)노예제도 세력에 대항하여 결속시킬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선거 결과가 일단 확실해지자, 특별히 소집된 사우드캐롤라이나주 대표자 회의는 "아메리카 합중국이라는 이름으로 사우드캐롤라이나주와 다른 주들 사이에 지금까지 존재해 온 연방은 이로써 해체된다"라고 선언했다. 1861년 2월 1일까지에는 최남부 지역의 6개 주 모두가 더 연방에서 탈퇴했고, 이들 7개 주는 2월 7일에 '아메리카 남부동맹자주'(Confederate State of America) 임시헌법을 채택했다. 남부의 북쪽 주들은 아직도 연방(아메리카 합중국)에 남아 있었다.
그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861년 3월 4일, 에이브러햄 링컨은 합중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주들의 탈퇴를 "법적으로 무효"로 간주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연방의 결속의 회복할 것을 호소하면서 취임 연설을 끝맺었다. 그러나 남부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마침내 4월12일 사우드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구에 있는 섬터요새에 주둔한 연방군을 향해 포문이 열렸다. 이 이전이나, 이 이후에 있었던 그 어떤 전쟁에서 죽은 미국인보다 더 많은 미국인이 죽은 전쟁이 시작되었다.
연방을 탈퇴한 7개 주에서는 주민들은 '아메리카 남부동맹자주'의 새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호소에 신속히 호응하였다. 이제 남부 양측은 지금까지 연방에 충성을 지켜왔던 노예주들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가를 긴장 속에서 지켜보았다. 섬터요새에 대한 포반에 호응하여 버지니아주는 4월 17일에 연방을 탈퇴하였고, 아칸소주, 테네시주, 그리고 노드캐롤라이나주가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버지니아주만큼 연방을 떠나기를 크게 주저한 州는 없었다. 버지니아주의 정치가들은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헌법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 지도적 역할을 했으며, 또 이 주는 5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던 것이다. 로버트 E. 리 대령은 버지니아주와 행동을 같이했는데, 그는 자신의 주에 대한 충성 때문에 연방군의 지휘를 거부했다. 확장된 남부동맹과 자유토지의 북부 사이에는 남부에 어느 정도 동정하면서도 여전히 연방에 충성하는 델라웨어주, 메릴랜드주, 켄터키주 및 미주리주 등의 경계주들이 있었다.
양측의 주민들은 조기에 승리하려는 큰 희망을 품고 전쟁에 돌입하였다. 물질적인 자원 면에서 북부는 결정적으로 우세하였다. 2,2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23개 주가 900만 명이 거주하는 1개 주와 대치하였다. 북부는 인구 면에서 남부보다 우세하였지만 산업면에서는 이보다 더 우세하였으며, 무기와 탄약, 의류 및 기타의 보급품을 제조하는 풍부한 시설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북부의 철도망은 연방의 군사적 전망을 밝게 하였다.
남부도 역시 몇몇 이점들을 갖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이점은 지리에 밝다는 사실이었는데, 남부는 자신의 영토 안에서 방어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남부는 또한 보다 강한 군사적 전통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전쟁 시초부터 경험 많은 군사 지도자들이 크게 활약했다.
수도 워싱턴에서 가까운 버지니아주의 불런에서 있었던 이 전쟁의 큰 전투는 (이 전투는 '제1차 머내서스 전투'라고도 알려져 있음) 사람들로 하여금 승리를 신속히 그리고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망상임을 깨닫도록 만들었다. 이 전투는 또한, 적어도 합중국의 동부에서는 남부가 혈전을 통해 거둔 승리가 결정적인 군사적 우세로 전환되지 못했던 그러한 승리의 패턴이 되었다. 전쟁 초기의 몇 년 동안은 남부가 전투에서 승리하는 일이 자주 있었지만, 전쟁에서는 승리하지 못했다.
연방군은 동부에서의 군사적 실패와는 대조적으로 해상과 서부에서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서서히 전략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전쟁 초기에 해군의 대부분은 연방의 장악 하에 있었으나, 흩어져 있었고 또 약했다. 기디온 웰즈 해군장관은 해군을 강화하기 위한 신속한 조치를 취하였다. 당시 링컨은 남부 해안에 대한 봉쇄를 선포하였다. 그 봉쇄의 효과는 처음에는 미미했지만 1863년에 이르러서는 남부 측의 유럽에 대한 목화 수송과, 남부가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탄약, 의류 및 의약품의 수입을 거의 완전하게 막았다.
그러는 동안, 총명한 해군 사령관 데이비드 파라가트 제독은 두 차례의 괄목할 만한 작전을 감행했다. 한 작전에서 그는 연방함대를 미시시피강 어귀까지 이끌고 가서 남부 최대의 도시인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즈시를 함락시켰다. 또 다른 작전에서 그는 앨라배마주 모빌만의 요새화된 어귀를 뚫고 들어가서 남부동맹의 장갑선 한 척을 노획하고 이 항구를 봉쇄하였다.
미시시피강 유역에서는 연방군은 거의 저항 없는 일련의 승리를 거두었다. 연방군은 테네시주의 길다란 남부동맹 전선을 돌파하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이리하여 테네시주의 서쪽을 거의 모두 점령할 수 있게 되었다. 연방군이 미시시피강의 중요한 항구인 맴피스를 점령하자, 그들은 남부동맹의 심장부 안으로 약 320킬로미터나 진격할 수 있었다. 끈질긴 성격의 율리시스 S. 그란트장군이 지휘하는 연방군 부대들은 테네시강을 굽어보는 벼랑 위의 사이로 요새에 대한 남부동맹 측의 돌연한 반격을 받고, 증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대항하여 끝내 이 반격을 물리쳤다. 사이로 전투에서 양측은 각각 1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는데, 이는 미국인들이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높은 사상자율이었다. 그러나 살육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버지니아주에서는 연방군은 패전을 거듭하였다. 연방군은 남부동맹의 수도인 리치먼드시(市)를 점령하려는 일련의 혈전에서 되풀이하여 격퇴 당했다. 남부동맹은 두 가지 큰 이점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워싱턴과 리치먼드 사이의 도로가 수많은 하천에 의해 끊기어 있는 지리를 이용한 강력한 방어 진지였고, 또 하나는 두 장군, 즉 로버트 E. 리 장군과 토마스 J. (스톤월) 잭슨 장군의 능력이었는데, 이들 두 사람의 능력은 초기의 연방군 지휘관들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1862년 연방군 사령관 조지 맥클렐란은 리치먼드시를 함락시키기 위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공격을 서서히 시도했다. 그러나 1862년 6월 25일부터 7월 1일까지 계속된 '7일 간의 전투'에서 연방군은 번번이 격퇴 당했으며, 쌍방은 다같이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제2차 불런 전투'( 즉 '제2차 머내서스 전투')에서 남부동맹군이 또 다른 승리를 거둔 후 리 장군은 포트맥강을 건너가서 메릴랜드주를 침공했다. 이때에도 맥클렐란 장군은 리 장군이 병력을 쪼갰고, 그 병력이 연방군 병력보다 크게 열세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시 주저하면서 응전하였다. 연방군과 남부동맹군은 1862년 9월 17일 메릴랜드주 샤프스버그 근처의 '앤티텀' 샛강에서 만나 하루 동안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양쪽에서 4,000명 이상이 전사하고 1만 8,000명이 부상했다. 하지만 병력의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맥클렐란 장군은 리 장군의 전선을 타격하여 반격을 가하지 못하고, 리 장군은 남부동맹군을 이끌고 포트맥강을 건너 고스란히 후퇴할 수 있었다. 이 결과, 링컨은 맥클렐란을 사령관직에서 파면했다.
비록 앤티텀 전투가 군사적 견지에서는 결정적인 전투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남부동맹을 승인하기 직전에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다같이 승인을 보류했고, 남부는 얻고자 필사적으로 애썼던 유럽의 외교적 승인고 원조를 받지 못하였다.
이 '앤티텀' 전투는 링컨에게 예비적 노예해방 선언(Preliminary Emancipation Proclamation)을 선포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계기를 마련해 주었는데, 이 노예해방선언은, 연방에 대항하는 모든 주의 노예들은 1863년 1월 1일을 기해 자유의 몸이라고 선포했다. 실제적인 견지에서는 이 노예해방선언은 즉각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는데, 경계주들의 노예들은 그대로 놓아둔 채 남부동맹 주들의 노예들만을 해방시켰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이 노예해방선언은 연방이 선포한 전쟁 목표가 연방을 보전하는 것 이외에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임을 뜻했다.
1863년 1월 1일에 선포된 최종적 노예해방 선언은 또한 흑인들을 연방군에 입대시키는 것을 승인했는데, 이 같은 조치는 프레드릭 더글러스와 같은 노예제도 폐지운동 지도자들이 남북사이의 무력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촉구해 왔던 조치였다. 사실 연방군은 탈주한 노예들을 숨겨주었었다. 그러나 최종적 노예해방선언이 선포된 이후부터는 연방군은 흑인들을 입대시켜, 흑인연대를 편성해서 훈련시켜, 버지니아주에서 미시시피주에 이르는 동서 각지의 전투에서 공훈을 세우게 했다. 연방군의 "합중국 유색인 부대"들에는 약 17만 8,000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복무했고, 연방 해군에는 약 2만 9,500명의 흑인이 복무했다.
노예해방선언으로 인한 정치적 이득에도 불구하고, 동부에서는 연방측의 군사적 전망이 여전히 흐렸다. 리 장군이 이끄는 북버지니아군은 포트맥강 지역의 연방군을 계속하여 타격했는데, 첫 번째는 1862년 12월 버지니아주 프레더릭스버그에서, 두 번째는 1863년 5월 찬셀로즈빌에서 연방군을 무찔렀다. 찬셀로즈빌에서의 승리는 리 장군이 거둔 가장 혁혁한 군사적 승리에 속했지만, 그가 가장 아끼던 부사령관 스턴월 잭슨 장군이 죽는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른 승리였는데, 잭슨은 자신의 부하 병사의 오인으로 사살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부동맹군이 거둔 승리 중에는 어느 하나 결정적인 것이 없었다. 연방정부도 단순히 새로 군대를 편성하여 공격을 다시 시도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남군의 리 장군은 북군이 찬셀로즈빌에서 참패당함으로써 공격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1863년 7월 북쪽으로 펜실베이니아주 안으로 진격하여, 주도 해리스버그에까지 거의 다다랐다. 이때 강력한 한 연방군부대가 게티스버그에서 리 장군의 진격을 요반했다. 남북 전쟁 최대의 전투인, 3일 간에 걸친 게티스버그의 혈전에서 남부동맹군은 연방군의 전선을 돌파하고자 용맹스러운 공격을 시도했다. 이 노력은 실패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리 장군 휘하의 병사들은 포트맥강으로 후퇴했다.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연방군은 3,000명 이상의, 그리고 남부동맹군은 거의 4,000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냈다. 부상자와 실종자는 쌍방 각각 2만 명이 넘었다. 1863년 11월 19일 링컨은 게키스버그에 새로운 국립묘지를 봉납하면서, 아마도 미국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을 하였다. 그는 짤막한 이 연설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었다.
".........이곳에 모인 우리들은 그 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할 것을...이 나라가 신의 가호 아래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키도록 할 것을 숭고하게 결의하며...인민의, 인민에 의한, 그리고 인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합시다."
한편 서부의 미시시피 강안에서는 그란트 장군의 연방군은 비크스버그에서 저지 당했는데, 남부동맹군은 해군이 공격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이 곳의 벼랑 위에 요새를 설치하여 대전(對戰)했다. 그러나 1863년 그는 서쪽으로 이동을 개시, 비크스버그 주위에 포진하여, 이 진지를 6주 동안 포위 공격했다. 7월 4일 그는 서부 최강의 남부동맹군 부대를 무찌르고 이곳을 함락시켰다. 미시시피강은 이제 완전히 연방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남부동맹군은 양분되었고, 텍사스주로부터 아칸소주로 보급물자를 가져오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비록 유혈이 가시지 않고 1년 반 동안 더 계속되었지만, 1863년 7월에 북부군이 비크스버그와 게티스버그에서 거둔 승리는 인 전쟁에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링컨은 그란트 장군을 동부전선으로 데려와서 연방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1864년 5월 그란트 장군은 버지니아주 안으로 깊숙이 진격하여 리 장군 지휘 하의 남부동맹군과 3일간에 걸친 "황야의 전투"를 벌였다. 쌍방의 피해는 컸지만 다른 연방군 지휘관들과 달리 그란트 장군은 후회하지 않았다. 후퇴는커녕, 그는 리 장군의 측면을 공격할 것을 시도하여 남부동맹군의 전선을 길게 뻗게 만들고, 측면에 포반과 보병 공격을 가했다. 거의 1년이나 지속된 동부전선에서의 전투의 특징이었던 피비린내 나는 참호전이 5일간이나 계속되는 동안, 이 연방군 총사령관은 스파트실베이니아에서 "온 여름이 걸릴지라도 끝까지 싸워 이 전선을 돌파하자"고 부하를 독려했다.
서부전선에서는 연방군은 1863년 가을 채터누거와 룩크아웃산에서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우어 테네시주를 장악함으로써 윌리엄 T. 셔먼 장군이 조지아주를 침공하는 길을 열었다. 셔먼의 부대는 서너 개의 작은 남부동맹군 부대들의 허를 찌르고 주도 아틀란타를 점령한 다음에는, 대서양 해안을 향해 진군하면서 도중에 있는 철도, 공장, 창고 및 기타 시설들을 체계적으로 파괴했다. 정상적인 보급선이 끊어진 그의 부하들은 식량을 찾아 시골 민가를 약탈했다. 대서양 해안에 도달한 셔먼의 부대는 북진하여 1865년 2월에는 남북전쟁의 첫 포성을 울렸던 사우드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을 점령했다. 셔먼은 다른 연방군 지휘관들 그 누구보다도 남부의 의사와 사기를 꺾는 일이 남부의 군대를 패배시키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편 북군의 그란트 장군은, 남부의 리 장군이 남쪽으로 후퇴하기 위해 1865년 5월 버지니아주의 피터즈버그와 남부동맹의 수도 리치먼드를 다같이 포기하기에 앞서, 9개월 동안이나 피터즈버그를 포위하여 공격했다. 리 장군의 퇴각은 너무 늦었었다. 리 장군의 남군은 엄청난 병력의 북군에 포위 당한 끝에 리 장군은 1865년 4월 9일 버지니아주의 애토매톡스의 군청에서 그란트 장군에게 항복했다. 그 후 수개월 동안 다른 곳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으나 남북전쟁은 끝났다.
애포매톡스에서의 항복 조건은 관대하였다. 그란트 장군은 리 장군의 항복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부하 장병들의 요란한 시위를 진정시키면서 "반란군들이 이제는 다시 우리나라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남부의 독립을 위한 전쟁은 "실패한 운동"이 되었고, 그 운동의 영웅 로버트 E. 리 장군은 그의 찬란한 지도력과 패배에서의 위대한 태도로 해서 널리 존경받았다.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북부를 위해서 이 전쟁은 에이브러햄 링컨이라는 더 위대한 영웅을 낳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무력과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정과 관용에 의해 연방을 다시 결속시키기를 열망했던 사람이었다. 링컨은 1864년의 대통령 선건에서 민주당 후보 조지 맥클렐란을 물리치고 재선되었다. 맥클렐란은 링컨이 애티텀 전투 후에 연방군 사령관직에서 파면되었던 장군이었다.
링컨의 두 번째 대통령 취임 연설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었다.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두에게 자비심을 가지고, 올바른 것을 보도록 신이 우리에게 주신 그 굳건함을 가지고 정도(正道)를 따르면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완수하기 위해, 이 나라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싸움터에 나간 자와 전쟁 미망인과 전쟁 고아를 돌보기 위해..우리들 자신과 모든 국가들 사이의 의롭고 영원한 평화를 성취하고 간직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기 위해 우리 다같이 힘씁시다."
이로부터 3주가 지난 후, 즉 리 장군이 항복하고 이틀이 지난 후 링컨은 일반 대중에게 마지막 연설을 했는데, 그는 이 연설에서 아량 있는 (남부) 재편입 계획을 밝혔다.
4월14일, 링컨은 의 마지막 것이 되었던 각료회의를 열었다. 그 밤, 링컨--부인과, 그리고 그의 손님인 젊은 부부와 함께--포드즈 극장에 연극을 관람하려고 갔다. 대통령 특별관람석에 앉아 있을 때, 그는 남부의 패배에 한을 품은 버지니아주의 배우 존 윌크스 부드에게 암살 했다. 부드는 며칠 후 버지니아주의 한 농촌 헛간에 숨어 있다가 총격전 끝에 살해당했다. 그의 공범들은 체포되어 후에 처형되었다.
링컨은 4월 15일 포드즈 극장 맞은편에 있는 한 주택의 아래층 침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인 제임스 럿셀 로웰은 다음과 같이 썼다.
만나 본 적도 없는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눈물을 흘렸던 일은 일찍이 없었다. 장례식 날 낯선 사람들이 만났을 때 서로 말없이 주고받은 애도의 표정만큼 흉금을 울리는 추도사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들 인간 가족은 한 혈족을 잃은 것이다.
이제는 링컨 정부의 부통령으로, 북부에 끝까지 충성을 다했던 남부인인 앤드류 존슨의 지도 아래 들어간 북부가 당면한 최초의 큰 과업은 앞서 연방을 탈퇴했던 주들의 지위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링컨의 견해는, 남부 각 주의 주민들은 법적으로 탈퇴한 일은 결코 없었고, 다만 일부 불충성한 시민들에 의해 연방정부의 권위를 무시하도록 오도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북전쟁은 개인들이 저지른 행위이었기 때문에, 연방 정부는 남부의 주들이 아니라 이러한 개인들을 다루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1863년에 링컨은, 만약 어떤 남부주에서 1860년에 등록된 유권자의 10%가 미국헌법에 충성하는 정부를 수립하고, 연방의회가 제정한 법률과 대통령이 선포한 명령에 대한 순종을 확인한다면, 그렇게 수립된 정부를 그 주의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할 것임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연방의회는 이 계획을 거부했고, 또 연방 의회와 협의 없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대통령의 권한에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정쟁이 완전히 끝나기 전인데도 버지니아주, 테네시주, 아칸소주 및 루이지애나주에서 이미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었다. 연방 의회의 일부 의원들은 연방에서 탈퇴한 모든 주들을 엄하게 처벌하라고 주장했다.
연방의회는 주요 관심사의 하나를, 즉 해방된 노예들의 처지문제를 다루기 위해, 1865년 3월에 '자유민국'(Freemen's Bureau)을 설치하여, 이 기관으로 하여금 아프리카系 미국인 시민들의 보호자로서 행동하게 하고, 또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지도하게 하였다. 그 해 12월 연방의회는 노예제도의 폐지를 규정한 미국헌법 수정조항 제13조를 비준했다.
1865년 여름 동안 존슨 대통령은 약간의 수정을 가한 링컨의 (남부주)재편입 계획의 수행을 추진하였다. 그는 대통령 포고령을 통해, 이전의 남부동맹의 주마다 지사를 임명하고,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를 통해, 많은 남부 시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정치적 권리를 자유롭게 되찾도록 하였다.
그러는 동안, 남부동맹에 속했던 주마다에서 연방 탈퇴령을 폐기하고 전쟁 부채의 상환을 거부하며 새 헌법을 기초하기 위한 대표자 회의가 개최되었다. 궁극적으로는 남부 주마다에서 그 고장 출신의 연방주의자가 지사가 되어, 연방정부에 충성하는 유권자들의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존슨은 이들 각 대표자 회의에 대해 연방 탈퇴를 무효로 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하며, 남부동맹을 원조하기 위해 짊어진 모든 부채의 상환을 거부하는 조치를 취하고, (시민의 권리에 관한) 미국헌법 수정조항 제14조를 비준하도록 촉구했다. 1865년 말까지에는 이러한 절차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완료되었다.
링컨과 존슨은 다같이 연방의회가 "상원과 하원 각 원은 그 자체의 구성원의 자격을 결정하는 심판자가 된다"라는 헌법 규정에 따라 남부출신 의원들이 연방 상원이나 하원의 의석을 차지하는 것을 거부할 권리를 행사할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대디우스 스티븐스의 영도 하에 남부에 대한 응징을 추진했던 ("과격파 공화당원"이라고 불렸던) 의원들이, 선출된 남부출신 의원들의 상원 의석을 거부함으로써 이 같은 예견은 현실로 나타났다. 그 후 수개월 안에, 연방의회에서는 링컨이 시작했고 존슨이 계속 추진했던 계획과는 매우 상이한, 남부의 재편입을 위한 계획수립 작업이 진행되었다.
흑인들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믿는 연방의회 의원들에 대한 폭넓은 일반 대중의 지지가 점차적으로 높아갔다. 1866년 7월에 와서는, 연방의회는 민권법을 통과시켰고, 또 새로운 '자유민국'을 설치하였는데, 이 같은 조치는 다같이 남부의 주립법기관에 의한 인종차별을 방지하도록 구상되었었다. 이 조치에 이어 연방의회는 헌법 수정조항 제14조를 통과시켰는데, 이 조문은 "미국에서 출생하였거나 미국에 귀화하여 미국의 관할 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미합중국과 그들의 거주하는 주의 시민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노예에 대해서는 시민으로서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던, 대법원의 드래드 스카트 건 판결은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테네시주를 제외하고는 모든 남부 각 주의 입법기관들은 이 헌법 수정 조항의 비준을 거부했고, 어떤 주의회에서는 전원 일치로 이 수정 조항에 반대 투표를 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전쟁이 끝난 후 남부 주의회들은 해방된 노예들을 다시 노예의 신분으로 묶어 두고자 흑인들에 관한 법령을 제정했다. 이들 법률은 주마다 상이했지만, 일부 규정들은 공통적이었다. 즉, 흑인들은 해마다 노동 계약을 체결하여야 하며 위반할 때는 처벌을 받고, 흑인들이 부양하는 자녀들은 의무적으로 도제생활을 하고 주인으로부터 매질을 당할 수 있으며, 흑인 방랑자에 대해서는 벌금을 물 수 없을 때는 이들을 (백인을 위한) 사적 용역에 붙이도록 팔아 넘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자 북부 일부 집단들은 남부의 흑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개입하라고 주장했다. 1867년 3월의 재편입영을 통해 연방의회는 남부 각 주에 수립되어 있었던 정부를 무시하고, 남부 전역을 5개 지구로 분할하여 군정 하에 두었다. 그러나 공민권을 존중하는 정부를 확립하고, (연방 정부에) 충성을 선서하고, 헌법 수정 조항 제14조를 비준하며, 흑인 참정권을 채택한 주들에 대해서는 항구적인 군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1868년에 헌법 수정 조항 제14조가 비준되었다. 다음해에 연방의회를 통과했고, 1870년에 주 의회들에 의해 비준된 수정 조항 제15조는 "미합중국 시민의 투표권은 인종이나 피부색, 또는 과거에 노예의 신분이었다는 이유로 미합중국이나 그 어떤 주에 의해서도 거부되거나 축소되지 않는다"라고 규정했다.
존슨 대통령이 새로이 해방된 흑인들을 보호하고 아울러 구(舊)남부동맹 지도자들로부터 공직에 종사하는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그들을 응징하려던 법률에 거부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비록 이같은 대통령의 법안 거부가 의회에 의해 번복되었지만) 연방의회는 "과격파 공화당원"들은 격노했다. 존슨에 대한 의회의 반감은 너무나 컸으며,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그를 대통령직에서 몰아내려는 대통령 탄핵 절차가 취해졌다.
존슨의 주요한 죄목은 (남부를) 응징하려는 의회 정책에 대한 반대와, 또 그 같은 정책을 비판했을 때의 과격한 용어의 사용이었다. 그의 정부들이 그에게 가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법적 비난은 (대통령이 상원이 전에 임명을 인준한 공직자를 해임하고자 할 때에는 상원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한) 공무원 임기법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그가 의회 정책을 철저히 지지했던 국방장관을 (상원의 승인 없이) 내각에서 해임했다는 것이었다. 탄핵 재판이 상원에서 열리자 존슨이 각원을 해임한 것은 기술적으로 그의 권한에 합당한 조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더 중요하게는, 만약 의회가 그를 의회의 대다수 의원의 의견에 찬동하지 않았다고 해서 대통령직에서 해임한다면 위험한 전례를 남길 것이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 탄핵 시도는 근소한 표차로 실패했고, 존슨은 임기가 만료될 때가지 계속 대통령으로서 집무했다.
연방의회는 군정주 재편입법(Military Reconstruction Act)에 의거 1869년까지는 아칸소주, 노드캐롤라이나주, 사우드캐롤라이나주, 조지아주, 앨라배마주, 그리고 플로리다주를 다시 연방으로 받아들였다. 연방에 재편입된 이들 7개 주에서 지사와 주의회의 상·하원의원의 대부분이, 남북 전쟁 후 남부로 가서 흔히 새로 해방된 흑인들과 제휴하여 정치적 행운을 노렸던 이른바 "뜨내기 정상배"인 북부인들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루이지애나주와 사우드캐롤라이나주의 입법부에서는 실제로 흑인이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남부의 3개 주, 미시시피주, 텍사스주, 버지니아주도 마침내 연방의회가 제시한 연방 재편입 조건을 받아들여, 1870년에 연방에 다시 편입되었다.
많은 남부인들은 그들의 정치적 및 사회적 지배력이 위협받게 되자 흑인들이 평등권을 얻는 것을 가로막기 위해 불법적 수단을 사용하게 되었다. 흑인들에 대한 폭력 행위가 점점 더 빈번히 일어났고 무질서가 더해진 결과 1870년에는 해방된 흑인들의 공민권을 박탈하고자 시도한 사람들을 엄히 처벌하는 시행령이 의회를 통과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부의 문제는 가혹한 법률과 구 남부동맹측 사람들에 대한 계속적인 깊은 증오감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 1872년 연방의회는 포괄적인 사면령을 통과시켜, 약 500명의 남부동맹 동조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완전한 정치적 권리를 되찾게 하였다.
남부의 주들은 점차적으로 공직에 민주당원들을 선출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이른바 "뜨내기 정상배" 남부인들은 공직에서 추방되었으며, 흑인들이 투표하거나 공직 취임을 기도하지 못하도록 협박하였다. 1876년에 와서는 남부에서 공화당원들이 계속해서 집권하고 있었던 州는 3개에 불과했다. 선거 결과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그 해의 대통령 선거를 (공화당 후보) 루더포드 B. 헤이즈에게 유리하게 해결했던 흥정의 일환으로, 공화당은 급진적인 (남부주) 재편입 방식을 그만둘 것을 약속했다. 이로써 남부의 대부분의 지역은 민주당 세력 아래 들어갔다. 1877년, 헤이즈 대통령은 남부에 주둔했던 나머지 정부군을 철수시킴으로써, (남부에서) 흑인들의 공민권을 시행하는 연방의 책임을 암암리에 포기했다.
그러나 남부는 아직도 전쟁에 의해 황폐된 지역일 뿐만 아니라, 실정으로 인한 부채를 걸머지고 십 여 년에 걸친 인종 싸움으로 사기가 떨어진 지역이었다. 불행하게도 국가적인 인종 정책은 극에서 극으로 격변했다. 이전에는 남부 지도자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지지했던 정책이 이제는 흑인들에 대한 새롭고 굴욕적인 종류의 차별을 관용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에 남부주들에서는 공립학교 교육에서 흑백을 분리했고, 공원과 식당 그리고 호텔과 같은 많은 공공 시설에 대한 흑인의 접근을 금지 내지는 제한했으며, 인두세를 부과하거나 글을 읽고 쓰는 능력에 대한 임의적인 시험을 실시하여 대부분의 흑인들의 투표권 행사를 가로막는 법률들이 대량으로 제정되었다.
남북전쟁에 깃들은 도덕적 명료성과 이 전쟁이 펼쳐 보인 숭고한 극적 국면들에도 불구하고, 사학자들은 "재통합"의 시기를 정치적인 갈등과 부채, 그리고 퇴보의 음울한 시기로 가혹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다. 노예들에게는 자유가 부여되었으나 평등이 부여된 것은 아니었다. 북부는 해방된 노예들의 경제적 필요성을 다루는 데에 완전히 실패했다. '자유민국'과 같은 노력도, 정치적 및 경제적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제도를, 또는 단순히 폭력과 협박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제도를 갈망하는 옛 노예들의 필요성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연방군의 장교들과 자유민국의 관리들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인 경우가 흔히 있었다. 흑인들은 남부 백인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 같은 북부백인들에게 의존했는데, 남부 백인들은 '쿠 클룩스 클랜(Ku Klux Klan)'과 같은 조직을 결성하여 뭉쳤고, 흑인들은 협박했으며, 흑인의 권리 행사를 가로막았다. 자기 자신의 경제적 자원이 없는 많은 남부 흑인들은 그들의 전주인이 소유하는 땅의 소작농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고, 20세기에 접어들어서까지도 계속된 빈곤의 악순환에 빠졌다.
"재통합" 시기의 연방정부는 전쟁으로 황폐한 남부주들을 재건함에 있어, 그리고 公共봉사 사업을 확대함에 있어, 특히 흑인과 백인을 위해 세금으로 지원되는 무료 공립학교 교육제도를 수립함에 있어 진정한 업적을 이룩했다. 하지만 반항적인 남부인들은 부패(이 시기에는 부패가 유독 남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의 사례를 포착하여 이를 급진적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이용했다. "재통합"의 실패는 평등과 자유를 얻기 위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투쟁이, 흑인 문제가 남부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문제가 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펼쳐지지 못했음을 뜻했다.
화평하려는 민주당원, 동정적인 북부인, 그리고 징집반대 폭동
에이브러햄 링컨은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기간 전반을 통해 그의 정치 노선과 전시정책에 대한 심각한 반대를 겪었다. 남북전쟁은 북부에서조차도 심한 분열을 일으켰고 수많은 인명과 자원을 소모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대는 없을 수가 없었다.
링컨에 대한 반대의 강도는 대체적으로 전장에서 울리는 북부(연방군)의 전과에 비례하여 오르내리곤 했다. 하지만 전쟁 노력에 대한, 나아가서는 링컨에 대한 불만의 첫 표시는 민주당이 아니라 의회로부터 나왔는데, 의회는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1861년 12월 전쟁수행과정조사 합동위원회"를 설치했다. 급진적인 공화당 의원들이 지배했던 이 합동위원회는 링컨 행정부에 대해 보다 공격적인 교전을 벌일 것과 아울러 노예해방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을 촉구했다
"주권재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에서 있음직도 한 일이지만, 일부 민주당원들은 연방을 (남북 분열 이전의 상태로) 되찾기 위한 전면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생각되는 일단의 민주당원들은 "Peace Democrats"(남부와 화평하려는 민주당원들)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 중 한 걸음 더 나아간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Copperheads"(남부에 동정적인 사람들)라고 불렀다.
"전쟁파"에 속하든 "화평파"에 속하든 간에, 노예해방이 북부인들의 피를 흘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민주당원들은 거의 없었다. 사실 노예해방 반대가 오랫동안 민주당의 정책이 되어 왔다. 예들 들어, 1862년에는 의회의 거의 모든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워싱턴) 콜롬비아 특별구에 있는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과, 모든 준(準)주에서 노예제도를 금지하는 데에 반대표를 던졌던 것이다.
노예 해방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가난한 근로계층, 특히 아일랜드계와 독일계의 가톨릭 교도 이민들 사이에서 높았는데, 그들은 새로 해방된 흑인들이 북부로 대량 이주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 같은 기운에 자극 받아 1862년에 북부의 몇몇 도시에서 인종 폭동이 일어났다.
링컨은 1863년 1월 노예해방선언을 선포함으로써, 그의 전쟁 목표에 노예제도 폐지를 분명하게 추가했다. 그러나 이 선언은 북부에서 두루 받아들여졌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인디애나주와 일리노이주의 주의회는 다같이 남부동맹과의 화평과, "사악하고 비인도적이며, 신성하지 못한" 그 선언의 철회를 요구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전쟁 수행에서 북부가 겪는 어려움은 1862년 링컨으로 하여금 (구속적부심사를 위해 피구속자를 법정에 출두시키는) 출두영장제도를 중단시키고, 모병을 방해하거나 반군을 지원 또는 위안하는 사람들에게 계엄령을 적용하게 만들었다. 비록 위기에 처한 시기에는 헌법상 정당화된다 할지라도, 민사에 관한 법률들에 대한 이 같은 침해는 민주당에 링컨을 비판하는 기회를 주었다.
북부는 병력의 필요성 때문에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외무적인 징병제도를 실시하였다. 입대를 "장려"하기 위해 1863년 입법 조치된 이 징병제도는 많은 사람들을 더욱 정부로부터 멀이지게 했다. 징병제도에 대한 반대는 펜실베니아주, 오하이오주, 인디애나주, 위스콘신주의 "Copperheads" 사이에서 특히 강렬했는데, 이들 지방에 대해서는 법대로 징병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연방군이 충돌해야만 했다.
징집당한 사람이 당시의 비숙련 노동자 1년 분의 수입과 맞먹는 액수인 300달러만 내면 병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만 하겠다. 이같은 일은 남부동맹에서도 강하게 받아 왔던, 이 전쟁이 "부자의 전쟁이며 빈자의 전투"라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더 깊게 심어주었다.
징병제도에 대한 가장 대규모의 저항은 1863년 여름 뉴욕市에서 일어났다. 민주당의 본거지인 뉴욕시에서는 그 해에 서너 명의 징병관이 이미 살해당했다. 7월에, 파업중인 아일랜드계 이민 항만노동자들을 대처하기 위해 경찰의 호위 아래 일단의 흑인들을 뉴욕시로 데려왔다. 동시에 인기없던 징병을 위한 제비뽑기가 행해졌다. 이 같은 두 가지 일이 겹친 결과 일어난 폭동은 4일간이나 계속되어, 인근의 흑인 거주지역, 징병서, 그리고 (기독교) 개신교 교회들이 많이 파괴되었고, 적어도 10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이 폭동은 게티스버그로부터 수개의 연방군 연대가 출동해서야 비로소 진압되어 질서를 되찾게 되었다.
남북 전쟁에 관한 가장 유명한 민사사건이 역시 그 해에 일어났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오하이오주 주지사 자리에 출마한, 포부가 큰 민주당측 후보 클레멘트 배랜디검이었다. 분명히 입후보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한 의도에서, 그는 그 지방의 군대가 내린 "반역 활동" 금지 명령에 공공연하게 항거했고, 링컨의 정책을 공격했으며,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을 촉구하면서 이 전쟁을 "흑인들의 자유를 위한, 그리고 백인들의 노예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이름지었다. 그 후 연방군 병사들이 그의 가택을 수색, 그를 체포했다.
즉각적으로 민주당원들과 일부 공화당원들마저도 배랜디검 체포의 합법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링컨은 배랜디검을 남군 전선 후방으로 추방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배랜디검은 거기에 있으면서 주지사 후보 지명을 받았었다. 그는 캐나다로 빠져나가 그곳에서 떠들썩하게 선거운동을 벌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연방군이 1864년 비크스버그와 게티스버그에서 거둔 승리에도 불구하고, 남부와의 화평을 주장하는 민주당원들은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계속해서 국가의 불행을 국민에게 호소하고 민감한 인종 감정을 이용했다. 북부의 분위기가 이렇게 되자, 링컨은 1864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해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조지 맥클렐란 장군이었는데, 그는 2년 전에 렁컨에 의해 포트맥 지구 사령관직에서 해임 당한 사람이었다. 맥클렐란의 부통령 후보는 배랜디검과 친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민주당원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멜클렐란은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민주당의 목표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였다. 링컨은 마침내 전쟁의 승리가 목전에 다가온 가운데 뉴저지주와 델라웨어주를 제외한 북부의 모든 주를 석권하고 이 선거에서 맥클렐란을 쉽게 패배시켰다.
미국 지도 펼쳐 보고 미국 여행 하자.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지도 검색 블로그)
| "서부로 가라, 젊은이여, 그리고 이 나라와 더불어 성장하라." -- 존 술레, 1851. |
1812년의 영미전쟁은 어떤 의미에서는 제2의 독립전쟁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이 끝난 후, 젊은 이 공화국이 독립전쟁 이래 당면했던 심각한 난관이 대부분 사라졌다. 헌법 아래 국가적 단결이 이룩됨으로써 자유와 질서의 균형이 잡혔다. 국가의 채무도 얼마 남지 않았고, 대륙이 개척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평화와 번영, 그리고 사회 발전의 전망이 나라 앞에 열렸다.
교역은 국가적 단결을 견고히 다지고 있었다. 전쟁 중에 겪었던 궁핍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국의 제조업체들이 외국과의 경쟁에서 견디어낼 수 있을 때까지 이들을 보호하는 중요성을 깨닫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독립이 정치적 독립만큼 불가결하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당시의 의회 지도자 헨리 클레이 (켄터키州 출신)과 존 C. 캘하운 (사우드캐롤라이나州 출신)은 경제적 자립을 촉진하기 위해 "보호무역주의"정책 즉, 미국산업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수입품에 제한을 가하는 정책의 시행을 촉구했다.
이때는 관세율을 높이는 데에 적기였다. 버몬트州와 오하이오州의 목양업자들은 영국에서 들여오는 양모로부터 보호를 받기를 원했다. 켄터키州에서는 이 지방의 대마로 면화포장용 마대를 제조하는 새로운 산업이 스코틀랜드의 포장제조업 때문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미 번창하는 제철공업의 중심지가 된 펜실베니아州 피츠버그는 영국과 스웨덴의 철공급자들에게 도전하고자 갈망하고 있었다. 1816년에 책정된 관세율은 미국의 제조업자들을 실질적으로 보호하기에 충분할 만큼 높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부 주민들은 그들 자신을 동부의 도시 및 항구들과 연결시키고 변경 지대의 땅에 정착을 위해 들어갈 수 있도록 전국적인 도로망과 운하망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뉴잉글랜드지방과 남부의 반대 때문에, 국토 개량사업에 연방정부가 역할을 맡도록 하는 요구를 관철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도로와 운하의 건설은 1916년에 연방 선도로법이 제정될 때까지 주정부들의 소관 사항으로 남아 있었다.
이 무렵 연방정부의 지위는 대법원이 내린 몇몇 판결로 크게 강화되었다. 확고한 신념을 가진 연방주의자였던 버지니아州 출신의 존 마샬은 1801년 대법원장에 임명되어 1835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 마샬이 대법원장이 될 때까지는 약체였던 대법원이 의회나 대통령과 맞먹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강력한 사법부로 변모했다. 역사적인 결정을 계속해서 내리면서 마샬은 헌법의 주권을 받든다는 한 가지 기본 원칙에서 결코 이탈하는 일이 없었다.
마샬은 자신의 판결로 헌법의 뜻과 적용을 확정해 온 많은 대법관들 중에서 으뜸이었다. 그가 대법원장으로서의 오랜 봉사를 끝내는 동안, 대법원은 헌법상의 문제와 관계되는 근 50건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었다. 마샬의 가장 유명한 판결 이유 중의 하나가 '마버리 대 매디슨 사건'(1830)에 관한 것인데, 그는 이 사건에서 연방의회나 주의회가 제장한 어떤 법률이라도 이를 심사할 수 있는 대법원의 권한을 명확히 확립해 놓았다. 또 마샬은 오래 전부터 논쟁되어 온 헌법에 의해 부여된 정부의 默示的 권한이라는 문제를 다룬 '맬컬로크 대 메릴랜드 사건'에서 헌법은 정부에게 명시된 권한 뿐만 아니라 묵시적 권한도 부여한다는 해밀턴의 이론을 대담하게 옹호했다.
이때까지 별로 사회의 주의를 끌지 못했던 노예제도가 국가적 문제로서 매우 큰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공화국 초기에 북부의 州들이 노예들을 즉각적으로 또는 점차적으로 해방시킬 준비를 하고 잇을 때, 여러 지도자들은 앞으로 노예제도가 없어지리라고 생각했다. 1786년 조지 워싱턴은 "노예제도를 서서히, 확실하게, 그리고 눈에 뛰지 않게 폐지시킬 수 있는" 어떤 계획이 채택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썼다. 세 명 모두 버지니아주 출신인 재퍼슨, 매디슨 및 먼로를 비롯한 남부의 다른 지도적 정치가들도 이와 비슷한 말들을 했다. 그 후 노예 무역이 폐지된 1808년에 와서는 노예제도가 머지않아 없어지리라고 생각한 남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 다음 세대 동안에 새로운 경제적 요인들이 노예제도로 하여금 1790년 이전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낳게 만들자 남부는 노예제도를 지지하여 굳게 뭉쳤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제적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품종의 면화가 들어오고, 또 엘리 휘트니라는 사람이 1793년에 면화씨를 빼내는 조면기를 발명한 데에 자극받아 남부에서 면화재배가 크게 활기를 띠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방직업을 대규모로 할 수 있게 만든 산업혁명으로 원면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또 1812년 이후 서부의 광활한 땅이 개척할 수 있게 되자 면화를 재배할 수 있는 땅이 크게 확대되었다. 면화문화는 동해안 지대의 州들로부터 급속히 남부의 여러 州를 거쳐, 미시시피강 하류 지역과 마침내는 텍사스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다.
또 다른 노동집약적 작물인 사탕수수의 재배도 역시 남부에서 노예제도가 확대되도록 만들었다. 루이지애나州 동남부의 기름지고 기온이 높은 땅은 이익이 많이 나는 사탕수수 재배에 이상적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1830년에 이르러서는 이 州가 전국의 설탕 공급량의 약 半을 공급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연초 재배자들도 노예를 데리고 서부로 이동해 나갔다.
북부의 자유사회와 남부의 노예사회가 서부로 확장해 나감에 따라, 서부의 영토들에 설치되고 있던 새로운 州들 사이에 대충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편리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일리노이주가 연방에 편입됨에 따라 노예제도를 허용하는 州는 10개, 이를 금지하는 州는 11개가 되었으나, 앨라배마州가 노예제도를 허용하는 州로서 연방에 편입됨으로써 동수로 균형이 회복되었다. 북부에서는 인구가 보다 빨리 늘어나고 있었고, 이로써 북부주들은 (연방) 하원에서 명백한 다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상원에서는 북부와 남부 사이에 의석수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1819년에 1만 명의 노예가 있는 미주리州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하지 않는 한 이의 연방 가입에 반대한다고 나서자, 항의의 폭풍이 전국을 휩쓸었다. 의회도 얼마 동안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헨리 클레이는 이른바 "미주리 절충안"을 마련했는데, 이 안에 따라 미주리 州는 노예주로서, 동시에 메인州는 자유주로서 연방에 편입되었다. 의회는 또한 미주리州 남부 경계선 이북의 '루이지애나 구입에서 생긴 영토에서의 노예제도를 금지했다. 당시 이같은 규정은 남부주들에게는 그들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는데, 이 "대아메리카사막"에는 사람들이 도저히 정착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임시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토마스 제퍼슨은 어떤 친구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한밤중의 화재경보 종소리 같은 이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는 나를 잠에서 깨워 두렵게 만들었다. 나는 이 같은 상황을 연방이 붕괴하는 불길한 전조라고 간주한다"라고 썼다.
19세기 초엽 20여년 동안에 중남미주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영국식민지들이 자유를 획득했을 때부터 이 지역 사람들 사이에는 자유의 사상이 고취되었다. 나폴레옹의 스페인 정복(1808)은 이 지역사람들에게 궐기하여 반란을 일으키라는 신호가 되었다. 1822년까지에는 시몬 볼리바르, 프란치스코 미란다, 호세 드 산 마르틴, 및 미구엘 히달고 등의 유능한 지도로, 남쪽으로는 아르헨티나에서 칠레에 이르는, 또 북쪽으로는 멕시코와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중남미주에서 스페인이 장악했던 모든 지역이 독립을 쟁취했다.
미국국민들은 자기들이 유럽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에 겪었던 경험의 되풀이로 생각되는 이 사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중남미주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자활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념을 확인해주었다. 1822년 먼로 대통령은 국민들의 강한 압력 아래 포르투갈의 전식민지인 브라질을 포함하는, 중남미주의 신생국들을 승인하는 권한을 부여받았고, 곧 이들과 사절을 교환하였다. 이같은 승인 조치는 유럽과의 옛 관계를 완전히 단절한, 진정한 독립국가로서의 이들 신생국의 지위를 확인해 주는 고치였다. 바로 이때에 러시아,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가 혁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른바 신성동맹이라는 연합을 조직했다. 신성동맹은-프랑스도 때때로 이 동맹에 합세했는데-대중운동이 군주의 왕좌를 위협하는 국가에 개입함으로써 혁명이 자기들 나라의 영역에까지 번지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의 자결권원칙에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신성동맹이 자신의 활동을 "구세계"에 국한시키는 한, 이 동맹은 미국에서 아무런 불안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신성동맹이 전식민지를 스페인이 되찾도록 할 의향을 선언하자, 믹국민은 매우 우려하게 되었다. 영국으로서는 스페인이 제국을 되찾게 되는 것을 막고자 결심했는데, 중남미 국가들과의 교역이 영국의 상업적 이해관계에는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런던정부는 영미 두 나라가 이 동맹의 기도를 막겠다는 보장을 중남미 국가들에게 해줄 것을 미국에 촉구했다. 그러나 국무장관 존 퀸시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행동하도록 먼로 대통령을 설득했다. "미국이 영국의 전함 뒤를 따라가는 소정구실을 하는 것보다, 러시아와 프랑스에 대해 자신의 원칙을 명백히 천명하는 것이 더 솔직하고 당당한 처사"라고 그는 말했다. 1823년 12월 먼로 대통령은 영국해군이 신성동맹과 프랑스로부터 중남미 국가들을 방어하리라는 것을 알면서, 의회에 국례교서를 보내는 기회에 이 교서를 통해 '먼로 독트린'-미대륙 국가들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지배의 그 어떤 연장도 이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정책-으로 알려지게 된 다음과 같은 미국의 입장을 선언했다.
"아메리카대륙은 앞으로는 유럽의 어느 강대국도 이를 미래의 식민지화 대상으로 간주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의 (정치적) 제도를 이 서반구의 그 어떤 부분에 대해서라도 확장하려는 그들의 그 어떤 시도도 이를 우리의 평화와 안전에 대해 위험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유럽 국가의 식민지나 속국에 대해서는 우리는 지금까지 간섭하지 않았으며 또 앞으로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을 선언했고 이를 유지한, 그리고 그들의 독립을 우리가 인정한 정부들에 관해서는, 우리는 그 어떤 유럽 강대국도 그 같은 나라들을 억압하기 위한, 또는 그 어떤 방법으로든 그 같은 나라들의 운명을 지배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들 나라에 간섭하는 행위를 미합중국에 대한 반우호적 성향의 표명 이외의 것으로 달리 간주할 수 없을 것이다."
'먼로 독트린'은 중남미주의 신생 독립 공화국들과의 연대 정신을 표명했다. 이들 나라들은, 이번에는 그들의 새로운 헌법을 많은 경우 북미의 본을 따름으로써, 미합중국과의 정치적 친근성을 확인했다.
국내적으로는 먼로 대통령의 재직기간은" 상쾌한 기분의 시대"로 불렷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이같은 호칭은 치열한 당파적 및 지역적 갈등의 시대를 위장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 호칭은 연방당에 대한 '공화당'의 정치적 승리를 확인해 준 것이었는데, 연방당은 전국적 세력으로는 붕괴되었다.
연방주의자들의 쇠퇴는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도에 혼란을 초래했다. 당시 주의회는 입후보자를 지명할 수 있었다. 1824년 테네시州와 펜실베이니아州 의회는 앤드류 잭슨을 대통령 후보로, 그리고 사우드캐로라이나州 출신 상원의원 존 C. 캘하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켄터키州 의회는 하원의장 헨리 클레이를, 매사추세츠주 의회는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즈를, 그리고 연방의회의 협의회는 재무장관 윌리엄 크로포드를 각각 대통령 후부로 지명했다.
선거의 결과를 결정함에 있어서 인품과 당파적 유대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거인단 투표에서 애담즈는 뉴잉글랜드 지방과 뉴욕州의 대부분 지역에서, 클레이는 켄터키州, 오하이오州 및 미주리주에서, 잭슨은 동남부 지역, 일리노이州, 인디애나州, 南 및 북캐롤라이나州, 메릴랜드州, 및 뉴저지州에서, 그리고 크로포드는 버지니아州, 조지아州 및 델라웨어州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어느 후보도 선거인단의 과반수 표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헌법의 규정에 하원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클레이는 하원에서 영향력이 가장 강한 인사였다. 클레이는 애담즈를 지지했고, 애담즈가 대통령이 되었다.
존 퀸시 애담즈 행정부 기간에 새로운 정당의 '진용'이 나타났다. 애담즈의 추종자들은 '국민공화당'(National Republicans)라는 이름으로 정당을 조직했으나, 후에 당명을 휘그(Whigs)당으로 바꾸엇다. 애담즈는 비록 정직하고 능률적으로 통치했지만 인기있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고, 그의 행정부는 많은 좌절을 겪었다. 무엇보다도 전국 도로망과 운하망을 건설하려는 그의 노력은 좌절되었다. 그의 재직기간은 재선을 위한 긴 선거운동처럼 보였으며, 그는 냉철한 지적인 기질 때문에 친구를 얻지 못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잭슨은, 특히 새로 조직된 민주당(Democratic Party)내의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이 당의 전신은 그 뿌리가 먼로, 메디슨, 및 제퍼슨 대통령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민주공화당(Democrat Republican Party)이다. 1828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잭슨은 애담즈를 압도적인 표차로 패배시키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테네시州 출신 정치가이고, 대인디언전투의 투사이며, 1812년의 뉴올리언즈전투의 영웅인 앤드류 잭슨은 산업혁명으로 융성하고 있는 상업 및 제조 업체들에 대항하여 투표권을 행사하려고 했던 서부의 소규모 농장주, 그리고 동부의 근로자, 기능공 및 소규모 상인들로부터 지지를 받앗다.
1828년의 선거는 토표자들이 점점 더 광범히 참여하게 되는 추세를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였다. 버몬트州는 연방에 편입될 때부터 남성들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했고, 테네시州는 납세자들의 대부분에게 참정권을 허용했다. 뉴저지州, 메릴랜드州 및 사우두캐롤라이나주는 모두가 1807년과 1810년 사이에 선거권에 관한 재산 및 납세 요건을 폐지했다. 1815년 이후 에 연방에 편입된 州들은 백인남성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했거나, 선거권에 대해 낮은 납세액 요건을 설정했다. 1815년에서 1821년 사이에 코네태컷州, 매사추세츠주 및 뉴욕州는 모든 재산 요건을 폐지했다. 1824년에는 선거인단원은 아직도 6개 주의회에서 선출되었다. 그러나 1828년에 와서 대통령 선거인은 델라웨어州와 사우드캐롤라이나주를 제외하고는 州마다 일반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다. 화려한 경력을 가진 앤드류 잭슨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때보다 이 같은 민주적 기풍을 더 극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다.
제 1차 임기가 끝날 무렵 잭슨은 보호관세 문제를 놓고 사우드캘로라이나주와 부득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 주의 실업계와 영농계 관계자들은 잭슨이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하여 자기들이 오랫동안 반대해 오던 관세법을 개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의 견해로는 보호의 모든 혜택이 북부의 제조업자들에게만 돌아가고, 또 국가는 전체적으로는 부강해지지만, 사우드캘로라이나주 만은 더욱 빈곤해져 대농장주들이 그 부담을 안게 된다는 것이었다.
1832년에 의회가 통과시켰고 잭슨이 서명한 새로운 보호관세법은 1828년에 제정된 것보다 내용이 완화된 것이었으나, 이는 사우드캘로라이나주의 많은 사람들을 한층 더 분개하게 만들었다. 이 관세법에 대응하여 일단의 사우드캘로라이나주 시민들이 '무효화'의 원칙에 대한 州의 권리를 찬성하고 나섰다. 이같은 州의 권리는 1832년까지 잭슨의 부통령으로 재직했던 존C. 캘하운이 자신이 작성한 "사우드캘로라이나주의 입장 해명 및 항의"(1828)라는 문서에서 천명한 것이다. 사우드캘로라이나 주의회는 이 관세법 문제를 다룸에 있어 "무효화영"을 채택했는데, 이 법령은 1828년의 관세법과 1832년의 관세법이 다같이 사우드캐로라이나주의 경계선 안에서는 무효라고 선언했다. 사우드캐로라이나 주의회는 또한 州의 군병력의 증강을 허용하고 무기 구입 자금을 영달하는 조치를 포함하여, 이 "무효화령"을 시행하기 위해 법률을 제정했다.
이 "무효화"는 그때까지 일어났단 연방정부의 권한에 대한 일련의 도전중 가장 최근의 것이었다. 주정부와 중앙정부 사이에는 거의 공화국 창견 때부터 중앙정부의 권한과 (주정부와 중앙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충성 문제를 놓고 계속적인 논쟁이 있어왔다. 예를 들어 1798년에 캔터키주와 버지니아주가 채택한 결의안은 외국인 단속법과 치안유지법을 반대했고, 하트포드회의에서는 잉글랜드 제주가 매디슨 대통령과 대영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잭슨은 사우드캘로라이나주가 가해오는 이같은 위협에 대응하여, 1832년 11월 소형 해군함정 7척과 전함 한 척을 찰스턴만으로 파견했다. 12월 10일, 그는 '무효화' 운동자들에게 강경한 포고문을 발표했다. 잭슨 대통령은 사우드캘로라이나주가 "반란과 반역의 일보전"에 서있다고 선언하고, 이 주의 주민들에게 그들의 조상이 투쟁하여 이룩한 연방에 대한 충성을 다시 천명하라고 호소했다.
의회가 관세문제를 다시 논의하게 되자 오직 한 사람, 즉 보호무역주의의 열렬한 주창자인 (그리고 잭슨의 정적인)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만이 의회가 타협 조치를 통과시키도록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명백해졌다. 1833년에 신속히 통과된 클레이의 관세법안은 수입품의 가치의 20퍼센트를 초과하는 모든 관세는 서서히 단계적으로 인하하여, 1842년까지에는 모든 물품에 대한 관세율이 1816의 적절했던 관세율 수준에 이르도록 한다고 명시했다.
사우드캘로라이나주의 "무효화" 운동 지도자들은 남부의 다른 주들의 지지를 기대했었으나, 남부의 여타 州들은 한결같이 사우드캘로라이나주의 노선이 현명치 못하며 위헌적이라고 선언했다. 사우드캘로라이나주는 마침내 행동을 철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방은 서로 승리를 주장하였다. 잭슨은 연방정부가 연방우위의 원칙을 확고히 따르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사우드캘로라이나주는 항거함으로써 그들의 요구 사항을 많이 얻어낼 수 있었으며, 또 단일 주가 연방의회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무효화"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잭슨의 영도력에 도전하는 또 다른 분쟁이 생겼다. 그것은 두 번째 '미국은행'(중앙은행)을 발족시키는 문제와 관계되는 것이었다. 최초의 중앙은행은 알렉산더 해밀턴의 주도하에 설립되었으며, 20년 동안 운영하도록 영업 허가가 났던 것이다. 정부가 이 은행의 주식의 일부를 가지고는 있었으나, 이 은행은 정부의 은행은 아니었다. 이 은행은 이익금이 주주들에게 돌아가는 민간회사였다. 이 은행은 통화를 안정시키고 무역을 자극하도록 구상되었었다. 그러나 이 은행이 소수의 유력한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고 잇는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미주리주출신 상원의원 하트 벤턴을 비롯한 서부 주민들과 근로자들은 이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1811년 이 은행의 영업허가 기한이 만료되었으나 갱신되지 않았다.
그 후 수년 동안 중앙은행의 금융 기능이 주로부터 영업 허가를 받은 은행들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이들 은행이 과도한 액수의 통화를 발행하자 큰 혼란을 일으켰고 통화 팽창을 부채질했다. 주립은행들이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화폐를 공급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백해졌고, 1816년에 첫 번째 것과 비슷한 두 번째 중앙은행이 20년간의 영업허가로 설립되었다.
이 두 번째 중앙은행은 설립초부터 새로 생겨난 주와 영토들에서, 또 전국 도처의 잘살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없었다. 반대자들은 이 은행이 이 나라의 신용대부권과 통화 운영을 실질적으로 독점하고 있으며, 소수 부유층의 이익을 대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체적으로는 이 은행은 운영이 잘되었고, 소중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 은행에 반대하는 인기 있는 투사로서 대통령에 당선된 잭슨은 이 은행의 영업허가 갱신을 위한 법안을 거부했다. 그는 의회에 보낸 교서에서 "이 나라의 부유한 사람들은 동등한 보호와 동등한 혜택에 만족하지 않고, 의회의 조치를 통해 우리(행정부)가 그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어 주도록 간청해왔다."고 지적하면서 독점과 특전을 규탄했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번복시키려는 의회의 노력은 실패했다.
다음 선거운동에서 이 중앙은행 문제는 상인, 제조업자 그리고 (전반적으로 통화 긴축과 고금리를 찬성하는 채권자들은) 금융업자들을 망라하는 계층과, 은행에 흔히 빚지고 있으며 따라서 저금리를 찬성하는 근로자와 영농자들의 계층 사이를 근본적으로 분열시켜 놓았다. 그 결과는 "잭슨주의"에 대한 열렬한 지지로 나타났다. 잭슨은 자기가 1832년 재선된 것은 이 은행을 재기할 수 없게 부숴버리라는 국민들의 위임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이 은행에 공공자금을 이체할 수 잇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는, 이 읂애의 영업허가 규정을 손쉽게 무기로 사용할수 있음을 알았다. 1833년 9월 그는 정부자금을 더 이상 중앙은행에 예금하지 말 것과, 이미 예치된 자금도 정부의 지출에 맞추어 정상적인 방식으로 점차적으로 인출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 대신 엄격히 제한된 수의, 조심스럽게 선정된 주립은행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다음 한 세대 동안 미국은 비교적 규제되지 않은 주립 금융기관에 의지하게 되었는데, 이는 저렴한 금리의 신용 대부를 통해 서부에로의 팽창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했으나, 이 나라를 계속해서 정기적인 공황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남북전쟁 때에 가서야 비로소 국립 금융기관에 영업을 허락했다.
잭슨의 정적들은 서로 엇갈린 목적을 가지고 있는 한 성공할 가망이 없었으므로, 불만을 가진 모든 파당들을 휘그(Whig)라는 이름의 단일 정당으로 규합하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1832년의 선거 바로 후에 이 정당을 조직했지만, 서로 이견을 조정하고 정강을 기초할 수 있기까지에는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휘그당은 1836년의 선거에서도 여전히 분열되어 단일 후보를 추대하거나 공동의 정강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잭슨의 부통령인 뉴욕주 출신 마틴 밴 부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임기중의 경제 불황과, 전임대통령의 인품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밴 부렌 자신은 빛을 내지 못했다. 그에게는 잭슨의 일거일동에 나타났던 리더쉽의 인상적인 특질과 극적인 재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취한 공적인 행동은 열렬한 환영을 받지 못했다. 1840년의 선거 때는 불경기와 저임금으로 국가가 어려운 형편에 있었으므로 민주당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휘그당의 대통령 후보인 오하이오주 출신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對인디언 전투와 다울러 1812년의 영미전쟁의 영웅으로서 인기가 대단했기 때문에, 잭슨처럼 민주적인 서부를 대표하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주의 권리와 저관세에 대한 견해로 남부에서 인기가 있었던버지나아주 출신인 존 타일러를 부통령 후보로 하여, 해리슨은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68세인 해리슨 대통령은 취임한지 1개월도 못되어 사망하고, 타일러가 대통령이 되었다. 타일러의 신념은 이나라에서 아직도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클레이와 웨브스터의 신념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하여 타일러의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이같은 이견은 타일러와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당 사이에 노골적인 분열을 낳게 했다.
하지만, 미국민들은 휘그당과 민주당 사이의 단순한 파당적 갈등 이상의 복잡한 방식으로 자신들이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예를 들어, 19세기 전년기에 주로 아일랜드계와 독일계의 많은 카톨릭 교도 이민들이, 신교도인 미국 태생 미국인들 사이에 반발을 자아냈던 것이다.
移민들은 미국에 기이한 새로운 습관과 새로운 종교적 관행 이상의 것을 가져왔다. 그들은 동해안 연안지역의 도시들에서 일자리를 놓고 미국 태생 미국인들과 경쟁을 벌였다. 더욱이, 1829년대와 1830년대의 정치적 변화는 외국 태생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이 20년 기간에 주헌법들은 백인남자의 보통선거권을 허용하도록 수정되었다. 이는 문벌좋은 정치인들에 의한 정치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권력을 상실한 것을 이민들의 탓으로 돌렸다. 마침내 가톨릭교회가 금주운동을 뒷받침하지 않음으로써, 이는 로마 카톨릭교회가 술을 통해 미국을 전복시키고자 시도하고 있다는 비난을 낳게 했다.
이 기간에 생겨난 미국 본토박이들의 단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체는1849년에 창설된 비밀 결사인 '성조기회'였다. 이 조직의 회원들은 자신의 신원을 밝히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곧 세인들에 의해 (이들이 누구인지 아는바가 없다는 뜻에서) 'Know-Nothing"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853년 뉴욕시의 'Know-Nothing'들은 총회를 조직했고, 이 총회는 그들의 州조직을 중앙 통제하기 위한 규약과 의식을 제정했다.
"Know-Nothing"당의 주목적은 외국인의 귀화에 필요한 조건인 미국 거주 기간을 5년에서 21년으로 연장하고, 외국 태생자와 가톨릭교주를 공직에서 배제하는 일이었다. 1855년 이 당은 뉴욕주와 매사추세츠주의 의회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에는 90명이나 되는 연방의회 의원들도 역시 이 당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노예 문제를 둘러싼 당내의 이견은 이 당이 전국적 정치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남부으ㅟ "Know-Nothing"들은 노예제도를 지지한 반면, 북부의 당원들인 이에 반대했다.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를 지명하기 위해 1856년에 열렸던 이 당의 대회에서 (1850년의)"미주리 타협안"을 지지하도록 하는 동의가 부결되자 42명의 북부 대의원들이 퇴장했고, 마침내 이 정당은 전국적 정치 세력으로서의 존재를 잃었다.
잭슨의 대통령 당선이 보여준 정치에 있어서의 민주적 격변은, 미국인들이 모든 시민을 위한 보다 많은 권리와 기회를 오랫동안 추구해 온 그 노력의 한 국면에 불과했다. 또다른 국면은 노조의 시작이었다. 1835년,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노동 세력들은 그때까지의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의 하루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줄이는 데에 성공하였다. 뉴햄프셔주, 로드아일랜드주, 오하이오주 그리고 1850년에 연방에 새로 편입된 캘리포니아주에서도 이와 비슷한 개혁이 시작되었다.
참정권의 확대로 사람들은 이미 교육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갖게 되었는데, 어디에서나 총명한 정치가들은 교육을 못받은 문맹자들까지도 보통선거권을 갖게 될 때의 위협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뉴욕주의 드위트 클린턴, 일리노이주의 에이브러햄 링컨, 그리고 매사추세추주의 호레이스 만 등은 노동단체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 노동 단체의 지도자는 세금으로 뒷받침되는 무료학교를 모든 아동들을 위해 세울 것을 요구했다. 점차적으로 여러 주가 차례찰O로 그러한 무료 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법을 제정하였다. 그리하여 이 나라 북부 전역에서는 공립학교제도가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이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는 공립학교 교육을 위한 투쟁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대두한 또다른 영향력있는 사회운동은 주류 판매와 음주에 대한 반대, 즉 금주운동이었다. 이 금주 운동은 종교적 신념, 근로계층에 미치는 음료의 영향, 부녀자들이 폭음한 남자들로부터 당한 폭행과 고통 등 다양한 관심사와 동기에서 나왔다. 1826년 보스턴의 목사들은 금주촉진협회를 조직했다. 7년 후 이 협회는 필라델피아에서 전국대회를 소집했고, 이 대회는 미국금주연맹을 결성했다. 이 연맹은 모든 주정 음료수의 폐기를 요구했고, 주의회에 대해 주류의 생산과 판매를 금지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1855년에 와서는 13개 주가 금주법을 시행했다. 하지만, 이 법은 후에 법원에서 그 타당성 여부를 심리받게 되었다. 금주법은 북부의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만 존속하였다. 그러나 1830년부터 1860년 사이에 금주운동은 미국인의 1인당 주류 소비를 낮추었다.
다른 개혁운동가들은 교도소 문제와 정신이상자들을 돌보는 문제를 다루었다. 그들은 처벌에 중점을 둔 감옥을 범법자들이 사회복귀를 준비하도록 교도하는 장소로 바꾸고자 노력하였다. 매사추세츠주에서는 도리어 딕스가 정신이상자들을 위한 환경개선을 위해 애썼다. 당시 정신이상자들은 환경이 열악한 사설 구빈원과 감옥에 감금되었었다. 매사추세츠주에서 이들을위한 환경개선 운동에 성공한 후, 그녀는 남부로 옮겨가서 이 운동을 벌였는데, 남부에서는 9개 州가 1845년부터 1852년 사이에 정신이상자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했다.
이같은 사회 개혁들은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사회에서의 자신들의 불평등한 지위를 깨닫게 만들었다. 식민지 시대부터 미혼녀성들은 비록 사회 관습상 일찍이 결혼해야 했지만, 남성들과 동일한 법적 권리를 많이 누려왔다. 그러나 여성들은 결혼을 하게 되면 법 앞에서는 독립된 신분을 사실상 상실했다. 여성들에게는 투표권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교육은 17세기와 18세기에는 주로 읽기, 쓰기, 음악, 무용 및 바느질에 국한되었다.
여성의 각성은 스코틀랜드의 강연자이며 언론인인 프란시스라이트가 미국을 방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녀는 1820년대에 미국 전역에 걸쳐 미국여성의 권리를 공적으로 신장시켰다.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말하는 것이 흔히 금지되었던 시기에, 라이트는 소신을 피력했을 뿐만 아니라 산아제한과 이혼에 관한 정보를 구하는 여성의 권리를 주창하는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청중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1840년대에 와서 첫 여권운동을 다지게 될 일단의 미국 여성들이 등장했다. 이 저명한 집단 중에서 첫째로 꼽히는 여성은 엘리자베드 캐디 스탠튼이었다. 1848년에 캐디 스탠튼과 또다른 여권주창자인 루크리셔 모트는 뉴욕州 세네카 폴주에서 세계 역사상 최초의 여권신장대회를 조직했다. 대위원들은 법률 앞에서의 남녀평등, 투표권 및 교육과 취업에서의 기회 균등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같은 해에, 폴란드 출신 이민인 어네스틴 로즈는 기혼녀성들이 재산을 결혼 전의 이름으로 계속 유지하는 것을 허용한 법률을 뉴욕州에서 통과하게 만드는 것을 도왔다.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정된 이 종류의 법률 중에서, '기혼여정의 재산에 관한 법'은 다른 州에서도 이와 비슷한 법률을 제정하도록 고무했다.
1869년 로즈는 엘리자베드 캐디 스탠튼과 또다른 굴지의 여권운동가인 수진 B. 앤토니를 도와 전국 여성참정권협회를 창설했는데, 이 협회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기 위한 헌법개정을 주창했다. 로즈와의 유대 관계를 묘사하면서 캐디 스테이튼은 "나는 벼락을 만들었고 그녀는 이 벼락을 터뜨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변방은 미국생활을 형성하는 데서 많은 역할을 하였다. 대서양 연안 전체의 사정은 새로운지역으로서의 이주를 재촉했다. 곡물을 많이 생산해 낼 수 없는 토양 조건이 던 뉴잉글랜드지방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안 지대에 있는 그들의 농장과 마을을 버리고 내륙의 기름진 땅을 찾아 줄을 지어 떠났다. 북캐로라이나주 및 버지니아州 오지의 정착지에서는 해안지방의 시장으로 통하는 도로와 운하가 없어 불리한 입장에 있었던, 또 해안지대의 대농장주들의 정치적 지배로 고통을 겪어 온 주민들이 역시 서부로 이주했다. 그리하여 1800년까지에는 미시시피강과 오하이오강 유역은 크게 발전한 변방지역이 되고 있었다. "하이오! 우리는 간다. 오하이오강을 타고 우리는 간다!"라는 노래는 수많은 이주민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19세기 초에 인구가 이와 같이 서부로 이동함으로써 舊영토를 갈라 새로운 경계선을 긋게 되었다. 새 주들이 연방에 편입됨에 따라 미시시피강 이동의 정치 판도는 안정되었다. 1816부터 1821년 사이의 기간에 6개 주, 즉 인디애나주, 일리노이주 및 메인주 (이상은 자유주)와, 미시시피주, 엘라배마주 및 미주리 주(이상은 노예주)가 새로이 탄생했다. 아메리카로 건너온 최초의 변방 정착민들은 유럽과 긴밀한 유대를 가졌고, 그 다음 정착민들은 연안 지대의 정착지와 밀접한 유대를 가졌으나, 미시시피강 유역의 개척민들은 독립심이 강했고, 동부보다는 서부로 눈을 돌렸다.
변방의 정착민들은 다양한 집단이었다. 한 영국인 여행가는 "초라한 오두막에서 사는 대담하고, 강인한 사람들 ... 그들은 세련되지 않았지만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고, 낯설은 사람들에게도 친절하며, 정직하고 믿음직스럽다. 그들은 인디언 옥수수와 호박을 좀 심고, 돼지와 때로는 한 두 마리의 소도 기른다...그러나 그들이 의지하는 주요한 생활수단은 총이다"라고 기술했다. 도끼질과 덫사냥을 잘하고, 낚시질에 익숙한 그들은 숲을 태워 길을 냈고, 최초의 통나무 오두막을 지었으며, 그들에게 땅을 점령당한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대결했다.
더욱 더 많은 정착민들이 황야로 침투해 들어가 사냥꾼이 되고 농부가 되기도 했다. 오두막 대신, 유리창문과 굴뚝도 있고, 방들도 칸막은 편안한 통나무집을 지었다. 옹달샘 대신 우물을 팠다. 부지런한 정착민들은 수목을 베어내고 농토를 만들었고, 나무를 태워 잿물을 만들었으며, 그루터기는 썩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먹을 곡식, 채소 및 과일으 가꾸었고, 숲속에서 사슴과 야생 칠면조를 사냥하고 벌꿀을 채취했고, 가까운 시내에서 낚시질을 했으며, 소와 돼지를 길렀다. 토지 투기꾼들은 값싼 땅을 많이 사가지고 있다가 땅값이 오르면 이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 넘기고 더욱 먼 서부로 옮겨갔다.
농부들의 뒤를 따라 의사, 변호사, 상인, 간행물의 편집인, 전도사, 기계공 및 정치인들이 곧 이주해갔다. 하지만, 농부들이 그 사회의 튼튼한 토대가 되었다. 그들이 한 곳에 정착할 때에는 거기서 오래 살면서 그들의 자녀들도 그곳에 남아 살기를 바랬다. 그들은 큰 헛간과 튼튼한 벽돌집이나 목조 가옥을 지었다. 그들은 개량종 가축을 길렀고, 땅도 슬기롭게 갈았으며, 수확이 많은 씨앗을 뿌렸다. 제분소와 제재소, 그리고 양조장을 세운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간선도로도 만들었고, 교회와 학교도 세웠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거의 믿기 어려운 변화가 생겼다. 예를 들어 1830년에는 일리노이주의 시카고는 요새가 하나 서있는 보잘 것 없는 교역촌이었다. 그러나 첫 정착자들이 다 죽기도 훨씬 전에 시카고는 이 나라의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농장은 얻기가 용이했다. 1820년 이후에는 정부가 소유하는 땅 약 半헥타르를 1.25달러로 살 수 있었고, 1862년에 홈스테드법(Homestead Act)이 제정된 이후로는 정부 소유 땅에 정착하여 개간하기만 하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농기구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 시기는 존 술레가 썼고, 호레이스 그릴리라는 기자에 의해 대중에게 보급된 구절에서 보듯이, 젊은이들이 "서부로 가서 나라와 더불어 함께 자랄 수 있는"시기였다. 뉴잉글랜드지방과 남부에서 이주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살던 지역의 많은 이상과 제도를 가지고 서부로 갔다.
미국의 경계를 넘어 멕시코영인 텍사스로 이주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1840년까지는 농업 개척지의 서부로의 지출이 미주리를 넘지 못하였다. 1819년에는 미국시민의 청구권 500만 달러를 부담하는 대가로,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와 극서부의 오리건지방에 대한 스페인의 권리를 차지했다. 한편 극서부는 모피교역의 큰 활동무대가 되었는데, 이 교역은 단순한 모피의 가치를 훨씬능가하는 의의를 갖게 되었다. 프랑스人들이 미시시피강 유역을 탐험하던 초기에서처럼, 모피상들은 미시시피 이서지역에 정착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도자 역할을 했다. 덫으로 짐승을 잡는 프랑스人 및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인 모피사냥꾼들은 큰 江들과 그 支流를 탐험하고 록키산맥과 시에라산맥을 넘는 모든 고갯길을 찾아내 1840대의 대륙횡단 이동을, 그리고 그 후의 내륙오지점거를 가능하게 하였다.
전반적으로 이 나라는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다. 인구는 1812년부터 1852년 사이에 725만 명에서 2,3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정착 가능한 토지는 거의 유럽 대륙의 크기만큼, 즉 440만 평방 킬로미터에서 780만 평방 킬로미터로 늘어났다. 하지만 파당적 이견에 뿌리를 박은 근본적인 갈등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었으며, 이같은 갈등은 1860년대에 가서 내전(남북전쟁)으로 폭발하게 된다. 하지만 이같은 서부로의 확장은 불가피하게 정착민들을 이 땅의 원래 주민, 즉 인디언들과의 충돌로 몰고갔다.
19세기 초에, 인디언들과의 이같은 충돌과 관련하여 가장 저명한 인물은 백악관의 주인이 된 첫 "서부인"인 앤드류 잭슨이었다. 1812년 전쟁(영미전쟁)이 한창일 때, 당시 테네시州 민병대 사령관이던 잭슨 앨라배마 남부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크리크부족 인디언들의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크리크부족들은 곧 그들의 땅의 3분의 2를 미국에 할양했다. 잭슨은 후에 스페인領 플로리다의 은신처에 있던 여러 무리의 (크리크부족의 분파인) 세미놀부족 인디언들을 패주시켰다.
1820년대에 먼로 대통령의 육군장관 전 C. 캘하운은 남아있는 인디언 부족들을 그들이 살던 남서부 지역에서 미시시피 이서지역으로 옮겨 재정착 시키는 정책을 추구했다. 잭슨도 대통령이 되자 이 정책을 계속했다.
1830년 의회는 인디언 철한법을 통과시켜, 동부지역의 인디언부족들을 미시시피 이서 지역으로 수송하는 자금을 제공했다. 1834년에 지금의 오클라호마주에 인디언 특별 지역이 설정되었다. 인디언 부족들은 잭슨의 두 번에 걸친 임기 동안에 미국정부와 94개에 달하는 조약을 체결하여, 수백만 헥타르에 달하는 그들의 땅을 미국정부에 할양했고, 수십에 달하는 인디언 부족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고향땅에서 철거당했다.
이 불행한 역사에서 가장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章은 체로키부족과 관계된 것인데, 노드캐롤라이나州와 조지아주에 있는 그들의 영토는 1791년이래 조약에 의해 보장되어 왔었다. 동부 지역 인디언 부족들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부족에 속했던 체로키부족의 운명은 1829년에 그들의 땅에서 금이 발견됨으로써 결정되고 말았다. 1835년 잭슨 행정부의 묵낙아래 체로키부족들은 오클라호마까지의 길고도 잔인한 여행을 강요당햇다. 많은 인디언들이 "눈물 자국"이라고 알려지게 된 고난에 찬 이 여정에서 질병과 궁핍 속에서 죽었다.
초기의 여권신장원동력인 엘리자베드 캐디 스탠턴은 열렬한 노예제도 폐지운동자인 루크레시아 모트가 자신의 동지임을 알았는데, 이는 이들 두 여인이 1840년 런던에서 열린 반노예제도대회에서 서로 만났을 때의 일이었다. 대회가 개막되자 이들 두 여인에게는, 이 대회에서 여성 대의원들이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발언은 물론 대회장에 참석하는 것조차 금지되자 캐디 스탠턴과 모트는 다른 여성 대의원들을 데리고 대회장에서 퇴장함으로써 이에 항의했다. 이때 캐디 스탠턴은 모트에게 여성의 사회적, 공민적 및 종교적 권리를 다루게 될 여권신장대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이 대회는 8년동안 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들 두 여인이 조직한 첫 여권신장대회가 마침내 1848년 뉴욕주의 세니카 폴에서 개최되었다.
이 모임에서 캐디 스탠턴은 독립선언문 형식을 본딴 '소감 선언문'(Declaration of Sentiments)을 발표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압박에 항의하는 18개의 불만 사항을 열거했다. 이들 불만사항 중에는 기혼 여성이 학대를 일삼는 남편을 떠나거나 남편과 이혼할 경우 자녀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사항도 있었다. 만약 여성에게 이혼이 허락되는 경우에는 이혼녀가 저술이나 교직을 택하지 않는 한 그녀에게는 전문적인 生計 수단이 없었다. 여성은 법정에서 남편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 것이 인정되지 않았다. 공장에서 일하는 기혼 여성들은 번 돈을 간직할 권리가 없었고, 그 돈을 남편에게 넘겨주어야만 했다. 여성이 결혼하면 미혼 때에 갖고 있었던 재산은 모두 자동적으로 남편의 재산의 일부가 되었다. 재산을 소유하는 독신여성들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입법자들을 선출하는 권리는 부여하지 않으면서 세금이 부과되었는데 이는 바로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영국으로부터 떨어져나온 바로 그 이유들 중의 하나였다.
대회 참석자들은 여성의 참정권을 제외하고는 결의안들을 만장 일치로 통과시켰다. 흑인인 노예제도 금지운동자 프레드릭 더글러스가 여성의 투표권에 찬성하는 정열적인 대다수가 여성의 투표권 행사를 추진하는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햇다.
세니카 폴에서 열린 이 대회를 통해, 캐디 스탠턴은 웅변적인 문필가로서 또 여권의 대변자로서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녀는 투표권없이는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되는 목표를 결코 달성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자신이 일찍부터 깨달았었노라고 말했다. 노예제도 금지운동자인 개혁가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을 자신의 여권신장운동에서의 모델로 삼은 그녀는 이 운동의 그 어떤 노력에서도 성공의 열쇠는 정당 활동이 아니라 여론을 변화시키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여성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괴로움을 안겨주는 불의에 대해 각성하게 함으로써, 세니카 폴에서 열린 여권신장대회는 장래의 변화를 위한 촉매가 되었다. 이로써, 다른 여권신장대회들도 열렸고, 다른 여성들도 여성의 정치적 및 사회적 평등을 위한 운동의 최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1812년의 영미전쟁은 어떤 의미에서는 제2의 독립전쟁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이 끝난 후, 젊은 이 공화국이 독립전쟁 이래 당면했던 심각한 난관이 대부분 사라졌다. 헌법 아래 국가적 단결이 이룩됨으로써 자유와 질서의 균형이 잡혔다. 국가의 채무도 얼마 남지 않았고, 대륙이 개척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평화와 번영, 그리고 사회 발전의 전망이 나라 앞에 열렸다.
교역은 국가적 단결을 견고히 다지고 있었다. 전쟁 중에 겪었던 궁핍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국의 제조업체들이 외국과의 경쟁에서 견디어낼 수 있을 때까지 이들을 보호하는 중요성을 깨닫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독립이 정치적 독립만큼 불가결하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당시의 의회 지도자 헨리 클레이 (켄터키州 출신)과 존 C. 캘하운 (사우드캐롤라이나州 출신)은 경제적 자립을 촉진하기 위해 "보호무역주의"정책 즉, 미국산업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수입품에 제한을 가하는 정책의 시행을 촉구했다.
이때는 관세율을 높이는 데에 적기였다. 버몬트州와 오하이오州의 목양업자들은 영국에서 들여오는 양모로부터 보호를 받기를 원했다. 켄터키州에서는 이 지방의 대마로 면화포장용 마대를 제조하는 새로운 산업이 스코틀랜드의 포장제조업 때문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미 번창하는 제철공업의 중심지가 된 펜실베니아州 피츠버그는 영국과 스웨덴의 철공급자들에게 도전하고자 갈망하고 있었다. 1816년에 책정된 관세율은 미국의 제조업자들을 실질적으로 보호하기에 충분할 만큼 높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부 주민들은 그들 자신을 동부의 도시 및 항구들과 연결시키고 변경 지대의 땅에 정착을 위해 들어갈 수 있도록 전국적인 도로망과 운하망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뉴잉글랜드지방과 남부의 반대 때문에, 국토 개량사업에 연방정부가 역할을 맡도록 하는 요구를 관철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도로와 운하의 건설은 1916년에 연방 선도로법이 제정될 때까지 주정부들의 소관 사항으로 남아 있었다.
이 무렵 연방정부의 지위는 대법원이 내린 몇몇 판결로 크게 강화되었다. 확고한 신념을 가진 연방주의자였던 버지니아州 출신의 존 마샬은 1801년 대법원장에 임명되어 1835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 마샬이 대법원장이 될 때까지는 약체였던 대법원이 의회나 대통령과 맞먹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강력한 사법부로 변모했다. 역사적인 결정을 계속해서 내리면서 마샬은 헌법의 주권을 받든다는 한 가지 기본 원칙에서 결코 이탈하는 일이 없었다.
마샬은 자신의 판결로 헌법의 뜻과 적용을 확정해 온 많은 대법관들 중에서 으뜸이었다. 그가 대법원장으로서의 오랜 봉사를 끝내는 동안, 대법원은 헌법상의 문제와 관계되는 근 50건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었다. 마샬의 가장 유명한 판결 이유 중의 하나가 '마버리 대 매디슨 사건'(1830)에 관한 것인데, 그는 이 사건에서 연방의회나 주의회가 제장한 어떤 법률이라도 이를 심사할 수 있는 대법원의 권한을 명확히 확립해 놓았다. 또 마샬은 오래 전부터 논쟁되어 온 헌법에 의해 부여된 정부의 默示的 권한이라는 문제를 다룬 '맬컬로크 대 메릴랜드 사건'에서 헌법은 정부에게 명시된 권한 뿐만 아니라 묵시적 권한도 부여한다는 해밀턴의 이론을 대담하게 옹호했다.
이때까지 별로 사회의 주의를 끌지 못했던 노예제도가 국가적 문제로서 매우 큰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공화국 초기에 북부의 州들이 노예들을 즉각적으로 또는 점차적으로 해방시킬 준비를 하고 잇을 때, 여러 지도자들은 앞으로 노예제도가 없어지리라고 생각했다. 1786년 조지 워싱턴은 "노예제도를 서서히, 확실하게, 그리고 눈에 뛰지 않게 폐지시킬 수 있는" 어떤 계획이 채택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썼다. 세 명 모두 버지니아주 출신인 재퍼슨, 매디슨 및 먼로를 비롯한 남부의 다른 지도적 정치가들도 이와 비슷한 말들을 했다. 그 후 노예 무역이 폐지된 1808년에 와서는 노예제도가 머지않아 없어지리라고 생각한 남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 다음 세대 동안에 새로운 경제적 요인들이 노예제도로 하여금 1790년 이전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낳게 만들자 남부는 노예제도를 지지하여 굳게 뭉쳤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제적 요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품종의 면화가 들어오고, 또 엘리 휘트니라는 사람이 1793년에 면화씨를 빼내는 조면기를 발명한 데에 자극받아 남부에서 면화재배가 크게 활기를 띠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방직업을 대규모로 할 수 있게 만든 산업혁명으로 원면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또 1812년 이후 서부의 광활한 땅이 개척할 수 있게 되자 면화를 재배할 수 있는 땅이 크게 확대되었다. 면화문화는 동해안 지대의 州들로부터 급속히 남부의 여러 州를 거쳐, 미시시피강 하류 지역과 마침내는 텍사스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다.
또 다른 노동집약적 작물인 사탕수수의 재배도 역시 남부에서 노예제도가 확대되도록 만들었다. 루이지애나州 동남부의 기름지고 기온이 높은 땅은 이익이 많이 나는 사탕수수 재배에 이상적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1830년에 이르러서는 이 州가 전국의 설탕 공급량의 약 半을 공급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연초 재배자들도 노예를 데리고 서부로 이동해 나갔다.
북부의 자유사회와 남부의 노예사회가 서부로 확장해 나감에 따라, 서부의 영토들에 설치되고 있던 새로운 州들 사이에 대충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편리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일리노이주가 연방에 편입됨에 따라 노예제도를 허용하는 州는 10개, 이를 금지하는 州는 11개가 되었으나, 앨라배마州가 노예제도를 허용하는 州로서 연방에 편입됨으로써 동수로 균형이 회복되었다. 북부에서는 인구가 보다 빨리 늘어나고 있었고, 이로써 북부주들은 (연방) 하원에서 명백한 다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상원에서는 북부와 남부 사이에 의석수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1819년에 1만 명의 노예가 있는 미주리州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하지 않는 한 이의 연방 가입에 반대한다고 나서자, 항의의 폭풍이 전국을 휩쓸었다. 의회도 얼마 동안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헨리 클레이는 이른바 "미주리 절충안"을 마련했는데, 이 안에 따라 미주리 州는 노예주로서, 동시에 메인州는 자유주로서 연방에 편입되었다. 의회는 또한 미주리州 남부 경계선 이북의 '루이지애나 구입에서 생긴 영토에서의 노예제도를 금지했다. 당시 이같은 규정은 남부주들에게는 그들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는데, 이 "대아메리카사막"에는 사람들이 도저히 정착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임시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토마스 제퍼슨은 어떤 친구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한밤중의 화재경보 종소리 같은 이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는 나를 잠에서 깨워 두렵게 만들었다. 나는 이 같은 상황을 연방이 붕괴하는 불길한 전조라고 간주한다"라고 썼다.
19세기 초엽 20여년 동안에 중남미주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영국식민지들이 자유를 획득했을 때부터 이 지역 사람들 사이에는 자유의 사상이 고취되었다. 나폴레옹의 스페인 정복(1808)은 이 지역사람들에게 궐기하여 반란을 일으키라는 신호가 되었다. 1822년까지에는 시몬 볼리바르, 프란치스코 미란다, 호세 드 산 마르틴, 및 미구엘 히달고 등의 유능한 지도로, 남쪽으로는 아르헨티나에서 칠레에 이르는, 또 북쪽으로는 멕시코와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중남미주에서 스페인이 장악했던 모든 지역이 독립을 쟁취했다.
미국국민들은 자기들이 유럽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에 겪었던 경험의 되풀이로 생각되는 이 사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중남미주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자활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념을 확인해주었다. 1822년 먼로 대통령은 국민들의 강한 압력 아래 포르투갈의 전식민지인 브라질을 포함하는, 중남미주의 신생국들을 승인하는 권한을 부여받았고, 곧 이들과 사절을 교환하였다. 이같은 승인 조치는 유럽과의 옛 관계를 완전히 단절한, 진정한 독립국가로서의 이들 신생국의 지위를 확인해 주는 고치였다. 바로 이때에 러시아,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가 혁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른바 신성동맹이라는 연합을 조직했다. 신성동맹은-프랑스도 때때로 이 동맹에 합세했는데-대중운동이 군주의 왕좌를 위협하는 국가에 개입함으로써 혁명이 자기들 나라의 영역에까지 번지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의 자결권원칙에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신성동맹이 자신의 활동을 "구세계"에 국한시키는 한, 이 동맹은 미국에서 아무런 불안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신성동맹이 전식민지를 스페인이 되찾도록 할 의향을 선언하자, 믹국민은 매우 우려하게 되었다. 영국으로서는 스페인이 제국을 되찾게 되는 것을 막고자 결심했는데, 중남미 국가들과의 교역이 영국의 상업적 이해관계에는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런던정부는 영미 두 나라가 이 동맹의 기도를 막겠다는 보장을 중남미 국가들에게 해줄 것을 미국에 촉구했다. 그러나 국무장관 존 퀸시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행동하도록 먼로 대통령을 설득했다. "미국이 영국의 전함 뒤를 따라가는 소정구실을 하는 것보다, 러시아와 프랑스에 대해 자신의 원칙을 명백히 천명하는 것이 더 솔직하고 당당한 처사"라고 그는 말했다. 1823년 12월 먼로 대통령은 영국해군이 신성동맹과 프랑스로부터 중남미 국가들을 방어하리라는 것을 알면서, 의회에 국례교서를 보내는 기회에 이 교서를 통해 '먼로 독트린'-미대륙 국가들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지배의 그 어떤 연장도 이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정책-으로 알려지게 된 다음과 같은 미국의 입장을 선언했다.
"아메리카대륙은 앞으로는 유럽의 어느 강대국도 이를 미래의 식민지화 대상으로 간주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의 (정치적) 제도를 이 서반구의 그 어떤 부분에 대해서라도 확장하려는 그들의 그 어떤 시도도 이를 우리의 평화와 안전에 대해 위험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유럽 국가의 식민지나 속국에 대해서는 우리는 지금까지 간섭하지 않았으며 또 앞으로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을 선언했고 이를 유지한, 그리고 그들의 독립을 우리가 인정한 정부들에 관해서는, 우리는 그 어떤 유럽 강대국도 그 같은 나라들을 억압하기 위한, 또는 그 어떤 방법으로든 그 같은 나라들의 운명을 지배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들 나라에 간섭하는 행위를 미합중국에 대한 반우호적 성향의 표명 이외의 것으로 달리 간주할 수 없을 것이다."
'먼로 독트린'은 중남미주의 신생 독립 공화국들과의 연대 정신을 표명했다. 이들 나라들은, 이번에는 그들의 새로운 헌법을 많은 경우 북미의 본을 따름으로써, 미합중국과의 정치적 친근성을 확인했다.
국내적으로는 먼로 대통령의 재직기간은" 상쾌한 기분의 시대"로 불렷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이같은 호칭은 치열한 당파적 및 지역적 갈등의 시대를 위장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 호칭은 연방당에 대한 '공화당'의 정치적 승리를 확인해 준 것이었는데, 연방당은 전국적 세력으로는 붕괴되었다.
연방주의자들의 쇠퇴는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도에 혼란을 초래했다. 당시 주의회는 입후보자를 지명할 수 있었다. 1824년 테네시州와 펜실베이니아州 의회는 앤드류 잭슨을 대통령 후보로, 그리고 사우드캐로라이나州 출신 상원의원 존 C. 캘하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켄터키州 의회는 하원의장 헨리 클레이를, 매사추세츠주 의회는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즈를, 그리고 연방의회의 협의회는 재무장관 윌리엄 크로포드를 각각 대통령 후부로 지명했다.
선거의 결과를 결정함에 있어서 인품과 당파적 유대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거인단 투표에서 애담즈는 뉴잉글랜드 지방과 뉴욕州의 대부분 지역에서, 클레이는 켄터키州, 오하이오州 및 미주리주에서, 잭슨은 동남부 지역, 일리노이州, 인디애나州, 南 및 북캐롤라이나州, 메릴랜드州, 및 뉴저지州에서, 그리고 크로포드는 버지니아州, 조지아州 및 델라웨어州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어느 후보도 선거인단의 과반수 표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헌법의 규정에 하원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클레이는 하원에서 영향력이 가장 강한 인사였다. 클레이는 애담즈를 지지했고, 애담즈가 대통령이 되었다.
존 퀸시 애담즈 행정부 기간에 새로운 정당의 '진용'이 나타났다. 애담즈의 추종자들은 '국민공화당'(National Republicans)라는 이름으로 정당을 조직했으나, 후에 당명을 휘그(Whigs)당으로 바꾸엇다. 애담즈는 비록 정직하고 능률적으로 통치했지만 인기있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고, 그의 행정부는 많은 좌절을 겪었다. 무엇보다도 전국 도로망과 운하망을 건설하려는 그의 노력은 좌절되었다. 그의 재직기간은 재선을 위한 긴 선거운동처럼 보였으며, 그는 냉철한 지적인 기질 때문에 친구를 얻지 못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잭슨은, 특히 새로 조직된 민주당(Democratic Party)내의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이 당의 전신은 그 뿌리가 먼로, 메디슨, 및 제퍼슨 대통령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민주공화당(Democrat Republican Party)이다. 1828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잭슨은 애담즈를 압도적인 표차로 패배시키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테네시州 출신 정치가이고, 대인디언전투의 투사이며, 1812년의 뉴올리언즈전투의 영웅인 앤드류 잭슨은 산업혁명으로 융성하고 있는 상업 및 제조 업체들에 대항하여 투표권을 행사하려고 했던 서부의 소규모 농장주, 그리고 동부의 근로자, 기능공 및 소규모 상인들로부터 지지를 받앗다.
1828년의 선거는 토표자들이 점점 더 광범히 참여하게 되는 추세를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였다. 버몬트州는 연방에 편입될 때부터 남성들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했고, 테네시州는 납세자들의 대부분에게 참정권을 허용했다. 뉴저지州, 메릴랜드州 및 사우두캐롤라이나주는 모두가 1807년과 1810년 사이에 선거권에 관한 재산 및 납세 요건을 폐지했다. 1815년 이후 에 연방에 편입된 州들은 백인남성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했거나, 선거권에 대해 낮은 납세액 요건을 설정했다. 1815년에서 1821년 사이에 코네태컷州, 매사추세츠주 및 뉴욕州는 모든 재산 요건을 폐지했다. 1824년에는 선거인단원은 아직도 6개 주의회에서 선출되었다. 그러나 1828년에 와서 대통령 선거인은 델라웨어州와 사우드캐롤라이나주를 제외하고는 州마다 일반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다. 화려한 경력을 가진 앤드류 잭슨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때보다 이 같은 민주적 기풍을 더 극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다.
제 1차 임기가 끝날 무렵 잭슨은 보호관세 문제를 놓고 사우드캘로라이나주와 부득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 주의 실업계와 영농계 관계자들은 잭슨이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하여 자기들이 오랫동안 반대해 오던 관세법을 개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의 견해로는 보호의 모든 혜택이 북부의 제조업자들에게만 돌아가고, 또 국가는 전체적으로는 부강해지지만, 사우드캘로라이나주 만은 더욱 빈곤해져 대농장주들이 그 부담을 안게 된다는 것이었다.
1832년에 의회가 통과시켰고 잭슨이 서명한 새로운 보호관세법은 1828년에 제정된 것보다 내용이 완화된 것이었으나, 이는 사우드캘로라이나주의 많은 사람들을 한층 더 분개하게 만들었다. 이 관세법에 대응하여 일단의 사우드캘로라이나주 시민들이 '무효화'의 원칙에 대한 州의 권리를 찬성하고 나섰다. 이같은 州의 권리는 1832년까지 잭슨의 부통령으로 재직했던 존C. 캘하운이 자신이 작성한 "사우드캘로라이나주의 입장 해명 및 항의"(1828)라는 문서에서 천명한 것이다. 사우드캘로라이나 주의회는 이 관세법 문제를 다룸에 있어 "무효화영"을 채택했는데, 이 법령은 1828년의 관세법과 1832년의 관세법이 다같이 사우드캐로라이나주의 경계선 안에서는 무효라고 선언했다. 사우드캐로라이나 주의회는 또한 州의 군병력의 증강을 허용하고 무기 구입 자금을 영달하는 조치를 포함하여, 이 "무효화령"을 시행하기 위해 법률을 제정했다.
이 "무효화"는 그때까지 일어났단 연방정부의 권한에 대한 일련의 도전중 가장 최근의 것이었다. 주정부와 중앙정부 사이에는 거의 공화국 창견 때부터 중앙정부의 권한과 (주정부와 중앙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충성 문제를 놓고 계속적인 논쟁이 있어왔다. 예를 들어 1798년에 캔터키주와 버지니아주가 채택한 결의안은 외국인 단속법과 치안유지법을 반대했고, 하트포드회의에서는 잉글랜드 제주가 매디슨 대통령과 대영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잭슨은 사우드캘로라이나주가 가해오는 이같은 위협에 대응하여, 1832년 11월 소형 해군함정 7척과 전함 한 척을 찰스턴만으로 파견했다. 12월 10일, 그는 '무효화' 운동자들에게 강경한 포고문을 발표했다. 잭슨 대통령은 사우드캘로라이나주가 "반란과 반역의 일보전"에 서있다고 선언하고, 이 주의 주민들에게 그들의 조상이 투쟁하여 이룩한 연방에 대한 충성을 다시 천명하라고 호소했다.
의회가 관세문제를 다시 논의하게 되자 오직 한 사람, 즉 보호무역주의의 열렬한 주창자인 (그리고 잭슨의 정적인)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만이 의회가 타협 조치를 통과시키도록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명백해졌다. 1833년에 신속히 통과된 클레이의 관세법안은 수입품의 가치의 20퍼센트를 초과하는 모든 관세는 서서히 단계적으로 인하하여, 1842년까지에는 모든 물품에 대한 관세율이 1816의 적절했던 관세율 수준에 이르도록 한다고 명시했다.
사우드캘로라이나주의 "무효화" 운동 지도자들은 남부의 다른 주들의 지지를 기대했었으나, 남부의 여타 州들은 한결같이 사우드캘로라이나주의 노선이 현명치 못하며 위헌적이라고 선언했다. 사우드캘로라이나주는 마침내 행동을 철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방은 서로 승리를 주장하였다. 잭슨은 연방정부가 연방우위의 원칙을 확고히 따르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사우드캘로라이나주는 항거함으로써 그들의 요구 사항을 많이 얻어낼 수 있었으며, 또 단일 주가 연방의회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무효화"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잭슨의 영도력에 도전하는 또 다른 분쟁이 생겼다. 그것은 두 번째 '미국은행'(중앙은행)을 발족시키는 문제와 관계되는 것이었다. 최초의 중앙은행은 알렉산더 해밀턴의 주도하에 설립되었으며, 20년 동안 운영하도록 영업 허가가 났던 것이다. 정부가 이 은행의 주식의 일부를 가지고는 있었으나, 이 은행은 정부의 은행은 아니었다. 이 은행은 이익금이 주주들에게 돌아가는 민간회사였다. 이 은행은 통화를 안정시키고 무역을 자극하도록 구상되었었다. 그러나 이 은행이 소수의 유력한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고 잇는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미주리주출신 상원의원 하트 벤턴을 비롯한 서부 주민들과 근로자들은 이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1811년 이 은행의 영업허가 기한이 만료되었으나 갱신되지 않았다.
그 후 수년 동안 중앙은행의 금융 기능이 주로부터 영업 허가를 받은 은행들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이들 은행이 과도한 액수의 통화를 발행하자 큰 혼란을 일으켰고 통화 팽창을 부채질했다. 주립은행들이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화폐를 공급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백해졌고, 1816년에 첫 번째 것과 비슷한 두 번째 중앙은행이 20년간의 영업허가로 설립되었다.
이 두 번째 중앙은행은 설립초부터 새로 생겨난 주와 영토들에서, 또 전국 도처의 잘살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없었다. 반대자들은 이 은행이 이 나라의 신용대부권과 통화 운영을 실질적으로 독점하고 있으며, 소수 부유층의 이익을 대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체적으로는 이 은행은 운영이 잘되었고, 소중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 은행에 반대하는 인기 있는 투사로서 대통령에 당선된 잭슨은 이 은행의 영업허가 갱신을 위한 법안을 거부했다. 그는 의회에 보낸 교서에서 "이 나라의 부유한 사람들은 동등한 보호와 동등한 혜택에 만족하지 않고, 의회의 조치를 통해 우리(행정부)가 그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어 주도록 간청해왔다."고 지적하면서 독점과 특전을 규탄했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번복시키려는 의회의 노력은 실패했다.
다음 선거운동에서 이 중앙은행 문제는 상인, 제조업자 그리고 (전반적으로 통화 긴축과 고금리를 찬성하는 채권자들은) 금융업자들을 망라하는 계층과, 은행에 흔히 빚지고 있으며 따라서 저금리를 찬성하는 근로자와 영농자들의 계층 사이를 근본적으로 분열시켜 놓았다. 그 결과는 "잭슨주의"에 대한 열렬한 지지로 나타났다. 잭슨은 자기가 1832년 재선된 것은 이 은행을 재기할 수 없게 부숴버리라는 국민들의 위임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이 은행에 공공자금을 이체할 수 잇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는, 이 읂애의 영업허가 규정을 손쉽게 무기로 사용할수 있음을 알았다. 1833년 9월 그는 정부자금을 더 이상 중앙은행에 예금하지 말 것과, 이미 예치된 자금도 정부의 지출에 맞추어 정상적인 방식으로 점차적으로 인출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 대신 엄격히 제한된 수의, 조심스럽게 선정된 주립은행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다음 한 세대 동안 미국은 비교적 규제되지 않은 주립 금융기관에 의지하게 되었는데, 이는 저렴한 금리의 신용 대부를 통해 서부에로의 팽창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했으나, 이 나라를 계속해서 정기적인 공황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남북전쟁 때에 가서야 비로소 국립 금융기관에 영업을 허락했다.
잭슨의 정적들은 서로 엇갈린 목적을 가지고 있는 한 성공할 가망이 없었으므로, 불만을 가진 모든 파당들을 휘그(Whig)라는 이름의 단일 정당으로 규합하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1832년의 선거 바로 후에 이 정당을 조직했지만, 서로 이견을 조정하고 정강을 기초할 수 있기까지에는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휘그당은 1836년의 선거에서도 여전히 분열되어 단일 후보를 추대하거나 공동의 정강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잭슨의 부통령인 뉴욕주 출신 마틴 밴 부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임기중의 경제 불황과, 전임대통령의 인품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밴 부렌 자신은 빛을 내지 못했다. 그에게는 잭슨의 일거일동에 나타났던 리더쉽의 인상적인 특질과 극적인 재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취한 공적인 행동은 열렬한 환영을 받지 못했다. 1840년의 선거 때는 불경기와 저임금으로 국가가 어려운 형편에 있었으므로 민주당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휘그당의 대통령 후보인 오하이오주 출신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對인디언 전투와 다울러 1812년의 영미전쟁의 영웅으로서 인기가 대단했기 때문에, 잭슨처럼 민주적인 서부를 대표하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주의 권리와 저관세에 대한 견해로 남부에서 인기가 있었던버지나아주 출신인 존 타일러를 부통령 후보로 하여, 해리슨은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68세인 해리슨 대통령은 취임한지 1개월도 못되어 사망하고, 타일러가 대통령이 되었다. 타일러의 신념은 이나라에서 아직도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클레이와 웨브스터의 신념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하여 타일러의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이같은 이견은 타일러와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당 사이에 노골적인 분열을 낳게 했다.
하지만, 미국민들은 휘그당과 민주당 사이의 단순한 파당적 갈등 이상의 복잡한 방식으로 자신들이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예를 들어, 19세기 전년기에 주로 아일랜드계와 독일계의 많은 카톨릭 교도 이민들이, 신교도인 미국 태생 미국인들 사이에 반발을 자아냈던 것이다.
移민들은 미국에 기이한 새로운 습관과 새로운 종교적 관행 이상의 것을 가져왔다. 그들은 동해안 연안지역의 도시들에서 일자리를 놓고 미국 태생 미국인들과 경쟁을 벌였다. 더욱이, 1829년대와 1830년대의 정치적 변화는 외국 태생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이 20년 기간에 주헌법들은 백인남자의 보통선거권을 허용하도록 수정되었다. 이는 문벌좋은 정치인들에 의한 정치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권력을 상실한 것을 이민들의 탓으로 돌렸다. 마침내 가톨릭교회가 금주운동을 뒷받침하지 않음으로써, 이는 로마 카톨릭교회가 술을 통해 미국을 전복시키고자 시도하고 있다는 비난을 낳게 했다.
이 기간에 생겨난 미국 본토박이들의 단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체는1849년에 창설된 비밀 결사인 '성조기회'였다. 이 조직의 회원들은 자신의 신원을 밝히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곧 세인들에 의해 (이들이 누구인지 아는바가 없다는 뜻에서) 'Know-Nothing"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853년 뉴욕시의 'Know-Nothing'들은 총회를 조직했고, 이 총회는 그들의 州조직을 중앙 통제하기 위한 규약과 의식을 제정했다.
"Know-Nothing"당의 주목적은 외국인의 귀화에 필요한 조건인 미국 거주 기간을 5년에서 21년으로 연장하고, 외국 태생자와 가톨릭교주를 공직에서 배제하는 일이었다. 1855년 이 당은 뉴욕주와 매사추세츠주의 의회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에는 90명이나 되는 연방의회 의원들도 역시 이 당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노예 문제를 둘러싼 당내의 이견은 이 당이 전국적 정치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남부으ㅟ "Know-Nothing"들은 노예제도를 지지한 반면, 북부의 당원들인 이에 반대했다.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를 지명하기 위해 1856년에 열렸던 이 당의 대회에서 (1850년의)"미주리 타협안"을 지지하도록 하는 동의가 부결되자 42명의 북부 대의원들이 퇴장했고, 마침내 이 정당은 전국적 정치 세력으로서의 존재를 잃었다.
잭슨의 대통령 당선이 보여준 정치에 있어서의 민주적 격변은, 미국인들이 모든 시민을 위한 보다 많은 권리와 기회를 오랫동안 추구해 온 그 노력의 한 국면에 불과했다. 또다른 국면은 노조의 시작이었다. 1835년,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노동 세력들은 그때까지의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의 하루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줄이는 데에 성공하였다. 뉴햄프셔주, 로드아일랜드주, 오하이오주 그리고 1850년에 연방에 새로 편입된 캘리포니아주에서도 이와 비슷한 개혁이 시작되었다.
참정권의 확대로 사람들은 이미 교육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갖게 되었는데, 어디에서나 총명한 정치가들은 교육을 못받은 문맹자들까지도 보통선거권을 갖게 될 때의 위협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뉴욕주의 드위트 클린턴, 일리노이주의 에이브러햄 링컨, 그리고 매사추세추주의 호레이스 만 등은 노동단체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 노동 단체의 지도자는 세금으로 뒷받침되는 무료학교를 모든 아동들을 위해 세울 것을 요구했다. 점차적으로 여러 주가 차례찰O로 그러한 무료 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법을 제정하였다. 그리하여 이 나라 북부 전역에서는 공립학교제도가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이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는 공립학교 교육을 위한 투쟁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대두한 또다른 영향력있는 사회운동은 주류 판매와 음주에 대한 반대, 즉 금주운동이었다. 이 금주 운동은 종교적 신념, 근로계층에 미치는 음료의 영향, 부녀자들이 폭음한 남자들로부터 당한 폭행과 고통 등 다양한 관심사와 동기에서 나왔다. 1826년 보스턴의 목사들은 금주촉진협회를 조직했다. 7년 후 이 협회는 필라델피아에서 전국대회를 소집했고, 이 대회는 미국금주연맹을 결성했다. 이 연맹은 모든 주정 음료수의 폐기를 요구했고, 주의회에 대해 주류의 생산과 판매를 금지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1855년에 와서는 13개 주가 금주법을 시행했다. 하지만, 이 법은 후에 법원에서 그 타당성 여부를 심리받게 되었다. 금주법은 북부의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만 존속하였다. 그러나 1830년부터 1860년 사이에 금주운동은 미국인의 1인당 주류 소비를 낮추었다.
다른 개혁운동가들은 교도소 문제와 정신이상자들을 돌보는 문제를 다루었다. 그들은 처벌에 중점을 둔 감옥을 범법자들이 사회복귀를 준비하도록 교도하는 장소로 바꾸고자 노력하였다. 매사추세츠주에서는 도리어 딕스가 정신이상자들을 위한 환경개선을 위해 애썼다. 당시 정신이상자들은 환경이 열악한 사설 구빈원과 감옥에 감금되었었다. 매사추세츠주에서 이들을위한 환경개선 운동에 성공한 후, 그녀는 남부로 옮겨가서 이 운동을 벌였는데, 남부에서는 9개 州가 1845년부터 1852년 사이에 정신이상자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했다.
이같은 사회 개혁들은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사회에서의 자신들의 불평등한 지위를 깨닫게 만들었다. 식민지 시대부터 미혼녀성들은 비록 사회 관습상 일찍이 결혼해야 했지만, 남성들과 동일한 법적 권리를 많이 누려왔다. 그러나 여성들은 결혼을 하게 되면 법 앞에서는 독립된 신분을 사실상 상실했다. 여성들에게는 투표권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교육은 17세기와 18세기에는 주로 읽기, 쓰기, 음악, 무용 및 바느질에 국한되었다.
여성의 각성은 스코틀랜드의 강연자이며 언론인인 프란시스라이트가 미국을 방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녀는 1820년대에 미국 전역에 걸쳐 미국여성의 권리를 공적으로 신장시켰다.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말하는 것이 흔히 금지되었던 시기에, 라이트는 소신을 피력했을 뿐만 아니라 산아제한과 이혼에 관한 정보를 구하는 여성의 권리를 주창하는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청중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1840년대에 와서 첫 여권운동을 다지게 될 일단의 미국 여성들이 등장했다. 이 저명한 집단 중에서 첫째로 꼽히는 여성은 엘리자베드 캐디 스탠튼이었다. 1848년에 캐디 스탠튼과 또다른 여권주창자인 루크리셔 모트는 뉴욕州 세네카 폴주에서 세계 역사상 최초의 여권신장대회를 조직했다. 대위원들은 법률 앞에서의 남녀평등, 투표권 및 교육과 취업에서의 기회 균등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같은 해에, 폴란드 출신 이민인 어네스틴 로즈는 기혼녀성들이 재산을 결혼 전의 이름으로 계속 유지하는 것을 허용한 법률을 뉴욕州에서 통과하게 만드는 것을 도왔다.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정된 이 종류의 법률 중에서, '기혼여정의 재산에 관한 법'은 다른 州에서도 이와 비슷한 법률을 제정하도록 고무했다.
1869년 로즈는 엘리자베드 캐디 스탠튼과 또다른 굴지의 여권운동가인 수진 B. 앤토니를 도와 전국 여성참정권협회를 창설했는데, 이 협회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기 위한 헌법개정을 주창했다. 로즈와의 유대 관계를 묘사하면서 캐디 스테이튼은 "나는 벼락을 만들었고 그녀는 이 벼락을 터뜨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변방은 미국생활을 형성하는 데서 많은 역할을 하였다. 대서양 연안 전체의 사정은 새로운지역으로서의 이주를 재촉했다. 곡물을 많이 생산해 낼 수 없는 토양 조건이 던 뉴잉글랜드지방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안 지대에 있는 그들의 농장과 마을을 버리고 내륙의 기름진 땅을 찾아 줄을 지어 떠났다. 북캐로라이나주 및 버지니아州 오지의 정착지에서는 해안지방의 시장으로 통하는 도로와 운하가 없어 불리한 입장에 있었던, 또 해안지대의 대농장주들의 정치적 지배로 고통을 겪어 온 주민들이 역시 서부로 이주했다. 그리하여 1800년까지에는 미시시피강과 오하이오강 유역은 크게 발전한 변방지역이 되고 있었다. "하이오! 우리는 간다. 오하이오강을 타고 우리는 간다!"라는 노래는 수많은 이주민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19세기 초에 인구가 이와 같이 서부로 이동함으로써 舊영토를 갈라 새로운 경계선을 긋게 되었다. 새 주들이 연방에 편입됨에 따라 미시시피강 이동의 정치 판도는 안정되었다. 1816부터 1821년 사이의 기간에 6개 주, 즉 인디애나주, 일리노이주 및 메인주 (이상은 자유주)와, 미시시피주, 엘라배마주 및 미주리 주(이상은 노예주)가 새로이 탄생했다. 아메리카로 건너온 최초의 변방 정착민들은 유럽과 긴밀한 유대를 가졌고, 그 다음 정착민들은 연안 지대의 정착지와 밀접한 유대를 가졌으나, 미시시피강 유역의 개척민들은 독립심이 강했고, 동부보다는 서부로 눈을 돌렸다.
변방의 정착민들은 다양한 집단이었다. 한 영국인 여행가는 "초라한 오두막에서 사는 대담하고, 강인한 사람들 ... 그들은 세련되지 않았지만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고, 낯설은 사람들에게도 친절하며, 정직하고 믿음직스럽다. 그들은 인디언 옥수수와 호박을 좀 심고, 돼지와 때로는 한 두 마리의 소도 기른다...그러나 그들이 의지하는 주요한 생활수단은 총이다"라고 기술했다. 도끼질과 덫사냥을 잘하고, 낚시질에 익숙한 그들은 숲을 태워 길을 냈고, 최초의 통나무 오두막을 지었으며, 그들에게 땅을 점령당한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대결했다.
더욱 더 많은 정착민들이 황야로 침투해 들어가 사냥꾼이 되고 농부가 되기도 했다. 오두막 대신, 유리창문과 굴뚝도 있고, 방들도 칸막은 편안한 통나무집을 지었다. 옹달샘 대신 우물을 팠다. 부지런한 정착민들은 수목을 베어내고 농토를 만들었고, 나무를 태워 잿물을 만들었으며, 그루터기는 썩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먹을 곡식, 채소 및 과일으 가꾸었고, 숲속에서 사슴과 야생 칠면조를 사냥하고 벌꿀을 채취했고, 가까운 시내에서 낚시질을 했으며, 소와 돼지를 길렀다. 토지 투기꾼들은 값싼 땅을 많이 사가지고 있다가 땅값이 오르면 이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 넘기고 더욱 먼 서부로 옮겨갔다.
농부들의 뒤를 따라 의사, 변호사, 상인, 간행물의 편집인, 전도사, 기계공 및 정치인들이 곧 이주해갔다. 하지만, 농부들이 그 사회의 튼튼한 토대가 되었다. 그들이 한 곳에 정착할 때에는 거기서 오래 살면서 그들의 자녀들도 그곳에 남아 살기를 바랬다. 그들은 큰 헛간과 튼튼한 벽돌집이나 목조 가옥을 지었다. 그들은 개량종 가축을 길렀고, 땅도 슬기롭게 갈았으며, 수확이 많은 씨앗을 뿌렸다. 제분소와 제재소, 그리고 양조장을 세운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간선도로도 만들었고, 교회와 학교도 세웠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거의 믿기 어려운 변화가 생겼다. 예를 들어 1830년에는 일리노이주의 시카고는 요새가 하나 서있는 보잘 것 없는 교역촌이었다. 그러나 첫 정착자들이 다 죽기도 훨씬 전에 시카고는 이 나라의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농장은 얻기가 용이했다. 1820년 이후에는 정부가 소유하는 땅 약 半헥타르를 1.25달러로 살 수 있었고, 1862년에 홈스테드법(Homestead Act)이 제정된 이후로는 정부 소유 땅에 정착하여 개간하기만 하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농기구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 시기는 존 술레가 썼고, 호레이스 그릴리라는 기자에 의해 대중에게 보급된 구절에서 보듯이, 젊은이들이 "서부로 가서 나라와 더불어 함께 자랄 수 있는"시기였다. 뉴잉글랜드지방과 남부에서 이주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살던 지역의 많은 이상과 제도를 가지고 서부로 갔다.
미국의 경계를 넘어 멕시코영인 텍사스로 이주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1840년까지는 농업 개척지의 서부로의 지출이 미주리를 넘지 못하였다. 1819년에는 미국시민의 청구권 500만 달러를 부담하는 대가로,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와 극서부의 오리건지방에 대한 스페인의 권리를 차지했다. 한편 극서부는 모피교역의 큰 활동무대가 되었는데, 이 교역은 단순한 모피의 가치를 훨씬능가하는 의의를 갖게 되었다. 프랑스人들이 미시시피강 유역을 탐험하던 초기에서처럼, 모피상들은 미시시피 이서지역에 정착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도자 역할을 했다. 덫으로 짐승을 잡는 프랑스人 및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인 모피사냥꾼들은 큰 江들과 그 支流를 탐험하고 록키산맥과 시에라산맥을 넘는 모든 고갯길을 찾아내 1840대의 대륙횡단 이동을, 그리고 그 후의 내륙오지점거를 가능하게 하였다.
전반적으로 이 나라는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다. 인구는 1812년부터 1852년 사이에 725만 명에서 2,3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정착 가능한 토지는 거의 유럽 대륙의 크기만큼, 즉 440만 평방 킬로미터에서 780만 평방 킬로미터로 늘어났다. 하지만 파당적 이견에 뿌리를 박은 근본적인 갈등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었으며, 이같은 갈등은 1860년대에 가서 내전(남북전쟁)으로 폭발하게 된다. 하지만 이같은 서부로의 확장은 불가피하게 정착민들을 이 땅의 원래 주민, 즉 인디언들과의 충돌로 몰고갔다.
19세기 초에, 인디언들과의 이같은 충돌과 관련하여 가장 저명한 인물은 백악관의 주인이 된 첫 "서부인"인 앤드류 잭슨이었다. 1812년 전쟁(영미전쟁)이 한창일 때, 당시 테네시州 민병대 사령관이던 잭슨 앨라배마 남부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크리크부족 인디언들의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크리크부족들은 곧 그들의 땅의 3분의 2를 미국에 할양했다. 잭슨은 후에 스페인領 플로리다의 은신처에 있던 여러 무리의 (크리크부족의 분파인) 세미놀부족 인디언들을 패주시켰다.
1820년대에 먼로 대통령의 육군장관 전 C. 캘하운은 남아있는 인디언 부족들을 그들이 살던 남서부 지역에서 미시시피 이서지역으로 옮겨 재정착 시키는 정책을 추구했다. 잭슨도 대통령이 되자 이 정책을 계속했다.
1830년 의회는 인디언 철한법을 통과시켜, 동부지역의 인디언부족들을 미시시피 이서 지역으로 수송하는 자금을 제공했다. 1834년에 지금의 오클라호마주에 인디언 특별 지역이 설정되었다. 인디언 부족들은 잭슨의 두 번에 걸친 임기 동안에 미국정부와 94개에 달하는 조약을 체결하여, 수백만 헥타르에 달하는 그들의 땅을 미국정부에 할양했고, 수십에 달하는 인디언 부족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고향땅에서 철거당했다.
이 불행한 역사에서 가장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章은 체로키부족과 관계된 것인데, 노드캐롤라이나州와 조지아주에 있는 그들의 영토는 1791년이래 조약에 의해 보장되어 왔었다. 동부 지역 인디언 부족들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부족에 속했던 체로키부족의 운명은 1829년에 그들의 땅에서 금이 발견됨으로써 결정되고 말았다. 1835년 잭슨 행정부의 묵낙아래 체로키부족들은 오클라호마까지의 길고도 잔인한 여행을 강요당햇다. 많은 인디언들이 "눈물 자국"이라고 알려지게 된 고난에 찬 이 여정에서 질병과 궁핍 속에서 죽었다.
초기의 여권신장원동력인 엘리자베드 캐디 스탠턴은 열렬한 노예제도 폐지운동자인 루크레시아 모트가 자신의 동지임을 알았는데, 이는 이들 두 여인이 1840년 런던에서 열린 반노예제도대회에서 서로 만났을 때의 일이었다. 대회가 개막되자 이들 두 여인에게는, 이 대회에서 여성 대의원들이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발언은 물론 대회장에 참석하는 것조차 금지되자 캐디 스탠턴과 모트는 다른 여성 대의원들을 데리고 대회장에서 퇴장함으로써 이에 항의했다. 이때 캐디 스탠턴은 모트에게 여성의 사회적, 공민적 및 종교적 권리를 다루게 될 여권신장대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이 대회는 8년동안 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들 두 여인이 조직한 첫 여권신장대회가 마침내 1848년 뉴욕주의 세니카 폴에서 개최되었다.
이 모임에서 캐디 스탠턴은 독립선언문 형식을 본딴 '소감 선언문'(Declaration of Sentiments)을 발표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압박에 항의하는 18개의 불만 사항을 열거했다. 이들 불만사항 중에는 기혼 여성이 학대를 일삼는 남편을 떠나거나 남편과 이혼할 경우 자녀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사항도 있었다. 만약 여성에게 이혼이 허락되는 경우에는 이혼녀가 저술이나 교직을 택하지 않는 한 그녀에게는 전문적인 生計 수단이 없었다. 여성은 법정에서 남편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 것이 인정되지 않았다. 공장에서 일하는 기혼 여성들은 번 돈을 간직할 권리가 없었고, 그 돈을 남편에게 넘겨주어야만 했다. 여성이 결혼하면 미혼 때에 갖고 있었던 재산은 모두 자동적으로 남편의 재산의 일부가 되었다. 재산을 소유하는 독신여성들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입법자들을 선출하는 권리는 부여하지 않으면서 세금이 부과되었는데 이는 바로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영국으로부터 떨어져나온 바로 그 이유들 중의 하나였다.
대회 참석자들은 여성의 참정권을 제외하고는 결의안들을 만장 일치로 통과시켰다. 흑인인 노예제도 금지운동자 프레드릭 더글러스가 여성의 투표권에 찬성하는 정열적인 대다수가 여성의 투표권 행사를 추진하는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햇다.
세니카 폴에서 열린 이 대회를 통해, 캐디 스탠턴은 웅변적인 문필가로서 또 여권의 대변자로서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녀는 투표권없이는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되는 목표를 결코 달성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자신이 일찍부터 깨달았었노라고 말했다. 노예제도 금지운동자인 개혁가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을 자신의 여권신장운동에서의 모델로 삼은 그녀는 이 운동의 그 어떤 노력에서도 성공의 열쇠는 정당 활동이 아니라 여론을 변화시키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여성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괴로움을 안겨주는 불의에 대해 각성하게 함으로써, 세니카 폴에서 열린 여권신장대회는 장래의 변화를 위한 촉매가 되었다. 이로써, 다른 여권신장대회들도 열렸고, 다른 여성들도 여성의 정치적 및 사회적 평등을 위한 운동의 최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미국 지도 펼쳐 보고 미국 여행 하자.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지도 검색 블로그)
|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자치정부를 가질 권리가 있다." -- 토마스 제퍼슨, 1790. |
아메리카 식민지 사람들은 독립전쟁에 성공함으로써 독립선언문에 표명된 자기들의 정치적 이상을 법적으로 구체화하고, 일부 불만 사항을 주헌법을 통하여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대륙회의는 1776년 5월10일에 벌서 “선거구민들의 행복과 안전을 가장 잘 도모할 수 있는” 정부를 수립하도록 식민지의 각 주에 종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식민주 중에는 이미 새 정부를 조직한 주도 더러 있었으며, 독립이 선언된 지 1년도 못되어 3개 주를 제외하고는 모든 주가 헌법을 기초했다.
이들 새 헌법에는 민주적 이념의 영향이 나타나 있었다. 그 어느 헌법도 과거와 과감하게 결별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식민 시대의 경험과 영국의 관행의 굳은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헌법마다가 또한 계몽철학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찬양되어 왔던 이상인 공화주의의 정신에 의해 고무되었다.
주헌법 기초자들의 첫째 목적이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확보하는 데에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권리가 침해당했기 때문에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과의 관계를 끊게된 것이다. 그래서 각 주의 헌법은 권리의 선언이나, 권리장전으로 시작하고 있다. 다른 모든 주헌법들의 모델이 된 버지니아주 헌법에는 국민주권, 관직의 교대제도, 선거의 자유, 그리고 기본적인 자유권의 세목--즉 적절한 보석과 인도적인 처벌, 배심에 의한 신속한 재판, 언론과 양심의 자유, 그리고 정부를 개혁하거나 바꿀 수 있는 다수파의 권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주들은 자유권의 목록을 확대하여 여기에 언론, 집회 및 청원의 자유의 보장을 추가했으며, 총기를 휴대할 권리, 인신보호영장제도에 의한 보호를 받을 권리, 주거의 불가침과 법의 평등한 보호를 받는 권리 등과 같은 규정을 포함시키는 일이 흔히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주헌법들은 정부를 행정부, 입법부 및 사법부로 나누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도모하게 하는 3권분립 체제에 충실하였다.
펜실베니아주 헌법은 가장 급진적이었다. 이 주에서는 필라델피아의 기술공,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변경개척자, 그리고 독일계 농민들이 지배적인 존재였다. 주대표자회의는 모든 남성 납세자와 그들의 아들을 투표할 수 있게 하고, 관직을 교대로 맡게 하고 (그 어떤 대표자도 7년 기간 중 4년 이상을 관직에 머물 수 없었다), 단원제 입법부를 설치하는 헌법을 택했다.
주헌법들에는 명백한 한계점들이 있었다. 인민의 천부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제정된 헌법들은 가장 기본적인 천부의 권리를--즉 평등을--모든 사람에게 확보해 주지는 않았다. 펜실베니아주 이남의 식민지들에서는 노예들로부터는 인간으로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배제했다. 여성들에게는 정치적 권리가 없었다. 그 어느 주도 보편적인 남성 참정권을 허용하려고는 하지 않았는데, 모든 납세자들이 투표하는 것을 허용한 주들(펜실베니아주 외에 델라웨아주, 노드캐롤라이나주 그리고 조지아주)에서조차도 공직자들은 일정한 액수의 재산을 소유해야 하도록 규정하였다.
영국과의 투쟁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태도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1754년에 지방 의회들은 자기들의 자치권의 조그마한 부분까지도 다른 기관에게, 심지어 자기들 자신이 선출한 기관에게 양도하는 것까지 거부함으로써 올바니연방안(Albany Plan of Union)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독립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상부상조하는 것이 효과적임을 알게 되자 개별적인 권한을 포기하는 데서 생기는 두려움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존 딕킨슨이 1776년에 ‘연합규약과 영속적인 연합(Article of Confederation and Perpetual Union)안을 제시했다. 대륙회의는 1777년 11월 이를 채택했고, 모든 州가 이를 추진함으로써 1781년부터 실시되었다. 이 규약에 의해 수립된 정부의 뼈대에는 약점이 많았다. 중앙정부에는 필요할 때 관세를 설정하고, 상행위를 규제하며,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이 없었다. 중앙정부에는 오직 중앙정부 만이 가질 수 있는, 국제관계를 통제하는 권한이 없었는데, 여러 주들이 외국과 독자적인 교섭을 하기 시작했다. 9개 주가 독자적으로 육군을 조직했으며, 몇몇 주들은 독자적으로 해군을 갖기도 했다. 괴상한 재화들이 잡다하게 많았으며, 주정부와 중앙정부가 발행한 온갖 지폐들은 그 가치가 급속도로 하락하였다.
독립전쟁 후의 경제적 어려움은 변화에 대한 요구를 촉진시켰다. 독립전쟁의 종식은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쌍방의 군대에 보급 물자를 공급했던, 그리고 영국의 상업 체제에 참여함으로써 얻는 유리한 조건을 잃게 된 상인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주들은 그들의 관세정책에서 미국의 물품에 특혜를 부여했는데, 그러나 이들 관세는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력한 중앙정부가 균일한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요구를 낳게 했다.
농민들이 독립전쟁에 이어 일어나 경제적 어려움의 고통을 어쩌면 가장 많이 겪었다. 농산물의 공급은 수요를 초과했고, 주로 채무가 많은 농민들 사이에 불안이 감돌았다. 그들은 저당 잡힌 자기들의 재산이 유실되는 일이 없도록 다짐해주는, 또 채무로 해서 투옥되는 일이 없도록 해주는 강력한 구제책을 바라고 있었다. 법원들에는 채무소송 사건이 가득 밀려 있었다. 1786년 여름 내내 몇몇 주에서 열린 주민대회와 비공식 회합에서는 주행정의 개혁을 요구했다.
1786년 가을 전 육군대위 다니엘 셰이즈의 지휘아래, 메사추세츠주의 농민 폭도들은 다음 주선거 때까지 군법원이 채무관계의 재판을 더 이상 하지 못하도록 힘으로 방해하기 시작했다. 1787년 1월 1,200명 농부들의 오합지졸 군대가 스프링필드에 있는 연방 병기차를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주로 장대와 갈퀴로 무장한 폭도들은 소수의 민병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때 벤자민 링컨장군이 보스턴으로부터 군을 이끌고 도착하여 남아있는 셰이즈 일당의 폭도들을 패주시켰고, 폭도들의 지도자는 버몬트로 도망했다. 정부는 폭도 14명을 체포하고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마침내 일부는 사면되고 다른 폭도들은 단기형을 복역한 후 석방되었다. 이 폭동이 실패한 후, 대다수가 폭도들에 동정적이었던 새로 선출된 주의회 의원들은 채무를 구제해 달라는 이들의 요구의 일부를 충족시켜 주었다.
독립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오래 전부터 해결되지 않고 있던 서부의 문제--복잡한 토지 문제가 수반된 영토확장의 문제, 모피 교역 문제, 인디언 문제, 정착 문제 및 속령의 통치 문제 등에 다시 직면해야 했다. 개척자들은 이 나라의 가장 기름진 땅에 유혹되어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내륙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1775년까지에는 수로를 따라 널리 흩어져 있는, 변경의 최전방 개척촌들에 수만 명이 살고 있었다. 산맥에 의해 분리되고, 동부의 정치적 중심지로부터 수백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사는 이들 개척민들은 자기들 자신의 정부를 수립했다. 모든 정착민들은 내륙의 기름진 강유역 울창한 삼림지대와 널따란 초원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리하여 1790년에 와서는 애팔래치아산맥 서쪽의 인구는 12만 명을 훨씬 넘었다.
독립전쟁 전에 몇몇 식민주들은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의 땅에 대해 흔히 이중 삼중으로 광범한 소유권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한 소유권을 내세우지 않았던 주에게는 이 기름진 땅이 공평하지 못하게 분배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메릴랜드주는 이들 후자의 대변인 격으로, 서부의 영토는 의회가 자유·독립 정부들에게 분할해 주어야 할 공유재산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안(案)은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1780년 뉴욕주는 솔선해서 서부영토 요구권을 합중국(중앙정부)에 양도했다. 1784년에는 가장 넓은 영토에 대한 요구권을 가졌던 버지니아주가 오하이오강 이북의 영토에 대한 요구권을 포기했다. 다른 주들도 그들의 영토 요구권을 포기했는데, 의회가 오하이오강 이북과 앨리게니 산맥의 모든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수백만 헥타르에 달하는 땅을 이렇게 공동의 소유로 하였다는 것은 국가의식과 통일의식이 존재하였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으며, 주권국가의 아이디어에 어떤 실질적 내용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같은 광대한 영토는 해결을 필요로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 문제는 연합규약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이 규약 아래, ‘북서영토’의 조직을 규정하는 제한된 자치제도(이는 1787년의 ‘북서부령(Northwest Ordinance)'에서 공포되었음)가 마련되었다. 시초에는 이 영토를 단일 행정 구역으로 하여 의회가 임명하는 지사와 판사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이 영토의 투표 연령에 달한 남자 주민의 수가 5,000 명에 달하게 되면 이 북서영토는 양원으로 구성된 입법부를 가질 수 있으며, 하원 의원은 주민이 직접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북서영토는 그 당시 투표권이 없는 대표를 의회에 보낼 수 있었다.
이 서부영토에는 3개 이상 5개 이하의 주를 두도록 되어 있었으며, 그 중 어느 주든 자유인인 주민의 수가 6만 명에 달했을 때에는 “모든 면에서 원래의 (13개) 주들과 동등한 조건으로” 연방에 가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 북서부는 민권을 보장했고 교육을 고무했으며, “상기 북서영토에는 노예제도나 자의에 의하지 않는 노역은 없음”을 보장했다.
이 새로운 정책은 식민지란 모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정치적으로는 종속적이고, 사회적으로는 열등하다는 옛날부터의 관념을 거부하였다. 그 관념은 식민지란 국가의 연장에 불과하며, 평등의 모든 혜택을 특전으로서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서 받을 자격이 있다는 원칙에 의해 대치되었다. 북서부령의 이 같은 개화된 규정들은 아메리카의 공유지정책의 기초를 다져놓았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 독립전쟁을 종결시켰던 강화조약인) 파리조약(Treaty of Paris)과 미국헌법이 기초될 때까지의 기간을 묘사하면서 주들이 겨우 “모래로 만든 줄”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썼다. 포토맥강 운선권을 둘러싼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 사이의 분규로 1786년 메릴랜드주 아내폴리스에서 5개 주의 대표자 회의가 열렸다. 대표자의 한 사람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상업은 다른 정치적 및 경제적 문제들과 너무 얽혀 있으며, 그 자리에 모인 국한된 대표자들만으로 다루기에는 사태가 너무 심각하다고 동료 대표자들을 설득했다.
해밀턴은 모든 주에 대해, 이듬해 봄 필라델피아에서 열리게 될 회의에 참가할 대표자를 임명하도록 촉구했다. 대륙회의는 처음에는 이 대담한 조치에 분개했으나, 버지니아주가 워싱턴을 대표로 선출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항의를 곧 중단했다. 그 다음 가을과 겨울 동안 로드아일랜드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선거가 실시되었다.
1787년 5월 필라델피아의 주의사당에서 열린 연방회의(Federal Convention)는 각사들의 집회였다. 각 주의 의회는 식민지 정부와 주정부, 대륙회의 법조계 및 군대의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들을 회의에 보냈다. 성실한 인격과 독립정쟁 중의 군사적 지휘 능력으로 해서 이 나라의 출중한 시민으로 인정되고 있던 조지 워싱턴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활동적이 대표들 중에서도 출중한 사람은 펜실베니아주의 두 대표였다. 즉, 중앙정부의 필요성을 명확히 간파한 유능하고 대담한 구버뉴어 모리스, 그리고 국가의 이상을 위해 지칠 줄 모르고 활동한 제임스 윌슨이었다. 버지니아주 대표는 제임스 매디슨이었는데, 그는 실제적이 젊은 정치가이며, 정치와 역사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동료의 말에 의하면, “근면하고 지성스러운 인물이며 ... 토론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나 가장 소상히 알고 있었다.” 매디슨은 오늘날 “미합중국 헌법의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다.
매사추세츠주의 대표는 유능하고 경험이 풍부한 두 젊은이, 루퍼스 킹과 엘브리지 게리였다. 코네티컷주 대표의 한 사람은 제화공으로부터 판사가 된 로저 샤먼이었다. 뉴욕주의 대표는 이 연방회의를 제안한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다.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던 대표는 미국공사로서 프랑스에서 근무하던 토마스 제퍼슨과, 역시 똑같은 임무로 영국에 가있던 존 애덤스였다.
연방회의는 연합규약 개정안을 기초할 권한이 부여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후일에 매디슨이 기술한 것처럼 대표들은 “자기들의 나라에 대해 사나이다운 확신을 갖고” 연합규약을 제쳐놓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수립하는 일을 추진해 나갔다.
그들은 두 가지 상이한 권력--즉, 반(半)독립적인 13개 주가 이미 행사하고 있는 지방 관할권과 중앙정부의 권한--을 조절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들은 중앙정부의 기능과 권한은 새로운 것이고 전체적이며 포괄적인 것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정의되고 진술되어야 하며, 한편 그 밖의 다른 모든 기능가 권한은 주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채택했다. 그러나 대표들은 중앙정부에게는 무엇보다도 실권을 가져야 하고 상거래를 규제하고 전쟁을 선포하며 강화를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대체로 받아들였다.
필라델피아에 모였던 18세기 미국정치인들은 정치에 있어서 권력이 균형 되어야 한다는 몽테스키외의 사상의 신봉자들이었다. 이 원칙은 식민지 시대의 경험으로 뒷받침되었으며, 이 원칙은 대부분 대표들이 익히 알고 있는 존 록의 저서로 해서 더욱 굳게 신봉되었다. 이러한 사상의 영향은, 정부에는 동등하고 대등한 3개 부가 설치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낳게 했다. 즉, 입법, 행정, 사법의 3부는 어느 한쪽이 타(他)부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잘 조화되고 균형이 잡혀야 했다. 대표들은 입법부나 영국의회처럼 양원제로 되어야 한다는 데에 견해를 같이했다.
이러한 사항에 대해서는 이 회의에 모였던 모두가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의견의 차이가 생겼다. 예를 들면 뉴저지주 같은 작은 주의 대표들은 연합규약 아래 행해진 주대표제에 따름으로써 중앙정부에서의 자기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는 개정 조치에 반대하였다.
다른 한편, 버지니아주와 같은 큰 주의 대표들은 인구 비례대표제를 주장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은 로저 샤먼이 의회의 한 원, 즉 하원에는 인구 비례 대표제를 적용하고, 다른 한 원, 즉 상원에는 각 주가 동일하게 대표를 보내는 안(案)을 제시할 때까지 끝없이 계속될 기세였다.
큰 주와 작은 주 사이의 대립은 마침내 이렇게 해서 해소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 계속해서 일어나는 문제마다 새로운 대립을 낳았고, 오직 새로운 타협안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었다. 북부주의 대표들은 각 주의 세금 몫을 계산할 때 노예도 포함시켜서 산정하기를 원했으나, 주가 하원에서 차지할 의석수를 (인구 비례로) 결정할 때는 노예를 계산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거의 이의 없이 채택된 타협안에 따라, 각 주의 하원 의석수는 주의 자유인인 주민의 수에 노예의 수의 5분의 3을 합친 인구에 비례하여 배당하게 되었다.
다니엘 셰이즈 일당이 일으켰던 농민 폭동에 아직도 상심하고 있었던 로저 샤먼과 엘브리지 게리와 같은 일부 대표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자신들을 다스릴 만한 충분한 지혜가 없다고 우려했고, 따라서 연방정부의 어느 부도 직선제로 선출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다른 대표들은 중앙정부는 가급적 넓은 국민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일부 대표들은 성장일로에 있는 서부에 주로 승격될 기회를 주지 않기를 바랐고, 다른 대표들은 1787년의 서북부령에 의해 확립된 동등의 원칙을 창도하고 나섰다.
지폐와 같은 전국적인 경제 문제, 계약상의 의무에 관한 법률, 또는 정치에서 배제된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심각한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지역별 경제적 이해관계를 균형잡고, 행정수반의 권한, 임기 및 선출 방법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며, 법관의 임기와 법원의 종류에 관계되는 문제들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연방회의는 필라델피아의 여름의 더위를 무릅쓰고 강행군하여 마침내 짧은 문서 속에, 그때까지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복잡한 정부의 조직을--명확히 정의된 한정된 범위 내에서 최고의 정부조직을 구체화하는 초안을 완성했다. 연방회의는 연방정부에게 권력을 부여함에 있어서 과세, 자금 차입, 균일한 관세, 공과금 및 물품세 책정, 도량형 결정, 특허권 및 저작권의 수요, 우체국의 설립 등의 전권을 부여했다. 중앙정부에게는 또한 육군과 해군을 조직하여 유지하고, 주 사이의 교역을 규제하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중앙정부에게는 인디언 문제와 국제 관계를 관장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중앙정부는 외국인을 귀화시키고 공유지를 관리하기 위한 법률을 통과시킬 수도 있었으며, 구(舊)주와의 절대적 평등의 바탕에서 신(新)주를 연방에 가입시킬 수도 있었다. 연방정부가 갖는, 명확히 정의된 이 같은 권한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하고 적절한 모든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는 권한은, 연방정부로 하여금 그 후에 올 세대들과 크게 확대된 정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권력분립의 원칙은 이미 대부분의 주헌법에서 잘 시행되어 건전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연방회의는 입법, 행정, 사법을 별개의 부로 하여 상호 견제하도록 하는 통치체제를 수립했다. 그리하여 의회가 통과시킨 법도 대통령의 찬성 없이는 확장될 수 없게 되었으며, 한편 대통령은 자기가 행하는 가장 중요한 임명사항과 자기가 체결한 조약을 상원에 제출하여 인준을 받게 되었다. 또 대통령이 의회에 의하여 탄핵되고 해임될 수 있게 했다. 사법부는 연방의 법률과 헌법 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다루어야 했는데, 사실상 법원은 기본법(헌법)과 성문법을 해석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이 인준하는 법관도 의회에서 탄핵될 수 있게 했다.
헌법을 경솔하게 고치는 것을 막기 위해, (헌법) 제5조는, 헌법 개정안은 상하 양원의 의원 3분의 2에 의해 제안되거나, 또는 연방 전주의 3분의 2가 대회를 열어 제안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 개정은 전(全)주의 4분의 3의 입법부에 의한 비준이나, 또는 전(全)주의 4분의 3에서 열린 대회에 의한 비준의 두 방법 중, 의회가 제의하는 한 가기 방법에 의해서 비준되어야 한다.
마침내 연방회의는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새 중앙정부에 부여된 권한은 어떻게 행사되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였다. 연합규약 아래의 중앙정부는 문서상으로는 방대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권한은 각 주가 이 같은 권한을 존중하기 않았기 때문에 실제에 있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 새 중앙정부가 그와 똑같은 운명에 빠지지 않도록 구해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처음에는 대부분의 대표들은 무력사용이라는 한 가지 해결책만을 내놓았다. 그러나 각 주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면 연방이 깨지고 말리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도달한 결정인즉, 중앙정부는 주에 대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해 작용하는 것이며, 국가의 개개 주민들 모두를 위한, 그리고 그들에게 적용될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연방회의는 헌법의 요체로서 짤막하면서도 매우 의미심장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성명을 채택했다.
“의회는 이 헌법에 의하여 미국정부에게 부여된 권한의 행사를 위해 필요하고 적절한 모든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갖는다.....”
(헌법 제1조, 제7절)
“이 헌법과 이 헌법에 따라 제정된 미국의 법률, 그리고 미국의 권한으로 이미 체결되었거나 체결될 모든 조약은 이 나라의 최고의 법이다. 그리고 각 주의 법관은 각 주의 헌법이나 법률에 이와 반대되는 규정이 있다 하더라도 이 헌법의 제약을 받는다.”(헌법 제6조)
이리하여 미국의 법률은 연방정부의 법관과 치안관에 의해 연방법원에서 뿐만 아니라 각주의 법관과 사법관에 의해 주법원에서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헌법을 기초한 사람들의 동기에 관한 논쟁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1913년에 찰스 비어드는 그의 저서 <헌법의 경제적 해석>에서, 건국원로들이 강력하고 권위 있는 중앙정부가 강제적으로 이룩한 안정으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얻고자 했는데, 이는 그들이 가치가 절하된 많은 약수의 정부 채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헌법의 아버지”인 제임스 매디슨은 공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으며, 반면 일부 헌법 반대론자들은 거액의 공채와 채권을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논쟁의 방향에 영향을 주었고, 주들 사이의 이해관계, 지방적 및 이념적 이해관계도 역시 그러했다. 계몽주의의 소산인 건국 원로들은 개인의 자유와 공공적 미덕을 신장시키리라고 그들이 믿었던 정부를 고안해 냈다. 미국헌법에 구현된 이상들은 미국의 국가적 독자성에서 불가결한 요소들이다.
1787년 9월17일, 16주 간의 심의 끝에 참석한 주대표 42명 중 39명이 완성된 헌법에 서명했다. 프랭클린 워싱턴의 의자 뒤에 찬란한 금빛으로 그려놓은 반원의 태양을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회의하는 동안 ... 의장의 뒤에 있는 저 해를 바라보면서, 그것이 돋는 해인지, 지는 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마침내 그것이 도는 해이지, 지는 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기쁘다.”
연방회의는 끝나고 대표들은 “‘시티주점’주점으로 자리를 옮겨 식사를 같이하고, 서로 정중한 작별을 하였다.” 그러나 보다 완벽한 연방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의 중요한 부분은 아직 남아있었다. 헌법이 효력을 발생하려면 아직도 국민이 선출한 주대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연방회의는 헌법이 13개 주 중, 9개 주에서의 대회에서 승인되는 즉시 발효하도록 결정했다. 1788년 6월까지에는 헌법 발효에 필요한 9개 주가 헌법을 비준했는데 큰 2개 주, 즉 버지니아 주와 뉴욕 주는 비준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 두 주의 지지 없이는 헌법이라는 문서에는 위험이 가득 차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이 헌법으로 수립되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국민을 억압하고, 무거운 세금으로 괴롭히며, 그들을 전쟁으로 끌어들이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견해가 달라짐으로써,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지하는 연방당(Federalists)과 각 주의 느슨한 유대를 지지하는 반연방당(Antifederalists)라는 두 당이 생겼다. 양측의 열띤 주장이 신문, 주의회에서 표명되었다.
버지니아주에서 반(反)연방당파는 미국 헌법 전문에 있는 “우리들 미합중국 인민은”이라는 구절을 문제삼으면서 제안된 새 중앙정부를 논했다. 대표들은 헌법에 개개의 주 명칭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각 주는 개별적인 권리와 권한을 보유하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버지니아주의 반연방당파는 패트릭 헨리가 이를 이끌었는데, 그는 새로운 중앙정부의 권력을 두려워했던 오지의 농민들의 주대변인이 되었다. 헌법지지 여부를 망설이던 대표들은 버지니아 주대회가 권리장전을 건의한다고 제안함으로써 헌법을 지지하도록 설득되었고, 6월 25일 반연방당파에 합세하여 헌법을 비준했다.
뉴욕주에서는 알렉산더 해밀턴, 존 제이 및 제임스 매디슨이 <연방주의론 논문집>(Federalists Paper)으로 알려진 일련의 논문을 통해 헌법을 비준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뉴욕의 신문을 통해 발표된 이 논문들은 서로 견제하고 균형 잡는 분립된 행정부, 입법부 및 사법부를 가진 연방중앙정부를 옹호하는, 이제는 고전이 된 주장을 내세웠다. <연방주의 논문집>이 뉴욕 주 대표들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헌법은 7월26일에 비준되었다.
1776년 버지니아주 권리선언(Declairation of Rights)의 기초자인 조지 메이슨은 최종적인 헙법 초안이 개인의 권리를 열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서에 대한 서명을 거부한, 헌법제정회의에 파견되었던 대표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패트릭 헨리와 함께 버지니아주가 헌법 비준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매사추세츠주를 포함하는 5개 주가 헌법에 그 같은 (개인의 권리에 관한) 수정조항이 즉각 추가되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헌법을 비준했던 것이다.
1789년 첫 (연방)의회가 뉴욕시(市)에서 열렸을 때,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수정 조항에 대한 요구는 거의 만장일치의 것이었다. 의회는 12개의 그 같은 수정 조항을 재빨리 채택했는데, 1791년까지에는 충분히 많은 수의 주가 10개 수정 조항이 헌법의 일부가 되도록 비준했다. 이들 10개 수정 조항은 총체적으로는 ‘권리장전’으로 알려져 있다. 수정 조항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언론, 출판, 및 종교의 자유와 평화적으로 집회하고, 항의하며 변화를 요구하는 권리(수정 제1조); 부당한 수색. (재산의) 압수 및 체포로부터의 보호(수정 제4조); 모든 형사사건에 있어서의 정당한 법공의 절차(수정 제5조);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 (수정 제6조); 잔혹하고 통상적이 아닌 처벌로부터의 보호(수정 제8조); 그리고 인민은 헌법에는 열거되어 있지 않는 권리를 추가로 보유한다는 규정(수정 제9조) 등이다.
권리장전이 채택된 이래 16개 수정 조항만이 현재까지 헌법에 추가되었다. 권리장전에 이은 많은 수정조항들이 연방정부의 구조와 운영방식을 수정했지만, 그 대부분은 권리장전에 의해 수립된 선례를 따랐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확대시켰다.
아메리카 식민지연맹 의회(Congress of the Confederation)가 취한 마지막 조치의 하나는 새로운 중앙정부의 발족 일자를 1789년 3월 4일로 정하고, 초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준비 절차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새 국가원수로서 한 사람의 이름이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이름은 조지 워싱턴으로, 그는 1789년 4월 30일 만장일치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워싱턴은 대통령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최선을 다하여 “미국의 헌법을 보전하고, 보호하며, 수호”할 것을 다짐했는데, 이때부터 모든 대통령이 취임식 때 이 말을 답습하여 사용했다.
워싱턴이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는, 새 헌법은 전통도 없었고, 조직화된 여론의 완전한 뒷받침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새 정부는 독자적인 기구를 마련해야 했다. 조세수입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법부가 들어설 때까지는 법을 시행할 수단이 없었다. 육군은 그 규모가 작았고, 해군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의회는 신속하게 토마스 제퍼슨을 장관으로 하는 국방부와, 알렉산더 해밀턴을 장관으로 하는 재무부를 창설했다. 그와 동시에 의회는 연방 사법부를 조직하여 대법원(대법원장과 5명의 대법원 판사로 구성) 뿐만 아니라, 3개의 고등법원과 13개의 지방법원을 설치했다. 육군장관과 법무장관도 임명되었다. 워싱턴은 대체로 자기가 그 판단을 존중하는 사람들과 의논한 후에 결정을 내리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의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나라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고,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은 늘어나고 있었다. 미국민의 에너지의 주력은 서부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뉴잉글랜드와 펜실베니아주 사람들은 오하이오주로 이동하고 있었고, 버지니아주와 캐롤라이나주 사람들은 켄터키주와 테네시주로 향하고 있었다. 적은 돈으로도 좋은 농장을 살 수 있었으며,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대단했다. 뉴욕주의 북부, 펜실베니아주의 비옥한 평야들은 이윽고 광활한 소맥 지대가 되었다.
아직도 여러 가지 물건들이 가내에서 만들어졌으나. 미국의 산업혁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매사추세츠주와 로드아일랜드주는 중요한 직조공업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었고, 코네티컷주는 주석제품과 시계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뉴욕주, 뉴저지주 및 펜실베니아주는 종이, 유리 및 철을 생산하고 있었다. 해운업은 미국이 바다에서 영국 다음 갈 정도로 발전했다. 미국의 배들은 1790년 이전에 벌써 중국에까지 진출하여 모피를 팔고, 차와 비단을 사들여왔다.
이 나라가 성장하는 중대한 그 시기에, 워싱턴의 현명한 지도력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그는 중앙정부를 조직하고, 이전에 영국과 스페인이 점유했던 영토문제의 해결을 위한 정책을 발전시켰고, 북서부의 변경지역을 안정시켰으며, 3개 주, 즉 버몬트주(1791년), 켄터키주(1792년), 및 테네시주(1796년)가 새로 연방에 가입하는 것을 감독했다. 마침내 워싱턴은 퇴임식의 고별사에서 "외부세계의 그 어떤 부분과도 항구적인 동맹을 맺는 일을 피하라"고 국민에게 경고했다. 이 같은 충고는 그 후 여러 세대를 두고 세계 여타 나라들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
1790년대에 연방주의자들과 반(反)연방주의자들 사이에 조성된 갈등은 미국 역사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부유한 슈일러가(家)에 장가든 알렉산더 해밀턴이 이끄는 연방주의자들은 항구들의 도시중심적인 상업적 이익을 대표했고, 토마스 제퍼슨이 이끄는 반(反)연방주의자들은 농촌과 남부지역의 이익을 대변했다. 이들 대립하는 두 파 사이의 논쟁은 중앙정부의 권한과 이에 대립하는 주정부의 권한에 관한 것이었는데, 연방주의자들은 전자에 찬성했고, 반면 반(反)연방주의자들은 주의 권리를 창도했다.
해밀턴은 상업과 공업의 이익을 추구하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추구했다. 그는 공적 생활에 능률, 질서 및 조직에 대한 '사랑'을 심어 놓았다. "국가의 신용을 적절히 뒷받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라는 하원의 요구에 호응해서, 그는 공공경제 뿐만 아니라 능률적인 정부에 관한 원칙을 마련하여 이를 뒷받침했다.
해밀턴은 미국은 공업발전, 상업 활동 및 정부의 운용을 위해 신용을 얻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은 또한 국민의 전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국가의 채무상환을 거부하거나 그 일부만을 상환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해밀턴은 국가 채무의 전액 상환뿐만 아니라, 연방정부가 주들이 독립전쟁 기간 중에 짊어진 미상환 채무까지도 인수하는 계획을 주장했다.
해밀턴은 또한 전국 각 지방에 지점을 설치할 권리를 가진 미국중앙은행을 고안해냈다. 그는 독립조폐국을 설립할 것을 발의했으며, 새로 탄생한 기업체들을 임시로 보호함으로써 경쟁력을 갖춘 국가의 산업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을 도울 수 있다는 일종의 "유치산업" 보호 이론을 내세워 관세제도에 찬성했다. 연방정부의 신용을 확고부동하게 만들며, 연방정부가 필요로 하는 모든 세입을 이에 주는 조치들은 상업과 공업을 고무했으며 중앙정부를 강력히 지지하는 튼튼한 실업인력을 만들어냈다.
토마스 제퍼슨은 지방분권 체제의, 농업에 중점을 두는 공화국을 창도했다. 그는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강력한 중앙정부의 가치를 인정했으나, 다른 여러 면에서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원하지 않았다. 해밀턴의 커다란 목표를 보다 효율적인 조직체였으나, 반면 제퍼슨은 "나는 너무 활력적인 정부에는 찬동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해밀턴은 무정부 상태를 두려워했고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제퍼슨은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이 두 가지 영향력을 모두 필요로 했다. 이 두 사람을 가졌다는 것은 미국의 행운이었으며, 미국은 조만간 그들의 철학을 융합하여 조절할 수 있었다. 제퍼슨이 국무장관으로 취임한지 얼마 후에 일어난 이들 두 사람 사이의 충돌은 헌법에 대한 새롭고 지극히 중요한 해석을 내리게 했다. 해밀턴이 중앙은행 설립을 위한 자신의 법안을 내놓았을 때 제퍼슨은 이에 반대했다. 주의 권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대변하여, 제퍼슨은 미국헌법은 연방정부에 속하는 모든 권한을 명백히 열거하고 있으며, 그 밖의 다른 권한은 이를 명백히 주에 유보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앙정부에는 어디에서도 은행을 설립할 권한이 부여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해밀턴은 중앙정부의 권한에 관한 필요한 세부 사항들이 방대하기 때문에 엄청난 수의 (중앙정부의) 권한들이 (헌법의) 일반적인 조항들에 의해 함축적으로 표시되어야 했고, 또 그 같은 조항들의 하나가 (중앙정부에게) 구체적으로 부여된 다른 권한을 의회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헌법은 중앙정부에게 세금을 부과, 징수하고, 채무를 상환하며, 자금을 차입할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중앙은행은 이러한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의회는 그 함축된 권한에 따라 그러한 은행을 설립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었다. 워싱턴 대통령과 의회는 해밀턴의 견해를 받아들였으며, 연방정부의 권한을 확대해석하는 하나의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새 정부가 맨 먼저 할 일의 하나는 국내 경제를 튼튼히 하고. 연방의 재정을 확고히 하는 일이었으나. 미합중국은 해외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워싱턴의 외교정책의 기초는 평화를 유지하고 이 나라가 (독립)전쟁의 상처로부터 회복할 시간적 여유를 주며, 국가적 통합의 완만한 과업이 계속될 수 잇게 하는 것이었다. 유럽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이러한 목표들을 위협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프랑스 혁명을 날카로운 관심과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1793년 4월에는 이 프랑스 혁명을 미국 정치문제로 만든 소식이 전해졌다. 프랑스가 영국과 스페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했으며, '시티즌' 즈네로 알려진 에드몽 새를르 즈네가 프랑스의 새로운 사절로서 미국으로 부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1793년 1월에 프랑스왕 루이 16세가 처형된 후, 영국, 스페인, 그리고 네덜란드는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1778년에 체결된 미불동맹 조약에 따라 미합중국과 프랑스는 영세 동맹국이었고, 미국에게는 프랑스가 서인도제도를 방어하는 것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미합중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약한 나라였고, 유럽의 주요 강국들을 상대로 하는 또 다른 전쟁에 끼어 들 만한 입장에 있지 않았다. 1793년 4월 22일 워싱턴은 미합중국이 "교전중인 국가들을 우호적으로 또 공평하게 대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미국 독립을 기능하게 만들었던 이 1778년 조약의 조건을 실제적으로 폐기했다. 즈네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많은 시민들은 그를 환영했으나, 정부로부터는 냉냉한 격식의 대접을 받았다. 이에 분개한 그는 나포한 한 영국선박에 사략선으로 사용하기 위한 필요장비를 갖추지 않겠다는 약속을 위배했다. 즈네는 다음에는 이 같은 의도를 미국정부 수반을 제쳐놓고 미국민에 직접 호소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미국은 곧 프랑스정부에 대해 그의 소환을 요청했다.
즈네 사건은 영국과의 관계가 결코 만족스럽지 않을 때에,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한때 긴장시켰다. 영국군 부대들은 아직도 서부의 요새들을 점령하고 있었고, 독립전쟁 중 영국군 병사들이 탈취해 간 재산은 아직 반환되거나 보상되지 않았으며, 영국해군은 프랑스 항구를 향해 가는 미국선박들을 나포하고 있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워싱턴은 미국 초대대법원장 존 제이를 특사로서 런던에 파견했다. 그는 미국 서부의 요새들로부터 영국군 병사들을 철수시키고, 영국정부로 하여금 1793년과 1794년에 영국이 나포, 압수한 미국의 선박과 화물에 대한 손해 배상을 약속하게 하도록 하는 조약을 협상했다. 체결된 조약은 미국의 입장의 허약성을 반영하고 있었는데, 이 조약은 미국의 서인도제도와의 교역을 심히 제한했고, 앞으로 미국의 선박을 나포하는 문제에 대해서나, 미국 선원을 강제로 영국 해군에 복무시키는 "강제 모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제이는 또한 해군용 전쟁물자는 중립국 선박에 의해 적의 항구에 운송될 수 없는 금제품이라는 영국측 견해를 받아들였다.
제이가 영국과 체결한 이 조약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놓고 이제는 공화주의자로 불리게 된 반(反)연방주의자들과 연방주의자들 사이에 격렬한 의견 대립을 불러 일으켰다. 연방주의자들은 그들이 대표하는 상업면의 이익이 영국과의 교역에서 나왔기 때문에 친(親)영정책에 호의적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공화주의자들은 주로 이념적 이유에서 프랑스에 호의적이었고, 제이가 체결한 조약이 영국에 지나치게 유리한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오랜 토론 끝에 미국 상원은 이 조약을 비준했다.
워싱턴은 국가원수직을 8년 이상 맡는 것을 굳게 사양하면서 1797년 은퇴했다. 그의 부통령이었던 매사추세츠주 출신인 존 애덤즈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애덤즈는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부터도 알렉산더 해밀턴과 다투었었는데--이처럼 당의 분열로 인해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국내적 난관은 국제적 분규로 해서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제이가 영국과 체결한 조약에 분노하여, 영국의 주장을 역으로 이용, 프랑스 해군이 적의 항구로 운송되는 보급품, 전쟁물자를 압수하기로 했다. 1797년까지에는 프랑스는 300척에 달하는 미국 선박을 나포했고,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애덤즈가 협상을 위해 다른 세 사절을 파리에 보냈을 때, 프랑스 외상 샤를르 모리스 드 탈레랑의 대리인들이 (애덤즈는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이들을 X, Y, 및 Z라고 호칭했다) 미국 사절들에게, 협상은 미국이 프랑스에 1,200만 달러를 대여하고 프랑스 정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고 귀뜸해 주었다. 프랑스에 대한 미국민의 적개심은 극도에 달했다. 이른바 XYZ사건의 결과로 미국에서는 군대가 모집되고 창설된 지 얼마 안 되는 해군을 강화시키게 되었다.
1799년 프랑스군과의 일련의 해전이 벌여진 끝에 마침내 전쟁이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위기에 처하여 애덤즈는 전쟁을 원했던 해밀턴의 조언을 제쳐놓고 세 사람의 새 사절을 프랑스로 보냈다. 갓 집권한 나폴레옹은 이 사절을 정중히 영접하였고, 1800년의 협정이 협상됨으로써 전쟁의 위험은 사라졌는데, 이 협정으로 미국은 1778년에 프랑스와 맺은 방위동맹의 의무에서 정식으로 벗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약한 입장을 반영하듯이, 프랑스는 프랑스 해군이 나포한 미국 선박들의 배상금 2,000만 달러의 지불을 거부했다.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은 의회로 하여금 미국민의 공민적 자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외국인 단속법과 치안 유지법을 통과시키게 만들었다. 미국시민으로 귀화할 수 있는 요건인 5년 간의 미국 거주 기간을 14년으로 바꾼 귀화법은 공화주의자들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은 아일랜드계와 프랑스계 이민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2년 동안만 효력이 있는 외국인 단속법은 전시에 대통령에게 외국인을 추방하거나 투옥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치안유지법은 대통령이나 의회에 고나해 "허위이고, 중상적이며 악의적인" 성질의 글을 쓰거나, 말을 하거나 인쇄물을 간행하는 그 어떤 행위도 이를 금지했다. 이 법에 의해 유죄 판결이 내려진 건이 몇몇 건 있었는데, 이는 공민적 자유의 대의에 몸바친 '순교자'들을 만들어낼 뿐이었고, 공화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를 일으켰다.
이들 법률은 저항에 부딪혔다. 제퍼슨과 매디슨은 켄터키주 의회와 버지니아주 의회가 1798년 11월과 12월에 켄터키주 결의안과 버지니아주 결의안을 통과시킬 것을 발의했다. 이들 결의안에 따르면, 주는 연방이 취한 조치에 그들의 의견을 "첨가"할 수 있고 이들 조치를 "무효화"시킬 수 있었다. 이 무효화의 독트린은 후에 남부 각 주가 관세문제를 놓고, 더 불길하게는 노예 문제를 놓고, 북부에 대항하여 그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1800년에 이르러서는 미국민들은 변화를 원하게 되었다. 워싱턴과 애덤즈의 집권 아래 연방주의자들은 장려한 정부를 확립하였으나. 때로는 미국정부는 국민의 의사에 호응해야 한다는 원칙을 존중하지 않고 많은 국민을 소외시키는 정책들을 시행했다. 예를 들어, 1798년에 연방정부는 주택, 토지 및 노예에 과세하는 제도를 제정하여 미국 내의 재산 소유자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제퍼슨은 수많은 소농, 상점주인 및 기타 근로자들을 규합했으며, 이들은 1800년의 선거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웠다. 이 선거에서 제퍼슨은 미국의 이상에 호소함으로써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그는 새로운 수도 워싱턴 D.C 에서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행하는 취임 연설을 통해, 주민들 사이의 질서를 유지하되, "그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산업과 생활향상을 추구해 나갈 수 있게 해줄, 현명하고 검약한 정부"를 약속했다. 제퍼슨이 백악관에 있다는 사실만도 이는 민주적 절차를 고무하는 힘이 되었다. 그는 부하들이 자신들을 단순한 국민의 수임자로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농업과 서부로의 확장을 장려했다. 그는 미국을 피압박자들의 안식처로 믿고, 관대한 이민법의 제정을 촉구했다. 1809년까지에는 긴 안목을 가진 재무장관 앨버트 갤라틴이 국가의 채무를 5억 6,000만 달러 미만으로 줄여놓았다. 제퍼슨식 사상의 열기가 전국을 휩쓸자 주들은 잇달아 재산 소유에 따른 투표 자격 제도를 폐지하고, 채무자와 범죄자들에 대한 보다 인도적인 법률을 제정했다.
제퍼슨의 업적의 하나는 미국의 국토를 배로 늘린 일이었다. 7년전쟁(Seven Year's War: 1756~1763)이 끝나고 프랑스는 미시시피강 이서의 영토를 스페인에 할양했는데, 이 강의 하구 가까이 있는 뉴올리언즈항은 오하이오강과 미시시피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미국의 산물을 수송하는 데에 절대로 필요한 항구였다. 제퍼슨이 대통령에 취임한지 얼마 후 나폴레옹은 약한 스페인 정부에게 루이지애나라고 불리는 넓은 지역을 다시 프랑스에 할양하도록 강요했다. 이러한 행동은 미국민들을 불안과 분노에 차게 만들었다. 미국의 바로 서쪽에 거대한 식민제국을 건설하려는 나폴레옹의 계획은 모든 내륙정착지의 교역권과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제퍼슨은 만약 프랑스가 루이지애나를 차지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영국의 함대및 국민과 결합해야 한다"고, 그리고 유럽의 전쟁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포성은 영미 연합군이 뉴올리언즈를 향해 진격하는 신호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또 다른 전쟁이 임박하고 있음을 알고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도함으로써 영국의 손이 이 영토에 미치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는 제퍼슨을 헌법상 궁지로 몰아넣었다. 헌법은 정부의 어는 부서에게도 영토를 구입하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제퍼슨은 헌법을 개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고문들은 구입을 지연시키면 나폴레옹의 마음을 바꾸게 될지도 모르고--영토를 구입하는 권한은 본래부터 조약을 체결하는 권한에 고유한 것이라고 그에게 조언하였다. 제퍼슨은 "우리나라의 양식은 엉성한 구조가 아니라 나쁜 영향을 미칠 때 그 해악을 시정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헌법 개정의 의사를 굽혔다.
미국은 1803년 1,500만 달러로 루이지애나를 구입했다. 이에는 260만 평방킬로미터가 넘는 광활한 토지와 함께 뉴올리언즈항이 포함되었다. 이리하여 80년 후에는 이 나라의 심장 지대가 되고==또 세계의 대곡창 지대의 하나가 될 광활한 평야, 산맥, 그리고 하천을 얻게 되었다.
1805년 제퍼슨이 2차 임기를 시작했을 때, 그는 영불전쟁에서 미국의 중립을 선언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다같이 상대방에 대한 중립국의 해운을 제한하려고 애썼지만, 영국 측의 해상 통제는 나폴레옹 통치 하의 프랑스 측의 그 어떤 조치보다 심각성이 훨씬 더한 교역 금지와 화물 압수의 고통을 미국 측에 안겨주었다.
1807년까지는 영국은 해군을 근 15만 병력의 수병과 해병이 승선하는 700여 척의 군함으로 증강했다. 이 막대한 해군력이 프랑스의 항구들을 봉쇄하고, 영국의 무역을 보호하며, 영국의 식민지들과의 연계를 유지하는 등 해로를 장악했다. 하지만 영국함대의 승무원들은 아주 가혹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자유로운 모병으로는 필요한 승무원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많은 영국 해군 수병들이 탈주하여 미국 선박에 피신했다. 이러한 경우 영국군 장교들은 미국 선박을 수색하여 영국국민을 데려가는 것을 자기들의 권리로 간주했다. 이는 미국인들에게 큰 모욕감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군 장교들이 미국인 선원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영국 해군에 편입시키는 일이 흔히 있었다.
제퍼슨이 영국군함들에게 미국의 영해에서 떠나도록 명령하는 포고를 발표하자 영국측은 더 많은 미국 선원을 강제로 끌고 가 영국해군에 편입시키는 대응을 보였다. 제퍼슨은 영국해군으로 하여금 물러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들게 위해 경제적 압력을 가하는 방법에 의존하기로 결정했다. 1807년 12월 미국의회는 금수령을 통과시켜, 모든 대외교역을 금지했다. 얄궂게도 제한된 정부를 옹호하는 공화주의자들이 중앙정부의 권한을 크게 증대시킨 법률을 제정했던 것이다. 단 1년 동안에 미국의 수출고는 전년도의 5분의 1로 줄었다. 이 조치로 해운업은 거의 몰락했고, 뉴잉글랜드와 뉴욕 주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높아갔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타격이 컸다. 남부와 서부의 농민들이 그들의 잉여 양곡과 육류 및 연초를 수출할 수 없게 되자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이 금수조치로 영국이 굶주리게 되면 그들이 정책을 바꾸리라는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국내에서 불만이 커지자 제퍼슨은 금수조치를 완화하여 국내 해운업자들을 달랬다. 1809년, 그는 영국 및 프랑스 그리고 그들의 속국을 제외하는 다름 모든 국가와의 통상을 허용하는 '비교역령'에 서명했다.
1809년 제임스 매디슨이 제퍼슨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영국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두 나라는 급히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매디슨 대통령은 영국이 미국 시민을 강제 모병해간 수천 건에 달하는 사례를 보여주는 상세한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 외에도 서북부의 정착민들은 인디언의 습격으로 피해를 입었는데, 그들은 캐나다에 있는 영국의 압잡이들이 인디언을 충동했다고 믿었다. 이는 많은 미국민들로 하여금 캐나다 정복을 찬성하게 만들었다. 캐나다 정복이 성공하면 인디언들 사이에 미치는 영국의 영향력이 제거되고, (미국의) 식민지 건설을 위한 새로운 땅이 마련되리라는 기대에서였다. 캐나다 정복의 의욕은 선원의 강제 모병에 대한 분노와 겹쳐 미국민의 전쟁 수행 열기를 북돋았는데, 이리하여 마침내 1812년 미국은 영국에 대해 전쟁을 포고했다.
미국은 영국과의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대내적으로 의견이 분열되어 있었다. 남부와 서부가 전쟁에 찬성하는 데에 반하여, 뉴욕주와 뉴잉글래드는 전쟁이 그들의 교역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이에 반대했다. 영국에 대한 전쟁은 미국 육군이 완전한 준비를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포고되었다. 7,000명 미만의 정규군 병사들은 해안과 캐나다 국경, 그리고 먼 내륙 지방에 널리 흩어져 있는 요새에 분산되어 있었다. 이들 정규군 병사들은 규율이 서있지 않은 주민병대의 지원을 받게 되어 있었다.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미국의 캐나다 침공과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만약 이 침공이 시간을 적절히 맞추어 수행되었더라면 몬트리올에 대한 연합 작전을 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 작전이 실패하여 영국군이 디트로이트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미국 해군은 거듭 승전하여 미국의 자신을 회복시켰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민간 무장선들이 대서양을 휩쓸면서 1812년에서 1813년에 이르는 가을과 겨울 기간에 영국 선박을 500척이나 나포했다.
1813년의 전투는 뉴욕주 이어리호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후에 대통령이 되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 장군은 디트로이트를 탈환할 목적으로 켄터키주로부터 민병대, 의용군 및 정규군의 부대를 이끌고 진군했다. 9월 12일, 그가 아직도 오하이오주 북부에 있을 때 올리버 해자드 페리 제독이 이어리호에서 영국 함대를 섬멸했다는 소식이 그에게 전해졌다. 헤리슨은 디트로이트를 탈환하고 캐나다로 진격하여, 쫓기는 영국군과 영국과 동맹한 인디언들을 테임즈강에서 무찔렀다. 이제 미국은 그 지역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전쟁의 또 다른 결정적인 전기는 1년 후 토마스 맥도너 제독이 뉴욕주 북부의 챔블레인호에서 벌이는 근접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마련되었다. 1만 명의 영국 침공군은 해군의 지원을 잃게 되자 캐나다로 후퇴했다. 그 무렵 영국함대는 "무찌르고 쳐부숴라!"라는 명령하에 동부 연안지역을 괴롭히고 있었다. 1814년 8월 24일 밤, 영국함대의 원정대가 연방정부의 본거지인 워싱턴 D.C로 쳐들어와 워싱턴은 화염에 싸이게 되었다. 제임즈 매디슨 대통령은 버지니아주로 피신했다.
이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미국과 영국 협상대표들은 서로 상대방에 대해 양보를 요구했다. 하지만 영국 대표들은 챔블레인호에서 맥도너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알자 양보하기로 결정했다. 웰린턴공으로부터 협상을 타결하라는 촉구를 받고, 또 국고의 고갈에 직면한 끝에 영국 협상대표들은 1814년 12월 젠트(Gent) 조약을 받아들였다. 이 조약으로 전투는 중지되고 점령지는 반환되었으며, 국경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쌍방은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즈에서 전투를 계속했다. 앤드류 잭슨 장군이 이끄는 미국군이 이 전쟁의 지상 전투 승리 중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과 미국의 대표들이 해결책을 협상하고 있는 동안, 매사추세츠주, 로드아일랜드주, 코네티컷주, 버몬트주 및 뉴햄프셔주의 의회가 선출한 연방주의자들의 대표들이 "매디슨씨의 전쟁"에 대한 반대를 상징한 모임을 코네티컷주의 하트포드에서 가졌다. 뉴잉글랜드는 이 전쟁 전반을 통해 힘들게나마 적과 교역을 할 수 있었고, 일부 지역들은 실제로 이 교역을 통해 번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방주의자들은 이 전쟁이 경제를 파멸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회의에 참가한 일부 대표들은 연방으로부터의 탈퇴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대표들은 60일 이상 지속되는 금수조치를 금지하고, 또 동일한 주에서 대통령이 연달아 나오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을 포함하는, 공화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한 일련의 헌법수정에 찬동했다. 하지만, 하트포드 회의가 보낸 사자가 워싱턴 D.C에 도착했을 때는 전쟁은 이미 끝난 후였다. 이 하트포드 회의는 연방주의자들에게 그들이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不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낙인을 찍어 놓았다.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교육받은 많은 미국인들이 더 이상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지 않았다. 이 시대의 세속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19세기 전반기에 기독교 신앙부흥운동이 코네티컷주에서 뉴햄프셔주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다.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일어난 이 기독교신앙 각성 대운동은 종교적 헌신의 현장과 그 헌신의 표현에 의해 구분되는 몇 가지 종류의 활동으로 구성되었다.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종교에 대한 새로워진 관심이 사회적 행동주의 물결을 고무했다. 뉴욕주의 서부에서는 신앙부흥 정신은 새로운 기독교 교파들의 대두를 고무했다. 켄터키주와 테네시주의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에서는 이 신앙 부흥운동은 감리교와 침례교를 강화시켜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표현인 "야영 집회"를 탄생시켰다.
1730년대에 일어났던 기독교신앙 각성 대운동과는 달리, 동부에서 일어난 (제2의) 신앙부흥운동에는 신도들의 히스테리적인 감정 노출이 없는 것이 현저한 현상이었다. 비(非)신자들은 신앙을 간증하는 신도들의 "존경스러운 침묵"에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일어난 복음전도의 열성은 서부를 복음화하기 위해 결성된 교파간 연합선교회들을 낳게 했다. 이들 선교회의 회원들은 신앙의 사도로서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 시민의 지도자로서, 또 동부 도시문화의 대표자로서 활동했다. 出版 및 교육단체들은 기독교에 바탕을 둔 교육을 장려했다. 이들 단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1816년에 창립된 미국성서공회였다. 신앙부흥운동에 의해 고무된 사회적 행동주의는 노예제도 폐지운동 단체들과 금주장려협회를 탄생시켰고, 아울러 교도소를 개혁하고 장애자와 정신질환자들을 돌보는 노력을 낳게 했다.
뉴요크주 서부에서의 신앙부흥운동은 뉴요크주 애덤즈 출신의 변호사 찰스 그래디슨 피니가 주로 벌인 운동이었다. 온타리오호에서 애디론댁 산맥에 이르는 지역은 지난날에 수많은 신앙부흥운동이 벌여졌던 장소였기 때문에 "열기로 타버린 구역"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1821년 피니는 일종의 종교적 현시를 경험하고 뉴요크주 서부에서 복음전도에 나섰다. 그의 신앙 부흥운동은 주의 깊은 계획 수립, 흥행적 수완 및 광고가 그 특징으로 되어 있었다. 피니는 1835년에 오버린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오하이오로 옮겨가기 전에, 1820년대 전반과 1830년대 초에 "열기로 타버린 구역"에서 전도 활동을 벌였다. 그는 마침내 오버린 대학 학장이 되었다.
미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두 교파, 즉 모르몬교와 '제7일 안식일 재림교'도 역시 이 "열기로 타버린 구역"에서 시작되었다.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에서는, 신앙 부흥운동은 18세기에 있었던 기독교신앙 각성 대운동과 유사한 특징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앙 부흥운동의 중심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거리 때문에, 그 장소에서 숙영하지 않을 수 없는 일단의 사람들을 위한, 서너 날에 걸친 종교 행사"라고 정의되는 "야영집회"였다. 인구가 희박한 지역에 살고 있는 개척자들은 이 야영집회를 변경지역의 외로운 생활로부터 벗어나는 기회로 생각했다. 수백 명, 어쩌면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신앙 부흥운동에 참석하게 된 기쁨에 들뜬 참석자들은 춤을 추고 고함을 지르며 이 행사에 관련된 노래들을 불렀다.
첫 야영집회는 1800년 7월 켄터키주 남서부의 '개스퍼 리버' 교회에서 열렸다. 이보다 훨씬 대규모인 야영집회는 1801년 8월 켄커키주 캔 리지에서 열렸는데, 이 집회에는 장로교, 침례교 및 감리교의 목사들이 참석했다. 조직된 신앙 부흥운동을 감리교, 침례교 같은 교단을 위한 교회 팽창의 주요방식이 되게 만든 것이 바로 이 행사였다.
이 대신앙부흥운동은 재빨리 켄터키주, 테네시주, 그리고 오하이오주주 남부에 걸쳐 확산했는데, 이로써 주로 감리교와 침례교가 교세를 확장하게 되었다. 교파마다 변경지역에서 교세를 확장하게 할 수 있는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감리교는 멀리 떨어진 변경지역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순회특사"(circuit rider)로 알려진 목사들에 의존했던, 매우 효과적인 조직을 갖고 있었다. 이 순회특사의 직분은 평신도들이 맡았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신도로 만들려고 바랐던 변경지역의 주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도왔다.
침례교는 정식 교회 조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교파의 전도사들은 신의 "소명"을 따른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성서를 공부하고 교회를 세웠으며, 이 교회가 이번에는 그들을 전도사로 임명했던 것이다. 이 같은 교회들에서 성직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멀리 떨어진 황무지에 침례교 교회들이 활동하는 기반을 다지는 것을 도왔다. 이 같은 전도방법을 사용하여 침례교는 경계주 전역과 남부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우세하게 되었다.
이 제2의 기독교신앙 각성 대운동은 미국역사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침례교와 감리교의 수적 세력은 식민지 기간에 우세했던 교파들--즉 성공회, 장로교회, 조합교회들의 수적 세력에 비례하여 상승했다. 후자의 교파들에서 기울인 사회문제의 해결에 기독교 가르침을 적용하려는 노력은 19세기 후기의 "사회적 복음" 운동을 예시한 것이었다. 미국은 19세기 초엽에서 중엽에 걸쳐 더 다양한 나라로 되어 가고 있었으며, 미국 개신교 안에서 점차 늘어나는 상이한 교파들은 이 다양성을 반영했고 또 이에 이바지했다.
미국 지도 펼쳐 보고 미국 여행 하자.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지도 검색 블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