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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ARTICLE 21세기를 향하여 | 1 ARTICLE FOUND

  1. 2007/11/20 미국 역사 개요 - 21세기를 향하여

"미국은 존속되기 위해 변화해야만 한다.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 미국의 이상을 보존하기 위해 변화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음악에 맞추어 행진하지만
우리의 사명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다"
-- 빌 클린턴 대통령, 1993년.


변천하는 사회

수년, 아니면 수십년 전에 시작된 미국 사회구조의 변화는 19890년대에 이르러 뚜렷해졌다. 인구구성 성분과 미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업종 및 기술이 주요한 변화를 하고 있었다. 경제에서 서비스업의 우세 현상은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기에 50여년 동안 계속되어온 추세가 마침내 절정에 이르러, 미국의 전고용인의 4분의 3이 서비스 부문에서 -예컨대, 소매 점원, 사무직원, 교사, 의사 및 기타 보건 전문직원, 정부 공무원, 변호사, 법률 및 금융 전문가 등으로- 일했다.

서비스 부문 활동은 특정 유형의 과학기술, 즉 컴퓨터의 이용성 및 이용도의 증대로 해서 득을 보았다. 이것은 경제적 및 사회적 추세에 관해서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만큼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를 가진 정보시대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연방정부는 군사 및 우주 계획의 일부로서 컴퓨터 과학기술에 상당히 많은 투자를 했다. 1970년대 말엽에 캘리포니아주의 두 젊은 기업인이 자동차 차고에서 일하고 있다가 최초로 널리 시판된 가정용 컴퓨터를 조립하고, 그것에 '애플'(Apple)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산업혁신에 불을 붙였다. 1980년대 초엽에 수백만 개의 마이크로컴퓨터들이 미국의 기업체들과 가정에 파고들어갔으며, 1982년에 시사주간지 Time은 그 컴퓨터에 "올해의 기계"(Machine of the Year)라는 명칭을 붙였다.

한편, 철강 및 직물 산업과 같은 미국의 "굴뚝 산업"들은 쇠퇴하고 있었다. 미국 자동차 산업은 도요타(豊田), 혼다(本田), 닛산(日産) -이들의 대부분은 미국에 자기들의 공장을 세웠음- 등과 같은 매우 유능한 日本 자동차 제조업자들과의 경쟁으로해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1980년에 일본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미국 시장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1980년대 말엽과 1990년대 초엽에 이르러 비로소 미국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자기들의 라이벌인 일본 자동차 제조업자들의 비용효과 및 기술 기준에 뒤지지 않기 시작했으며, 지난 20년 동안 수입 자동차에 양보했던 국내 자동차 시장의 몫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으로 해서 득을 본 자는 소비자들이었지만 -생산비를 줄이려는 고통스러운 노력은 미국 자동차 산업에서의 수천명의 항구적인 실업을 의미했다.

인구 패턴도 변했다. 1946년경부터 1964년까지 계속된, 전후 "베이베 붐" 시기가 끝난 후, 전반적인 인구 증가율은 줄어들었으며, 인구는 보다 높은 연령이 되었다. 세대구성 상태도 변했다. 1980년에 가족세대의 백분율(%)은 떨어졌으며, 미국의 전세대수의 4분의 1은 인척 혈연 관계 없는 2, 3명의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비가족 세대"로 분류되었다.

새로운 이민들이 다른 방법으로 미국사회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1965년에 개혁된 이민정책은 그 초점을 서유럽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에 아시아 및 중남미 지역으로부터 새로 도착한 이민들의 수가 괄목할 만하게 증가되었다. 예컨대, 월남전 직후기에 월남 난민들이 미국으로 유입했다. 1980년에 80만 8,000명의 이민이 도착했는데, 이것은 60년만에 처음보는 최고 이민수였다. 이 나라는 또다시 全세계로부터 들어오는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1980년대에는 또다른 그룹이 기회 균등을 위한 투쟁의 적극적인 참가자가 되었다. 동성연애자들은 민권운동의 여러 전술을 사용하여 다른 그룹들이 요구한 것과 똑같은 것, 즉 차별대우로 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 흔히 압력이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예컨대, 1975년에 미국공무원 임용시험 위원회(USCSC)는 동성연애자 고용금지를 폐지했으며, 많은 주들이 차별대우 금지법을 제정했다. 반발이 일어났으며, 동성연애자들을 적대시하는 사건들이 나타나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후, 1981년에 인체의 면역체계를 파괴하는 가공할 질병인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가 발견되었다. 에이즈(AIDS)는 성행위나 혈액을 통해서 전염된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일반 국민들도 이 질병에 걸리기 쉽다는 것이 판명되었지만, 이 질병은 특히 동성연애자들이나 정맥주사약 사용자들이 아주 많이 걸렸다. 1992년에 이르러 에이즈로 사망한 미국인수는 15만명을 웃돌았으며,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는 30만명 내지 100여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에이즈는 결코 미국에만 국한된 질병이 아니었으며, 이 전염병을 다루려는 노력에는 전세계의 의사들과 의학 연구자들이 참가했다. 그들의 초기 성공 중의 하나(주로 미국과 프랑스의 연구 결과임)는 에이즈 병균을 분리시킨 다음, 혈액 공급의 보호를 확실케 하기 위한 실험을 발전시킨 일이었다.


보수주의와 로널드 레이건의 부상

지난 20년 동안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추세를 -여러 도심자에서의 범죄와 인종적 대립에서부터 카터 대통령 시대의 경제적 하강 및 인플레에 이르기까지- 은 많은 미국민들에게 환멸무드를 안겨주었다.그 추세들은 또한 정부에 대한 회의는 물론, 이 나라에 깊이 뿌리박힌 사회적 및 정치적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정부의 능력에 대한 회의도 증대시켰다.

전국적인 수준에서 장기간 세력을 잃고 있던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새 무드를 이용하기에 좋은 입장에 있었다. 당시는 많은 미국민들이 제한된 정부, 강력한 국방, 그리고 관용적이고 흔히 혼란스러운 현대 사회 현상의 침입으로 간주된 것들에 반대하는 전통적 가치관 보호 등 메시지를 잘 받아들이는 때였다.

이러한 보수주의자 급증 원인은 여러 곳에 있었다. 성경을 신의 직접적이고 잘못없는 말씀으로 간주하는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의 큰 집단은 범죄와 성적인 부도덕행위의 증대를 특히 염려하고 있었다. 1980년대 초엽의 가장 정치적으로 유력한 집단 중의 하나는 '도덕적인 다수파'(Christian Majority)라고 불렀는데, 이 집단은 침체적 목사 제레 팰웰이 이끌었다. 패트 로버트슨이 이끈 또하나의 집단은 '크리스천 연합'(Christian Coalition)이라고 불린 단체를 조직했는데, 이 단체는 1990년대에 공화당 내의 하나의 유력한 세력이었다. 이러한 여러 집단들처럼, 그들 (보수주의자들)은 종교를 미국 생활의 중심부로 되돌리기를 원했다. 팰웰 및 로버트슨과 같이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복음을 전도하는 성직자들은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었다.

보수주의자들을 적극적으로 나오도록 만든 문제는 당시의 여론을 가장 분열시키는 감정적인 문제중의 하나인 낙태 문제였다. 1973년 '로우 대 웨이드' 사건에서 임신 초기 수개월 내에 낙태 시킬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확인한 연방대법원 판결에 대한 반대세력이 갖가지 여러 단체들과 개인들을 뭉치게 했다. 이렇게 뭉친 사람들에게는 많은 수의 가톨릭 신자들, 정치적 보수주의자들, 그리고 실제로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낙태를 살인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대부분이 간주한 기독교 원리주의자들 등이 들어 있었으나, 이들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주장에 찬동하는 정치가들과, 자기들의 주장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반대하는 정치가들을 옹호하여 조직체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낙태 합법화 지지 데모와, 낙태금지 데모는 미국 정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되었다.

공화당 내에서, 우익은 또다시 커져서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다. 이 우익은 1964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배리 골드워터와 더불어 잠시 공화당지배력을 장악했었으나, 그 후 세인의 주시권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1980년에 이르러 우익은 최신 모금 기법을 사용하여 당내의 중도파를 추월했다. '신우익'(New Right)은 경제학자 밀튼 프리드만, 저널리스트 윌리엄 F. 버클리 및 조지 윌, 그리고 '헤리티지 재단'과 같은 연구기관 등의 지적 능력이 의존하면서, 1980년대의 쟁점들을 명백히 밝히는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우익은 기타 보수주의자들이나 '구우익'처럼, 정부의 경제개입에 대한 엄격한 제한을 찬성했다. 그러나 신우익은 자기들의 가정관을 장려하고, 동성연애 행위를 제한하고, 그리고 외설물들을 검열하기 위해 기꺼이 국가 권력을 사용하려고 했다. 대체로, 신우익은 범죄에 대한 강경 조치, 강력한 국방, 긔록 공립학교에서의 기도를 허용하기 위한 헌법수정, 낙태 반대, 그리고 여성을 위한 남녀평등 헌법수정안의 폐기 등을 찬성했다.

이러한 본질적으로 다른 모든 요소들을 한데 묶게 한 인물은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난 레이건은 정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할리우드 영화 및 텔리비젼 배우로써 스타의 지위를 이룩했었다. 그는 1964년 전국적으로 텔레비전 방송된 배리 골드워터 지지 연설로써 정치적인 두각을 최초고 나타냈다. 1966년에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에서의 학생 폭동에 반대하는 물결의 유권자 반응 덕택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었으며, 1975년까지 주지사였다. 그는 1976년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 획득을 약간의 차로 놓쳤으나 198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되어 대통령이 되었다. 레이건은 198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카터 대통령의 부통령 월터 먼데일을 누르고 압도적으로 재당선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불요불굴의 낙관주의와, 미국민들의 업적 및 여망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그의 능력은 그의 두 차례의 임기중 내내 지속되었다. 그는 많은 미국민들을 안심시켜주고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잘못된 진술을 하는 성향은 있었지만, 주로 텔레비전을 숙달된 솜씨로 이용했기 때문에 "위대한 의사소통자"(Great Communicator)로 알려졌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1950년대의 번영과 사회안정, 즉 널리 국민의 사랑을 받던 또 한 사람의 온화한 공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통치한 시대를 상기시켰다.

레이건 대통령은 정부가 미국민 생활에 너무나 깊이 개입한 것으로 믿었다. 그는 "낭비, 사기 그리고 권력 남용" 등을 제거함으로써, 이 나라에 필요하지 않다고 그가 주장한 프로그램들을 감축하기를 원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또한 지미 카터 대통령이 시작한 규제해제 계획을 임기 중 내내 추구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비자, 작업장, 환경 등에 영향을 주고 있는, 그리고 비능률적이고 값비싸고 경제성장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그가 주장한 규제조치들의 철폐를 추구했다.


1980년대의 경제

레이건 대통령의 국내 계획은 민간경제 부문이 규제의 속박에서 풀려나면 이 나라가 번영할 것이라는 그의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공급측" 경제, 즉 상품 및 용역의 보다 많은 공급은 경제성장으로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의 지지자인 레이건 대통령은 보다 많은 소비자 지출, 저축, 투자 등을 촉진시키기 위해 대폭적인 감세를 추구했다. 공급측 경제 전문가들은 감세가 기업체의 투자 증대, 수익 증대, 그리고 이러한 수익에 대한 과세에 의한 정부 세수 증대 등의 현상을 초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원에서는 공화당이 약간의 차로 다수파 세력이 되어 있고, 하원은 민주당원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레이건 대통령은 개인에 대한 세금을 3년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25%줄이는 감세안이 들어 있는 그의 경제 계획의 주요한 부분을 첫 임기중에 성공적으로 법제화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또한 이 나라의 군대를 현대화하고, 소련으로부터의 계속적이고도 점증되고 있는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방위비 지출의 대폭적인 증대를 추구했으며, 실제로 방위비 지출을 대폭적으로 증대시켰다.

경기후퇴는 레이건 대통령 시정 초기의 특색을 이루었으며, 이 나라의 거의 모든 부문을 강타했다. 실업율이 10%를 웃돌게 되고, 미국의 공장들의 약 3분의 1이 유휴 상태에 빠지게 되자, 1982년도의 미국의 실질 국민총생산(GNP)은 2.5%나 떨어졌다. 중서부 전역에서, 제네럴 일렉트릭사 및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사와 같은 주요한 회사들이 근로자들을 해고했다. 석유 위기도 이러한 경기후퇴를 나타나게 한 한 요인이었다. 미국 생산성 증대율이 둔화됨에 따라, 독일 및 일본과 같은 미국의 경제적 라이벌들이 세계무역에서 보다 많은 몫을 차지했다. 미국의 외국산 상품 소비가 격증되었다.

농민들도 어려운 시기의 고통을 받았다. 생산이 소수의 수중에 집중됨에 따라, 농민 수는 줄어들었다. 1970년대에, 미국 농민들은 인도, 중국, 소련, 그리고 농산물 부정으로 고통받고 있는 기타 국가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토지를 사들이고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해 자금을 많이 차입했다. 그 후 유가가 올라서 농산물 생산비가 올라갔으며, 1980년의 범세계적인 경제침체로 해서 농산물의 수요가 줄어들었다. 농민들은 빚 안 지고 살아가느라고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떨어지는 유가와 함께 1982년 내내 계속된 심한 경기후퇴는 하나의 중요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카터 대통령 시정 기간 중에 시작되었던 천정부지의 인플레를 그것이 억제했다. 1983년 말엽에 일부 경제부문의 상태는 좋아졌으며, 1984년 초엽에는 경제가 원상태로 회복되었고,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이래 환경 훼손 없는 경제성장의 가장 긴 시기 중의 하나에 진입했다. 일본은 일본 자동차의 대미 수출에 자율적인 쿼터제를 실시한다는데 동의했다. 연방정부의 감세 조치에 따라, 소비자 지출이 증가되었다. 낙관적인 매기 폭증 현상이 나타나서 주식시세는 앙등했다. 경제회복이 시작된 후 5년 동안, GNP는 연간 성장율 4.2%로 증대되었다. 연간 인플레율은 1983년부터 1987년까지의 기간 중에 3% 내지 5%에 머물러 있었는데, 1986년도만은 예외로 2% 미만, 즉 수십년 내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었다. 1980년대에 이 나라의 GNP는 상당히 증대되었으며, 1982년부터 1987년까지의 기간중에 미국경제가 창출한 새로운 일자리 수는 1,300만 개를 웃돌았다.

그러나, 이러한 고르지 않은 성장율은 적자지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 시정하에서 미국의 채무는 거의 3배로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국부증대 현상은 최고 소득 그룹에서만 나타났다. 낮은 수준의 기술 및 반숙련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들이 경제로부터 제거되거나, 사회의 여타 부문의 발전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게 됨에 따라, 대부분의 빈곤층 및 중산층 가구들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보다 낮은 세금 공약이 확고부동한 레이건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 중에 75년만에 가장 포괄적인 연방 세제개혁안에 서명했다. 민주당원으로부터나 공화당원으로부터나 다같이 폭넓게 지지를 받은 이 세제개혁안은 소득세율을 낮추고, 소득에 따라 분류되는 납세계층제를 간소화하고, 탈세 구멍들을 막음으로써 저소득 미국민들에게 보다 고정하게 과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경제가 호전되었는데도 만성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이득을 얻지 못했다. 농민들은 계속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 1986년과 1988년의 심한 가뭄은 그들의 어려움을 더욱 증가시켰다.

감세 및 정부 보건지출의 증가와 아울러 군사예산 증대는 연방정부가 매년 거두어들인 세수보다 훨씬 더 많은 연방정부 지출을 초래했다. 일부 분석가들은 이러한 적자는 민주당이 추구한 국내지출 증대를 막기 위한 계획적인 행정부 전략의 일부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의회의 민주당 의원들과 공화당 의원들은 다같이 이러한 지출의 삭감을 거부했다. 적자는 1980년의 740억 달러로부터 1986년의 2,210억 달러로 치솟았다가 1987년의 1,500억 달러로 다시 내려갔다. 1987년 말엽의 주식시장 붕괴는 경제안정에 대한 의심을 극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외교문제

레이건 대통령은 외교정책에서 이 나라를 위하여 보다 독단적인 역할을 추구했으며, 초기의 시험 장소는 중미였다. 게릴라 반도들이 엘살바도르 정부를 전복시킬 기세를 보이자, 미국은 엘살바도르에 경제원조 및 군사훈련 계획을 제공했다. 미국은 또한 민선 민주정부로 이행하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는데, 활력적인 우익 암살대들을 억제하려는 노력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미국측의 지원은 정부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엘살바도르에서의 폭력의 수준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으며, 1989년 말엽에는 오히려 증대되었다. 그러나 쌍방은 1992년초에 평화협정에 합의했다.

미국의 대니카라과 정책은 훨씬 더 많은 논난의 대상이어다. 1979년 '산디니스타'로 자칭하는 혁명전사들이 억압적인 우익 소모사 정권을 타도했다. 산디니스타 정부는 쿠바 및 소련과의 군사적 유대를 단절하고, 민주적 개혁을 위하여 니카라과 정치 체제를 개방하라는 미국측 요구를 거절했다. 지역평화 노력의 초저은 '콘트라'로 알려진 반산디니스타 저항 세력에 대한 지원으로 옮겨졌다. 의회는 이 정책에 관해서 열띤 정치적 논쟁을 한 후에, 1984년 10월에 '콘트라'에 대한 모든 군사원조를 종결했지만 인도주의적인 지원은 계속되었다. 1986년 가을 의회는 행정부 측의 압력을 받아서 태도를 번복하여 '콘트라'에 대한 군사원조비 1억 달러를 승인했다. 그러나, 전장에서의 성공의 부재, 인권침해 비난, 그리고 이란에 대한 비밀 무기 판매 대금이 '콘트라'에 전용되어 온 사실의 탄로 등으로 해서 반산디니스타 게릴라를 위한 군사원조 계속에 대한 의회에서의 정치적 지지 근거가 사라졌다.

그 후, 조지 부시 행정부는 '콘트라'를 위한 군사원조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아예 포기해버렸다. 부시 행정부는 또한 비올레타 차모로가 이끈 재야 정치연합을 지지했는데, 이 정치연합은 1990년 2월에 실시한 선거에서 산디니스타를 누르고 놀랄 만한 승리를 거두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다행히도 과테말라에서부터 아르헨티나에 이르기까지 중남미 전역에서의 민주주의 복귀 현상을 목격했다. 하지만,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출현은 중남미에 국한되지 않았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코라손 아키노의 "민중의 힘"(people power) 운동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독재정권을 타도했으며, 한국에서의 선거는 30여년 동안의 군사통치를 종식시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논란의 대상인 "건설적인 관여"정책에 의한 인종차별정책 종결을 권장하려는 레이건 행정부의 노력에 마주쳤을 때에 여전히 비타협적이었다. 1986년 아무런 진전이 없어서 실망한 미국의회는 레이건 대통령이 거부한 법안을 재가결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일련의 경제적 제재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1988년 12월 레이건 행정부의 마지막 수주일 동안에 이르러 비로소 여러 해 동안의 꾸준한 미국의 거중 조정이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나미비아 영토의 역사적인 평화적 해결 및 독립에 도움이 되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노골적으로 반공 언사를 사용했지만, 직접적인 군사력 사용은 비교적 자제하는 편이었다. 19833년 10월 25일 그레나다의 이웃 나라들의 긴급한 지원 호소가 있은 후 미군은 카리브해의 섬나라 그레나다에 상륙했다. 이러한 조치는 그레나다의 좌익 수상이 그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지향 정당 당원들에 의하여 암살된 후에 취해졌다. 미군은 단기간의 전부 끝에 수백명의 쿠바 군인들과 건설요원들을 사로잡았으며, 소련이 공급한 무기의 저장소들을 점거했다. 1983년 12월 최후의 미군 전투부대가 그레나다를 떠났는데, 그레나다는 1년 후에 민주적인 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허약하고 온건한 친서방 정부를 지지하려고 시도했던 레바논에서의 미국의 군사적 노력은 1983년 10월 테러리스트의 폭파작전으로 미해병대원 241명이 피살되자 비극적으로 끝났다. 1986년 4월 미해군 및 공군 비행기들은 리비아의 사주를 받은 테러리스트들의 유럽 주둔 미군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리비아의 트리폴리시 및 벵가지시 목표물들을 폭격했다.

페르시아만에서는 미-이란 관계의 악화와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해서 이 지역의 미해군 활동 무대가 열렸다. 처음에는 미국이 쿠웨이트의 유조선대를 보호해달라는 쿠위에트측의 요청에 응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서유럽 해군 함정들과 함께 페르시아만을 왕래하는 유조선의 호위선들과 기타 중립국 선박들을 호송함으로써 지극히 중요한 해상 운송로를 계속 열어놓게 되었다.


미소관계

대소 관계에서 레이건 대통령이 선언한 정책은 힘에 의한 평화 정책이었다. 냉전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잇던 그는 자기가 "사악한 제국"이라고 명명한 나라(소련)를 다룰 때에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두 개의 사건이 미소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즉, 1981년 12월 폴란드의 자유로조 '솔리다리티' 운동 탄압 사건과, 1983년 9월 1일 소련 전투기가 항로를 이탈한 민간 항공기 대한항공 007기를 격추한 사건이다. 미국은 또한 소련의 계속적인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규탄했으며, 그곳의 무자히딘(회교 반군) 저항 세력을 지원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레이건의 첫 임기중에 소련의 미사일 배치에 대항하기 위한 중거리 핵미사일 유럽 배치를 포함하여, 대규모의 방위력 증강을 위해 미증유의 거액을 소비했다. 그리고 레이건 대통령은 1983년 3월 23일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중 가장 피열하게 토의된 정책 결정 중의 하나에서, 대륙간 탄도 유도탄을 막기 위해 레이저 광선 무기 및 고에너지 발사체와 같은 발달된 과학기술을 연구할 수 있는 '전략방위계획'(SDI) 연구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많은 과학자들이 SDI의 과학기술상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경제전문가들은 이에 관련된 어마어마한 거액을 지적했지만, 레이건 행정부는 그 계획을 계속 추진했다.

레이건은 1984년에 재당선된 후 군비통제에 관한 그의 경직된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미국의 방위력증강과 경쟁하기 위해 소련 경제가 필요로 하는 경비의 수준을 소련이 지탱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일부 원인이 되어 소련은 쉽사리 합의를 보게 되어있었다. 1985년 11월 레이건 대통령은 제네바에서 소련의 새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그들은 중거리 핵전력에 관한 잠정 협정과, 아울러 공격용 전략핵무기의 50% 감축을 추구한다는 데에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1987년 12월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핵무기의 파괴를 규정하고 있는 중거리 핵전력(INF) 조약에 서명했다.


우주왕복선

전략방위계획(SDI)은 레이건 행정부에게 문제거리였지만, 우주에서의 기타 노력들은 보다 전도유망한 것이었다. 1981년에 미국은 우주 왕복선 '콜롬비아'호 즉, 최초의 재사용 가능 유인 우주선을 발사했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의 기간 중에, 이 우주 왕복선은 우주 비행사들의 실험, 사진 촬영, 그리고 궤도를 돌고 있는 동안의 인공위성의 발사, 회수, 수리 등과 같은 비상한 여러 가지 기능을 입증해보였다. 그러나 1986년 1월 비극이 일어났다.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가 이륙한지 73초 만에 폭발하여 우주 비행사 6명과, 우주 최초의 보통 시민이 될 뻔한 교사가 즉사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안전을 위해 우주 왕복선의 재설계에 착수했지만, 우주 왕복선의 비행은 무기연기되었다. 미국이 1989년 말엽 우주 왕복선 '디스커버리'호를 발사하기까지에는 이 우주 왕복선의 발사 시스템 및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300여 가지나 변경되었다.


이란-콘트라와 '불길한 월요일'

레이건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 레이건 행정부의 가장 심각한 외교정책 문제가 발생했다. 1987년에 미국민들은 이란의 호메이니 정부가 조종하고 있는 과격한 단체들이 레바논에 억류하고 있는 미국인 인질들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한 한 시도로서 행정부가 비밀리에 이란에 무기를 판매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사를 해본 결과, 이 무기판매 대금이 의회가 이러한 군사원조를 금지하고 있던 기간 중에 니카라과의 콘트라에게 전용되었다는 사실도 나타났다.

그 후 상하양원합동위원회에서의 이란-콘트라 청문회들에서는 중동 및 중미 지역에서의 미국 외교정책 이익을 정의하는 폭넓은 문제와, 아울러 대이란 무기 판매의 불법성 유무 문제가 심의되었다. 광의로 볼 때, 이란-콘트라 청문회들은 14년 전의 상원 워터게이트 청문회와 마찬가지로, 국민에 대한 정부의 책임 문제와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적절한 균형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미국은 주식시세가 22%나 폭락하여 1930년대의 세계대공황이 뒤따른 1929년의 엄청난 주식시장 붕괴를 즉시 상기시킨 소위 "불길한 월요일"인 1987년 10월 19일 경제침체의 고통을 당했다. 이러한 주식시장 붕괴는 미국 국제무역 적자 및 연방정부 예산 적자에 대한 걱정, 법인 및 개인 채무의 높은 수준에 대한 염려, 그리고 특정 상황이 발생할 경우 컴퓨터가 대량의 주식의 매입이나 매각을 자동적으로 명령하는 "프로그램 거래"로 알려져 있는 새로운 주식시장 기술혁신 등이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괄목할 만하게 단기간에 회복되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주식시장으로부터 보다 더 안전한 형태의 투자쪽으로 옮겨갔으며, 경기후퇴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제로, 경제 성장은 지속되었으며, 1988년 6월 실업율은 14년만에 5.2%로 떨어졌다.


대통령직에 오른 조지 부시

레이건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 인기가 매우 높았었지만, 미국헌법에 따라서 1988년에 다시 출마할 수 없었다. 8년 동안 그의 부통령으로 재직했던 그의 정치적 후계자인 조지 부시는 레이건의 인기 덕을 크게 봤으며, 41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부시는 레이건 대통령이 초래한 번영의 계속을 유권자들에게 약속하고 선거운동을 했으며, 자기의 전문지식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마이클 듀카키스보다 더 낫게 미국 방위를 강력하게 뒷받침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매사추세츠 주지사 듀카키스는 불우한 미국민들이 경제적으로 해를 입고 있으며, 정부는 연방정부 채무 및 방위지출을 억제하는 한편, 이러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민들은 새로운 증세가 없을 것임을 약속하는 부시 후보의 메시지에 마음이 훨씬 더 끌렸다. 선거에서 부시는 54% 대 46%의 일반투표 差로 승리했다.

부시 대통령은 첫 임기중에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계획에 충실한 세제, 지출, 채무 정책들을 추구함으로써 보수주의적인 재정 계획을 따랐다. 그러나, 터무니없이 방대한 예산적자와 적자감축 원칙으로 해서, 부시 대통령은 정부지출 삭감을 요구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새로운 예산 항목들을 거의 허용할 수 없는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국정부에게 비용이 가장 적게 들게 하는 행정부 정책들만이 가장 잘 진척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환경보호 및 교육 문제들, 즉 민간산업과 지방자치체 및 주정부가 그 대부분의 비용을 지불하는 문제들에 관해서 정책 변경책을 내놓았다. 1990년 11월 부시 대통령은 도시 스모그, 자동차 배기가스, 유독성 대기오염, 산성비 등에 관한 새로운 연방 기준을 시행하되, 그 비용의 대부분은 산업측의 오염자들이 부담하도록 하는 포괄적인 법안에 서명했다. 그는 신체장애자들을 위해 공공건물 등에 신체장애자들이 접근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확보해주되, 그 비용은 기업체에게 부담시키는 법안에 서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한 자발적인 사회적 선행, 즉 그의 기억할 만한 문구인 이른바 "수많은 자선의 불빛"(a thousand points of light)을 권장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연방정부 예산과 적자

그러나, 연방정부 예산적자를 억제하려는 부시 행정부의 노력은 문제를 보다 많이 안고 있었다. 어려움을 발생시킨 한 원인은 상호신용금고업의 위기에 있었다. 사기, 경영실책, 엄격하지 않은 규정, 그리고 1980년대 초엽 및 중엽의 미국의 특정 지역들의 경제적 하강 등으로 해서 상호신용금고들의 채무변제 불능(파산)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1970년대 말엽에 존재하던 3,100여개의 이러한 기관들 중에서, 1990년 6월 30일 현재까지 존속된 기관들은 2,453개에 불과했다. 1993년에 이르러, 파산한 저축기관들의 매각비 및 정리비 총액 -이들 기관의 예금에 대한 지불보증은 정부가 해주었음- 은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즉, 3,000억 달러 내지 5,000억 달러에 달했었다.

1990년 1월 부시 대통령은 그의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민주당은 행정부 예산안이 너무나 낙관적이며, 적자감축 원칙을 실행하자면 증세와 아울러 방위 지출의 격감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산 협상은 지연되었으며, 6월에 이르러 -부시 후보가 선거운동 중에 증세가 없을 것임을 약속했는데도 불구하고- 부시 대통령은 국가경제의 변화하는 상황은 증세가 포괄적인 예산안의 일부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고 의회 지도자들에게 말했다.

예산안에는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경기후퇴 현상, 상호신용금고업 구출 작업으로 해서 생긴 손실액, 그리고 메디케어(고령자 의보제도) 및 메디케이드(저소득자 및 신체장애자 의보제도)를 위한 보건비 증대 등이 한데 뭉쳐서 모든 적자 감축, 조치들을 상쇄하고, 1991년도에 적어도 전년도(1990)만큼의 적자를 만들어 냈다.


냉전의 종식

1980년대 말엽의 초강대국들의 관계는 동유럽의 정치적 소요의영향을 받았다. 민주적 개혁을 위한 민중 폭동의 결과로 그 지역 전역의 공산주의 정부들이 몰락하는 것을 미국과 세계는 지켜보았다.

1989년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말타섬에서 개최한 미소 정상회담은 성공적이었지만, 1990년에 미소 관계에서 이루어질 비상한 업적을 예언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시 대통령은 1월의 그의 연두교서에서, 유럽 주둔 미군을 19만 5,000명으로 감축할 의도를 발표했다. 2월에 부시 행정부는 군비통제와 동서독 통일에 관해서 소련과 협의했다. 7월 이내에, 소련은 갖가지 2국간 협의와 다자간 협의를 한 후에 소련의 전시 권리들을 포기하고,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정식 회원국 자격을 가진 통일독일을 수락했다. 독일에 관한 "최종해결 조약"(The Treaty on the Final Settlement)이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조인되었다.

유럽 안보협력회의(CSCE)의 3일간의 정상회담에서, 1990년 11월 19일 부시 대통령과 21개국 국가수반들은 '유럽 주둔 재래식 군대(CFE)에 관한 조약'에 서명했다. 이 CFE 조약은 나토와 구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이 대서양에서부터 우랄산맥에 이르기까지 배치해놓은 수천 대의 탱크, 항공기, 각종 포 등에 관한 가장 복잡하고 대규모인 군비통제 조약 중의 하나였다.

그 후, 1991년 7월 31일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모스크바에서 미소 양측의 비축 핵무기를 30% 내지 40% 감축할 것을 명령한, 장기간 협상되던 전략무기 감축조약(START)에 섬여함으로써 미국은 소련과의 마지막 주요한 군비통제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군비 감축마저도 모든 다탄두 미사일을 2003년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없애기로 한 보리스 옐친 새 러시아 연방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 간의 합의로 해서 더 줄어들었다. 이 두 개의 협정으로 해서 핵탄두의 수는 3분의 2가 줄어들어 약 2만 1,000개로부터 6,000개 내지 7,000개로 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미소 간의 핵대결 대신에 핵물길 처리와 핵확산에 대한 상존하는 염려가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냉전은 사실상 끝났다.


걸프 전쟁

냉전의 종식으로 생긴 행복감은 1990년 8월 2일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해서 격감되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과 이것이 사우디 아라비아 및 군소 페르시아만 국가들에 대해 제기하는 위험성은 미국의 중요한 국익의 하나를 위협했다. 왜냐하면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대체로 그 유류 공급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의 행동을 강력히 규탄하고, 이라크의 즉각적이고도 무조건의 철수를 요구했다. 유엔 안보이사회 긴급회의는 이라크를 규탄하고, 휴전을 촉구하고, 그리고 쿠웨이트로부터의 이라크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그 후 8월에,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합병을 선언하고, 쿠웨이트의 모든 외국 공관의 폐쇄를 명령하고, 쿠웨이트의 미국인들과 영국인들을 인질로 삼기 시작했다. 8월 8일 부시 대통령은 전국의 텔레비전 방송에서 미군의 중동 배치를 발표했다. 그런 다음, 부시 대통령은 중동은 물론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지역으로부터의 군대들과 함께, 현대의 가장 비상한 군사적 및 정치적 연합세력 중의 하나를 규합하려고 노력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후 수주일 동안에,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의 침공행위를 규탄하고, 이라크에 대해 광범위한 경제제재를 가하기로 하는 12개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1월 29일에 통과된 12번째의 결의안은 이라크가 1991년 1월 15일 까지 쿠웨이트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경우 유엔 회원국들에 의한 무력사용을 승인했다. 새로운 미소 관계가 이라크의 침공행위를 저지할 수 있는 유엔 조치를 위해 필요한 조건을 제공했다. 양국간의 합의가 없었더라면, 유엔은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을 결코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의회 의원들은 페르시아 만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다하기를 부시 대통령과 국제사회에 공적으로 요구했다. 기초에 깔려 있는 문제는 미국헌법에 관한 문제였다. 즉, 미국헌법은 선전포고권을 입법부에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기에, 미국은 특히 월남에서 이러한 의회의 명령 없이 무력 충돌에 거듭 말려들게 되었다. 일부 의원들은 안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다른 의원들은 의회가 원하는 것은 미국이 개전하게 되는 장소와 때와 조건에 있어서의 발언권이지, 선전포고 자체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유엔이 이라크에게 통고한 최종 기한 3일 전인 1991년 1월 12일 의회는 부시 대통령에게 가장 명백하고도 포괄적인 개전권에서 그가 추구한 권한을 부여했는데, 이것은 약 반세기 만에 미국 대통령에게 부여된 개전권이었다.

유엔 최종 기한이 지난지 24 시간도 채 안되어서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이끈 한 달 남짓 계속된 대파괴적인 공중전에 의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은 쿠웨이트 해방에 성공했다. 이에 장갑부대 및 공수 보병대들의 대규모 쿠웨이트-이라크 침공이 뒤따랐다. 연합군은 100시간 밖에 계속되지 않은 지상전에서, 우월한 속도, 기동성, 화력 등으로 이라크군을 압도해버렸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군사적인 목표는 달성했지만, 승리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여전히 권좌에 머물러 있었으며, 전쟁 발발 후 반란을 일으키고 있던, 북부의 쿠르드족과 남부의 회교 시아파 신도들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있었다. 이라크인들이 고의로 방화하여 불타고 있는 수백개의 유전들은 1991년 11월에 이르러서 소화작업이 끝났다. 사담 정권은 또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들에 따라 활동하고 있으며, 핵시설과 대량적인 비축 화학무기가 포함된 이라크의 대량 파괴무기의 소재 확인 및 파괴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유엔 시찰단원들을 방해하려고 꾀했다.

그러나 간접적인 면에서 미국은 걸프전으로 해서 아랍 국가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대표단 등을 설득하여 복잡하고 서로 얽힌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마침내 이 지역의 복잡하고 서로 얽힌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마침내 이 지역의 영속적인 평화를 초래할 수 있는 직접협상들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991년 10월 30일 스페인의 마드리드시에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 협상은 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간의 역사적인 협정을 초래한 노르웨이에서의 비밀협상 무대를 마련했으며, 그 협정은 1993년 9월 13일 백악관에서 서명되었다.


파나마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부시 대통령은 또한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 장군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1989년 12월 20일의 미국의 단기간의 파나마 침공에 대한 폭넓은 초당적인 의회측 지지를 받았다. 1980년대에, 코카인 중독은 전염병에 버금갈 정도로 만연되었으며, 부시 대통령은 "마약에 대한 전쟁"을 그의 국내 과제의 중심으로 삼았다. 미국은 노리에가가 마약 밀수활동에 관련되어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파나마 침공에 의하여 노리에가를 재판에 회부하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파나마를 침공한 이유에는 이 밖의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부시 대통령의 목적 중의 하나는 노리에가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길레르모 엔다라가 이끄는 정부로 대체시키려는 데에 있었다. 엔다라의 대통령 당선을 선거 후에 노리에가가 무효화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또한 미국인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하고,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일에 도움을 주고, 긔록 파나마 운하조약을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 미군의 파나마 파병을 명령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노리에가는 마침내 미국 관헌 당국에 넘겨졌으며, 후에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시의 연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마약 불법거래 및 부정한 돈벌이의 죄명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부시 행정부는 멕시코 및 캐나다와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협상으로 경제면에서 진전을 이룩했는데, 이 협정은 클린턴 행정부에서 치열한 비준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노동조합들은 NAFTA가 미국 일자리 수출을 촉진시키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으며, 환경보호론자들은 이 협정이 산업공해 통제력이 이완되어 있는 지역들로 산업들이 이동하도록 만드는 유인을 산업들에게 제공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와 클린턴 행정부는 NAFTA가 보다 낮은 비용으로 상품과 서비스(용역)을 보다 많이 유통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이 세 나라(미국, 캐나다, 멕시코)의 산업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보다 더 갖게 되도록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3년 말에 전국적인 활발한 토론을 거친 끝에 의회에서 승인된 NAFTA는, 결국에 가서 서반구 전역의 자유무역을 초래할 수 있게 될 미래의 무역협정들을 위한 하나의 시험장으로 간주되고 있다.


1992의 대통령선거

1992년의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을 때, 미국민들은 자신들이 4년 전에는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방식으로 변화된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냉전의 낯익은 상징들, 즉 베를린 장벽에서부터 끊임 없는 심한 경계의 대상이 되어왔던 대륙간 탄도 미사일 및 폭격기들에 이르기까지 냉전을 일깨워주는 것들은 사라져버렸다. 동유럽은 독자적으로 되었고, 소련은 해체되었으며, 독일은 통일되었고, 아랍인들과 이스라엘은 직접 협상을 하게 되었으며, 핵대결의 위협은 격감되었다. 마치 하나의 커다란 역사책 한 권이 닫히고, 또하나의 역사책 한 권이 열린 것 같았다.

그러나 국내에서, 미국민들은 덜 낙관적이었다. 즉 미국민들은 심각하고도 낯익은 문제들에 마주치고 있었다. 걸프전 후의 축하 행사 및 행렬들이 끝나게 되자, 미국은 자신이 1980년대 초엽 이래 가장 심각한 경기후퇴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과거에 가장 심한 타격을 받았던 제조업 부문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아니라, 중간경영층의 화이트칼라 근로자들 가운데서 실직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1992년에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을 때에도, 경제성장은 그해 말까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미미했으며, 이 나라의 여러 지역들은 여전히 경기후퇴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연방정부 적자는 증대일로의 보건비 지출로 해서 계속 증대되었다. 대부분의 미국민들은 자기들의 미래에 대해 심각한 비관론을 표명하고, 자기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과 댄 퀘일 부통령은 초기에 보수주의 저널리스트 패트릭 부캐넌의 도전을 받았지만, 공화당의 재지명을 쉽사리 얻었다. 민주당 측에서는 빌 클린턴 아칸소주지사가 난립한 후보들을 누르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았다. 클린턴은 일반적으로 가장 식견있고 달변인 환경보호론자 중의 하나로 인정된 앨 고어 상원의원(테네시주)을 자기의 러닝 메이트로 선정했다.

그러나 경제의 방향에 대한 이 나라의 깊은 불안감은 괄목할 만한 무소속 대통령 후보, 즉 텍사스주 부호 기업가 H. 로스 페로를 등장시켰다. 컴퓨터 및 정보처리 분야에서 큰 재산을 모은 페로는 경제문제, 주로 연방정부 적자를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미국정부의 무능에 대한 국민들의 좌절감을 노렸으며, 그의 지지자들은 미국 전주 50개주의 입후보자 명단에 그의 성명이 오를 수 있을만큼 충분한 수의 지지자 서명을 모으는 일에 성공했다. 페로는 7월의 대통령 선거전의 후보명단에서 탈퇴했다가 가을에 다시 출마 의사를 밝힘으로써 그나마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하던 기회마저 헛되게 했지만, 그의 존재로 해서 경제문제들은 계속 전국적인 논쟁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은 으레 쟁점, 이미지, 인품 등이 혼합된 싸움인데, 그 초점이 이 나라의 경제적 장래에 강하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1992년의 대통령 선거운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시의 재선 노력은 현직 정부통령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일련의 아이디어들, 적 경험과 신뢰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세대 간의 싸움이었다. 아마 제 2차 세계대전 중 군에 복무한 경력을 가진 마지막 미국 대통령일지도 모르는 68세의 조지 부시 후보는 군대 복무 경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월남전 반대 항의운동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46세의 젊은 도전자 빌 클린턴 후보와 마주쳤다. 부시 후보는 대통령 및 총사령관으로서의 자기의 경험을 강조하면서 클린턴 후보의 판단력과 품위부족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한편, 빌 클린턴 후보는 선거 정치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테마의 하나인 '변화를 중심으로 하여 자기의 선거운동을 추진했다. 클린턴은 청년 시절에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는데, 30년 후에 자신의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의식적으로 변화를 받아들이기를 미국민들에게 요구하는 그의 언설의 대부분은 1960년대의 케네디 후보의 언설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같았다.

12년 동안의 아칸소 주지사로서 클린턴 후보는, 여론조사에 따르면 바로 부시 대통령의 주된 취약점인 경제성장, 교육, 보건 문제 등과 씨름해온 자기의 경험을 내세울 수 있었다. 부시 후보는 보다 낮은 시금과 정부 지출 삭감에 입각한 경제계획을 제안했지만, 클린턴 후보는 부유층에 대한 보다 높은 과세와, 이 나라의 생산성 및 경제성장을 증대시킴으로써 적자를 줄이게 될 것으로 생각했던 교육, 운수, 통신에의 투자에 대한 지출 증가를 제안했다. 마찬가지로, 클린턴의 보건비 통제책도 부시 후보의 안보다 훨씬 더 많은 연방정부 개입을 필요로 했다.

클린턴은 10월의 부시 대통령 및 로스 페로와의 세 차례에 걸친 텔레비전 토론에서는 물론, 선거운동 기간 내내 '변화'의 테마를 성공적으로 국민들의 마음에 주입시켰다. 11월 3일 빌 클린턴은 일반투표의 43%를 얻은데 불과했지만, 제 42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끝맺는말

미국은 대서양안을 껴안고 있는,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한 무리의 식민지들이던 기원 당시부터 괄목할 만한 변화를 거쳐서, 정치분석가 벤 와텐버그의 이른바 "최초의 세계적인 국가"(the first universal nation), 즉 전세계의 모든 국민성 및 인종 집단을 나타내고 있는 약 2억 5,000만 인구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또한 경제적, 과학기술적, 문화적, 인구학적, 사회적 변화의 속도 및 정도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은 흔히 현대화 및 변화의 선구자가 되는데, 이 현대화와 변화는 점점 더 상호의존적이고, 상호관련적인 세계 속에서 다른 나라들과 사회들에 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미국은 또한 계속성에 대한 의식, 즉 미국 건국 당시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일련의 핵심적인 가치관들을 유지하고 있다. 그 가치관들에는 개인적 자유와 민주적인 정부에 대한 신념, 그리고 만인을 위한 경제적 기회 및 발전에 대한 공약이 들어 있다. 미국이 계속해야 할 과업들은 이 나라와 세계가 새로운 세기의 문턱에 다가섬에 즈음해서, 이 나라의 자유, 민주주의, 기회 등 가치 -풍요롭고 파란만장한 역사의 유산- 를 보호하고, 번성하도록 다짐하는 일일 것이다.


제 3당 및 무소속 대통령 후보들

미국은 흔히 양대정당 제도로 생각되고 있다. 실제에 있어서 그렇다. 즉 1852년 이래 백악관은 4년마다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이 차지해왔다. 그러나, 동시에 이 나라에서는 그 동안에 제 3당과 군소 정당들이 많이 결성되었다. 예컨대, 1992년의 대통령 선거 기간중 에는 적어도 1개주 입후보자 명단에 58개 정당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이런 정당들 가운데는 무관심당(the Apathy), 회고당(the Looking Back), 뉴멕시코 금주당, 무소속 시민당, 버몬트 납세자당 등과 같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정당들이 들어 들어있었다.

일반적으로, 제 3당들은 단일 쟁점이나 일련의 쟁점들을 중심으로 하여 결성된다. 제 3당들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가지고 있을 때에 가장 잘 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제 3당들은 대통령직은 감히 바라보지 않으면서 자기들의 정치적 및 사회적 관심사를 선전·광고할 수 있는 정강을 추구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금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제 3당 대통령 후보는 공화당원인 디어도어 루스벨트였다. 그의 진보당, 즉 '불 무스'(큰 사슴) 혁신당은 1912년에 일반 투표수의 27.4%를 얻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자기 후계자로 손수 선정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에 환멸을 느끼게 된 공화당내 진보파는 루스벨트에게 1912년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획득을 추구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그렇게 해서 여러 예비선거에거 태프트를 패배시켰다. 그러나, 태프트는 공화당 조직을 조종하여 당의 대통령 후보 指名을 얻어냈다.

그 후 루스벨트 지지자들은 공화당과 결별하고 진보당을 결성했다. 루스벨트는 자기 자신이 '큰 사슴'(bull moose)처럼 원기왕성하다고 선언하면서(이때부터 이것이 정당의 상징이 되었음), "대기업" 규제, 여성들의 선걱권, 누진 소득세, 파나마 운하, 자연보호 등을 정강으로 내걸고 선거운동을 했다. 그의 노력은 태프트를 패배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화당의 표를 갈라놓음으로써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 후보의 당선에 도움을 주었다.

사회주의자들, 사회당도 일반 투표수의 6%를 얻음으로써 1912년에 그 최고세에 달했다. 다년간 계속 출마하는 사회당 대통령 후보 유진 뎁스는 운수 및 통신 산업의 공동소유권, 보다 짧은 근로시간, 고용 촉진을 위한 공공 사업계획 등을 주창함으로써 그해에 90만표를 웃도는 표를 얻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폭동 교사 행위로 수감된 뎁스는 1920년 감방에서 선거운동을 했는데, 뎁스나 그의 후계자들이나 1912년에 올린 것과 같은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로버트 라폴레트, 또 하나의 진보당원은 192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일반투표수의 16.65를 얻은 로버트 라폴레트 상원의원이었다. 장기간 농민들과 산업 근로자들을 위한 투사였으며, 대기업의 숙적이었던 라폴레트 의원은 제 1차 세계대전 후 진보당 운동을 다시 살리는 주동자였다. 사회주의자들과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혁신당(Bull Moose Party) 잔당은 물론, 농민들 및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은 라폴레트 의원은 철도와 천연자원의 국유화를 정강으로 내걸고 출마했다. 그는 또한 부유층에 대한 증세와, (노조의) 단체교섭권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는 일부 지역들에서 강세를 보였지만, 자기 출신 주인 위스컨신주에서만 승리했다.

헨리 월러스, 진보당은 1948년에 전농무장관이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 부통령이었던 헨리 월러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함으로써 당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잠시 동안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상무장관이었던 그는 소련에 대한 트루먼 대통령의 단호한 태도에 반대했기 때문에 파면되었다. 월러스 후보의 1948년의 정강은 냉전, 마셜 계획, 대기업 등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흑인들 및 여성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종식시키기 위한 운동을 하고, 최저임금제를 지지하고, 하원 비미활동위원회의 폐지를 요구했다. 그는 그를 지지하던 미국 공산당과의 인연을 끊지 못한 탓으로 인기가 떨어졌으며, 그가 얻은 표수는 일반투표의 2.4%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딕시크래트(미국남부의 민주당 이반파), 사우드 캐롤라이나주의 스트롬 더몬드지사가 이끈 주권 확대론자들, 즉 남부 민주당 이반파들도 이와 똑같은 비율의 표수 밖에 얻이 못했다. 진보당과 마찬가지로, 남부 민주당 이반파도 1948년에 민주당과 결별했다. 그러나, 남부 민주당 이반파는 두드러지게 색다른 단체였다. 그들이 민주당에 반대한 이유는 트루먼 대통령의 냉전 정책이 아니라, 그의 공민권 강령에 있었다. 남부 민주당 이반파 의 주요한 목표는 "주권 확대"를 내세웠지만, 실은 인권분리 정책과 그거을 지지한 "짐 크로우"법(흑인에 대한 인종차별법)을 계속하려는 데에 있었다.

조지 월러스, 1960년대의 인종분규와 사회적 격변은 또하나의 인권분리주의자인 남부(앨라매배마주)의 주지사 조지 월러스가 전국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월러스 주지사는 공민권, 자유진보주의자, 연방정부 등에 대한 다채로운 공격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일을 했다. 즉, 1968년에 범미 독립당을 창당한 그는 앨라배마주 주의회 의사당에서부터 그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시작하여 일반투표의 13.5%를 얻었다.

H. 로스 페로, 모든 제 3당은 주요한 정당들과 연방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최근의 미국사에서 이러한 감정이 1992년의 대통령 선거 때처럼 강렬했던 때는 별로 없었다. 텍사스 페로는 경제적 상식과 재정 책임에 관한 자기의 메시지를 각계각층의 미국민들에게 주지시킬 수 있는 교묘한 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페로 후보는 이 나라의 지도자들을 비아냥거리고, 자기의 경제적 메시지를 쉽사리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요약함으로써 어려움 없이 매스 미디어의 주목을 끌었다. 그의 선거운동 단체 "우리는 단합되어 있다"(United We Stand)에는 주로 자원자들이 들어가 있었으며, 재원은 그의 개인 재산이 뒷받침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富에 분개하기는커녕, 페로의 사업적인 성공과 그 성공이 특별 이익단체들에게 선거운동 자금을 간청하지 않아도 된 것을 찬양했다.

페로는 7월에 대통령 선거 경쟁에서 물러섰다. 그랬다가, 선거 실시 한 달 전에 다시 그 경쟁에 뛰어드는 그는 그때까지 제 3당 대통령 후보가 얻은 표수로서는 단연 최다표수였으며, 총투표수의 백분율로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1912년에 얻은 득표율(27.4%)에 다음가는, 1,900여만표를 얻었다.
변천하는 사회
수년, 아니면 수십년 전에 시작된 미국 사회구조의 변화는 19890년대에 이르러 뚜렷해졌다. 인구구성 성분과 미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업종 및 기술이 주요한 변화를 하고 있었다.
경제에서 서비스업의 우세 현상은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기에 50여년 동안 계속되어온 추세가 마침내 절정에 이르러, 미국의 전고용인의 4분의 3이 서비스 부문에서 -예컨대, 소매 점원, 사무직원, 교사, 의사 및 기타 보건 전문직원, 정부 공무원, 변호사, 법률 및 금융 전문가 등으로- 일했다.

서비스 부문 활동은 특정 유형의 과학기술, 즉 컴퓨터의 이용성 및 이용도의 증대로 해서 득을 보았다. 이것은 경제적 및 사회적 추세에 관해서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만큼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를 가진 정보시대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연방정부는 군사 및 우주 계획의 일부로서 컴퓨터 과학기술에 상당히 많은 투자를 했다. 1970년대 말엽에 캘리포니아주의 두 젊은 기업인이 자동차 차고에서 일하고 있다가 최초로 널리 시판된 가정용 컴퓨터를 조립하고, 그것에 '애플'(Apple)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산업혁신에 불을 붙였다. 1980년대 초엽에 수백만 개의 마이크로컴퓨터들이 미국의 기업체들과 가정에 파고들어갔으며, 1982년에 시사주간지 Time은 그 컴퓨터에 "올해의 기계"(Machine of the Year)라는 명칭을 붙였다.

한편, 철강 및 직물 산업과 같은 미국의 "굴뚝 산업"들은 쇠퇴하고 있었다. 미국 자동차 산업은 도요타(豊田), 혼다(本田), 닛산(日産) -이들의 대부분은 미국에 자기들의 공장을 세웠음- 등과 같은 매우 유능한 日本 자동차 제조업자들과의 경쟁으로해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1980년에 일본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미국 시장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1980년대 말엽과 1990년대 초엽에 이르러 비로소 미국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자기들의 라이벌인 일본 자동차 제조업자들의 비용효과 및 기술 기준에 뒤지지 않기 시작했으며, 지난 20년 동안 수입 자동차에 양보했던 국내 자동차 시장의 몫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으로 해서 득을 본 자는 소비자들이었지만 -생산비를 줄이려는 고통스러운 노력은 미국 자동차 산업에서의 수천명의 항구적인 실업을 의미했다.

인구 패턴도 변했다. 1946년경부터 1964년까지 계속된, 전후 "베이베 붐" 시기가 끝난 후, 전반적인 인구 증가율은 줄어들었으며, 인구는 보다 높은 연령이 되었다. 세대구성 상태도 변했다. 1980년에 가족세대의 백분율(%)은 떨어졌으며, 미국의 전세대수의 4분의 1은 인척 혈연 관계 없는 2, 3명의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비가족 세대"로 분류되었다.

새로운 이민들이 다른 방법으로 미국사회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1965년에 개혁된 이민정책은 그 초점을 서유럽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에 아시아 및 중남미 지역으로부터 새로 도착한 이민들의 수가 괄목할 만하게 증가되었다. 예컨대, 월남전 직후기에 월남 난민들이 미국으로 유입했다. 1980년에 80만 8,000명의 이민이 도착했는데, 이것은 60년만에 처음보는 최고 이민수였다. 이 나라는 또다시 全세계로부터 들어오는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1980년대에는 또다른 그룹이 기회 균등을 위한 투쟁의 적극적인 참가자가 되었다. 동성연애자들은 민권운동의 여러 전술을 사용하여 다른 그룹들이 요구한 것과 똑같은 것, 즉 차별대우로 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 흔히 압력이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예컨대, 1975년에 미국공무원 임용시험 위원회(USCSC)는 동성연애자 고용금지를 폐지했으며, 많은 주들이 차별대우 금지법을 제정했다. 반발이 일어났으며, 동성연애자들을 적대시하는 사건들이 나타나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후, 1981년에 인체의 면역체계를 파괴하는 가공할 질병인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가 발견되었다. 에이즈(AIDS)는 성행위나 혈액을 통해서 전염된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일반 국민들도 이 질병에 걸리기 쉽다는 것이 판명되었지만, 이 질병은 특히 동성연애자들이나 정맥주사약 사용자들이 아주 많이 걸렸다. 1992년에 이르러 에이즈로 사망한 미국인수는 15만명을 웃돌았으며,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는 30만명 내지 100여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에이즈는 결코 미국에만 국한된 질병이 아니었으며, 이 전염병을 다루려는 노력에는 전세계의 의사들과 의학 연구자들이 참가했다. 그들의 초기 성공 중의 하나(주로 미국과 프랑스의 연구 결과임)는 에이즈 병균을 분리시킨 다음, 혈액 공급의 보호를 확실케 하기 위한 실험을 발전시킨 일이었다.


1980년대의 경제

레이건 대통령의 국내 계획은 민간경제 부문이 규제의 속박에서 풀려나면 이 나라가 번영할 것이라는 그의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공급측" 경제, 즉 상품 및 용역의 보다 많은 공급은 경제성장으로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의 지지자인 레이건 대통령은 보다 많은 소비자 지출, 저축, 투자 등을 촉진시키기 위해 대폭적인 감세를 추구했다. 공급측 경제 전문가들은 감세가 기업체의 투자 증대, 수익 증대, 그리고 이러한 수익에 대한 과세에 의한 정부 세수 증대 등의 현상을 초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원에서는 공화당이 약간의 차로 다수파 세력이 되어 있고, 하원은 민주당원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레이건 대통령은 개인에 대한 세금을 3년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25%줄이는 감세안이 들어 있는 그의 경제 계획의 주요한 부분을 첫 임기중에 성공적으로 법제화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또한 이 나라의 군대를 현대화하고, 소련으로부터의 계속적이고도 점증되고 있는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방위비 지출의 대폭적인 증대를 추구했으며, 실제로 방위비 지출을 대폭적으로 증대시켰다.

경기후퇴는 레이건 대통령 시정 초기의 특색을 이루었으며, 이 나라의 거의 모든 부문을 강타했다. 실업율이 10%를 웃돌게 되고, 미국의 공장들의 약 3분의 1이 유휴 상태에 빠지게 되자, 1982년도의 미국의 실질 국민총생산(GNP)은 2.5%나 떨어졌다. 중서부 전역에서, 제네럴 일렉트릭사 및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사와 같은 주요한 회사들이 근로자들을 해고했다. 석유 위기도 이러한 경기후퇴를 나타나게 한 한 요인이었다. 미국 생산성 증대율이 둔화됨에 따라, 독일 및 일본과 같은 미국의 경제적 라이벌들이 세계무역에서 보다 많은 몫을 차지했다. 미국의 외국산 상품 소비가 격증되었다.

농민들도 어려운 시기의 고통을 받았다. 생산이 소수의 수중에 집중됨에 따라, 농민 수는 줄어들었다. 1970년대에, 미국 농민들은 인도, 중국, 소련, 그리고 농산물 부정으로 고통받고 있는 기타 국가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토지를 사들이고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해 자금을 많이 차입했다. 그 후 유가가 올라서 농산물 생산비가 올라갔으며, 1980년의 범세계적인 경제침체로 해서 농산물의 수요가 줄어들었다. 농민들은 빚 안 지고 살아가느라고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떨어지는 유가와 함께 1982년 내내 계속된 심한 경기후퇴는 하나의 중요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카터 대통령 시정 기간 중에 시작되었던 천정부지의 인플레를 그것이 억제했다. 1983년 말엽에 일부 경제부문의 상태는 좋아졌으며, 1984년 초엽에는 경제가 원상태로 회복되었고,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이래 환경 훼손 없는 경제성장의 가장 긴 시기 중의 하나에 진입했다. 일본은 일본 자동차의 대미 수출에 자율적인 쿼터제를 실시한다는데 동의했다. 연방정부의 감세 조치에 따라, 소비자 지출이 증가되었다. 낙관적인 매기 폭증 현상이 나타나서 주식시세는 앙등했다. 경제회복이 시작된 후 5년 동안, GNP는 연간 성장율 4.2%로 증대되었다. 연간 인플레율은 1983년부터 1987년까지의 기간 중에 3% 내지 5%에 머물러 있었는데, 1986년도만은 예외로 2% 미만, 즉 수십년 내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었다. 1980년대에 이 나라의 GNP는 상당히 증대되었으며, 1982년부터 1987년까지의 기간중에 미국경제가 창출한 새로운 일자리 수는 1,300만 개를 웃돌았다.

그러나, 이러한 고르지 않은 성장율은 적자지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 시정하에서 미국의 채무는 거의 3배로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국부증대 현상은 최고 소득 그룹에서만 나타났다. 낮은 수준의 기술 및 반숙련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들이 경제로부터 제거되거나, 사회의 여타 부문의 발전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게 됨에 따라, 대부분의 빈곤층 및 중산층 가구들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보다 낮은 세금 공약이 확고부동한 레이건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 중에 75년만에 가장 포괄적인 연방 세제개혁안에 서명했다. 민주당원으로부터나 공화당원으로부터나 다같이 폭넓게 지지를 받은 이 세제개혁안은 소득세율을 낮추고, 소득에 따라 분류되는 납세계층제를 간소화하고, 탈세 구멍들을 막음으로써 저소득 미국민들에게 보다 고정하게 과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경제가 호전되었는데도 만성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이득을 얻지 못했다. 농민들은 계속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 1986년과 1988년의 심한 가뭄은 그들의 어려움을 더욱 증가시켰다.

감세 및 정부 보건지출의 증가와 아울러 군사예산 증대는 연방정부가 매년 거두어들인 세수보다 훨씬 더 많은 연방정부 지출을 초래했다. 일부 분석가들은 이러한 적자는 민주당이 추구한 국내지출 증대를 막기 위한 계획적인 행정부 전략의 일부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의회의 민주당 의원들과 공화당 의원들은 다같이 이러한 지출의 삭감을 거부했다. 적자는 1980년의 740억 달러로부터 1986년의 2,210억 달러로 치솟았다가 1987년의 1,500억 달러로 다시 내려갔다. 1987년 말엽의 주식시장 붕괴는 경제안정에 대한 의심을 극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외교문제

레이건 대통령은 외교정책에서 이 나라를 위하여 보다 독단적인 역할을 추구했으며, 초기의 시험 장소는 중미였다. 게릴라 반도들이 엘살바도르 정부를 전복시킬 기세를 보이자, 미국은 엘살바도르에 경제원조 및 군사훈련 계획을 제공했다. 미국은 또한 민선 민주정부로 이행하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는데, 활력적인 우익 암살대들을 억제하려는 노력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미국측의 지원은 정부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엘살바도르에서의 폭력의 수준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으며, 1989년 말엽에는 오히려 증대되었다. 그러나 쌍방은 1992년초에 평화협정에 합의했다.

미국의 대니카라과 정책은 훨씬 더 많은 논난의 대상이어다. 1979년 '산디니스타'로 자칭하는 혁명전사들이 억압적인 우익 소모사 정권을 타도했다. 산디니스타 정부는 쿠바 및 소련과의 군사적 유대를 단절하고, 민주적 개혁을 위하여 니카라과 정치 체제를 개방하라는 미국측 요구를 거절했다. 지역평화 노력의 초저은 '콘트라'로 알려진 반산디니스타 저항 세력에 대한 지원으로 옮겨졌다. 의회는 이 정책에 관해서 열띤 정치적 논쟁을 한 후에, 1984년 10월에 '콘트라'에 대한 모든 군사원조를 종결했지만 인도주의적인 지원은 계속되었다. 1986년 가을 의회는 행정부 측의 압력을 받아서 태도를 번복하여 '콘트라'에 대한 군사원조비 1억 달러를 승인했다. 그러나, 전장에서의 성공의 부재, 인권침해 비난, 그리고 이란에 대한 비밀 무기 판매 대금이 '콘트라'에 전용되어 온 사실의 탄로 등으로 해서 반산디니스타 게릴라를 위한 군사원조 계속에 대한 의회에서의 정치적 지지 근거가 사라졌다.

그 후, 조지 부시 행정부는 '콘트라'를 위한 군사원조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아예 포기해버렸다. 부시 행정부는 또한 비올레타 차모로가 이끈 재야 정치연합을 지지했는데, 이 정치연합은 1990년 2월에 실시한 선거에서 산디니스타를 누르고 놀랄 만한 승리를 거두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다행히도 과테말라에서부터 아르헨티나에 이르기까지 중남미 전역에서의 민주주의 복귀 현상을 목격했다. 하지만,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출현은 중남미에 국한되지 않았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코라손 아키노의 "민중의 힘"(people power) 운동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독재정권을 타도했으며, 한국에서의 선거는 30여년 동안의 군사통치를 종식시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논란의 대상인 "건설적인 관여"정책에 의한 인종차별정책 종결을 권장하려는 레이건 행정부의 노력에 마주쳤을 때에 여전히 비타협적이었다. 1986년 아무런 진전이 없어서 실망한 미국의회는 레이건 대통령이 거부한 법안을 재가결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일련의 경제적 제재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1988년 12월 레이건 행정부의 마지막 수주일 동안에 이르러 비로소 여러 해 동안의 꾸준한 미국의 거중 조정이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나미비아 영토의 역사적인 평화적 해결 및 독립에 도움이 되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노골적으로 반공 언사를 사용했지만, 직접적인 군사력 사용은 비교적 자제하는 편이었다. 19833년 10월 25일 그레나다의 이웃 나라들의 긴급한 지원 호소가 있은 후 미군은 카리브해의 섬나라 그레나다에 상륙했다. 이러한 조치는 그레나다의 좌익 수상이 그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지향 정당 당원들에 의하여 암살된 후에 취해졌다. 미군은 단기간의 전부 끝에 수백명의 쿠바 군인들과 건설요원들을 사로잡았으며, 소련이 공급한 무기의 저장소들을 점거했다. 1983년 12월 최후의 미군 전투부대가 그레나다를 떠났는데, 그레나다는 1년 후에 민주적인 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허약하고 온건한 친서방 정부를 지지하려고 시도했던 레바논에서의 미국의 군사적 노력은 1983년 10월 테러리스트의 폭파작전으로 미해병대원 241명이 피살되자 비극적으로 끝났다. 1986년 4월 미해군 및 공군 비행기들은 리비아의 사주를 받은 테러리스트들의 유럽 주둔 미군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리비아의 트리폴리시 및 벵가지시 목표물들을 폭격했다.

페르시아만에서는 미-이란 관계의 악화와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해서 이 지역의 미해군 활동 무대가 열렸다. 처음에는 미국이 쿠웨이트의 유조선대를 보호해달라는 쿠위에트측의 요청에 응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서유럽 해군 함정들과 함께 페르시아만을 왕래하는 유조선의 호위선들과 기타 중립국 선박들을 호송함으로써 지극히 중요한 해상 운송로를 계속 열어놓게 되었다.


미소관계

대소 관계에서 레이건 대통령이 선언한 정책은 힘에 의한 평화 정책이었다. 냉전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잇던 그는 자기가 "사악한 제국"이라고 명명한 나라(소련)를 다룰 때에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두 개의 사건이 미소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즉, 1981년 12월 폴란드의 자유로조 '솔리다리티' 운동 탄압 사건과, 1983년 9월 1일 소련 전투기가 항로를 이탈한 민간 항공기 대한항공 007기를 격추한 사건이다. 미국은 또한 소련의 계속적인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규탄했으며, 그곳의 무자히딘(회교 반군) 저항 세력을 지원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레이건의 첫 임기중에 소련의 미사일 배치에 대항하기 위한 중거리 핵미사일 유럽 배치를 포함하여, 대규모의 방위력 증강을 위해 미증유의 거액을 소비했다. 그리고 레이건 대통령은 1983년 3월 23일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중 가장 피열하게 토의된 정책 결정 중의 하나에서, 대륙간 탄도 유도탄을 막기 위해 레이저 광선 무기 및 고에너지 발사체와 같은 발달된 과학기술을 연구할 수 있는 '전략방위계획'(SDI) 연구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많은 과학자들이 SDI의 과학기술상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경제전문가들은 이에 관련된 어마어마한 거액을 지적했지만, 레이건 행정부는 그 계획을 계속 추진했다.

레이건은 1984년에 재당선된 후 군비통제에 관한 그의 경직된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미국의 방위력증강과 경쟁하기 위해 소련 경제가 필요로 하는 경비의 수준을 소련이 지탱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일부 원인이 되어 소련은 쉽사리 합의를 보게 되어있었다. 1985년 11월 레이건 대통령은 제네바에서 소련의 새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그들은 중거리 핵전력에 관한 잠정 협정과, 아울러 공격용 전략핵무기의 50% 감축을 추구한다는 데에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1987년 12월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핵무기의 파괴를 규정하고 있는 중거리 핵전력(INF) 조약에 서명했다.


우주왕복선

전략방위계획(SDI)은 레이건 행정부에게 문제거리였지만, 우주에서의 기타 노력들은 보다 전도유망한 것이었다. 1981년에 미국은 우주 왕복선 '콜롬비아'호 즉, 최초의 재사용 가능 유인 우주선을 발사했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의 기간 중에, 이 우주 왕복선은 우주 비행사들의 실험, 사진 촬영, 그리고 궤도를 돌고 있는 동안의 인공위성의 발사, 회수, 수리 등과 같은 비상한 여러 가지 기능을 입증해보였다. 그러나 1986년 1월 비극이 일어났다.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가 이륙한지 73초 만에 폭발하여 우주 비행사 6명과, 우주 최초의 보통 시민이 될 뻔한 교사가 즉사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안전을 위해 우주 왕복선의 재설계에 착수했지만, 우주 왕복선의 비행은 무기연기되었다. 미국이 1989년 말엽 우주 왕복선 '디스커버리'호를 발사하기까지에는 이 우주 왕복선의 발사 시스템 및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300여 가지나 변경되었다.


이란-콘트라와 '불길한 월요일'

레이건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 레이건 행정부의 가장 심각한 외교정책 문제가 발생했다. 1987년에 미국민들은 이란의 호메이니 정부가 조종하고 있는 과격한 단체들이 레바논에 억류하고 있는 미국인 인질들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한 한 시도로서 행정부가 비밀리에 이란에 무기를 판매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사를 해본 결과, 이 무기판매 대금이 의회가 이러한 군사원조를 금지하고 있던 기간 중에 니카라과의 콘트라에게 전용되었다는 사실도 나타났다.

그 후 상하양원합동위원회에서의 이란-콘트라 청문회들에서는 중동 및 중미 지역에서의 미국 외교정책 이익을 정의하는 폭넓은 문제와, 아울러 대이란 무기 판매의 불법성 유무 문제가 심의되었다. 광의로 볼 때, 이란-콘트라 청문회들은 14년 전의 상원 워터게이트 청문회와 마찬가지로, 국민에 대한 정부의 책임 문제와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적절한 균형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미국은 주식시세가 22%나 폭락하여 1930년대의 세계대공황이 뒤따른 1929년의 엄청난 주식시장 붕괴를 즉시 상기시킨 소위 "불길한 월요일"인 1987년 10월 19일 경제침체의 고통을 당했다. 이러한 주식시장 붕괴는 미국 국제무역 적자 및 연방정부 예산 적자에 대한 걱정, 법인 및 개인 채무의 높은 수준에 대한 염려, 그리고 특정 상황이 발생할 경우 컴퓨터가 대량의 주식의 매입이나 매각을 자동적으로 명령하는 "프로그램 거래"로 알려져 있는 새로운 주식시장 기술혁신 등이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괄목할 만하게 단기간에 회복되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주식시장으로부터 보다 더 안전한 형태의 투자쪽으로 옮겨갔으며, 경기후퇴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제로, 경제 성장은 지속되었으며, 1988년 6월 실업율은 14년만에 5.2%로 떨어졌다.


대통령직에 오른 조지 부시

레이건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 인기가 매우 높았었지만, 미국헌법에 따라서 1988년에 다시 출마할 수 없었다. 8년 동안 그의 부통령으로 재직했던 그의 정치적 후계자인 조지 부시는 레이건의 인기 덕을 크게 봤으며, 41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부시는 레이건 대통령이 초래한 번영의 계속을 유권자들에게 약속하고 선거운동을 했으며, 자기의 전문지식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마이클 듀카키스보다 더 낫게 미국 방위를 강력하게 뒷받침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매사추세츠 주지사 듀카키스는 불우한 미국민들이 경제적으로 해를 입고 있으며, 정부는 연방정부 채무 및 방위지출을 억제하는 한편, 이러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민들은 새로운 증세가 없을 것임을 약속하는 부시 후보의 메시지에 마음이 훨씬 더 끌렸다. 선거에서 부시는 54% 대 46%의 일반투표 差로 승리했다.

부시 대통령은 첫 임기중에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계획에 충실한 세제, 지출, 채무 정책들을 추구함으로써 보수주의적인 재정 계획을 따랐다. 그러나, 터무니없이 방대한 예산적자와 적자감축 원칙으로 해서, 부시 대통령은 정부지출 삭감을 요구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새로운 예산 항목들을 거의 허용할 수 없는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국정부에게 비용이 가장 적게 들게 하는 행정부 정책들만이 가장 잘 진척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환경보호 및 교육 문제들, 즉 민간산업과 지방자치체 및 주정부가 그 대부분의 비용을 지불하는 문제들에 관해서 정책 변경책을 내놓았다. 1990년 11월 부시 대통령은 도시 스모그, 자동차 배기가스, 유독성 대기오염, 산성비 등에 관한 새로운 연방 기준을 시행하되, 그 비용의 대부분은 산업측의 오염자들이 부담하도록 하는 포괄적인 법안에 서명했다. 그는 신체장애자들을 위해 공공건물 등에 신체장애자들이 접근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확보해주되, 그 비용은 기업체에게 부담시키는 법안에 서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한 자발적인 사회적 선행, 즉 그의 기억할 만한 문구인 이른바 "수많은 자선의 불빛"(a thousand points of light)을 권장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연방정부 예산과 적자

그러나, 연방정부 예산적자를 억제하려는 부시 행정부의 노력은 문제를 보다 많이 안고 있었다. 어려움을 발생시킨 한 원인은 상호신용금고업의 위기에 있었다. 사기, 경영실책, 엄격하지 않은 규정, 그리고 1980년대 초엽 및 중엽의 미국의 특정 지역들의 경제적 하강 등으로 해서 상호신용금고들의 채무변제 불능(파산)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1970년대 말엽에 존재하던 3,100여개의 이러한 기관들 중에서, 1990년 6월 30일 현재까지 존속된 기관들은 2,453개에 불과했다. 1993년에 이르러, 파산한 저축기관들의 매각비 및 정리비 총액 -이들 기관의 예금에 대한 지불보증은 정부가 해주었음- 은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즉, 3,000억 달러 내지 5,000억 달러에 달했었다.

1990년 1월 부시 대통령은 그의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민주당은 행정부 예산안이 너무나 낙관적이며, 적자감축 원칙을 실행하자면 증세와 아울러 방위 지출의 격감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산 협상은 지연되었으며, 6월에 이르러 -부시 후보가 선거운동 중에 증세가 없을 것임을 약속했는데도 불구하고- 부시 대통령은 국가경제의 변화하는 상황은 증세가 포괄적인 예산안의 일부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고 의회 지도자들에게 말했다.

예산안에는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경기후퇴 현상, 상호신용금고업 구출 작업으로 해서 생긴 손실액, 그리고 메디케어(고령자 의보제도) 및 메디케이드(저소득자 및 신체장애자 의보제도)를 위한 보건비 증대 등이 한데 뭉쳐서 모든 적자 감축, 조치들을 상쇄하고, 1991년도에 적어도 전년도(1990)만큼의 적자를 만들어 냈다.


냉전의 종식

1980년대 말엽의 초강대국들의 관계는 동유럽의 정치적 소요의영향을 받았다. 민주적 개혁을 위한 민중 폭동의 결과로 그 지역 전역의 공산주의 정부들이 몰락하는 것을 미국과 세계는 지켜보았다.

1989년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말타섬에서 개최한 미소 정상회담은 성공적이었지만, 1990년에 미소 관계에서 이루어질 비상한 업적을 예언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시 대통령은 1월의 그의 연두교서에서, 유럽 주둔 미군을 19만 5,000명으로 감축할 의도를 발표했다. 2월에 부시 행정부는 군비통제와 동서독 통일에 관해서 소련과 협의했다. 7월 이내에, 소련은 갖가지 2국간 협의와 다자간 협의를 한 후에 소련의 전시 권리들을 포기하고,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정식 회원국 자격을 가진 통일독일을 수락했다. 독일에 관한 "최종해결 조약"(The Treaty on the Final Settlement)이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조인되었다.

유럽 안보협력회의(CSCE)의 3일간의 정상회담에서, 1990년 11월 19일 부시 대통령과 21개국 국가수반들은 '유럽 주둔 재래식 군대(CFE)에 관한 조약'에 서명했다. 이 CFE 조약은 나토와 구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이 대서양에서부터 우랄산맥에 이르기까지 배치해놓은 수천 대의 탱크, 항공기, 각종 포 등에 관한 가장 복잡하고 대규모인 군비통제 조약 중의 하나였다.

그 후, 1991년 7월 31일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모스크바에서 미소 양측의 비축 핵무기를 30% 내지 40% 감축할 것을 명령한, 장기간 협상되던 전략무기 감축조약(START)에 섬여함으로써 미국은 소련과의 마지막 주요한 군비통제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군비 감축마저도 모든 다탄두 미사일을 2003년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없애기로 한 보리스 옐친 새 러시아 연방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 간의 합의로 해서 더 줄어들었다. 이 두 개의 협정으로 해서 핵탄두의 수는 3분의 2가 줄어들어 약 2만 1,000개로부터 6,000개 내지 7,000개로 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미소 간의 핵대결 대신에 핵물길 처리와 핵확산에 대한 상존하는 염려가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냉전은 사실상 끝났다.


걸프 전쟁

냉전의 종식으로 생긴 행복감은 1990년 8월 2일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해서 격감되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과 이것이 사우디 아라비아 및 군소 페르시아만 국가들에 대해 제기하는 위험성은 미국의 중요한 국익의 하나를 위협했다. 왜냐하면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대체로 그 유류 공급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의 행동을 강력히 규탄하고, 이라크의 즉각적이고도 무조건의 철수를 요구했다. 유엔 안보이사회 긴급회의는 이라크를 규탄하고, 휴전을 촉구하고, 그리고 쿠웨이트로부터의 이라크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그 후 8월에,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합병을 선언하고, 쿠웨이트의 모든 외국 공관의 폐쇄를 명령하고, 쿠웨이트의 미국인들과 영국인들을 인질로 삼기 시작했다. 8월 8일 부시 대통령은 전국의 텔레비전 방송에서 미군의 중동 배치를 발표했다. 그런 다음, 부시 대통령은 중동은 물론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지역으로부터의 군대들과 함께, 현대의 가장 비상한 군사적 및 정치적 연합세력 중의 하나를 규합하려고 노력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후 수주일 동안에,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의 침공행위를 규탄하고, 이라크에 대해 광범위한 경제제재를 가하기로 하는 12개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1월 29일에 통과된 12번째의 결의안은 이라크가 1991년 1월 15일 까지 쿠웨이트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경우 유엔 회원국들에 의한 무력사용을 승인했다. 새로운 미소 관계가 이라크의 침공행위를 저지할 수 있는 유엔 조치를 위해 필요한 조건을 제공했다. 양국간의 합의가 없었더라면, 유엔은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을 결코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의회 의원들은 페르시아 만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다하기를 부시 대통령과 국제사회에 공적으로 요구했다. 기초에 깔려 있는 문제는 미국헌법에 관한 문제였다. 즉, 미국헌법은 선전포고권을 입법부에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기에, 미국은 특히 월남에서 이러한 의회의 명령 없이 무력 충돌에 거듭 말려들게 되었다. 일부 의원들은 안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다른 의원들은 의회가 원하는 것은 미국이 개전하게 되는 장소와 때와 조건에 있어서의 발언권이지, 선전포고 자체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유엔이 이라크에게 통고한 최종 기한 3일 전인 1991년 1월 12일 의회는 부시 대통령에게 가장 명백하고도 포괄적인 개전권에서 그가 추구한 권한을 부여했는데, 이것은 약 반세기 만에 미국 대통령에게 부여된 개전권이었다.

유엔 최종 기한이 지난지 24 시간도 채 안되어서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이끈 한 달 남짓 계속된 대파괴적인 공중전에 의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은 쿠웨이트 해방에 성공했다. 이에 장갑부대 및 공수 보병대들의 대규모 쿠웨이트-이라크 침공이 뒤따랐다. 연합군은 100시간 밖에 계속되지 않은 지상전에서, 우월한 속도, 기동성, 화력 등으로 이라크군을 압도해버렸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군사적인 목표는 달성했지만, 승리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여전히 권좌에 머물러 있었으며, 전쟁 발발 후 반란을 일으키고 있던, 북부의 쿠르드족과 남부의 회교 시아파 신도들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있었다. 이라크인들이 고의로 방화하여 불타고 있는 수백개의 유전들은 1991년 11월에 이르러서 소화작업이 끝났다. 사담 정권은 또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들에 따라 활동하고 있으며, 핵시설과 대량적인 비축 화학무기가 포함된 이라크의 대량 파괴무기의 소재 확인 및 파괴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유엔 시찰단원들을 방해하려고 꾀했다.

그러나 간접적인 면에서 미국은 걸프전으로 해서 아랍 국가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대표단 등을 설득하여 복잡하고 서로 얽힌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마침내 이 지역의 복잡하고 서로 얽힌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마침내 이 지역의 영속적인 평화를 초래할 수 있는 직접협상들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991년 10월 30일 스페인의 마드리드시에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 협상은 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간의 역사적인 협정을 초래한 노르웨이에서의 비밀협상 무대를 마련했으며, 그 협정은 1993년 9월 13일 백악관에서 서명되었다.


파나마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부시 대통령은 또한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 장군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1989년 12월 20일의 미국의 단기간의 파나마 침공에 대한 폭넓은 초당적인 의회측 지지를 받았다. 1980년대에, 코카인 중독은 전염병에 버금갈 정도로 만연되었으며, 부시 대통령은 "마약에 대한 전쟁"을 그의 국내 과제의 중심으로 삼았다. 미국은 노리에가가 마약 밀수활동에 관련되어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파나마 침공에 의하여 노리에가를 재판에 회부하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파나마를 침공한 이유에는 이 밖의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부시 대통령의 목적 중의 하나는 노리에가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길레르모 엔다라가 이끄는 정부로 대체시키려는 데에 있었다. 엔다라의 대통령 당선을 선거 후에 노리에가가 무효화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또한 미국인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하고,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일에 도움을 주고, 긔록 파나마 운하조약을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 미군의 파나마 파병을 명령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노리에가는 마침내 미국 관헌 당국에 넘겨졌으며, 후에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시의 연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마약 불법거래 및 부정한 돈벌이의 죄명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부시 행정부는 멕시코 및 캐나다와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협상으로 경제면에서 진전을 이룩했는데, 이 협정은 클린턴 행정부에서 치열한 비준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노동조합들은 NAFTA가 미국 일자리 수출을 촉진시키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으며, 환경보호론자들은 이 협정이 산업공해 통제력이 이완되어 있는 지역들로 산업들이 이동하도록 만드는 유인을 산업들에게 제공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와 클린턴 행정부는 NAFTA가 보다 낮은 비용으로 상품과 서비스(용역)을 보다 많이 유통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이 세 나라(미국, 캐나다, 멕시코)의 산업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보다 더 갖게 되도록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3년 말에 전국적인 활발한 토론을 거친 끝에 의회에서 승인된 NAFTA는, 결국에 가서 서반구 전역의 자유무역을 초래할 수 있게 될 미래의 무역협정들을 위한 하나의 시험장으로 간주되고 있다.


1992의 대통령선거

1992년의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을 때, 미국민들은 자신들이 4년 전에는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방식으로 변화된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냉전의 낯익은 상징들, 즉 베를린 장벽에서부터 끊임 없는 심한 경계의 대상이 되어왔던 대륙간 탄도 미사일 및 폭격기들에 이르기까지 냉전을 일깨워주는 것들은 사라져버렸다. 동유럽은 독자적으로 되었고, 소련은 해체되었으며, 독일은 통일되었고, 아랍인들과 이스라엘은 직접 협상을 하게 되었으며, 핵대결의 위협은 격감되었다. 마치 하나의 커다란 역사책 한 권이 닫히고, 또하나의 역사책 한 권이 열린 것 같았다.

그러나 국내에서, 미국민들은 덜 낙관적이었다. 즉 미국민들은 심각하고도 낯익은 문제들에 마주치고 있었다. 걸프전 후의 축하 행사 및 행렬들이 끝나게 되자, 미국은 자신이 1980년대 초엽 이래 가장 심각한 경기후퇴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과거에 가장 심한 타격을 받았던 제조업 부문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아니라, 중간경영층의 화이트칼라 근로자들 가운데서 실직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1992년에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을 때에도, 경제성장은 그해 말까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미미했으며, 이 나라의 여러 지역들은 여전히 경기후퇴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연방정부 적자는 증대일로의 보건비 지출로 해서 계속 증대되었다. 대부분의 미국민들은 자기들의 미래에 대해 심각한 비관론을 표명하고, 자기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과 댄 퀘일 부통령은 초기에 보수주의 저널리스트 패트릭 부캐넌의 도전을 받았지만, 공화당의 재지명을 쉽사리 얻었다. 민주당 측에서는 빌 클린턴 아칸소주지사가 난립한 후보들을 누르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았다. 클린턴은 일반적으로 가장 식견있고 달변인 환경보호론자 중의 하나로 인정된 앨 고어 상원의원(테네시주)을 자기의 러닝 메이트로 선정했다.

그러나 경제의 방향에 대한 이 나라의 깊은 불안감은 괄목할 만한 무소속 대통령 후보, 즉 텍사스주 부호 기업가 H. 로스 페로를 등장시켰다. 컴퓨터 및 정보처리 분야에서 큰 재산을 모은 페로는 경제문제, 주로 연방정부 적자를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미국정부의 무능에 대한 국민들의 좌절감을 노렸으며, 그의 지지자들은 미국 전주 50개주의 입후보자 명단에 그의 성명이 오를 수 있을만큼 충분한 수의 지지자 서명을 모으는 일에 성공했다. 페로는 7월의 대통령 선거전의 후보명단에서 탈퇴했다가 가을에 다시 출마 의사를 밝힘으로써 그나마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하던 기회마저 헛되게 했지만, 그의 존재로 해서 경제문제들은 계속 전국적인 논쟁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은 으레 쟁점, 이미지, 인품 등이 혼합된 싸움인데, 그 초점이 이 나라의 경제적 장래에 강하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1992년의 대통령 선거운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시의 재선 노력은 현직 정부통령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일련의 아이디어들, 적 경험과 신뢰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세대 간의 싸움이었다. 아마 제 2차 세계대전 중 군에 복무한 경력을 가진 마지막 미국 대통령일지도 모르는 68세의 조지 부시 후보는 군대 복무 경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월남전 반대 항의운동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46세의 젊은 도전자 빌 클린턴 후보와 마주쳤다. 부시 후보는 대통령 및 총사령관으로서의 자기의 경험을 강조하면서 클린턴 후보의 판단력과 품위부족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한편, 빌 클린턴 후보는 선거 정치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테마의 하나인 '변화를 중심으로 하여 자기의 선거운동을 추진했다. 클린턴은 청년 시절에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는데, 30년 후에 자신의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의식적으로 변화를 받아들이기를 미국민들에게 요구하는 그의 언설의 대부분은 1960년대의 케네디 후보의 언설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같았다.

12년 동안의 아칸소 주지사로서 클린턴 후보는, 여론조사에 따르면 바로 부시 대통령의 주된 취약점인 경제성장, 교육, 보건 문제 등과 씨름해온 자기의 경험을 내세울 수 있었다. 부시 후보는 보다 낮은 시금과 정부 지출 삭감에 입각한 경제계획을 제안했지만, 클린턴 후보는 부유층에 대한 보다 높은 과세와, 이 나라의 생산성 및 경제성장을 증대시킴으로써 적자를 줄이게 될 것으로 생각했던 교육, 운수, 통신에의 투자에 대한 지출 증가를 제안했다. 마찬가지로, 클린턴의 보건비 통제책도 부시 후보의 안보다 훨씬 더 많은 연방정부 개입을 필요로 했다.

클린턴은 10월의 부시 대통령 및 로스 페로와의 세 차례에 걸친 텔레비전 토론에서는 물론, 선거운동 기간 내내 '변화'의 테마를 성공적으로 국민들의 마음에 주입시켰다. 11월 3일 빌 클린턴은 일반투표의 43%를 얻은데 불과했지만, 제 42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끝맺는말

미국은 대서양안을 껴안고 있는,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한 무리의 식민지들이던 기원 당시부터 괄목할 만한 변화를 거쳐서, 정치분석가 벤 와텐버그의 이른바 "최초의 세계적인 국가"(the first universal nation), 즉 전세계의 모든 국민성 및 인종 집단을 나타내고 있는 약 2억 5,000만 인구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또한 경제적, 과학기술적, 문화적, 인구학적, 사회적 변화의 속도 및 정도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은 흔히 현대화 및 변화의 선구자가 되는데, 이 현대화와 변화는 점점 더 상호의존적이고, 상호관련적인 세계 속에서 다른 나라들과 사회들에 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미국은 또한 계속성에 대한 의식, 즉 미국 건국 당시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일련의 핵심적인 가치관들을 유지하고 있다. 그 가치관들에는 개인적 자유와 민주적인 정부에 대한 신념, 그리고 만인을 위한 경제적 기회 및 발전에 대한 공약이 들어 있다. 미국이 계속해야 할 과업들은 이 나라와 세계가 새로운 세기의 문턱에 다가섬에 즈음해서, 이 나라의 자유, 민주주의, 기회 등 가치 -풍요롭고 파란만장한 역사의 유산- 를 보호하고, 번성하도록 다짐하는 일일 것이다.

미국은 흔히 양대정당 제도로 생각되고 있다. 실제에 있어서 그렇다. 즉 1852년 이래 백악관은 4년마다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이 차지해왔다. 그러나, 동시에 이 나라에서는 그 동안에 제 3당과 군소 정당들이 많이 결성되었다. 예컨대, 1992년의 대통령 선거 기간중 에는 적어도 1개주 입후보자 명단에 58개 정당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이런 정당들 가운데는 무관심당(the Apathy), 회고당(the Looking Back), 뉴멕시코 금주당, 무소속 시민당, 버몬트 납세자당 등과 같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정당들이 들어 들어있었다.

일반적으로, 제 3당들은 단일 쟁점이나 일련의 쟁점들을 중심으로 하여 결성된다. 제 3당들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가지고 있을 때에 가장 잘 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제 3당들은 대통령직은 감히 바라보지 않으면서 자기들의 정치적 및 사회적 관심사를 선전·광고할 수 있는 정강을 추구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금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제 3당 대통령 후보는 공화당원인 디어도어 루스벨트였다. 그의 진보당, 즉 '불 무스'(큰 사슴) 혁신당은 1912년에 일반 투표수의 27.4%를 얻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자기 후계자로 손수 선정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에 환멸을 느끼게 된 공화당내 진보파는 루스벨트에게 1912년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획득을 추구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그렇게 해서 여러 예비선거에거 태프트를 패배시켰다. 그러나, 태프트는 공화당 조직을 조종하여 당의 대통령 후보 指名을 얻어냈다.

그 후 루스벨트 지지자들은 공화당과 결별하고 진보당을 결성했다. 루스벨트는 자기 자신이 '큰 사슴'(bull moose)처럼 원기왕성하다고 선언하면서(이때부터 이것이 정당의 상징이 되었음), "대기업" 규제, 여성들의 선걱권, 누진 소득세, 파나마 운하, 자연보호 등을 정강으로 내걸고 선거운동을 했다. 그의 노력은 태프트를 패배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화당의 표를 갈라놓음으로써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 후보의 당선에 도움을 주었다.

사회주의자들, 사회당도 일반 투표수의 6%를 얻음으로써 1912년에 그 최고세에 달했다. 다년간 계속 출마하는 사회당 대통령 후보 유진 뎁스는 운수 및 통신 산업의 공동소유권, 보다 짧은 근로시간, 고용 촉진을 위한 공공 사업계획 등을 주창함으로써 그해에 90만표를 웃도는 표를 얻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폭동 교사 행위로 수감된 뎁스는 1920년 감방에서 선거운동을 했는데, 뎁스나 그의 후계자들이나 1912년에 올린 것과 같은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로버트 라폴레트, 또 하나의 진보당원은 192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일반투표수의 16.65를 얻은 로버트 라폴레트 상원의원이었다. 장기간 농민들과 산업 근로자들을 위한 투사였으며, 대기업의 숙적이었던 라폴레트 의원은 제 1차 세계대전 후 진보당 운동을 다시 살리는 주동자였다. 사회주의자들과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혁신당(Bull Moose Party) 잔당은 물론, 농민들 및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은 라폴레트 의원은 철도와 천연자원의 국유화를 정강으로 내걸고 출마했다. 그는 또한 부유층에 대한 증세와, (노조의) 단체교섭권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는 일부 지역들에서 강세를 보였지만, 자기 출신 주인 위스컨신주에서만 승리했다.

헨리 월러스, 진보당은 1948년에 전농무장관이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 부통령이었던 헨리 월러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함으로써 당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잠시 동안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상무장관이었던 그는 소련에 대한 트루먼 대통령의 단호한 태도에 반대했기 때문에 파면되었다. 월러스 후보의 1948년의 정강은 냉전, 마셜 계획, 대기업 등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흑인들 및 여성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종식시키기 위한 운동을 하고, 최저임금제를 지지하고, 하원 비미활동위원회의 폐지를 요구했다. 그는 그를 지지하던 미국 공산당과의 인연을 끊지 못한 탓으로 인기가 떨어졌으며, 그가 얻은 표수는 일반투표의 2.4%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딕시크래트(미국남부의 민주당 이반파), 사우드 캐롤라이나주의 스트롬 더몬드지사가 이끈 주권 확대론자들, 즉 남부 민주당 이반파들도 이와 똑같은 비율의 표수 밖에 얻이 못했다. 진보당과 마찬가지로, 남부 민주당 이반파도 1948년에 민주당과 결별했다. 그러나, 남부 민주당 이반파는 두드러지게 색다른 단체였다. 그들이 민주당에 반대한 이유는 트루먼 대통령의 냉전 정책이 아니라, 그의 공민권 강령에 있었다. 남부 민주당 이반파 의 주요한 목표는 "주권 확대"를 내세웠지만, 실은 인권분리 정책과 그거을 지지한 "짐 크로우"법(흑인에 대한 인종차별법)을 계속하려는 데에 있었다.

조지 월러스, 1960년대의 인종분규와 사회적 격변은 또하나의 인권분리주의자인 남부(앨라매배마주)의 주지사 조지 월러스가 전국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월러스 주지사는 공민권, 자유진보주의자, 연방정부 등에 대한 다채로운 공격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일을 했다. 즉, 1968년에 범미 독립당을 창당한 그는 앨라배마주 주의회 의사당에서부터 그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시작하여 일반투표의 13.5%를 얻었다.

H. 로스 페로, 모든 제 3당은 주요한 정당들과 연방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최근의 미국사에서 이러한 감정이 1992년의 대통령 선거 때처럼 강렬했던 때는 별로 없었다. 텍사스 페로는 경제적 상식과 재정 책임에 관한 자기의 메시지를 각계각층의 미국민들에게 주지시킬 수 있는 교묘한 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페로 후보는 이 나라의 지도자들을 비아냥거리고, 자기의 경제적 메시지를 쉽사리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요약함으로써 어려움 없이 매스 미디어의 주목을 끌었다. 그의 선거운동 단체 "우리는 단합되어 있다"(United We Stand)에는 주로 자원자들이 들어가 있었으며, 재원은 그의 개인 재산이 뒷받침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富에 분개하기는커녕, 페로의 사업적인 성공과 그 성공이 특별 이익단체들에게 선거운동 자금을 간청하지 않아도 된 것을 찬양했다.

페로는 7월에 대통령 선거 경쟁에서 물러섰다. 그랬다가, 선거 실시 한 달 전에 다시 그 경쟁에 뛰어드는 그는 그때까지 제 3당 대통령 후보가 얻은 표수로서는 단연 최다표수였으며, 총투표수의 백분율로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1912년에 얻은 득표율(27.4%)에 다음가는, 1,900여만표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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